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8. 행성 무니악
열대의 풍미가 물씬 묻어나는 멋진 바닷가 모래사장을 끼고 있는 행성 무니악의 전초 기지 앞에 모래 먼지를 잔뜩 뒤집어 쓴 무한궤도 차량 한 대가 멈춰 섰다. 운전석 정면의 유리창에는 윈도우 브러시가 닦아낸 부채꼴 모양의 자리를 제외하고는 온통 샛노란 먼지가 잔뜩 껴 있었다.
어디서 모래가 잔뜩 실린 폭풍이라도 만났는지 차체 전체에 작은 알갱이들이 할퀴고 지나간 자잘한 상처들이 잔뜩 나 있었다.
기지 앞에 다소 거칠게 정차시킨 차에서 아직 어린 티가 가시지 않은 젊은 사내 하나가 활과 활통을 매단 헌터용 배낭 하나를 메고 내렸다.
쾅
기지 안에서도 들릴 정도로 큰 소리가 나게 신경질적으로 운전석 문을 닫은 사내의 손에는 저격용 소총이 들려 있었다. 허리에는 긁힌 흔적이 군데군데 나 있는 검집이 장검을 꽂은 채 매달려 있었다.
사내는 소총을 어깨에 메더니 조수석에서 커다란 가방 두 개를 꺼내 양손에 들고는 전초 기지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 옷 위로 드러난 잘 다듬어진 근육에도 불구하고 왠지 몸 전체에서 피로감이 물씬 풍겨 나오는 듯한 지친 모습이었다.
전초 기지 입구 위로 솟아 있는 5층 높이의 건물 꼭대기에는 ‘모래와 바다’라는 뜻의 ‘사블레메흐’라는 이름의 간판이 커다랗게 매달려 있었다. 프랑스 정부에서 설립하고, 운영은 프랑스 헌터 협회에서 하고 있는 전초 기지였다.
사내는 품에서 헌터 자격증, 보통은 그냥 헌터 카드로 불리는 네모난 전자 플라스틱 카드를 꺼내면서 그 간판을 흘깃 올려다보았다. 볼 때마다 외딴 행성의 전초기지라기보다는 한적한 휴양지에 위치한 고급 리조트를 연상케 하는 간판이었다.
사내는 쓴웃음을 한 번 짓더니 품에서 꺼낸 헌터 카드를 입구 옆의 작은 패널에 가져다 대었다. 삑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어서오세... 헤이 지누. 그렇게 먼지가 잔뜩 낀 옷을 입은 채로 그냥 들어오면 어떡해? 내가 폭풍 지대에 다녀 올 때에는 반드시 밖에서 먼지를 다 털어내고 들어오라고 했잖아. 아, 정말.”
이곳이 정말 리조트라면 접수대라고 할 수밖에 없는 모양의 데스크에 앉아 있던 잘 생긴 청년 하나가 벌떡 일어나더니 후다닥 달려왔다.
“아, 세드릭. 이거 방에 올라가자마자 벗어서 세탁 맡길게. 너무 피곤해서 그러니까 조금만 봐 줘.”
한국 출신의 중급 헌터 강진우는 미간에 잔뜩 주름을 잡고 달려오는 세드릭 아킨의 화가 난 목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한 번 들어 흔들어주고는 그대로 데스크를 지나쳐 방으로 오르는 계단으로 향했다.
“그렇게 다니면 카펫 위에 먼지가 얼마나 떨어지는 줄 알아? 우리 귀염둥이들이 매일 청소하느라 얼마나 고생하는데, 미리 조금만 수고를 해 주면 좋잖아. 아우, 미치겠네.”
땅딸막한 쇳덩어리에 리본 매고 메이드복 입히면 다 귀염둥이냐? 로봇들이 하는 일이 그건데 무슨 고생이냐 고생은. 진우는 속으로 짜증 섞인 헛웃음을 지으며 대꾸도 하지 않고 그냥 계단을 올랐다. 뒤에서 세드릭이 또 뭐라고 잔소리를 퍼부어댔지만 더 이상 대꾸를 할 기력도 없었다.
그냥 빨리 샤워를 해서 뼛속까지 낀 듯한 모래 먼지를 씻어내고 푹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 * * * *
“후우~”
진우는 샤워를 마치고 메이드 로봇을 호출해 먼지가 끼고 기름과 그을음마저 잔뜩 묻은 방호복과 신발을 세탁하도록 맡긴 뒤 침대 위에 길게 누웠다. 탐사하면서 갈아입었던 옷가지들과 텐트도 마찬가지로 모두 내놓았다.
저격용 소총 킬러 제이를 비롯한 무기들도 공들여 닦아내고 점검을 해야 했지만, 오늘은 모든 일을 미루고 그저 푹 쉬고 싶었다.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라서 모든 일이 귀찮았다.
“벌써 세 달 째인가...”
마나 크리스털이 있는 것으로 의심되는 지역이 있다는 행성을 두 곳이나 들렀다가 모두 허탕을 친 뒤 세 번째로 온 곳이 이곳 무니악이었다. 행성마다 두어 달씩 머무르다 보니 어느새 지구를 떠난 지 반년이 넘게 지났다.
처음 출발하던 때의 부푼 희망과는 달리 마나 크리스털은 아직 하나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동안 하급과 중급 마수 십여 마리를 잡아 마나스톤을 얻지 못했다면, 포털 이용료와 숙식비용만으로도 적자가 날 뻔 했다.
6개월만 돌아다니다가 지구로 돌아가 방학을 맞았을 소현이를 보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았다. 목적을 달성하지도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가기는 정말 싫었다.
무니악에 와서 두 달이 넘도록 있는 동안, 마나 크리스털 의심지역으로 분류된 북쪽의 모래 폭풍 지대를 세 번이나 탐사했다. 첫 탐사에서는 폭풍의 중심 지역으로는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외곽만 빙빙 돌다가 식량이 떨어져 허탕을 치고 돌아와야 했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기어코 중심 지역에 들어갔지만 거기서 만난 초대형 마수 윌러몬을 어쩌지 못하고 결국 소득 없이 철수해야만 했다.
‘마나 동결이 잘 먹히지를 않아. 그 놈을 어떻게 해치워야 하지. 골치 아프네.’
꽤 고생을 한 끝에 두 번째 탐사에서 비로소 소문으로만 듣던 대형 윌러몬을 만났을 때는 그 엄청난 크기에 조금 기가 질렸었다. 길이가 40m에 높이만 해도 6m 가까이 되는 통통한 굼벵이 모양의 윌러몬은 둔해 보이는 생김새와는 달리 강력한 마수였다.
보통의 작은 윌러몬들과는 달리 폭풍의 눈에 해당하는 중심부의 무풍지대에 서식하는 이 대형 윌러몬은 느리기는 하지만 꽤 상대하기 까다로운 공격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진우는 처음 윌러몬을 상대했을 때에 녀석의 몸 구석구석에서 헬리콥터 모양의 날개를 가진 하급 마수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던 광경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진저리를 쳤다. 얼핏 보아서는 녀석의 몸 여기저기에 작은 혹이 잔뜩 붙어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게 모두 독립적인 비행능력을 가진 하급 마수들이었다.
윌러몬과 일종의 공생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그 마수들을 헌터 패드에 있는 외계 생물 도감에서는 샴비종이라고 소개했다. 날개를 제외하면 몸 길이가 불과 50cm 밖에 되지 않았지만 하급 마수로 분류될 정도로 단단하고 날카로운 갈고리 모양의 발톱이 달린 발을 여섯 개나 가지고 있었다.
자체적인 소화기관이 잘 발달되지 않은 녀석들은 윌러몬 근처에 접근하는 생물들을 사냥한 뒤, 그것을 직접 먹지 않고 윌러몬에게 주었다. 윌러몬이 그것을 먹어 소화시키면 대신 녀석의 몸에 대롱 모양의 꼬리를 박아 양분을 흡수하며 사는 놈들이었다.
진우는 윌러몬과의 첫 대면에서 녀석에게는 공격도 해 보지 못하고 샴비종들을 상대하다 지쳐서 철수하고 말았다. 끝까지 상대하면 물리칠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당시만 해도 아직 무리를 하지 말자는 생각이 강했던 것이다.
첫 탐험 때와는 달리 무풍지대에 도착하기도 전에 폭풍 속에서 살아가는 마수들의 공격에 시달리느라 이미 상당히 지친 상태이기도 했다.
열흘 전, 세 번째 탐사에 나설 때만 하더라도 이번에는 윌러몬을 없앨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바가지나 다름없는 기지 내의 물품들을 눈 딱 감고 양껏 구매해서 각종 장비를 철저히 준비했었다.
지난번처럼 폭풍지대를 통과하는 동안 너무 힘을 빼지만 않는다면, 샴비종을 먼저 없애고 나서 대형 윌러몬의 체내 마나를 동결시키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거라고 보았던 것이다.
‘샴비종에게만 의존하는 녀석이 아닌 줄은 알고 있었지만... 쩝.’
첫 공략 대상으로 삼았던 샴비종들을 어느 정도 해치웠다고 생각할 무렵 그동안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던 윌러몬이 갑자기 몸 주위로 희미한 붉은 빛이 도는 안개 같은 것을 내뿜기 시작했다. 진우가 샴비종들을 정리하면서 차츰 자신에게 접근하자 본능적으로 위기를 느낀 것 같았다.
‘그대로 멍청하게 있었으면 최소 중상이었지.’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채고 얼른 물러나기를 천만다행이었다. 윌러몬의 몸에서 스며 나오듯이 흘러나와 바닥에 얕게 깔리면서 퍼져나가던 안개가 어느 정도 범위를 뒤엎었을 때, 갑자기 꽝 하고 천지를 무너뜨리는 굉음과 함께 사방이 터져나갔다.
녀석이 입에서 뱉어낸 작은 불꽃이 안개에 닿자마자 마치 가스가 가득 찬 방안에 불씨가 튄 것처럼 안개에 뒤덮였던 지역이 일시에 폭발했던 것이다. 무풍지대의 가장자리에 멀찍이 세워 놓았던 그 무거운 무한궤도 차량이 들썩일 정도로 강력한 폭발이었다.
다급히 온 몸에 두른 마나 방어막에도 불구하고 내장이 흔들릴 정도로 엄청난 충격이 진우를 덮쳤다. 폭발이 가라앉자 그을음에 온통 뒤덮인 진우가 몸을 일으켰을 때에는 사방의 땅이 몽땅 뒤집혀져 있었다.
윌러몬 자신도 폭발의 영향에서 완전히 무사하지는 않은 듯 그을음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래도 보통의 윌러몬보다 훨씬 질긴 피부를 지니고 있는지 특별한 부상을 입은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땅 위를 낮게 날아다니던 샴비종들은 그 폭발 한 방에 모두 부서지고 탄 채로 땅 위에 떨어져 있었다.
‘그게 끝이 아니었어.’
설마 그런 폭발을 두 번 세 번 연거푸 일으킬 수는 없을 거라는 생각에 검을 빼어들고 빠르게 윌러몬에게 다가가던 진우를 향해 녀석은 마치 화염방사기 같은 불줄기를 입에서 쏘아내며 공격했다. 입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부터 푸른색으로 타오르기 시작하는 불줄기는 아마도 기화시킨 가연성 물질을 불어내는 방식으로 불길을 만들어 내는 것 같았다.
벌린 입 위 아래로 한 쌍씩 돌출된 긴 이빨들이 내뿜는 숨길에 불을 붙이는 한편, 불길이 너무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동시에 하는 것으로 보였다.
윌러몬이 그런 공격을 한다는 것은 외계 생물 도감에 있는 정보를 통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는 것과, 그것을 피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놈은 이동 속도가 느렸지만 단지 몸을 약간씩 틀며 고개짓을 하는 것만으로도 불길의 방향을 원하는 대로 조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하는 입장에서는 그걸 완전히 따돌릴 정도로 빠르게 움직여 놈의 반대편으로 돌아가야 했다.
문제는 그러기에는 윌러몬의 몸집이 너무 크다는 점이었다. 윌러몬은 제자리에서 조금씩 돌면서 몸을 틀면 되었지만, 진우는 놈의 불길을 피하기 위해 먼 거리를 빙 돌며 움직여야 했다.
그래도 최상급 마나 한터로서의 빠른 움직임 덕에 진우는 불길을 피해 어찌어찌 윌러몬의 등 위로 올라가는데 결국 성공할 수 있었다. 진우는 그곳에서 일단 녀석의 마나를 동결시킨 다음에 무한 칼질을 해서 윌러몬을 사냥할 생각이었다.
‘동결의 범위가 너무 작았어. 그리고 해소되는 시간도 생각보다 빨랐고.’
마나 동결이 먹히기는 했다. 그러나 윌러몬의 덩치가 너무 커서 그런지, 아니면 녀석에게 마나 동결에 대한 어떤 저항력이 있었던 건지, 동결되는 마나의 범위가 생각보다 넓지 않았다. 그리고 일단 동결이 되었던 마나도 불과 10초도 되지 않아서 다시 풀렸다.
유일한 방법은 마나를 잔뜩 불어넣은 검을 이용해 등 위에서부터 놈의 가죽을 잘라내는 것이었지만 그것 역시 쉽지 않았다. 가죽이 질긴 것은 그래도 검에 불어넣는 마나의 밀집도를 높여 어떻게든 베어낸다고 하더라도, 도저히 중심을 잡고 서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땀도 아니고, 피부에서 기름을 내는 녀석이라니.’
진우가 윌러몬의 등 위로 올라가자 놈은 피부 위로 약간의 붉은색이 깃든 투명한 기름을 분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기름이 엄청나게 미끄러웠던 것이다. 기름이 분비되기 시작하자 진우는 간신히 잡았던 몸의 균형을 잃고 윌러몬의 몸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샴비종이 사라진 매끈한 가죽 위로는 잡을 곳도 마땅치 않았다. 간신히 중간에 놈의 몸을 박차고 스스로 뛰어내리지 않았으면 그대로 바닥에 떨어져 윌러몬의 몸에 깔리거나, 허둥대다가 이어지는 화염방사기를 방불케 하는 불줄기에 직격을 당했을 것이다.
결국 세 번째 탐사에서도 몸 안의 마나가 거의 고갈될 지경까지 공략을 시도하다가 포기하고 말았다. 자칫하면 마수를 잡는 게 아니라 놈의 먹이가 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상황까지 몰리고 만 것이다.
기름과 그을음, 먼지가 잔뜩 낀 몸을 이끌고 간신히 몸을 빼낸 진우는 차를 몰고 돌아오는 내내 억울함에 치를 떨었다.
“하지만, 그 놈이 분명 폭풍 지대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마나 크리스털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는 게 틀림없어.”
진우는 세 번째 사냥의 실패를 곱씹다가 저도 모르게 누워 있던 침대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폭풍지대의 반경은 대략 100Km 정도였다. 갈 때마다 약간의 변화는 있었지만 대체로 크기가 늘 일정했다. 진우는 그 폭풍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 행성의 기후 특성에 따른 것도 아니고, 일 년 내내 지속되는 폭풍이라는 게 말이 될 리가 없지.’
무풍 지대 안쪽 어딘가에 분명 폭풍의 원인이 되는 무언가가 있을 것 같았다. 문제는 폭풍의 위치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느리기는 하지만 조금씩 계속 움직인다는 데에 있었다.
“폭풍이 움직이는 자리를 따라 놈이 이동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진우의 생각에는 놈이 움직이는 길을 따라 폭풍이 이동하는 것 같았다. 확인이 필요한 일이었다.
폭풍지대에는 무풍지대에서 서식하는 놈 뿐만이 아니라 그보다는 훨씬 작지만 또 다른 윌러몬들이 있었다. 보통의 윌러몬들은 길이가 10m 정도에 높이도 2m를 넘지 않았다.
외계 행성 도감의 기록에 의하면 그게 정상적인 윌러몬이었다. 그리고 일반적인 윌러몬은 비록 불길을 내뿜기는 해도 안개를 이용해 주위를 온통 폭발시키는 공격을 하지는 않았다. 그런 공격을 한다는 얘기는 진우가 가지고 있는 외계 행성 도감에도 없었다.
“샴비종의 숫자도 폭풍지대에 있는 녀석들보다는 훨씬 많고 말이지.”
일반적인 윌러몬의 등에서 공생하는 샴비종의 숫자는 많아야 열 마리 안팎이다. 그런데 진우에게 두 번이나 좌절을 안겨 준 놈은 무려 50 마리가 넘는 샴비종을 등에 지고 다녔다. 여러 모로 알려진 것과는 다른 규격 외의 별종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진우의 생각에는 그게 아무래도 그 부근에 있다는 마나 크리스털의 영향 때문인 것 같았다. 진우는 반드시 놈을 잡아 부근은 물론 그 뱃속까지 샅샅이 확인하고 싶었다.
“문제는 놈을 어떻게 죽이느냐는 거지. 마나 동결의 위력을 갑자기 높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진우는 일으켰던 몸을 도로 눕히고는 머리속에서 생각을 지웠다. 어차피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내내 방법을 생각했지만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었다.
띵동
진우가 한참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고 있는데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샤워 뒤에 제대로 말리지도 않아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 일어나 문에 달린 렌즈를 통해 밖을 보니 세드릭이 쟁반 위에 뭔가를 받쳐들고 서 있었다.
“세드릭, 무슨 일이야? 나 지금은 피곤해서 좀 쉬고 싶은데.”
문을 반쯤 열고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하는데 세드릭이 손에 들고 있던 쟁반을 불쑥 내밀었다.
“야채 주스야. 피곤해 보여서 이것저것 섞어서 갈아왔어. 지구에서 가져온 것들이야. 피로회복에 좋을 거야.”
외계 행성에서 지구에서 재배한 야채를 먹는 것은 호사까지는 아니더라도 흔하게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대개는 행성 현지에서 조그만 온실 같은 것을 만들어 필요한 것을 직접 재배해서 사용했다.
“너, 아까는 먼지 털라고 난리를 치더니 이건 웬 서비스냐?”
“웬 서비스는? 지누는 장기 투숙객이잖아. 그래도 먼지는 조금 조심해 줘. 지금 관리 인력이 부족해서 무인 로봇 점검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야. 먼지가 많으면 걔들이 고장이 잘 나거든. 그럼 나 간다.”
쟁반을 건넨 세드릭은 또 휭하니 사라졌다. 녀석은 잔소리가 심한 편이기는 하지만 가끔 이런 서비스를 하기도 했다. 어떤 면에서는 무니악에 온 뒤로 진우가 가장 말을 많이 나눴던 사람이 세드릭이었다. 덜렁대기는 해도 잔정이 많은 놈이었다.
세드릭이 준 야채주스를 마시고 나니 피로가 풀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잠이 쏟아졌다.
“일단은 좀 자자. 좀 쉬어야 머리도 개운해 질 거고, 그래야 무슨 대책이 떠오르든지 말든지 할 것 같아.”
기지로 돌아오면 오랜 만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겠다던 생각도 잊은 채 주스 한 잔을 비운 진우는 그대로 잠이 들고 말았다. 그리고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일어난 다음날 아침, 말 그대로 머리가 개운해지면서 문득 한 번 시험해 볼만한 생각이 떠올랐다.
============================ 작품 후기 ============================
새로운 행성에서 시작하는 새로운 모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