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료들이 정리한 공간에 청년들이 가득 찼다.
지원 분야별로 팀이 구성되었다.
기존 지리산 멤버들이 팀장을 맡았다.
농업 지원 센터에 있을 때와 분위기가 달랐다. 인원이 많아진 것도 있었지만 생기가 넘쳤다.
청년 농부들은 의욕이 넘치고 있었다.
지원한 분야는 달라도 동일하게 받는 교육이 있었다.
샐러드 컨테이너 교육이다.
샐러드 컨테이너의 작동 원리와 재배 방법 그리고 유지 보수까지는 하나의 커리큘럼으로 만들었다.
단시간에 수경 재배를 이해하기에는 샐러드 컨테이너만큼 좋은 것도 없었다.
재배와 이론 교육은 민요한이 담당했다. 보조 강사로 방현식과 김상철을 두었다.
기술 쪽은 이동춘이 교육을 맡았다. 영양액 제조도 커리큘럼에 넣었다.
영양액 제조는, 농업 지원 센터 수경 재배 교육에서는 이뤄지지 않았던 내용이다. 그때는 시설이 마땅치 않았었지만, 이곳에서는 가능했다.
청년 농부들을 첨단 농업의 전문가로 키울 모든 준비가 끝났다.
교육이 시작되자 대학이 다시 살아난 기분이 들었다.
민요한과 이동춘 그리고 서우영은 청년 농부를 대상으로 열정적으로 강의했다.
청년 농부들도 스펀지처럼 그들의 지식을 흡수했다.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교육과 실습이 안정적으로 이뤄지고 있었다.
“오늘 점심은 특별식이야.”
한기탁이 웃으며 말했다.
인원이 많아진 만큼 밥을 먹는 것도 중요한 일이 됐다.
식사는 원래 대학에 있던 구내식당을 이용했다. 요리를 맡은 건 하동부인회관의 할머니들이다.
이사를 하기 전, 할머니들에게 지리산 농부들의 식탁을 책임져 달라고 부탁했다.
할머니들의 요리 솜씨는 매우 만족스러웠다.
점심 저녁으로 정갈한 백반이 나왔다.
지금까지 특별식은 없었다.
궁금한 마음에 그에게 물었다.
“무슨 음식인데요?”
“피자!”
“피자요? 할머니들이 피자를 만들었다고요?”
깜짝 놀라 물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메뉴다. 할머니들이 피자를 만들었다니, 믿기지 않았다.
그때였다. 사무실 안으로 동료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중 목장의 설민주도 있었다.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피자 배달 왔습니다.”
그제야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지리산 목장에서 만든 피자였다.
설민주가 테이블 위에 피자를 놓으며 말했다.
“청년 농부들을 위해서 실력 발휘 좀 했어요.”
“그럼, 피자를 200인분이나 만든 건가요?”
“당연하죠. 인원이 많아서 새벽부터 고생 좀 했지만.”
설민주는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말했다.
“일도 많을 텐데 피자까지 만들다니, 고생하셨어요.”
“매일은 아니더라도 가끔은 만들어 보려고요. 할머니들도 좀 쉬게요.”
목장에서는 청년 농부들을 위해 매일같이 우유와 요거트를 제공하고 있었다.
피자까지 만들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쉽지 않은 일인데, 정성 들여서 해 주는 마음이 참 고마웠다.
“어디 맛 좀 볼까요?”
이동춘이 피자 한 조각을 손에 들고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치즈가 살아 있네요. 맛이 아주 좋아요.”
백민석과 한기탁도 피자를 한 조각씩 들고 맛깔스럽게 먹었다.
나도 동료들과 함께 피자를 먹었다.
이동춘의 말대로 치즈가 고소하고 쫀득했다. 맛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피자를 먹던 한기탁이 농담처럼 말했다.
“사람들이 많아지니까 밥값도 장난이 아니야.”
“그러게 말입니다. 전과는 비교할 수 없어요. 이제 회식은 꿈도 못 꿀 거 같아요.”
이동춘이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한기탁의 농담을 받았다.
난 웃으며 이동춘에게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곧 있으면 일이 넘칠 테니까요.”
“일이 넘친다고요? 벌써 유럽 진출을 계획 중인가요?”
“네, 재배 시설이 완성되기 전까지 다른 일도 해야죠.”
“역시 대표님은 언제나 계획이 있으시네요.”
“참, 아버님. 샐러드 컨테이너 교육은 어떻게 되고 있나요?”
“엔지니어 부분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제가 모두 특급 기술자로 만들고 있으니까요.”
민요한과 서우영도 피자를 먹으며 교육 성과를 이야기했다.
청년 농부들이 모두 잘 따라 주고 있다고들 한다.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점심을 먹고 한기탁과 함께 산책을 나왔다.
운동장에서 사람들이 족구를 하고 있었다.
좋은 에너지가 느껴졌다.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한기탁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정말 조만간 유럽에 진출할 생각이야?”
“네, 식구들이 늘어난 만큼 일도 늘려야 하니까요.”
“유럽 시장 진출이 그리 만만한 일은 아닐 거야.”
“저도 알고 있어요. 그래서 박태호 씨도 먼저 보낸 거고요.”
“박태호는 두바이에서 잘하고 있나?”
한기탁이 궁금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아주 잘하고 있어요. 지금도 시장 분석하느라고 정신이 없을 거예요.”
“혹시, 우리 대표님도 조만간 두바이로 떠나는 건가?”
“네, 저도 조만간 떠날 생각이에요. 두바이에 진행 중인 공사 상황도 살필 겸 해서요. 유럽도 들러 봐야 할 것 같고요.”
“우리 대표님은 동선이 아주 화려해. 남극에서 두바이로, 이젠 유럽이라니.”
“그만큼 세상이 좁아진 거죠.”
“네 말이 맞아, 세상이 좁아졌어. 이제 한국에서만 경쟁하는 시대는 끝났지.”
“제가 마음 놓고 외국을 나갈 수 있는 건, 모두 선배가 있기 때문이에요.”
“나?”
한기탁이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켰다.
표정이 귀엽다.
“네, 선배가 하동을 지켜 줘서 제가 마음 놓고 다닐 수 있는 거죠.”
“당연한 말씀, 내가 지리산 농부들의 안방마님이니까.”
한기탁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그때 운동장에 있던 청년 농부 중 한 명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양초 학교 출신의 성도윤이다.
그가 인사를 하며 말했다.
“피자 잘 먹었습니다.”
“잘 먹었다니 다행이네요. 이곳 생활은 어때요?”
“양초 학교처럼 아주 좋…….”
성도윤은 당황한 얼굴로 입을 막았다. 무의식중에 말이 튀어나온 것 같았다.
난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지금 양초 학교라고 했어요?”
“아, 아닙니다……. 말이 잘못 나왔네요. 전 일이 있어서…….”
성도윤은 줄행랑을 치듯 달아났다.
한기탁과 난 그 모습을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 * *
청년 농부들로 북적이는 평일과 달리 주말은 한산했다.
시내로 나간 사람들도 많았다.
예전 하동 대학이 있던 자리는 한적한 시골이다.
주말만큼은 마음껏 놀고 싶은 것이다.
서류 작업을 위해 사무실에 들렀다.
나만 사무실에 온 것이 아니었다.
백민석도 나와 있었다.
“주말인데 사무실에 왔네, 일하러 온 거야?”
“스터디 모임 때문에 왔어.”
“스터디 모임?”
“주말에 스터디 모임이 있어?”
“열정적인 친구들은 어디든 있으니까.”
기술 파트는 엔지니어와 소프트웨어 개발로 나뉘어 있었다.
백민석은 프로그램 개발과 동시에 교육을 병행했다.
그의 팀원들은 주말에도 애플리케이션 교육을 받기 위해 모였다.
“백 팀장님 주말도 없이 바쁘네.”
“우리 대표님보다 더할까요?”
백민석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가 나가고 난 사무실에서 자료를 취합하고 있었다.
박태호가 두바이에 보낸 자료들이다.
난 유럽 시장 진출을 위해 계획을 세웠다.
컴퓨터와 씨름을 하고 있을 때였다.
백민석이 내 어깨를 두드리고 있었다.
“점심 먹으러 가자.”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벌써 1시가 넘었다고.”
“정말? 시간 가는 줄도 몰랐네.”
“점심 메뉴는 충무김밥이야. 나가서 먹자.”
“충무김밥? 너 요리도 해?”
“우리 팀원이 싸 온 거야.”
백민석이 자랑하듯 말했다.
엔지니어 파트는 전부 남자들이었지만, 소프트웨어 개발 쪽엔 여자 팀원들도 제법 있었다.
그와 함께 운동장으로 나갔다.
가을바람이 부드럽게 이마를 스쳐 지나갔다.
백민석이 도시락 뚜껑을 열었다.
김밥과 오징어무침이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맛있겠는데?”
한입에 쏙 들어가는 크기였다. 오징어무침과 충무김밥을 한입에 넣었다.
“음식점 차려도 되겠다.”
“코딩 실력만큼이나 맛이 좋네.”
그와 김밥을 먹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다.
운동장에 한 무리의 남자들이 등장했다.
모두 축구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붉은색 유니폼과 파란색 유니폼이 눈에 들어왔다.
백민석이 김밥을 먹다 말했다.
“붉은색 유니폼은 모두 재배 팀이야.”
“파란색은 엔지니어 팀이고.”
재배 팀과 엔지니어 팀이 편을 갈라 축구를 하는 모양이다.
“재밌겠는데?”
“그러게.”
재배 팀의 주장은 성도윤이다. 그가 붉은색 유니폼을 입고 몸을 풀고 있었다.
엔지니어 팀의 주장은 강수열이다.
호리호리한 체격의 성도윤과 달리, 강수열은 우람한 체격을 자랑했다.
내가 직접 면접을 보지 않았지만, 강수열이란 이름을 기억하는 이유는 그 역시 양초 학교 출신이기 때문이다.
백민석과 난 김밥을 먹으며 경기를 지켜보았다.
두 팀의 전략은 완전 달랐다.
재배 팀의 성도윤은 지능적인 플레이를 벌였다.
반면 엔지니어 팀의 강수열은 공격적으로 나왔다.
재배 팀은 수비에 집중하다 급습하는 전략을 펼쳤다. 반면 엔지니어 팀은 수비보다 공격이 중심이다.
엔지니어 팀의 수비는 재배 팀의 공격에 맥없이 무너졌다. 수비보다 공격에 주안점을 뒀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재배 팀이 골을 넣으면 엔지니어 팀이 바로 만회한다는 점이다.
팽팽한 접전이 이어졌다.
결과는 성도윤이 이끄는 재배 팀의 승리였다.
한 점 차로 아슬아슬하게 이겼다.
경기가 끝난 뒤에 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민석이 고개를 들고 물었다.
“뭐 하게?”
“궁금한 게 있어서.”
내가 운동장에 나타나자 유니폼을 입은 청년 농부들이 긴장한 눈빛으로 날 쳐다봤다.
난 엔지니어 팀의 주장 강수열에게 다가갔다.
우람한 체격에 각진 얼굴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에게 묻고 싶은 게 있었다.
“수염을 기르고 있네요?”
“아, 네…….”
그가 손으로 수염을 가리며 말했다.
강수열뿐만이 아니었다. 엔지니어 팀 모두가 콧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콧수염을 기르는 이유가 궁금해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콧수염을 기르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강수열이 잠시 주저하더니 입을 열었다.
“두바이에 갈 것에 대비해서입니다.”
“두바이요?”
“콧수염을 기르면 친근감이 느껴질 것 같아서요.”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내가 웃자 유니폼을 입은 청년 농부들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말대로 아랍 남자들은 콧수염을 기른다.
수염을 길렀던 예언자 무함마드를 닮으려는 종교적인 열정이다.
“기왕 기르는 거, 멋지게 길러 보세요.”
* * *
한 달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샐러드 컨테이너 교육도 마무리가 돼 가고 있었다.
이동춘은 팀원들과 함께 본격적으로 샐러드 컨테이너를 만들기 시작했다.
연구소 사람들도 교육이 끝나고 영양액을 생산했다.
백민석과 주말 스터디를 한 팀원들은 샐러드 컨테이너에 들어가는 애플리케이션을 만드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민요한은 청년 농부들과 함께 모종 작업에 들어갔다.
모든 게 순조롭게 돌아가고 있었다.
난 유럽 진출을 위한 작업에 집중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이다.
집에 도착했을 때, 전화벨이 울렸다.
두바이에 간 박태호에게 온 전화다.
“태호 씨, 잘 있었나요?”
“네, 잘 지내고 있습니다. 혹시 지금 통화 가능하신가요?”
“네, 가능합니다.”
“우선 용건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말씀하세요.”
“대표님이 두바이로 오셨으면 좋겠습니다.”
유럽 진출을 위한 전략
박태호의 목소리가 밝았다.
“우선 기쁜 소식부터 전해 드리겠습니다. 두바이에서 샐러드 컨테이너를 팔았습니다.”
그는 유럽 시장 조사를 하며 두바이 귀족들에게 샐러드 컨테이너를 소개했다.
샐러드 컨테이너에 관심을 보인 두바이 귀족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의 기술력을 의심하지 않았다.
두바이에 지리산 농부들이 대형 수경 재배 시설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
박태호의 용건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유럽 시장 조사를 하다가 알게 된 사실이 있습니다. 곧 암스테르담에서 농업 박람회가 열립니다. 그 박람회에 지리산 농부들도 참가하면 어떨까요?”
그가 나에게 전화한 중요한 이유였다.
“저도 암스테르담 농업 박람회에 참여할 생각이었습니다.”
“대표님도 저와 같은 생각이었군요.”
박태호가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암스테르담 농업 박람회는 유럽 최대 규모의 농업 박람회다.
캘리포니아 농업 박람회와 양대 산맥을 이루고 있는 국제 박람회이기도 했다.
유럽 시장 진출을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다.
“박람회 신청과 준비 작업은 하동에서 진행하겠습니다. 준비가 끝나는 대로 두바이로 가겠습니다.”
“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 *
다음 날 팀장급 회의에서 암스테르담 박람회 이야기를 꺼냈다.
한기탁이 말문을 열었다.
“암스테르담이면 네덜란드 수도네.”
“네덜란드면, 풍차의 나라 아닙니까?”
이동춘이 나를 보고 물었다.
“네, 맞습니다. 풍차의 나라죠.”
네덜란드는 토지가 해수면보다 낮은 곳이 많다. 조금만 부주의하면 땅이 물에 잠기는 열악한 환경이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풍차를 이용해 배수 문제를 해결했다.
과거엔 무려 9,000개의 풍차가 돌아가기도 했다.
그들은 열악한 환경에서도 농업을 발전시켰다.
유럽의 많은 나라 중에 암스테르담이 국제 농업 박람회장이 된 까닭이기도 하다.
“국제 농업 박람회에 참여한다니 감회가 새롭네.”
백민석이 나를 보고 말했다.
그는 캘리포니아 국제 농업 박람회에 갔던 일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나 역시 감회가 새로웠다.
그때만 해도 이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혹시 신청했다가 거절당할 수도 있나요?”
이동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난 그의 눈을 보며 답했다.
“거절당할 수도 있습니다. 전 세계의 우수한 농업 회사들이 모이는 박람회니까요.”
이동춘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지리산 농부들은 국제 특허까지 가졌으니까요.”
“대표님은 농담도 잘하시네요.”
이동춘이 웃으며 말했다.
“이번 출장은 민석이 너도 같이 가야 해.”
난 백민석을 보며 말했다.
그가 내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엔 그가 꼭 필요했다. 우리가 제작한 샐러드 컨테이너는 애플리케이션으로 관리하는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이번 박람회에서는 그 부분을 특히 부각하고 싶었다.
“암스테르담 농업 박람회 신청은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참고로 말씀드리면 신청이 확정되면 그쪽으로 샐러드 컨테이너를 보내야 합니다. 준비 철저히 해 주세요.”
“그런 일이라면 문제없습니다.”
이동춘이 기운찬 목소리로 말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민요한이 물었다.
“모종 작업은 현지에서 하나요?”
“네, 모종 작업은 현지에서 합니다.”
“남극에서 했던 것과 같은 방식이네요.”
방식은 동일하지만, 남극처럼 혹한의 지역이 아니라서 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작업할 수 있을 것이다.
“혹시, 저는 안 가요?”
민요한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눈에서 암스테르담에 가고 싶은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요한 씨와 함께 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아요. 하지만 박람회보다 우리 재배 시설이 더 중요하다는 것도 잘 아실 거예요.”
민요한이 새로 짓고 있는 재배 시설의 자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단순한 자문이 아니다. 매일 같이 시설을 체크해야 했다.
펀딩을 통해 만들고 있는 대규모 재배 시설이니만큼, 철저한 관리 감독이 필요했다.
두바이에서는 이장우가 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재배 시설 공사가 끝나면 요한 씨에게 박람회 일을 맡길 생각이에요. 암스테르담부터 캘리포니아까지요.”
“맞습니다. 대표님 말씀대로 우리 재배 시설이 가장 중요하죠. 대신 약속은 꼭 지켜 주세요.”
민요한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리고 경영지원 팀장님에게도 부탁드리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난 한기탁을 바라보며 말했다.
“부탁이라니?”
“청년 농부들에게 영어 교육이 필요할 거 같아요.”
“하긴, 영어가 필수겠네. 우리도 다 같이 배워야겠어.”
한기탁이 동료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모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한다는 눈빛을 보냈다.
이동춘만은 예외였다. 그는 불안해 보였다.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어디 안 좋으세요?”
“제가 영어 울렁증이 있어서요. 영어 이야기만 나오면 체한 것처럼 배가 아파서…….”
이동춘의 말에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아버님은 기술만 신경 써 주세요. 힘들면 영어는 안 배우셔도 돼요.”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야 체증이 좀 내려가네요.”
* * *
암스테르담 농업 박람회에 가기 위한 준비 작업이 시작됐다.
예상대로 신청은 문제가 없었다.
국제 특허증이 유용하게 쓰였다.
신청이 확정되고 난 뒤에 바로 샐러드 컨테이너도 암스테르담으로 보냈다.
박람회에 참석하기 전, 먼저 두바이에 들러야 했다.
재배 시설 공사가 시작된 지 벌써 3달이 지나고 있는 시점이다.
이장우에게 진행 상황을 보고받고는 있었지만, 직접 확인해 봐야 했다.
난 한기탁에게 일정을 공유했다.
“다음 주 중으로 두바이로 떠날 계획이에요.”
“비행기 표 끊어 놓을게.”
“그곳에서 삼일 정도 있다가 다시 암스테르담으로 이동해요. 박태호도 함께요.”
“알겠습니다. 문제없이 준비해 놓겠습니다.”
한기탁이 웃는 얼굴로 말했다.
“참, 오늘 황유신 선생님이 오시는 날이지?”
“네. 오늘 곶감 수업이 있어요.”
곶감 수업은 정길산의 과수원에서 진행됐다.
정길산은 정가희의 아버지로, 하동에서 가장 큰 과수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내가 처음 곶감 농사를 지을 때 도움을 줬던 분이기도 하다.
그는 이번에도 흔쾌히 응했다.
청년 농부들이 감나무 아래서 황유신 선생님에게 곶감 수업을 듣고 있었다.
유황 훈증 없이 곶감을 만드는 법이다.
나도 청년 농부들 틈에 끼어 수업을 들었다.
수업을 듣고 있으니, 곶감을 팔아 빚을 갚았던 일이 떠올랐다.
불행했던 과거를 지우고 가족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시작한 농사다.
작은 성공이 커다란 성공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지금은 수많은 청년 농부들을 모았고, 그들도 나처럼 곶감 수업을 받고 있다.
잠시 쉬는 시간에 난 성도윤을 찾았다.
두바이로 떠나기 전 그에게 할 말이 있었다.
그는 감나무 아래서 엔지니어 팀의 강수열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두 사람은 양초 학교에 있을 때도 친한 사이 같았다.
“콧수염이 제법 자랐네요.”
난 강수열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 그는 부끄러운 듯 손으로 수염을 가렸다.
두바이에 갈 때를 대비해 기르는 콧수염이라니, 발상이 귀엽다고 여겼다.
“도윤 씨랑 잠깐 이야기 좀 나누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강수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성도윤에게 수화하듯 손으로 사인을 보내곤 무리 속으로 사라졌다.
난 성도윤 옆자리에 앉아 물었다.
“방금 뭐라고 한 거예요? 둘만 아는 신호인 거 같던데.”
“행운을 빈다는 뜻이에요. 우리끼리 쓰는 신호죠.”
성도윤이 가느다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그의 길고 가느다란 눈을 볼 때마다 부처의 얼굴이 생각나곤 했다.
“크라우드 펀딩을 농사에 접목하는 아이디어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그가 면접 때 말한 아이디어였다. 농부가 농사 계획을 사이트에 올리면 소비자가 돈을 미리 지급하는 방식이다.
“그때 대표님이 말씀하신 부분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성도윤은 기운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난 그에게 자연재해 등으로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상황에 관해서 물었었다.
“그 부분을 해결할 방법이 있습니다.”
“해결할 방법이요?”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난 그에게 해결 방법에 대해 말했다.
보험을 통해 해결하는 방법이다.
보험 회사와 연결해 손해 배상을 하는 것이다.
그는 내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방법이네요. 그런데 보험 회사가 그런 상품을 만들까요?”
“그 부분은 제가 해결할 생각입니다.”
“대표님이 직접요?”
“좋은 아이디어를 살리고 싶으니까요.”
성도윤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의 아이디어를 살리고 싶은 이유가 있었다.
농사 펀딩이 대중화되면 판로 때문에 힘들어하는 농부들을 도울 수 있었다.
영농자금이 부족한 농부들에게도 도움이 되는 일이기도 했다.
지리산 농부들 하나만 잘 된다고 한국 농업이 살아나진 않는다.
농부들이 더불어 잘 살아야 한다. 그것이 농업이 강해지는 길이다.
난 성도윤의 아이디어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난 조만간 출장을 떠납니다. 그사이에 농사 펀딩 아이디어를 구체적으로 만들어 보세요. 하동을 중심으로 해 보는 걸 추천합니다.”
시작부터 전국을 대상으로 하는 건 위험 부담이 컸다.
무슨 일이든 작은 것부터 도전해 보는 게 중요했다.
게다가 그는 아직 경험이 없는 초보다.
작은 성공을 기반으로 전국으로 뻗어 나가길 바랐다.
“‘농사로 세상을 풍요롭게 한다’, 도윤 씨가 했던 그 말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저도 대표님처럼 꿈을 이루겠습니다.”
성도윤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곶감 수업을 마치고, 황유신 선생님을 뵈었다.
“선생님에게 곶감 수업을 다시 들으니 옛날 생각이 났습니다.”
“나도 옛날 생각이 났다. 김덕명이란 놈이 날 찾아서 곶감 만드는 법을 알려 달라고 했던 때가.”
황유신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제가 댁까지 모셔 드리겠습니다.”
난 황유신과 함께 상주로 향했다.
가만히 바깥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그가 조용히 물었다.
“정가희는 잘 지내냐?”
정가희와 함께 황유신에게 곶감을 배웠다.
황유신은 정가희를 유독 귀여워했다.
“양초 학교를 잘 꾸려 가고 있습니다. 오늘 선생님께서 가르친 청년 농부 중에 양초 학교 출신도 몇 있고요.”
“눈빛이 범상치 않은 아이도 있었다. 어쩌면 그 아이가 양초 학교 출신일 수도 있겠구나.”
“정가희가 아이들을 멋지게 성장시켰어요. 역시, 농사보다 교육에 더 재능이 있는 것 같아요.”
“사람마다 재능이 다른 법이니까. 김덕명은 부자 농부를 만드는 데 탁월한 재능을 가졌지.”
황유신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 *
모든 준비를 마치고 두바이로 떠나는 날이다.
난 백민석과 함께 인천 공항으로 향했다.
서울역에서 공항으로 가는 버스를 갈아탔다.
버스가 움직이는 순간 백민석이 말했다.
“보통 때와 달라서 그런지 좀 떨린다.”
그의 말대로 특별한 출장이기는 했다.
두바이에 들렀다 암스테르담으로 이동하는 일정이다.
암스테르담에서는 농업 박람회 준비도 해야 했다.
창밖을 바라보던 백민석이 고개를 돌려 물었다.
“이장우에게는 연락했어? 우리 간다고?”
“당연히 했지. 아마 공항에 마중 나와 있을 거야.”
이장우에게만 연락한 것은 아니었다.
중원건설의 차종문 대표와 모하마드 살라에게도 소식을 전했다.
모하마드는 공항에 그때처럼 차를 보내겠다고 말했다.
난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이장우에게 들었는데, 롤스로이스를 탔다고? 그게 사실이야?”
“사실이야, 너도 타게 될 거야.”
“롤스로이스를 탄다고? 정말?”
백민석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생각도 못 한 일 같았다.
“두바이 왕자가 차를 보내기로 했어.”
“역시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롤스로이스도 타 보고.”
백민석이 아이처럼 미소 지으며 말했다.
“롤스로이스에 타는 것보다 더 멋진 일도 생길 거야!”
“멋진 일?”
우린 두바이로 떠나는 비행기에 올랐다.
개인 샐러드 농장
두바이 국제공항에서 반가운 얼굴과 마주했다.
이장우가 두 팔을 벌려 반겼다.
“두바이 생활은 어때?”
“매일 먼지 날리는 공사 현장만 보고 있지. 그나마 박태호라도 있어서 좀 낫지만.”
박태호는 백민석과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가 나에게 고개를 돌렸다.
“대표님,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고생은 태호 씨가 하고 있었죠.”
그때 이장우가 내 등을 떠밀며 말했다.
“가면서 이야기하자, 밖에 아자르가 기다리고 있어.”
“진짜 롤스로이스를 타는 거야?”
백민석이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두바이에서 롤스로이스는 기본이지. 앞으로 종종 타게 될 거야.”
이장우가 장난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때 박태호가 눈을 깜빡거리며 말했다.
“실은 저도 오늘 처음 타 보는데…….”
이장우는 박태호의 입을 막았다.
모하마드의 배려가 아니면 탈 수 없는 자동차다.
왕족의 번호판이 달린 롤스로이스가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아자르가 차 문을 열고 나왔다. 그는 하얀 천이 무릎까지 내려오는 아랍 전통 의상을 입고 있었다.
“두바이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아자르가 하얀 치아를 드러내며 말했다.
처음 두바이에 왔을 때도 그가 마중 나왔다. 아자르는 모하마드가 신임하는 보좌진 중 하나였다.
백민석은 기대에 찬 얼굴로 롤스로이스에 탔다. 마치 놀이 기구를 처음 타는 아이처럼 보였다.
몇 달 만에 다시 찾은 두바이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사막 위에 세워진 미래 도시 같았다.
이장우가 창밖을 보며 말했다.
“오늘도 비 한 방울 안 내릴 것 같네.”
“혹시, 비를 기다리는 거야?”
“비가 온 날은 후덥지근한 기운이 좀 가시니까. 나도 모르게 비를 기다리게 되더라고. 이제 두바이 사람들이 왜 행운의 비라고 말하는지 알 거 같아.”
“두바이 사람이 다 됐네.”
그때 박태호가 끼어들었다.
“저도 이 팀장님의 말에 공감해요. 기우제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니까요. 아마 우리 시설이 완성되면 두바이 사람들이 반가워할 거예요. 매일 비가 내리는 장면을 볼 수 있을 테니까요.”
우리 재배 시설엔 비가 내리는 형상의 대규모 조형물이 들어선다.
수경 재배 시설을 알리는 동시에 두바이 사람들이 환호하는 비의 형상을 건물 외관에 배치하는 일이다.
지금 생각해도 훌륭한 아이디어였다.
재배 시설은 두바이의 상징적인 건물이 될 것이다.
* * *
호텔에 도착해서 모하마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잘 도착했나요?”
“덕분에 편안하게 왔습니다.”
“내일 만나는 게 어떨까요? 여독도 풀어야 하니까요.”
왕족다운 말투다. 사람을 배려하는 일이 몸에 밴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옆에 있던 백민석이 물었다.
“두바이 왕자는 내일 보는 건가?”
“맞아, 내일 만나기로 했어.”
“오늘은 좀 쉬겠네?”
“오늘 할 일이 아주 많은데.”
난 그를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우선 현장부터 가 봐야 했다. 이장우를 통해 보고받고 있었지만,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장우야, 현장에 같이 나가자.”
“역시 우리 대표님은 하루도 쉬는 법이 없네.”
이장우는 나갈 준비를 하며 백민석에게 물었다.
“너, 혹시 선글라스 없는 거야?”
“두바이에서 하나 사려고 했지.”
백민석은 웃으며 답했다.
“여기서는 선글라스는 완전 필수품이야. 우선 내 거를 써.”
이장우는 가방에서 안경집을 꺼냈다.
그가 여분으로 가지고 다니는 선글라스였다.
우리는 곧장 현장으로 달려갔다.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차종문 대표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그의 짧은 머리가 눈에 띄었다.
“차종문 대표님, 저 왔습니다.”
“김 대표님 오셨군요.”
“일은 잘 진행되고 있나요?”
“보다시피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는 손으로 현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고개를 돌려 현장을 바라보니, 거대한 재배 시설의 뼈대가 세워지고 있었다.
“인력이 많네요.”
“두바이엔 건설 노동자들이 많죠. 물론 중원 건설에서도 파견을 나왔습니다. 모두 일류 기술자들입니다.”
그의 말대로 곳곳에 한국 기술자들이 보였다.
그들은 두바이 현지 노동자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다.
“이장우 씨 덕에 공사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차종문 대표는 내 뒤에 있던 이장우를 쳐다보며 말했다.
“차 대표님, 또 비행기 태우신다.”
“제가 뭐 틀린 말 했나요?”
두 남자는 사이좋게 웃었다.
두바이에 있는 동안 제법 가까워진 것 같았다.
난 스캔하듯 현장을 구석구석 둘러보았다.
차종문 대표는 나를 안내하며 진행 상황을 보고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현장을 보고 있을 때다.
종소리가 울렸다.
“이게 무슨 소린가요?”
“점심시간입니다.”
차종문 대표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김 대표님도 함께 드시죠.”
난 동료들과 함께 현장에 세워진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현장 사람들이 간이 식당으로 사용하는 곳이다.
모든 이들에게 도시락이 주어졌다.
이장우가 도시락 뚜껑을 열며 말했다.
“오늘은 닭고기 카레 도시락이네. 먹어 봐, 제법 먹을 만해.”
한국에서 먹는 닭고기 카레보다 맛이 좋았다.
백민석은 도시락을 먹다 말했다.
“정말 인도 카레 뺨치네.”
“인도 요리사가 직접 만든 거니까.”
이장우가 닭고기 카레를 먹다 말했다.
“두바이는 세계 각지의 노동자들이 총집합한 곳이야. 음식들도 글로벌하다고. 지금 먹는 도시락은 인도 요리 집에서 포장해 온 거야. 닭고기 카레가 최고로 인기가 좋아.”
난 고개를 돌려 천막 안을 둘러보았다.
인도 사람들부터 다양한 지역의 사람들이 카레 도시락을 먹고 있었다.
두바이의 그림자들이다.
* * *
다음 목적지는 박태호가 안내했다.
샐러드 컨테이너를 개인용으로 구입한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박태호는 두바이에서 시장조사와 함께 영업도 하고 있었다.
두바이 귀족들이 관심을 많이 보였다는데, 그중 한 인물이 구입한 것이다.
박태호가 그에 대한 정보를 공유했다.
“두바이 귀족이고, 이름은 압둘라 사마입니다. 현재 두바이 국영 석유 회사의 이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두바이 귀족은 왕족 다음으로 힘이 있는 사람들이다.
대부분 국영 회사에서 일한다. 석유 회사면 귀족 중에서도 권세가 높은 축이다.
“귀족 중에 샐러드 컨테이너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난 박태호의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었다.
한국에서는 생각하지 못한 일이기 때문이다.
농부들을 위한 재배 시설로 만들었지, 개인용 샐러드 컨테이너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압둘라 사마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사막 한가운데 저택이 나타났다.
왕궁만큼은 아니었지만, 집을 지키는 경호원들도 꽤 많았다.
단단한 철문이 열리고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란 수영장 시설이 눈에 띄었다. 마치 오아시스를 보는 것 같았다.
오아시스에서만 자생한다는 대추야자 나무도 보였다.
압둘라 사마는 아랍 전통 의상을 입고 우릴 반겼다.
“반갑습니다. 압둘라 사마라고 합니다.”
긴 턱수염에 맹꽁이를 닮은 남자다.
“김덕명입니다.”
“이스마일 왕에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함께 매사냥도 하셨다고요~”
압둘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난번, 두바이 왕 이스마일 살라와 매사냥을 하던 때가 떠올랐다.
매사냥이 목적이 아니라 날 평가하는 자리였다.
“샐러드 컨테이너를 사셨다고 들었습니다.”
“네, 아주 만족하고 있습니다.”
압둘라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제가 샐러드 컨테이너를 체크해 봐도 될까요?”
“물론이죠.”
샐러드 컨테이너가 대추야자 나무가 우거진 숲 안에 있었다.
보물이라도 모셔 둔 것 같았다.
중원 건설이 건설 자재를 실어 보낼 때, 지리산 농부들의 샐러드 컨테이너도 몇 개 실어 보냈었다.
유럽 진출을 대비해 샘플로 보낸 물건이었다.
그중 하나가 두바이 귀족의 정원 안에 놓여 있었다.
버터헤드, 카이피라가 무럭무럭 자라는 중이다.
특이하게도, 넓게 간격을 벌려 샐러드를 재배하고 있었다.
난 압둘라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양이 적네요?”
“아니요, 절대 적지 않습니다. 지금 재배하는 것도 양이 많습니다.”
압둘라는 손사래 치며 말했다.
“가족들과 매일매일 풍족하게 먹고도 남을 양입니다. 이 정도 양이면 충분히 만족합니다.”
농부를 위해 기획한 설비였다.
개인적인 용도로는 생각해 본 적 없었던 물건이, 개인 가족을 위해 쓰이고 있다는 상황이 신기했다.
“관리는 애플리케이션으로 하고 계시죠?”
난 그가 들고 있는 스마트폰을 보며 물었다.
그는 난처한 얼굴로 스마트폰을 뒤로 감췄다.
“스마트폰으로 관리가 된다는 말을 박태호 씨에게 듣긴 했습니다만.”
“아, 무슨 문제가 있나요? 혹시 사용하지 않는다는 뜻인가요?”
“네, 샐러드 컨테이너에 딸린 계기판만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압둘라는 잠시 주저하더니 입을 열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아직 스마트폰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법했다.
아직 2009년 후반이기 때문이다.
스마트폰을 사용한다고 해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이들도 많았다.
“제가 한번 봐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가 나에게 스마트폰을 건넸다.
내 옆에는 지리산 농부들의 모든 프로그램을 맡았던 백민석이 있었다.
그는 간단하게 스마트폰을 샐러드 컨테이너와 연동시켰다.
화면에 샐러드 컨테이너의 관리 화면이 나왔다.
[빛 8,500lux]
[온도 17도]
[상대습도 범위 70%]
[이산화탄소 농도 380ppm]
[물의 흐름 정상]
[영양액 정상]
압둘라 사마는 놀란 얼굴로 화면을 바라보았다.
“이런 게 되나요?”
“더 많은 기능도 있습니다. 샐러드 컨테이너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경보를 보내기도 합니다. 카메라를 통해 내부 모습을 관찰할 수도 있죠.”
“이런 첨단 기능이 있는데 사용도 못 하고 있었네요.”
“이제, 훨씬 편리하게 관리하실 수 있을 겁니다.”
샐러드 컨테이너 점검을 마치고, 응접실로 이동했다.
검은 차도르를 두른 여자가 우리에게 민트 차를 건넸다.
“태호 씨에게 들었습니다. 저를 만나고 싶다고 하셨다고요?”
“네, 김덕명 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습니다.”
함께 온 동료들도 그의 입을 주목하고 있었다.
“저 말고도 샐러드 컨테이너를 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문제요?”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샐러드 컨테이너의 크기가 좀 큽니다. 크기가 작은 것도 있나요? 박태호 씨 말로는 저 사이즈밖에 없다고 하던데.”
압둘라 사마는 박태호를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박태호 씨의 말이 맞습니다. 현재 지리산 농부들이 제작하는 샐러드 컨테이너는 40피트뿐입니다.”
“작게는 불가능한 건가요?”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말씀을 들어보니 작은 것도 만들어 보고 싶네요.”
“그거 잘됐네요.”
압둘라 사마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 * *
압둘라 사마를 통해 샐러드 컨테이너의 새로운 면을 발견했다.
개인적인 목적으로 샐러드 컨테이너를 사용하려는 사람이 있다는 거다.
두바이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통할 것 같았다.
암스테르담 박람회에서도 개인 샐러드 컨테이너를 전시해 보고 싶어졌다.
그날 저녁, 호텔로 돌아와 한국에 전화를 걸었다.
이동춘이 전화를 받았다.
“대표님, 무슨 일인가요?”
“지리산 농부들이 만드는 샐러드 컨테이너는 모두 40피트 규격이죠?”
“네, 40피트를 기준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청년 농부를 대상으로 교육할 때 작은 컨테이너를 봤습니다. 그건 어떤 물건이죠?”
“실습을 좀 원활하게 하기 위해, 작은 컨테이너를 사용해봤습니다.”
“그건 몇 피트 규격인가요?”
“10피트 규격의 컨테이너를 사용했습니다. 가장 작은 규격이죠.”
“그걸 암스테르담으로 보내 주실 수 있나요? 최대한 빨리요.”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 작은 걸 어디다 쓰시게요?”
“유럽 시장을 공략할 물건이 될 겁니다.”
“유럽 농부들은 작은 걸 좋아하나 보네요.”
이동춘이 특유의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분명 유럽 시장에서 통할 물건이 될 것이다.
열기구에서 내려다본 세상
다음 날, 두바이 왕궁으로 향했다.
이장우와 백민석은 현장으로 나간 뒤였다.
난 롤스로이스에 타고 왕궁 안으로 들어갔다.
모하마드 살라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여독이 좀 풀렸나요?”
“네, 덕분에 푹 쉬었습니다.”
“두바이에 도착하자마자 일부터 한 건 아니고요?”
모하마드는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물었다. 두바이에서는 왕족의 눈을 피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실은 현장에 좀 다녀왔습니다.”
“현장 상황은 저도 매일 보고받고 있습니다. 한국 기술진들은 무척 꼼꼼하더군요.”
모하마드는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오늘 그를 만난 건 재배 시설에 대한 보고 때문이다.
그에게 매일같이 보고서를 전달하고 있었다.
오늘은 얼굴을 맞대고 하는 중간보고쯤이다.
난 재배 시설의 진행 상황과 앞으로 일정에 관해서 알렸다.
모하마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보고가 끝난 뒤 그에게 말했다.
“한국에서 가져온 물건이 있습니다.”
난 가방에서 준비한 물건을 꺼냈다. 한국에서 특별히 준비한 물건이다.
올해 채취한 토종꿀이다. 벌꿀은 육각형 모양의 유리병에 담겨 있었다.
“이건 꿀 아닌가요?”
모하마드가 육각형 모양의 유리병을 들고 물었다.
“한국 토종꿀입니다, 제가 직접 딴 꿀이죠.”
“맛을 한 번 봐도 될까요?”
“물론이요.”
모하마드는 나무 수저로 꿀을 떠서 한입에 베어 물었다.
“시드르 꿀만큼이나 향이 좋네요.”
시드르 꿀은 시드르 나무의 꽃에서 딴 벌꿀이다.
시드르 나무는 아랍 지역에서 자생하는 나무로 꽃에서 달콤한 향이 난다.
두바이에 처음 방문했던 때 시드르 꿀을 먹어 본 적이 있었다.
유난히 점성이 강하고 꽃향기가 진했다.
한국 토종꿀도 시드르 꿀만큼이나 점성이 강하다. 다양한 꽃향기가 느껴지는 게 가장 큰 차이다.
모하마드도 꿀맛을 보고 향이 다른 것을 구분했다.
그가 꿀을 한 수저 더 먹으며 말했다.
“어머니도 꿀을 좋아하십니다. 한국 토종꿀도 좋아할 것 같네요.”
예로부터 아랍 사람들은 꿀을 귀하게 여겼다.
이슬람 성전인 코란에도 벌꿀에 관한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난 그를 위해 다섯 개의 토종꿀을 준비했다.
“전부 주시는 건가요?”
“감사의 표시입니다.”
모하마드는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난 그에게 넌지시 말했다.
“두바이 사람들에게 한국 토종꿀을 소개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한국 토종꿀은 시드르 꿀과도 견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분명 두바이 사람들도 좋아할 겁니다. 혹시 제가 도울 일이 있을까요?”
“선물이지 뇌물은 아닙니다.”
“그럼 그때 주신 곶감은 뇌물이었나요?”
모하마드의 말에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는 듯이 말했다.
“두바이 사람들에게 곶감도 소개하면 어떨까요? 전에 덕명 씨가 준 곶감을 먹어 보고 감탄했습니다. 아버지도 가끔 물으실 정도였죠. 대추야자보다 맛이 훌륭하다고 하셨습니다.”
“말씀대로 두바이 사람들에게 곶감과 토종꿀을 모두 소개해 보겠습니다. 곧 있으면 곶감을 만들 때가 됩니다. 다음에 올 땐 곶감과 꿀을 한 보따리 들고 오겠습니다.”
“기대되네요.”
그에게 곶감을 선물했을 때도 수출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두바이 왕족이 곶감을 먹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좋은 마케팅이 될 것이다.
“귀한 선물도 받았으니 저도 선물을 드려야겠네요.”
“선물이요?”
모하마드는 외출 준비를 했다.
그는 아랍 전통 복장에서 캐주얼한 차림으로 바꿔 입었다.
“어딜 가는 거죠?”
“기대하십시오. 두바이를 한눈에 보여 드리죠.”
“두바이를 한 눈에요?”
모하마드는 아자르를 불러 차를 준비시켰다.
왕궁 앞에서 벤츠 사륜구동 자동차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모하마드가 직접 차를 몰았다.
그가 어디로 데려갈지 궁금했다.
사륜구동 자동차가 사막 위를 질주했다.
두바이 왕 이스마일을 만나러 가던 때가 생각났다.
사막 한가운데 매사냥을 하는 곳이 있었다.
난 모하마드에게 물었다.
“혹시 또 매사냥을 가는 건 아니겠죠?”
“전 아버지처럼 매사냥을 즐기지 않습니다.”
모하마드가 엷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뒤에 몇 대의 차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왕자를 보호하는 군인들로 보였다.
우린 사막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다.
드넓은 사막이 바다처럼 펼쳐져 있었다.
사막 한가운데 묘한 물건이 보였다.
붉은색과 초록색으로 장식한 거대한 열기구다.
“열기구 아닌가요?”
“이걸 타고 하늘 높이 오를 겁니다.”
모하마드가 열기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때 푸른 눈의 백인 남자가 열기구에서 내렸다.
“언제든지 이륙할 수 있습니다. 말씀만 하십시오.”
우리가 오기 전부터 준비하고 있던 모양이다.
모하마드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게 제가 드리는 선물입니다.”
사막 한가운데서 타는 열기구다. 재미있을 거 같았다.
“열기구는 태양이 낮게 떠 있을 때 타야 합니다. 지금이 바로 그 시간이죠.”
모하마드는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처음부터 나와 함께 이곳에 올 것을 계획한 것 같았다.
난 그와 함께 열기구에 올랐다.
열기구 조종사가 레버를 당기자 초대형 풍선 아래 달린 버너에서 불이 뿜어져 나왔다.
공기를 가열하자 기구가 하늘 위로 올랐다.
열기구 조종사는 하늘과 계기판을 보며 비행에 집중하고 있었다.
“비행기를 탈 때와는 다른 기분이죠?”
모하마드가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의 말대로 비행기를 탈 때와는 전혀 다른 기분이 들었다.
풍선에 매달려 날아가는 기분이다.
하늘 끝에 닿을 것만 같았다.
1,200미터 상공에 이르자, 시원한 바람에 산뜻한 청량감이 느껴졌다.
끝도 없는 사막 가운데, 우주 도시 같은 모습의 두바이도 귀엽게 보였다.
“저 아래 뛰어다니는 놈들이 보이나요?”
모하마드는 사막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에서 진풍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수십 마리의 동물이 떼를 지어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모하마드는 달리는 동물을 보며 말했다.
“오릭스라고 불리는 놈들이죠.”
“뿔이 엄청나게 기네요.”
“오릭스의 특징이죠. ”
모하마드가 웃으며 말했다.
오릭스는 아프리카와 중동 일대에 서식하는 영양이다.
하얀 몸뚱이에 길게 뻗은 뿔이 신화에 등장하는 유니콘처럼 보이기도 했다.
자연의 경외감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안타깝게도 오릭스는 멸종 위기 동물입니다.”
모하마드가 오릭스 무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저렇게 많은데 위기 종인가요?”
“밀렵과 서식지 파괴 때문이죠. 최근엔 기상 이변 때문에 개체 수가 더 줄고 있습니다.”
수십 마리의 오릭스가 사막을 달리는 모습을 바라보며, 척박한 사막에서 푸른 잎이 돋아나는 장면을 상상했다.
첨단 농업이 멸종 위기의 동물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열기구가 방향을 돌리고 있었다.
이제 착륙 장소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하늘을 바라보던 모하마드가 나에게 물었다.
“덕명 씨는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나요?”
“암스테르담에 일이 있습니다.”
“암스테르담이요?”
모하마드는 호기심에 찬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암스테르담에서 국제 농업 박람회가 있습니다. 지리산 농부들도 이번 박람회에 참가하게 됐습니다.”
“두바이뿐만이 아니라 유럽에도 수경 재배 시설을 지을 생각이군요?”
“기후 변화 때문에 곤란한 건 오릭스만이 아니니까요.”
“그 말엔 반박할 수가 없네요.”
모하마드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때 하늘 위에 떠 있던 열기구가 땅으로 내려왔다.
* * *
며칠 더 두바이에서 머물렀다.
차종문 대표와 재배 시설에 관한 일정을 공유해야 했다.
외관이 마무리되면, 재배 시설은 지리산 농부들도 함께 작업해야 했기 때문이다.
차종문 대표는 열정적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 재배 시설을 짓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배 시설에 관련한 모든 조율을 마쳤다.
이제 내일이면 암스테르담으로 떠난다.
일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왔을 때다.
이장우가 나에게 말했다.
“내일이면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데 그냥 갈 수는 없지.”
“그냥 안 가면?”
“소주 한잔해야지.”
소주라는 말에 박태호와 백민석이 눈을 번쩍 떴다.
모두 두바이에 온 이후에 술은 입에 대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두바이에서도 소주를 파나?”
“가 보면 알아.”
이장우가 기세등등한 얼굴로 말했다.
우린 두바이 다운타운으로 향했다.
두바이 다운타운은 세계 음식점의 집합소이기도 했다.
그곳에 한국 음식점도 있었다.
‘한국 가든.’
백민석이 간판을 보며 말했다.
“불고기 전문점이네.”
불고기란 단어가 한글, 영어, 아랍어로 적혀 있었다.
“뭘 그렇게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어, 들어가자.”
이장우가 백민석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달콤한 불고기 냄새가 콧속을 진동했다.
한국이 그리워지는 냄새였다.
이장우는 메뉴판도 보지 않고 주문했다.
“불고기 4인분이랑 소주 한 병 주세요.”
주문이 끝나기도 무섭게 반찬과 고기가 나왔다.
두바이에서 불고기를 먹게 될 줄은 몰랐다.
불판에 고기가 올라가자 입에서 침이 돌았다.
백민석도 침을 꼴깍 삼키고 있었다.
“다들 배가 고팠나 보네.”
이장우는 능숙한 솜씨로 고기를 뒤집었다.
“이제 먹어도 돼.”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젓가락이 달려들었다.
한국에서 먹는 것보다 맛이 더 좋았다.
두바이에서 맛보는 불고기라서 더 맛있는지도 몰랐다.
이장우는 소주를 따르며 말했다.
“유럽에서도 통할까? 우리 샐러드 컨테이너?”
“분명 통할 거야.”
“하긴, 압둘라도 샐러드 컨테이너 이야기를 떠들고 다니고 있으니까. 지금쯤 유럽까지 퍼졌을 거야.”
이장우는 너털웃음을 호탕하게 터트리며 말했다.
웃는 모습이 아버지 이동춘과 무척 닮아 보였다.
“암스테르담 박람회 때는 샐러드 컨테이너만 전시하는 건가?”
“그럴 거야. 대규모 재배 시설은 전시회장에 넣을 수도 없으니까.”
“그러게, 그 큰 걸 전시할 수는 없겠지.”
전시는 할 수 없지만, 영상을 통해 보여줄 순 있었다.
난 수직 재배 시설을 촬영한 영상을 준비했다.
이장우는 소주잔을 기울이며 물었다.
“나도 박람회에 참석하고 싶은데 힘들겠지?”
“넌 두바이 현장을 지켜야지.”
“박태호까지 데려가니까 서운해서 그렇지.”
“만약 일이 잘되면 태호 씨는 두바이에 안 올지도 몰라.”
이장우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암스테르담 박람회에서 성과를 내면 유럽 현지에도 사무실을 세울 계획이다.
그곳을 책임질 사람이 필요했다.
“팀장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다시 두바이로 돌아올 테니까요.”
박태호가 이장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두 남자는 한국에서는 그리 가까운 관계가 아니었다.
타지에서 있다 보니 제법 친밀해진 것 같았다.
“눈치를 보니까 너 돌아오긴 틀린 것 같아. 가끔 전화라도 해라.”
이장우가 웃으며 말했다.
두바이의 마지막 밤이 그렇게 지나갔다.
* * *
다음 날 백민석, 박태호와 함께 호텔을 나왔다.
아자르의 롤스로이스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공항으로 가는 도중 아자르가 나에게 작은 상자를 건넸다.
“모하마드 왕자님의 선물입니다.”
난 선물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 대추야자가 들어 있었다.
백민석이 내용물을 보고 물었다.
“이게 뭐야?”
“대추야자. 두바이 곶감이야.”
“두바이 곶감?”
“한 번 먹어봐.”
백민석이 대추야자를 한입에 넣었다.
“곶감 맛이 아니잖아!”
그가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말이 그렇다는 거지.”
대추야자를 맛보는 사이, 우린 두바이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난 공항 입구에서 아자르에게 종이 가방을 건넸다.
그는 놀란 얼굴로 물었다.
“이게 뭔가요?”
“내가 아자르에게 주는 선물이요. 두바이에 올 때마다 케어해 줘서 고마워요.”
아자르에게 한국 토종꿀을 주었다.
그는 감동했는지 큰 눈가가 촉촉하게 젖었다.
그는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암스테르담 박람회에서 좋은 성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네, 아자르의 바람대로 좋은 성과 낼게요.”
난 암스테르담 박람회에서 파란을 일으키고 싶었다.
암스테르담 농업 박람회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우린 암스테르담 동부에 있는 에이뷔르흐로 향했다.
에이뷔르흐는 간척지에 만든 도시다. 그곳에서 국제 농업 박람회가 열린다.
빌딩 숲 사이로 자동차가 다니던 두바이와는 다른 모습이다.
네덜란드는 고층 건물을 규제하고 있었다. 국토의 많은 부분이 매립지로, 지반이 약하기 때문이다.
이색적인 건 낮은 건물만이 아니다.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네덜란드 시민들도 인상적이다.
백민석이 눈을 크게 뜨고 말할 정도다.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자전거를 타고 있네. 그것도 한두 명이 아니야. 설마 자전거를 타면서 밥을 먹는 건가?”
시계를 보니 마침 점심시간이다.
정말 자전거 위에서 점심을 해결하는 것 같았다.
네덜란드는 인구는 1,640만 명이다. 자전거 수는 약 1,800만 대로 국민 1인당 자전거 보유율이 세계 최고다.
국토 대부분이 평지이고 사계절 내내 온난한 날씨이기 때문에 자전거를 타기에 좋았다.
물론 체면보다 실리를 찾는 네덜란드 국민의 의식이 바탕에 깔려 있었다.
유럽 국가 중 첨단 농업이 가장 발달한 이유기도 하다. 이들은 친환경 에너지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첨단 농업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우린 암스테르담 농업 박람회장에 도착했다. 오래전 만국 박람회장으로 이용하던 곳이었다.
리모델링을 해서 그런지 세월의 흔적은 느낄 수 없었다.
“바람이 제법 부네요.”
박태호가 재킷을 여미며 말했다.
농업 박람회장 맞은편에 바다가 보였다.
풍차의 나라답게 바람이 심하게 불었다.
박람회 운영진이 있는 사무국으로 들어갔다.
키가 큰 서양 남자가 우릴 반겼다.
“지리산 농부들의 김덕명이라고 합니다.”
“암스테르담 농업 박람회의 데이비 클라센입니다.”
그가 커다란 손을 내밀며 말했다.
데이비 클라센은 우유처럼 하얀 피부에 북극곰처럼 기골이 장대했다.
“일찍 오셨네요?”
“네, 사전에 준비할 게 있어서요.”
암스테르담 농업 박람회를 시작하기 3주 전이다. 다른 참가자들은 아직 암스테르담에 도착하지 않았다.
“오신 김에 사용할 부스를 보고 가시죠.”
그가 친절한 얼굴로 말했다. 그의 안내를 받아 박람회장으로 이동했다. 박람회장은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이곳이 지리산 농부들이 사용할 공간입니다.”
우리가 사용할 공간은 샐러드 컨테이너가 들어가기에 충분했다.
백민석은 그곳의 사진을 찍고 있었다. 공간 활용을 어떻게 할지 머릿속으로 계산하는 얼굴이다.
사전 조사를 마치고, 대여한 사무실로 이동했다.
* * *
난 박람회장 인근에 창고가 딸린 사무실을 대여했다.
사무실 창고에는 우리가 박람회에 사용할 샐러드 컨테이너가 도착해 있었다.
“암스테르담에서 우리 샐러드 컨테이너를 보니까 반갑네.”
백민석이 샐러드 컨테이너를 손으로 만지며 말했다.
“민석아, 샐러드 컨테이너 점검부터 하자.”
“좋아.”
백민석이 웃으며 말했다. 박태호도 팔을 걷어붙이고 함께 샐러드 컨테이너를 점검했다.
모두 샐러드 컨테이너의 전문 지식이 있는 이들이다.
점검은 꼼꼼하게 진행했다. 사소한 문제도 있어서는 안 됐다.
다행히도 샐러드 컨테이너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점검을 마치고 늦은 저녁을 먹었다.
저녁밥은 사무실 인근 매장에서 사 온 샌드위치다.
“네덜란드 샌드위치 맛 좋네.”
백민석이 샌드위치를 베어 물며 말했다.
박태호도 먹을 만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샌드위치에 신선한 샐러드가 가득했다.
그때였다.
박태호가 책자를 펼치며 말했다.
“이것 좀 보세요.”
“이게 뭐야?”
백민석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암스테르담 박람회에 참가하는 업체들 목록이요.”
박태호가 박람회 사무국에서 가져온 책자였다.
표지 작업이 덜 돼 있었다.
박태호가 사무국 사람에게 부탁해 가져온 것 같았다.
난 샌드위치를 먹으며 책장을 넘겼다.
낯익은 이름이 눈에 띄었다.
백민석이 나와 같은 이름을 본 것 같았다.
그가 큰 목소리로 외쳤다.
“플랜트 팩토리도 암스테르담 농업 박람회에 참가하네!”
난 샌드위치를 내려놓고 책자를 자세히 보았다.
플랜트 팩토리도 첨단 농업이 주력인 업체다.
암스테르담 농업 박람회에 참여하는 게 이상할 건 없었다.
다만 박람회에 선보일 물건이 예상외였다.
“플랜트 팩토리도 샐러드 컨테이너를 내놓을 모양이야.”
백민석이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그는 입에 샌드위치 소스가 묻은 것도 모르고 있었다.
난 휴지로 그의 입을 닦아주며 말했다.
“일이 재밌게 됐어.”
“재미? 난 좀 긴장되는데?”
“긴장할 거 없어. 플랜트 팩토리는 우리 상대가 되지 않을 테니까.”
샌프란시스코에 본사를 둔 플랜트 팩토리를 처음 방문했을 때가 생각났다.
그때는 우리가 감히 상대도 할 수 없는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우린 세계에서 유일하게 수직 재배를 성공시켰다. 게다가 샐러드 컨테이너 기술도 그들보다 앞서 있었다.
야비한 방법으로 우리 기술을 빼 가려고 했던 일을 갚아 줄 기회였다.
“박람회에서 지리산 농부들이 주목받게 될 거야. 플랜트 팩토리 따윈 경쟁자도 못 될 거야.”
난 백민석의 눈을 보며 말했다.
방금까지 긴장하던 그의 얼굴이 자신감 있는 얼굴로 바뀌고 있었다.
“하긴, 우리는 예전 지리산 농부들이 아니지. 플랜트 팩토리도 성공 못 한 수직 재배에 성공했으니까. 우리가 베스트지.”
백민석이 웃으며 말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