소설리스트

행성 헌터-89화 (89/235)

89화

김상곤은 한 시간쯤 지나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옆에서 잠시 명상을 하면서 마나를 회복하고 있던 진우가 반색을 하며 그를 부축했다.

“대장님, 정신이 드세요?”

김상곤이 힘겹게 눈을 뜨고는 조금 멍한 시선으로 진우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불에라도 덴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곧 신음소리를 내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진우는 김상곤이 들고 뛰어내렸던 배낭에서 물통을 꺼내 그의 입에 물려주었다.

“물 좀 드세요. 되도록 후유증이 없게 치료를 했지만 아직은 통증이 조금 남아 있을 거예요. 무리하지 말고 조금 더 누워 쉬세요.”

하지만 김상곤은 물통을 뿌리치고 진우의 팔을 꽉 움켜쥐며 다급하게 물었다.

“천구는? 놈은 어떻게 됐냐?”

진우가 부드럽게 웃으며 그의 손을 잡고 천천히 말했다.

“놈은 죽었어요. 한 시간 쯤 전에 싸움이 끝났어요. 더 시간이 지나면 이곳도 안전하지는 않겠지만 일단은 안심하세요.”

김상곤의 눈이 크게 떠지더니 잠시 후 팽팽하게 긴장하고 있던 그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그는 그제서야 진우가 내미는 물통의 물을 받아 마셨다. 물통에서 입을 뗀 그가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조금 가라앉은 눈빛으로 진우를 향해 물었다.

“후우~. 네가 놈을 죽였냐?”

진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힘없이 웃으며 진우를 바라보았다.

“녀석, 무투 대회에서 보던 모습보다 더 발전했나 보구나. 다행이다. 그리고 수고했다.”

진우가 부축한 손에 잠시 기대있던 김상곤이 다시 진우에게 물었다.

“다른 일행들은 호수로 떠났지?”

“제가 천구와 부딪힌 다음에 잠시 정신을 잃느라 분명히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그랬을 것 같아요.”

김상곤이 진우의 몸을 잡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일단 혹시 모르니 클랜원들이 우리를 발견할 수 있게 해 보자.”

진우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어떻게요?”

그러자 김상곤이 한쪽 허공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비행드론이 떠 있었다.

*  * * * *

트럭 적재함 위에 올라 앉아 있던 임지근은 계속해서 비행드론이 전송하는 화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기지를 떠나 호수 쪽으로 향하는 트럭 위에 떠서 일행을 쫓아오던 비행 드론은 천구가 땅으로 떨어지면서 발생시킨 충격파 때문에 본래의 자리에서 상당히 밀려난 상태에서 정지해 있었다.

드론은 이동을 위한 명령을 기다렸지만 경황이 없던 클랜원들은 아무도 드론을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적재함에 혼자 앉아 있던 임지근이 문득 비행드론을 떠올렸다.

비행드론이 자신들을 따라오지 않고 있다는 것은 천구가 떨어진 자리 부근에 아직 멈춰 서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의미했다. 임지근은 헌터 패드를 조작해서 비행드론이 비춰주는 영상을 띄웠다. 하지만 본래의 자리에서 벗어나 있는지 화면에는 텅 빈 밀밭만이 보이고 있었다.

위치를 바꿔보려고 조작을 시도했지만 헌터 패드의 빈약한 송출력으로는 이미 거리가 한참 멀어진 드론을 조정할 수 없었다. 그나마 수신이 되는 것이 다행이었다. 다만 간간이 들려오는 폭음과 충돌음으로 미루어 드론 근처에서 누군가가 계속 전투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차마 다른 일행들에게는 말을 하지 못한 채 그는 계속해서 헌터 패드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싸움 소리가 끝난 지 한 시간이 넘게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드론이 전송하는 화면에는 그저 텅 빈 밀밭의 풍경만이 계속해서 비치고 있었다. 임지근은 아니라고 부정하면서도 어쩔 수 없이 밀려드는 절망감 때문에 속이 꺼멓게 죽는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임지근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운전석을 탕탕 내려쳤다.

“부대장님. 차 돌려요. 그만 가고 차 거꾸로 돌리세요.”

“무슨 소리야. 갑자기 왜 그래?”

운전대를 잡고 있던 최진석이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고함을 질렀다. 그러자 그의 눈앞으로 임지근의 헌터 패드가 쑥 디밀어졌다. 그 안에는 화면을 바라보며 얼굴에 활짝 웃음을 띤 채 두 손을 흔들고 있는 김상곤과 진우의 모습이 있었다.

다소 멀리 떨어져 있어 얼굴을 분명히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옷차림이나 느낌으로 보아 두 사람이 틀림없었다.

“야호~~!”

트럭 안에서 비명같은 환호성이 터지면서 무중력 차량이 거칠게 몸을 기울이며 방향을 틀었다.

*  * * * *

드론의 시야가 있는 곳에서 손을 흔들며 삼십분 가량을 서 있던 진우와 김상곤은 다른 일행이 떠난 호수 방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진우는 총과 검만 들고 차에서 뛰어내리느라 배낭에 걸어두었던 통신기를 챙기지 못했고, 김상곤의 통신기는 천구와 전투를 벌이던 중에 놈의 발톱에 배가 찢길 때 땅에 떨어졌었다.

김상곤을 향해 다가가던 천구가 떨어진 통신기를 발로 밟자 통신기는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말았다. 남은 것은 헌터 패드뿐이었는데, 전초 기지가 습격을 당하면서 중계기가 파괴당했기 때문에 패드 간의 통신은 처음부터 먹통이었다.

오로지 비행 드론이 송출해 주는 영상만을 받아볼 수 있었지만, 클랜원들이 텅 빈 밀밭만을 비추고 있는 영상에 언제까지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은 클랜원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호수까지 간다는 생각으로 걷는 수밖에 없었다.

“치료형 마나는 언제부터 쓸 수 있었던 거냐?”

십여 분을 말없이 걷던 김상곤의 무심한 듯한 물음에 진우는 저도 모르게 머리를 긁적였다. 일부러 속이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미리 말을 하지 않았던 일이라 조금 미안했다.

“예전에 케이튼의 조세연 기지장님에게서 배웠어요. 한 1년 된 것 같아요.”

미안한 기색이 담긴 진우의 말을 들은 김상곤이 피식 웃었다.

“대견해서 묻는 거다. 놀랍기도 하고. 따지는 게 아니야. 화정이가 함께 오지 못해서 대원들이 부상당할까 봐 걱정했었는데, 널 데리고 오길 잘한 것 같구나.”

“저기, 제가 치료술도 익혔다는 건 당분간 밝히지 않았으면 해요.”

김상곤이 빙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더블형 상급 헌터인 것만 해도 대단한데 트리플이라는 게 밝혀지면 난리가 나겠지. 알겠다. 그렇게 하마. 근데 스승님은 네가 트리플이라는 걸 알고 계시냐?”

“네. 스승님한테는 벌써 말씀드렸어요.”

김상곤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을 또 입을 다물고 걷기만 하던 그가 문득 진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했다.

“녀석한테 얼굴을 다쳤을 때 문득 태어날 아이를 볼 일이 걱정이 되더라. 아이한테 흉터가 가득한 아빠의 흉측한 얼굴을 보여주면 애가 놀랄 텐데, 큰일 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

그 말을 하고는 그가 잠시 소리를 내며 웃었다.

“네 덕분에 흉터를 남기지 않게 되어서 좋구나. 무엇보다 그 점이 고맙다.”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도 않는 사람이 아이에게 흉터를 보여줄 걸 걱정한다는 게 아직 진우로서는 금방 와 닿지는 않았다. 하지만 김상곤이 생각 외로 자상한 아빠가 될 것 같다는 느낌은 들었다. 진우로서는 슬퍼할 형수님 얼굴을 대하지 않게 되어서 천만다행이었다.

천구와의 싸움이 워낙 격렬해서 그런지 한참 동안 별로 기척을 죽이지도 않으면서 걸었는데도 마주치는 마수가 없었다. 삼십분을 더 걸어 가사리 한 마리를 발견한 진우가 총을 쏘아 녀석을 쓰러뜨렸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마나스톤을 찾기 위해 놈을 해체하고 있는데 김상곤이 진우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저 멀리서 무중력 차량이 까마득한 점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진우는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두 손을 마구 휘둘렀다. 일행이 비행 드론이 송출하는 영상을 보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  * * * *

다시 만난 클랜원들은 마치 죽은 줄 알았던 가족이 다시 살아 돌아온 것처럼 김상곤과 진우를 얼싸 안고 환호성을 질렀다. 특히 부클랜장인 최진석은 아무 말 없이 김상곤을 끌어안고는 대성통곡을 했다. 그의 울음이 멈출 때까지 김상곤은 입을 굳게 다물고 최진석의 등을 두드리기만 했다.

진우와 김상곤이 트럭의 적재함에 올라타자 무중력 자동차는 곧바로 호수를 향해 다시 방향을 돌렸다. 이동 중에 접근하는 마수들은 채 다가오기도 전에 진우와 임지근이 쏜 총이나 활에 맞아 거꾸러졌다.

원래 정상적인 헌팅 중이었다면 차를 멈추고 마수의 사체에서 일일이 마나 스톤을 적출해야 했지만, 일단은 호수까지 멈추지 않고 계속 달리기로 했다. 적재함 위에 길게 누운 김상곤의 부상이 아직 완전히 완쾌된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진우가 치료를 했다고는 하나, 출혈이 너무 많았던 데다가 새로 재생된 세포들이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으려면 충분한 휴식이 필요했다.

무중력 차량이 지도에 나와 있던 호수에 도착했을 때에는 해가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일행은 새들 행성에 온 이래 처음으로 호숫가에 텐트를 치고 하루를 온전히 쉬기로 했다.

그동안 땅을 파고 흙바닥에서 몸을 웅크린 채로 잠을 자며 지내서 그런지, 고작 천으로 만든 텐트를 치고 쉬는데도 호텔 침대에 누운 것처럼 편안하게 느껴졌다.

식사 당번을 맡은 손주원과 원혜수가 간단한 재료이기는 하지만 모처럼 양념을 해서 제대로 된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다들 식사 전까지는 편히 쉬자는 분위기였지만 진우는 혼자서 텐트에서 나와 호수를 살피기로 했다.

먼저 지구에서 가져온 간단한 마나 측정기를 이용하여 호수물이 함유하고 있는 마나의 양을 쟀다. 그리고는 그 수치를 장박사가 주었던 자료에 나타난 예전의 측정 수치와 비교해 보았다.

“확실히 호수의 마나 함유량이 예전보다 절반 이하로 줄었네. 생각보다 차이가 큰데?”

호수의 주위를 빙 둘러가며 기슭에 나 있는 자국을 살펴본 결과도 예상과 다르지 않았다. 호수 기슭에 과거에 물이 들어왔던 자리가 뚜렷이 남아 있었다. 남아 있는 흔적으로 보아 최근에 물이 전보다 약간 줄었음이 틀림없었다. 호수로 들어오던 지하 수맥이 막혔거나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어떠냐? 호수에 이상이 생긴 게 확실한 것 같니?”

진우가 호수를 둘러보고 오는 모습을 보고 최진석이 텐트 앞에 나와 앉아 있다가 물었다.

“네. 전보다 물이 빠졌고, 마나 함유량도 줄었어요. 전에 호수로 들어오던 수맥에 이상이 생겼다는 뜻인데, 그 수맥이 엄청난 마나를 함유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물이 줄어든 양이 그다지 많지는 않은 것 같은데도 마나 함유량이 너무 많이 줄었어요.”

그때 원혜수가 진우에게 맛있는 냄새가 나는 스튜 그릇을 불쑥 내밀었다.

“자, 탐사는 천천히 하고 일단 배 좀 채워라. 대장님하고 둘이서 천구를 쓰러뜨렸다면서? 기운을 많이 썼을 테니까 먼저 영양 보충부터 해야지.”

설마 진우 혼자 천구를 쓰러뜨린 것이나 다름없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더블형이기는 해도 상급 헌터인 진우 혼자 힘으로만 천구를 쓰러뜨렸다고 생각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김상곤도 그 점에 대해서는 가타부타 말이 없이 그냥 씩 웃기만 했다. 본인이 아직 최상급임을 밝히기 싫어하니 김상곤도 나서서 굳이 자세한 사정을 설명하지는 않았다. 다만 지구로 돌아가서 정찰 보고를 할 때에는 자신이 아니라 진우가 천구를 없애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점을 분명히 할 작정이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공연히 자신이 세우지도 않은 공을 부풀려서 보고 하는 게 되기 때문이었다.

식사를 마칠 즈음 사방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진우가 마나 감지를 통해 주변에 특별한 마수나 맹수가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일행은 조그만 등을 켜고 모여 앉아 각자 취향대로 커피나 차를 마시면서 다음날의 계획을 의논했다.

“전초 기지로 돌아가서 내부를 살피실 겁니까?”

임지근의 물음에 아무 대답도 않고 가만히 있던 김상곤이 문득 거꾸로 일행을 향해 질문을 했다.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최진석이 입을 열었다.

“저희 임무 중에 첫 번째가 정황 파악이었습니다. 그 점은 지금까지 살펴본 것만으로도 충분히 책임 있는 보고를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마수들의 침공이 발생한 원인인데 그걸 확실히 파악하려면 전초 기지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반드시 완수해야 하는 임무는 아니지만 현재로서는 천구와 두억시니 한 마리를 처치한 상태니 불가능한 임무도 아닙니다.

하면 좋고, 안 해도 비난은 받지 않을 일입니다. 대장님이 판단하시지요.”

김상곤이 클랜원들의 얼굴을 죽 돌아가며 살폈다. 다들 입을 열지 않았다. 클랜장의 판단에 따르겠다는 뜻이었다. 김상곤의 시선이 진우를 향했다.

“진우는 어떠냐? 전초 기지 안까지 들어가 봤으면 좋겠냐?”

진우는 약간 망설였다. 하지만 곧 결심을 하고 입을 열었다.

“저는 들어가 봤으면 좋겠어요. 호수의 상태까지 파악을 했으니, 기지 안의 상태도 확인을 하고 싶어요. 장담할 수는 없지만 거길 가 보면 마수 침공의 원인에 대해 최소한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을 것 같아요. 어쨌든 기지나 그 근처에 마수들을 불러들이는 원인이 있다는 건 확실해 보여서요.”

진우의 말을 들은 김상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동안 말없이 들고 있던 커피 잔을 만지작거리던 그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부클랜장도 말했지만 내 생각에도 특별한 이변이 생기지 않는 한 귀찮은 일은 있을지 몰라도 크게 위험한 일이 생기지는 않을 것 같다. 무중력 차량도 확보했으니 기지까지 다시 가는 것도 크게 시간이 걸리는 일도 아니지. 일단 오늘은 푹 쉬고, 내일 일찍 전초 기지로 가 보자. 기지 상황도 살피고, 그곳에 있는 포털의 상태도 확인하고 나서 귀환 여부를 결정하도록 하자.”

김상곤의 말에 일행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회의가 끝나자 원혜수가 크게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아웅~. 오늘은 간만에 두 다리 쭉 펴고 자겠네. 그럼 불침번 때 확실히 깨우도록 하고 저는 이만 들어가 잘게요.”

그 말이 신호이기라도 한 듯 일행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자기 텐트로 들어갔다. 새들 행성에 들어온 뒤 가장 평온한 밤이었다.

============================ 작품 후기 ============================

오늘 제 글에 대한 서평이 올라왔더군요. 서평을 주신 분께 감사드립니다. 비판을 각오하고 읽었는데 너무 칭찬만 해 주셔서 조금 부끄러웠습니다.

요즘 여러가지 생각이 많기는 한데 제가 드릴 말은 결국 이거 하나인거 같습니다. 열심히 쓰고 더 재미있는 글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