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행성 헌터-11화 (11/235)

11화

이사를 하는 일이 무척 드문 연말연시에 살던 집에 대한 매매 계약을 완료할 수 있었던 것은 진우에게는 행운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가 살던 집이 워낙 상태가 좋았던 덕도 있지만 새로 이사 올 가족이 외국에서 급히 귀국하느라 당장 살 집을 구해야 했던 탓도 컸다. 세밑이 얼마 남지 않은 12월 28일, 진우는 당장 갈아입을 옷 몇 벌만 챙긴 채 살던 집을 송두리째 새로 이사 올 사람들에게 넘기고 잔금을 받을 수 있었다.

간단한 옷가지와 책들은 조그만 박스 몇 개에 담아 정태네 집에 맡겼다. 냉장고나 세탁기를 비롯한 세간들은 새로 이사 오는 가족이 그대로 사용하는 조건이었다. 진우네 집에 와서 가전기기나 장롱 같은 가구들을 미리 살펴 본 새 주인이 외국에 있는 살림을 굳이 가지고 오는 것보다는 그의 집에 있던 것을 그대로 사용하는 편이 좋다고 판단하고 그대로 인수하기로 결정했다. 덕분에 진우로서는 일이 많이 줄었다.

그의 소식을 들은 정태가 연말연시를 자기 집에서 함께 보내자고 했지만 그는 굳이 정태의 청을 마다하고 제주도로 향했다. 헌터 양성소의 포털을 이용하여 행성 케이튼으로 가기로 한 게 1월 2일이었는데 그 동안은 모처럼 잠시나마 혼자 여행 겸 휴식을 취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가지고 있던 콘도 회원권을 진우가 물려받은 게 있었는데, 마침 연말연시임에도 불구하고 빈 방이 있다고 해서 그걸 이용하기로 했다. 그곳에서 그는 제주도 올레길을 걷고, 한라산을 올라 물이 없어 이름뿐인 백록담을 보기도 하면서 새로운 행성으로의 여행에 대한 기대와 불안을 잠재우려고 노력했다. 그러는 사이 새해가 밝았다. 1월 2일 아침 일찍, 그는 가방 하나를 둘러메고 헌터 양성소가 있는 대전 근처의 청주 공항을 향하는 비행기에 올라탔다.

청주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헌터 양성소에 도착한 진우는 바로 소장실로 올라가 그곳에서 다시 우지연 과장과 최현 헌터를 만났다. 거기서 대략 한 시간 가량 앞으로 진행될 훈련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설명이 모두 끝나자 진우를 포함한 네 사람은 함께 본관 뒤쪽에 있는 돔 모양의 건물로 이동했다. ‘외계 행성 연결 관리동’이라는 다소 긴 이름을 가진 건물은 보통은 그냥 ‘포털 관리동’이라고 불렸다. 건물은 몇 개의 사무실과 연구실을 제외하면 전체가 중앙의 커다란 방 하나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방 한 가운데에 공항 검색대처럼 생긴 문이 하나 있었다. 공간을 순식간에 뛰어넘어 다른 행성으로 오갈 수 있는 포털 장치였다.

네 사람은 포털 앞으로 다가갔다.

“최 헌터는 미리 얘기한 대로 준비 다 했지?”

소장의 물음에 최현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네. 필요한 물품은 다 챙겼습니다.”

그는 꽤 묵직해 보이는 대도 외에 가벼운 배낭 하나를 어깨에 걸쳐 메고 있었다. 다른 쪽 어깨에는 거의 최현의 길쭉한 하드 케이스가 메어져 있었다. 진우에게는 따로 제법 묵직한 배낭과 함께 장검 한 자루가 주어졌다. 진우가 본래 가지고 있던 가방은 속옷 몇 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관리동의 라커 안에 집어넣었다.

준비 상태를 눈으로 살핀 소장이 품에서 메추리알 크기의 둥그런 돌을 하나 꺼내들었다. 마나 스톤이었다. 진우로서는 소장실에서 설명을 들었지만 실물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엷은 적색의 그것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돌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았다.

“이제부터 포털을 열거야. 진우 군은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게 있으면 지금 얘기하게.”

소장의 말에 진우가 은근히 걱정되던 바를 물었다.

“짐은 이게 전부인 건가요? 말씀하신 대로라면 두 달 가까이 머물 거라고 하셨는데 짐이 너무 적은 거 같아서요”

그러자 우지연 과장이 웃으면서 그 말에 대답했다.

“케이튼 행성에는 전초 기지가 있으니 웬만한 건 다 갖추어져 있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그리고 포털이 한 번 열렸을 때 유지시간이 3분밖에 안 되기 때문에 통과시킬 수 있는 짐의 양에도 제한이 있어. 포탈이 열려 있는 동안은 여러 번 통과해도 상관없지만, 한 번에 통과할 수 있는 부피는 제한이 있어. 가로 세로가 각각 1m에 높이가 2.5m 가량 되는 상자를 생각하면 될 거야. 무게도 300kg을 넘길 수가 없고 말이야.”

진우는 얼핏 그게 많은 건지 적은 건지 판단하기 어려웠다.

“그럼 빨리 움직이기만 하면 포털이 한 번 열렸을 때 여러 사람이 통과할 수 있겠네요?”

“그건 그렇지. 실제로도 단체로 포털을 통과할 때는 그래야 하고. 포털은 한 번 열릴 때마다 소장님이 들고 있는 크기 정도의 마나 스톤을 소모해. 마나 스톤이 귀하고 비싸다는 건 알지? 그러니 가지고 가고 싶은 게 많아도 되도록 꼭 필요한 것만 가지고 들어가고 나머지는 현지에서 조달해야 해.”

우지연의 설명에 진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소장이 문 옆에 있는 단추를 눌러 조그만 홈을 열더니 들고 있던 마나스톤을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잠시 후 웅~하는 진동과 함께 문 안에 검은 색의 포털이 열렸다. 소장이 진우와 최현을 향해 손짓을 했다.

“자, 어서 들어가게.”

최현 헌터가 먼저 포털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던 진우 역시 눈을 질끈 감고 포털로 뛰어들었다.

포털에 들어섰을 때의 감각은 기묘했다. 순식간에 모든 감각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상하 좌우가 사라지는 느낌이었고, 심지어는 몸속과 밖이 바뀌는 것 같은 이상한 느낌도 들었다. 진우가 생전 처음 느끼는 감각에 미처 적응하지 못하고 당황하는 사이에 모든 감각이 순식간에 정상으로 돌아왔다. 진우는 자신이 헌터 양성소에서 보았던 공항 검색대와는 조금 다르게 생긴 또 하나의 문 밖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앞에는 최현 헌터가 예의 그 넉넉한 웃음을 지으며 환영을 하듯 손을 벌리고 있었다.

“행성 케이튼에 온 것을 환영한다. 신세계로의 첫발이로군.”

그의 등 뒤에 있는 창문 너머로 너른 초원이 보였다. 지평선 끝까지 무릎에도 미치지 못할 것 같은 짧은 풀들이 융단처럼 펼쳐진 위로 푸른 하늘이 한가로운 흰 구름 몇 가닥을 품에 안고 있었다. 새로운 행성에서 진우가 처음으로 보는 외계의 풍경이었다.

*  * * * *

진우가 포털을 나서고 나서 얼마 후, 긴 머리를 포니테일 형식으로 묶은 삼십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 하나가 허겁지겁 포털이 설치된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어이, 조박사 오랜만이야.”

최현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방안에 뛰어 든 여자에게 한쪽 손을 치켜들며 반갑게 인사했다. 그런 최현의 모습을 본 여자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뭐야. 최현 아냐. 깜짝 놀랐네. 예정에도 없던 포털이 열렸다는 신호에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그런데 웬일이야? 이번 달에 학생들 오려면 아직 보름도 넘게 남았잖아?"

"아. 사정이 있어서 헌터 학교 신입생 하나 데리고 내가 먼저 좀 왔어.“

“헌터 학교 신입생? 무슨 소리야? 신입생이 왜 여기를 와? 허락은 받고 온 거야?”

“아, 사정이 있어서 그랬어. 자세한 얘기는 나중에 해 줄 테니까 먼저 이것부터 받아. 소장님이 주신 편지야.”

“소장님이?”

최현이 품에서 작은 수정막대 하나를 꺼내어 여자에게 주었다. 크리스털 메모리였다. 미국의 화이트캐슬 사에서 처음 개발할 당시 저장 장치의 혁명이라고 불렸던 결정 모양의 새로운 메모리였다. 여자는 품에서 다목적 디스플레이 장치인 헌터 패드를 꺼내 크리스털 메모리를 꽂더니 안에 담긴 편지를 띄웠다. 잠시 편지를 읽던 여자가 헌터 패드를 끄면서 눈을 치켜뜨고 최현에게 물었다.

“특별 훈련생?”

그러자 최현이 손을 휘휘 저으며 말을 막았다.

“글쎄, 자세한 건 나중에 얘기해 준다니까. 일단 우리 묵을 방이나 좀 정해 줘. 짐부터 풀게. 아참. 진우는 누군지 모르지? 인사해라. 여기 전초 기지장이자 의사인 조세연 박사다.”

멀뚱히 서 있던 진우가 그 얘기를 듣고는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이번에 헌터 학교에 새로 입학하게 된 강진우입니다.”

그러자 조세연 박사가 진우에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했다.

“그래. 오자마자 사람 놀라게 한 건 괘씸하지만 일단 소장님 편지도 받았으니까 환영하는 게 맞겠지? 여기 기지 관리를 맡고 있는 조세연이다. 어차피 온 거니까 있는 동안 잘 지내자.”

160cm 정도의 적당한 키를 가지고 있는 조세연 박사는 날씬해 보이는 체형에도 불구하고 가슴이 유난히 도드라진 글래머 스타일이었다. 진우가 살짝 손을 마주잡자 조박사 쪽에서 오히려 손을 세게 잡으며 흔들었다. 그 바람에 진우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이 녀석, 헌터학교 신입생답지 않게 사내자식이 뭘 부끄러움을 타고 그래. 얼굴은 여자 여럿 울리게끔 생겼고만. 어차피 앞으로 다치게 되면 내 손맛을 볼 일이 많을 테니까 미리 적응해라, 하하.”

“네?”

진우가 얼떨결에 말끝을 올리자 옆에 서 있던 최현이 껄껄 웃으며 대신 대답을 했다.

“여기 조박사는 정식 자격증을 가진 의사이기도 하지만 마나를 발현할 수 있는 마나 헌터이기도 하거든. 헌터로서는 드물게 치료 목적으로 마나를 발현하는 치료형 헌터야.”

“헌터로서는 드물게 정식 의사라는 게 더 맞는 말 아냐? 아무튼 먼저 방을 정해 줄 테니까, 짐 정리 끝나고 나면 현이 너는 나하고 얘기 좀 하자.”

“알았어. 일단 방부터 줘.”

조박사가 정해 준 두 개의 방에 최현과 진우는 각자 짐을 풀었다. 최현은 자기 방에 가방만 던져 둔 채로 바로 조박사에게 끌려 나갔다가 한참이 지난 다음에 돌아왔다. 진우는 혼자라도 짐을 정리하기 위해 포털을 통과하기 전에 소장이 건네 준 묵직한 가방을 풀었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옷가지나 식량 등만 들어 있을 거라고 예상했던 가방 속에서 여러 가지 장비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용도를 알 수 없는 장비들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그것들을 침대 위에 펼쳐 놓고 멍하니 있는데 조박사에게 끌려갔던 최현이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고는 소리를 쳤다.

“그건 이따가 나하고 같이 정리하도록 하고, 먼저 식당에 가서 밥부터 먹자.”

침대 위에 짐을 펼쳐 둔 채로 식당에 내려가자 이미 보았던 조세연 박사를 제외하고도 다섯 명의 사람들이 더 모습을 보였다. 조세연 박사가 사람들을 하나씩 가리키면서 소개를 했다. 남정호 주방장을 포함한 세 사람은 주방을 담당하는 이들이었고, 중년의 아줌마 두 사람은 전초 기지 관리를 맡고 있다고 했다. ‘그럼 가사 도우미 같은 일을 하시는 분인가’라고 가볍게 생각했던 진우는 이어지는 조세연의 설명을 듣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여기 계신 분들 중에 남정호 주방장은 전문 헌터 출신이고, 다른 분들도 모두 헌터 학교 졸업생이다. 모두 네 선배들이니까 깍듯이 예의를 지켜라.”

진우는 기지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헌터 학교 졸업생이라는 말에 깜짝 놀랐다. 차림새를 보고는 영락없이 기지를 관리하기 위해 이런저런 허드렛일을 하는 사람들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그의 생각을 짐작이라도 한 듯 최현이 옆에서 설명을 했다.

“외계 행성 전초기지 가운데 케이튼 행성은 비교적 안전한 곳이지만 그래도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점에서는 지구와는 환경이 많이 달라. 그래서 최소한 헌터 학교 졸업생이 아니면 근무를 할 수 없지. 기지장 같은 경우는 치료가 전공이기는 하지만 역시 중급 헌터이기도 하고. 근무하는 전원이 만약의 사태가 발생할 경우 곧바로 전투 요원의 역할을 해야 하는 곳이 이곳이다. 그러니 조박사가 얘기했듯이 있는 동안 예의를 지키도록 해라.”

“네. 알겠습니다.”

최현의 설명이 끝나자 빙그레 웃는 모습으로 지켜보고 있던 남경호 주방장이 손뼉을 치며 일행에게 소리쳤다.

“자자. 그럼 식사들 합시다. 손님이 온다는 얘기를 듣지 못해서 특별한 걸 준비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새로 온 학생에게는 외계 행성의 첫 식사가 될 것 같아서 오늘은 크롱 고기로 준비했어요. 식으면 맛이 없으니까 어서들 듭시다.”

그러자 최현의 입이 함지박만하게 벌어졌다.

“우와, 크롱 고기요? 오랜 만에 입이 호강하겠네.”

일행이 자리에 앉자 주방장을 비롯해서 요리사들이 식탁 위에 속속 음식을 차려놓았다. 진우는 자기 앞에 놓인 큼지막한 스테이크를 살짝 잘라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독특한 육즙의 풍미가 입안 가득히 퍼지는 게 환상적인 느낌이었다.

“이게 크롱 고기이군요? 말로만 들었지 처음 먹어봐요. 맛이 정말 끝내주네요.”

최현에게 엄지를 치켜들며 찬사를 보내자 그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그거 먹다가 쇠고기 스테이크 먹으면 지우개 씹는 것 같다니까. 이 고기는 양념이 따로 필요 없어. 그냥 굽기만 해도 맛이 죽이거든. 여기 환경에 조금 적응되면 나중에 나랑 같이 크롱 사냥도 갈 테니까 기대하고 있어라.”

진우는 최현의 말에 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기대할 만한 맛이었다.

*  * * * *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진우는 최현과 함께 자기 방에 먼저 들러 그의 지시에 따라 침대 위에 펼쳐 놓았던 장비들을 정리하였다. 장비 중에는 각종 방호구와 신발 등의 특수 장비 외에도 근거리 통신기를 비롯한 간단한 전자 장비도 있었다. 장비 중에는 의외로 여러 종류의 실탄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건 모두 내가 쓰는 총에 사용하는 실탄이다. 네가 쓸 총과 실탄은 전초 기지 내에 있는 것을 빌릴 거야. 헌터 자격증을 따기 전에는 총기를 개인 장비로 가질 수 없게 되어 있거든. 헌터 보조원들도 헌팅을 따라갈 때에는 모두 해당 행성의 전초 기지 내에 비치되어 있는 총기를 임시로 대여 받아 쓰게 되어 있다.”

“그럼 전초 기지가 없는 행성은요?”

“그런 곳에는 근본적으로 헌터 보조원이 갈 수 없게 되어 있어. 전초 기지가 없다는 얘기는 그만큼 위험한 곳이라는 뜻이니까.”

진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최현이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여기는 지구와는 대기 환경이 달라서 원거리 통신이 불가능하다. 통신 장비로도 100Km 이상은 전파가 닿지 않으니까 명심해야 해.”

“네.”

“그럼 오늘은 도착 첫날이니까 간단히 기지 주변을 구경하도록 하고 내일 오전부터 본격적인 훈련에 돌입할 거다. 뭐 그래봤자 당분간은 주로 기본적인 체력 훈련 위주일 테지만 말이야.”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몸이 조금 무겁다고 느끼지 않니?”

“아.. 그렇잖아도 계속 느끼고 있었는데 여기 중력이 지구보다 조금 센 가요?”

“맞아. 지구에 비해 중력이 1.2배 정도 될 거다. 아직 느끼지 못하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기압도 평균적으로 좀 높은 편이지. 대기 중의 산소 농도가 지구보다는 조금 진해서 숨쉬기에는 불편함이 없을 거야. 전초 기지가 설치된 외계 행성은 대개 지구와 비슷한 대기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래도 어떤 곳은 여전히 우주복 수준의 장비를 갖추지 않고서는 활동하기 어려운 곳도 있어.”

“네.”

“그리고 이곳은 하루가 대략 25시간 30분가량 된다. 잠자고 일어나는 생활패턴을 빨리 그 시간에 맞게 조절해야 할 거야. 뭐 어차피 좀 지내다 보면 적응이 되겠지만.”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내고서 최현은 자신이 챙겨야 할 장비를 들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남겨진 장비들을 적당히 정리한 뒤 진우는 산책을 겸해서 기지 주변을 돌아보기로 했다.

행성 케이튼의 전초 기지는 넓은 초원 한가운데에서 들판 전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얕은 구릉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기지 뒤편으로는 구릉을 살짝 감아 돌며 초원을 뱀처럼 구불구불 가로지르는 좁은 강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정면에는 군데군데 비석처럼 서 있는 기둥 모양의 암석들을 뱉어 놓은 채 역시 푸른 평야가 지평선까지 이어졌다. 최현은 지평선 너머에는 넓이를 알 수 없는 우거진 숲이 자리하고 있다고 했다.

지평선 끝까지 평야가 이어지는 풍경은 진우로서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 광활한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저절로 숨이 탁 트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는 기지 부근의 작은 벤치에 앉아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 순간 갑자기 사방이 온통 초록색으로 물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기지는 물론이고 지평선 끝까지 온통 넘실대는 짙은 초록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빛은 지평선 근처로 갈수록 점점 짙어지다가 먼 하늘 끝에 이르러서는 은은한 붉은 기운을 살짝 내비치고 있었다.

‘이게 무슨?’

그러다 퍼뜩 정신이 들었다.

‘아, 이게 케이튼의 마나로구나.’

눈에 보이는 것 그대로라면 케이튼의 모든 것은 지상과 하늘을 가릴 것 없이 짙은 마나로 덮여 있었다. 말 그대로 마나의 축복을 받은 행성이었다. 엄청난 장관이었다. 진우는 기지 관리를 맡고 있다는 아주머니가 찾으러 올 때까지 넋을 잃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외계 행성의 밤에 빛나는 낯선 별들 아래에서 맞은 저녁 식사는 바비큐 파티였다. 기지 앞마당에 직접 불을 피워 기지의 모든 인원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며 고기를 구웠다. 정신적인 긴장 탓인지 조금 일찍 피곤해진 진우가 양해를 구하고 숙소로 들어가 잠을 청한 뒤에도 최현 헌터를 비롯한 기지 식구들이 늦게까지 술잔을 부딪치며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간간히 터지는 왁자한 웃음소리를 듣고 있다가 진우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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