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정태와 헤어진 진우는 시간에 맞춰 격투술 시범이 실시되는 장소에 도착했다. 작은 규모의 체육관처럼 생긴 그곳에는 이미 적지 않은 학생들이 자리를 잡고 시범을 기다리고 있었다. 진우가 빈자리에 앉아 기다리자 잠시 후 80명이나 되는 교관들이 총교관을 앞세우고 시범장으로 들어왔다.
진우는 그들 중에서 최현이 말한 권일도라는 교관을 금방 찾을 수 있었다. 헌터 패드에 각 교관들의 얼굴이 나와 있어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권일도는 170cm가 조금 넘어 보이는 키에 단단한 근육을 가진 중년의 남자였다. 그는 웃음 띤 얼굴로 관중석에 앉은 학생들을 둘러보는 다른 교관들과는 달리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조금 무뚝뚝해 보이기는 하나 특별한 위압감 같은 것은 느껴지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인상에 특별한 특징이 없어 한 번 보고 다시 만나도 얼굴이 잘 기억나지 않을 것 같았다.
최현의 말대로 권일도는 시범에 나서지 않았다. 어차피 참석한 교관 중에 직접 시범을 보이는 교관들은 대략 이십 여명 정도였다. 시범 교관들이 하나씩 나와 자신들의 특기를 보여주고, 권법의 유파나 특징 등을 설명하면, 교관들 중에 같은 유파의 사람들이 함께 나와 인사를 하는 방식이었다.
학생들의 표정을 보니, 아마도 시범에 나선 교관들의 반은 5명 정원이 먼저 채워질 게 분명했다. 반면 권일도를 눈여겨보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어떤 유파에도 속하지 않은 듯했다. 격투술 시범은 그렇게 끝났다.
정태는 결국 차연희와 같은 반에 들어가는데 실패했다. 나름대로 자존심까지 굽혀가며 김도훈에게 차연희가 신청한 반을 물어봤는데, 정태의 말을 들은 김도훈이 아무 말도 없이 정태를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휑하고 고개를 돌려 가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아우, 그 재수탱이 자식은 역시 밥맛이 없어.”
공공연하게 차연희와 사귄다고 떠벌리고 다니는 녀석이 그걸 대답해 줄 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김도훈 역시 차연희가 신청한 반에 들어가지 못했다. 이러저런 끈이 있는 녀석이라 차연희가 신청한 반을 확인하고 같은 반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차연희가 이미 4명이 신청한 반을 골라 마지막 1명을 딱 채우고 만 것이다.
헌터 패드를 통한 수강 신청은 학생이 어떤 반을 신청할 경우, 해당 반의 교관이 승인 버튼을 눌러 주어야만 신청이 완료되는 방식이었다. 수강 신청이 성공하면 그 반의 목록에 학생의 이름과 학년이 뜨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학생들은 자기 마음에 드는 학생이 있는 반을 고르거나, 반대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있는 반은 피할 수 있었다.
아마 차연희는 그걸 이용해서 자기 뒤에 다른 학생이 더 들어오지 못하게 나름 머리를 쓴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늘 같이 다니기는 하지만, 그러면서도 딱히 차연희가 김도훈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한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전투 훈련을 세 과목이나 신청하겠다는 진우의 계획은 예상치 못한 암초에 부딪치고 말았다. 헌터학교의 신입생은 1학년 동안 주중에 매일 오전과 오후 각각 4시간씩 수업을 들어야 했다. 아울러 무조건 2과목 이상의 전투 과목을 신청해야 했다. 전투 훈련 과목은 같은 과목이라도 학생의 편의에 따라 주당 6시간 수업을 하는 반부터 주당 10시간 수업을 하는 반까지 여러 종류가 있었다. 주당 10시간 수업을 하는 반의 경우 매일 2시간씩 수업을 한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진우가 신청한 검술과 궁술 반이 바로 주당 10시간, 즉 매일 하루 2시간씩 꼬박 수업을 하는 반이었다. 다시 말해 이미 검술과 궁술만으로 오후 수업 시간이 다 차버린 것이다. 자발적으로 수강 신청을 해 본 경험이 없는 신입생들이 가끔씩 저지르는 실수였다. 과목과 교관 이름만 보고, 수업 시간 확인을 꼼꼼하게 하지 않고 수강시간을 신청한 경우였다.
이미 검술과 궁술에 대해 수강 신청을 해서 승인까지 받아버리는 바람에, 권일도 교관의 격투술 신청 버튼을 눌렀더니 계속 오류가 떴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헌터 패드를 들여다보던 진우는 나중에야 자신이 저지른 실수를 깨달았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실수였다. 이대로라면 최현이 일부러 전화까지 해서 추천해 준 교관의 수업을 놓치는 건 둘째 치고, 대부분의 신입생이 신청한다는 격투술 과목 자체를 듣지 못한 채 첫 학기를 보내게 되었다.
진우는 할 수 없이 최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부러 추천해 준 교관의 과목을 신청하지도 못했으니 솔직히 말하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전화를 받은 최현은 혀를 차더니 나중에 연락을 하자고 말하고는 전화를 툭 끊어 버렸다. 그리고는 한 시간쯤 지나 그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진우야, 너 이번 학기에 저녁 먹고 나서 특별히 공부할 계획 잡은 거 있니?”
“아뇨. 저녁 먹고는 가벼운 운동을 하거나 학과 공부를 할 생각이에요.”
“흠, 그럼 혹시 저녁에 격투술 훈련 받을 수 있어? 매일 저녁 2시간씩 말이야.”
가능할 것도 같았다. 조금 피곤하기는 하겠지만, 케이튼 행성을 다녀온 뒤로는 체력이 워낙 좋아졌다. 저녁에 훈련을 마치고 나서 조금 늦게까지 공부하고, 대신 잠을 좀 줄이면 별 무리는 없을 것 같았다.
“네. 괜찮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게 가능한가요? 오후 수업은 4시간 받는 거 아닌가요? 저는 이미 수업시간이 꽉 찼는데요.”
“그런 건 아냐. 원칙적으로 4시간 이하면 안 된다는 거지 그 이상을 받지 말라는 건 아니니까 문제될 건 없어. 뭐, 교관들이 저녁 시간에 수업을 개설하는 경우가 지금까지 없기는 했지. 교관들도 퇴근을 해야 하니까 말이야, 하하.”
“저 때문에 너무 그 교관님한테 폐를 끼치는 거 아닌가요? 선생님한테도 그렇고요.”
“나야 별 상관없지만 확실히 그 형님한테는 네가 폐를 끼치는 게 맞기는 하다. 일단 내가 일도 형님, 아니 권교관님한테는 얘기를 해 놨다. 다행히 아직 아무도 수업을 신청한 학생이 없단다. 30분쯤 있다가 강의 시간표 다시 확인해 보면 아마 시간대가 옮겨져 있을 거다. 그거 보고 신청하면 될 거야. 근데 너 정신 좀 차려야겠다. 이런 건 큰 실례라는 거 알지?”
“네. 죄송해요. 그리고 감사해요.”
“그래, 그럼 이번에는 실수하지 말고 신청 잘 해라.”
전화를 끊고 나니 얼굴이 뜨거웠다. 참 어처구니없는 실수였다. 마나를 각성한 헌터가 발현 단계에 들어가면 신체 기능이 크게 향상되기 마련이었다. 그 향상되는 신체 기능에는 뇌 기능도 포함되어 있었다. 명색이 인류 최초로 10대에 발현 가능한 헌터가 된 자신인데 너무나 터무니없는 실수를 하고 말았다. 주변에서 너무 많은 것을 도와줘서 어려운 일도 쉽게 처리되다 보니, 어느새 긴장의 끈이 살짝 풀어진 것 같았다.
‘조심해야겠구나. 뭐냐 이게, 민폐나 끼치다니.’
30분을 기다려 수강 신청을 마치고 나서 최현에게 문자를 보냈다. 수강 신청을 무사히 마쳤으며, 다시는 이런 실수를 하지 않겠다고 사과의 뜻을 전했다. 그에게서는 스마일 표시 하나가 덜렁 날아왔다.
* * * * *
금요일까지 시험을 마친 결과가 토요일 저녁에 벌써 공지되었다. 진우는 응시한 모든 과목에서 통과 판정을 받았다. 그는 판정 결과를 바탕으로 오전 수업에 대한 수강 신청을 마쳤다. 그제야 긴장이 풀리면서 한숨이 나왔다. 입학하자마자 첫 주를 너무 정신없이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지고 보면 올해가 시작되기 무섭게 케이튼 행성으로 날아갔다가 돌아온 뒤로 바로 입학식을 치렀다. 새해 벽두부터 너무 숨 가쁘게 달려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너무 정신없이 지나가네. 숨 좀 돌려야 하겠어.’
입학하고 맞는 첫 주말은 학생들에게 자유로운 외출이 허용되었다. 처음 집을 떠나 객지 생활을 하는 학생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가족이나 친구를 만나고 올 수 있도록 특별히 허가가 내려진 것이다. 헌터 학교는 ‘자유’를 모토로 하고 있었지만 외출 외박에 대해서는 다소 엄격한 규율을 고수하고 있었다. 모든 비용이 헌터 양성소와 헌터 협회, 외문연의 지원으로 충당되고 학생들에게는 일체 부담을 요구하지 않는 만큼, 학습이나 훈련에 대해서는 학생들 역시 최소한의 성의와 책임감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취지였다.
어차피 갈 곳이 없어 그냥 기숙사에서 지내려던 진우는 정태의 손에 끌려 서울에 있는 정태네 집에 가기로 했다. 두 사람은 점심 무렵 정태 집에 도착해 부모님들과 함께 식사를 했다. 진우가 헌터 후보자 테스트에 합격해서 헌터 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던 분들이셨다. 진우는 부모님을 일찍 잃으면서 자신의 인생이 참 불운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최근에는 거꾸로 너무 대가없이 많은 것을 받는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주변에 고마운 분들이 너무 많았다.
정태 어머니가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진우에게 이것저것 권하면서 넌지시 부탁했다.
“우리 정태가 운동은 잘 하는데, 공부에는 좀 꾀를 부려. 거긴 수학, 영어 같은 것도 잘 해야 한다며? 진우 네가 같은 방에 있으면서 이 녀석 공부 안하면 야단 좀 쳐라.”
그 말을 들은 정태 녀석이 발끈했다.
“에이, 엄마. 나도 공부 못해 속 썩인 적은 없잖아. 그리고 어차피 헌터 학교는 모든 과목을 다 패스하지 않으면 졸업도 못해.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걱정은 오히려 진우지. 거긴 전투 훈련이 진짜 빡세거든.”
정태가 진우의 어깨를 툭툭 쳤다.
“뭐 걱정마라. 이 형님이 많이 도와줄게.”
운동에서도 자신이 진우를 이기기는 이제 힘들다는 걸 그는 아직 몰랐다.
* * * * *
식사를 마치고 예전 담임선생님을 비롯해서 인사 드려야 할 분들을 몇 명 찾아다니다 보니 어느새 저녁 시간이 되었다. 진우는 학교로 돌아가기 전에 잠시 운동했던 격투기 도장을 들렀다. 마침 남상호 관장이 있어 인사를 드렸다. 운동하는 사람답게 진우의 체형이 변했다는 걸 금세 알아 챈 남관장이 확실히 요즘 아이들은 잘 자란다며 어깨를 두들기는 바람에 속으로 진땀을 흘렸다.
“아참, 너희 방학 되면 케이튼 행성으로 훈련 간다면서?”
“네. 1학년들은 매년 방학마다 거기로 가요.”
“케이튼에 내 동생이 주방장으로 있다. 혹시 가면 내 얘기하고 맛있는 것 좀 해달라고 해라. 하하.”
그러고 보니 케이튼 행성 전초 기지 주방장 이름이 남경호였다. 이름이 비슷하다 했는데 설마 남상호 관장님 동생일 줄이야. 헌터 학교에 입학할 때, 헌터 양성소 소장은 진우에게 마나를 각성했다는 사실을 숨기라고 했다. 그는 정 부득이한 경우에도 발현이 가능하다는 사실은 절대 드러내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남경호 주방장은 진우가 이미 총알에도 마나를 부여하는 게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여차하면 남상호 관장에게도 비밀을 지켜달라고 부탁해야 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사를 마치고 나가려는데 마침 남상호 관장의 딸인 희정이가 꽁지머리를 팔락이며 들어왔다.
“어? 오빠! 언제 왔어? 계속 안 보이더니 아빠한테 인사 온 거야? 못 보던 사이에 키가 많이 컸네?”
진우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 봐도 명랑하고 기운 센 아이였다.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고, 지금은 아니겠지만 심지어 자신보다도 격투에 능한 아이인데도, 볼 때마다 늘 한참 어린 동생 같은 느낌이 들었다.
“오빠네 입학하면 격투술 빡세게 배운다며? 방학 때는 우리 삼촌 있는 케이튼 행성으로 훈련도 가고.”
“응. 올해도 아마 특별한 일이 없으면 가게 될 거야.”
“그럼, 오빠 방학 때는 전혀 시간이 없는 거야?”
“뭐, 방학은 두 달이고, 케이튼 훈련은 한 달이니까, 그래도 좀 여유는 있겠지. 그런데 왜?”
“그럼 오빠 방학 때 시간나면 나하고 다시 한 번 대련 좀 해 줄래? 그때쯤이면 오빠도 꽤 배울 거 아냐. 헌터 학교 학생들은 어떤 수준인지 궁금해서. 헤헤.”
그러자 들고 있던 남상호 관장이 눈을 부라렸다.
“몇 번을 얘기해야 하냐? 헌터 후보자 테스트 통과하려면 대련 실력보다 가상훈련 장치에서의 점수가 더 중요해. 올 한 해는 체력을 유지할 정도만 실전 훈련을 하고 가상훈련에 더 신경을 쓰라고 했잖아. 진우도 운동은 잘 못했지만 오후 측정 점수가 좋아서 합격했다는 거 알지? 헌터 학교 훈련이 세긴 하다만 고작 육 개월 만에 어려서부터 격투기를 배운 너하고 대련하기에는 일러.”
관장이 대뜸 나서서 남희정을 야단쳤다. 그가 이제는 운동을 잘 하게 되었다는 걸 모르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진우는 다시 한 번 진땀이 흐르는 걸 느꼈다.
“희정이가 가상훈련 장치에는 잘 적응하던가요?”
진우는 지나가는 말처럼 슬쩍 남관장에게 물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엄하게 딸을 꾸짖던 그가 남희정을 자기 방으로 들여보내더니 돌아서서 씩 웃었다.
“날 닮아서 그런지 잘 해. 아마 테스트 당일 날 큰 실수만 안 하면 합격도 가능할 거야.”
남관장도 헌터 학교 졸업생이니 그가 저렇게 자신 있게 얘기한다면 남희정도 헌터 후보자 테스트에 합격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였다. 하긴 들리는 말에 의하면 전문 헌터가 되지 못한 자신의 한을 풀겠다며 어릴 때부터 희정이를 철저하게 교육을 시켜온 그였다.
‘잘 하면 학교 후배가 되겠군.’
진우는 남관장에게 인사하고 돌아서며 희정이가 헌터 학교 후배가 되어 자신에게 대련해 달라고 조르는 장면을 잠깐 상상했다. 왠지 모르게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 * * * *
수준별 테스트를 열여섯 개나 통과하는 바람에 진우가 듣는 오전 수업에서는 교실에서 1학년을 찾기가 어려웠다. 수학의 경우 반에서 1학년이 진우밖에 없었다. 그가 신청한 수학 과목은 보통 4년제 일반고에서는 3학년 2학기에나 듣는 수업이었기 때문이었다.
영어 교실에서 차연희와 김도훈을 함께 만난 것은 다소 의외였다. 차연희가 같은 반이 된 것은 다소 우연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김도훈은 아니었다. 눈치를 보니 오후 격투술을 함께 듣지 못하게 된 김도훈이 수를 써서 차연희가 신청한 영어 수업을 기어코 알아낸 것 같았다.
“이야, 우리 확실히 인연은 인연인가 보다. 영어 반이 굉장히 많은데 여기서 또 만나네. 아무튼 반갑다.”
녀석은 여전히 너스레가 심했다. 진우는 차연희에게도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지만, 그녀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여 아는 체를 하고는 금방 표정 없는 얼굴로 돌아갔다. 여전히 뭔가 알 수 없는 두 사람이었다.
정태와는 국어 수업만 같이 듣게 되었다. 진우가 국어에는 다소 약한 반면, 정태가 의외로 국어에 소질이 있었던 터라 처음부터 헌터 패드를 나란히 놓고 같은 반을 신청했다. 진우는그 대가로 정태로부터 ‘내가 너에게 국어의 쓴 맛을 보여주마’라는 헛소리를 들어야 했다. 의기양양하던 녀석은 함부로 나대다가 첫 수업에서부터 선생님에게 질문 공세를 당하고는 기가 팍 죽어버렸다. 불쌍한 녀석.
국영수를 제외한 나머지 과목은 경제학과 물리학을 신청했다. 외계인들의 방문 이후 과학이 급격히 발달한 덕분에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과학 과목의 내용도 제법 난이도가 높았다. 진우도 수준별 테스트에서 물리, 화학, 생물을 각각 두 단계밖에는 통과하지 못했다. 게다가 경제학의 경우 수준별 테스트에는 응시조차 하지 못했다. 사회 과목에서는 국사를 간신히 두 단계 통과한 게 다였다. 정태는 두 과목 모두 고개를 저으며 강의 신청조차 하지 않았다.
오후 첫 수업에서 만난 검술 교관은 키만 껑충하게 크고 몸에 살이 별로 없어 보이는 젊은 남자였다. 이름을 정찬우라고 했는데, 아직 마나를 각성한 하급 헌터라고 스스로 밝혔다. 그는 굉장히 편하게 수업을 하는 스타일이었다.
“제 수업은 간단합니다. 첫째, 제가 보여드리는 검술형을 완전히 익힐 것. 그리고 저와의 대련에서 10분 이상을 버틸 것. 그 두 가지를 할 수 있다면 이 과목을 통과시켜 드리겠습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 나서 바로 시범을 보였는데, 무려 20분 이상을 쉬지 않고 물 흐르는 듯한 검술을 보여주었다. 검술의 변화도 심하고 동작도 제법 화려해서 세밀한 부분까지 놓치지 않고 외워서 익히려면 시간이 좀 걸릴 듯했다. 하지만 형을 따라하는 것 정도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함께 수업을 듣는 다른 네 학생들의 눈에는 자신감이 비쳤다. 시범을 마치고 난 교관도 그런 눈치를 챈 거 같았지만 별 다른 말이 없어 그저 씩 웃었다. 아무래도 대련 시험을 통과하기가 만만치 않아 보였다. 그리고 그런 짐작은 채 한 달이 되지 않아 사실로 드러났다.
궁술 교관은 여자였는데 뜻밖에 외국인이었다. 게다가 엄청난 미인이었다. 이름이 나르샤인 그 교관은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서 어릴 때 한국으로 이민을 왔다고 했다. 그녀 역시 마나를 각성한 하급헌터였다. 궁수형 헌터는 발현이 안 되면 실전에서의 효용이 거의 없는데, 포기하지 않고 용케도 각성까지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는 녀석들도 있었다.
“우와, 교관님 완전히 엘프다, 엘프. 우리 완전히 땡잡았다, 그지?”
함께 수업을 신청한 남학생 두 명은 서로 아는 사이인지 저희들끼리 환호하고 난리가 났다. 같이 수업을 듣는 여학생 두 명이 눈을 가늘게 뜨고 째려보았지만, 녀석들에게는 이미 함께 수업을 듣는 여학생 따위는 안중에서 사라진 것 같았다. 녀석들은 그날 땡잡기는커녕 인생을 땡 칠 뻔 했다.
“궁수의 생명은 정확성과 민첩성입니다. 첫날이니까 오늘은 가볍게 뛰는 걸로 시작하겠습니다.”
말을 마친 교관은 앞장서서 뛰기 시작했다. 그날 궁술반 학생들은 가볍게 뛰는 나르샤 교관을 따라 두 시간 동안 전력질주에 가까운 속도로 뛰기만 했다. 수업이 끝나기 훨씬 전부터 남학생 두 명은 탈진해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했다. 여학생들이 오히려 더 오래 버텼지만 그녀들도 결국은 주저앉고 말았다. 끝까지 함께 뛴 것은 진우 혼자였다. 수업을 마친 나르샤 교관은 진우를 다소 의외라는 눈으로 쳐다보더니 씩 웃었다.
“이 수업 첫 시간에 나하고 끝까지 뛴 학생은 처음이네. 이름이 강진우라고 했지?”
“네.”
“그래, 체력도 좋고 속도도 좋으니 기대할게. 열심히 해라.”
“네, 감사합니다.”
뒤에서 남학생 둘이 ‘저 자식 괴물이네’라고 소곤대는 소리가 들렸다. 진우는 요즘 괴물이라는 소리를 아주 귀에 달고 다닌다는 생각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역시 설명이 많은 날은 스토리 전개가 느리게 가네요. 진우가 헌터 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는 두고 두고 밑바탕이 될 내용들이라서 일단은 짚고 넘어가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불타는 금요일, 재미있는 시간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