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동 사무실 앞에 반가운 얼굴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기사처럼 차 문을 열며 말했다.
“대표님과 기술자님 잘 다녀오셨습니까?”
“네, 잘 다녀왔습니다.”
“이번 출장은 완전 금의환향이네. 두바이 계약 건이 빅이슈가 됐어. 도착하자마자 기사가 떴다니까.”
“다 잘난 우리 대표님 때문이죠.”
이장우가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한기탁은 운전대를 잡고 물었다.
“우선 계약부터 말해 봐. 5천만 달러 계약이 어떻게 1억 3천만 달러가 됐는지.”
“덕명이가 두바이 왕을 이겨서 그래요.”
이장우가 목청을 높여 말했다.
한기탁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두바이 왕을 이겼다고? 그게 무슨 소리야? 알아듣게 좀 말해 봐.”
이장우는 두바이에서 있던 일들을 무용담처럼 말했다.
매사냥 중에 가슴을 졸였던 일까지 흥미진진하게 전했다.
“우리 대표님 두바이에서 또 한 건 했네.”
한기탁은 유쾌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기사 내용이 맞는 거야? 청년 농부를 200명이나 뽑는다고 말했던데, 애초 계획은 100명 아니었어?”
“어쩌면 200명도 모자랄 수도 있어요.”
이장우가 다시 나섰다.
“뭐라고? 200명도 모자랄 수 있다고?”
“두바이 쪽에서, 재배 시설 관리도 지리산 농부들에게 맡겼어요.”
“현지 시설 관리도 지리산 농부들에게 맡겼다고? 두바이엔 사람이 없대?”
“사람은 아주 많죠.”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뭐 굳이 관리까지 우리한테 맡긴 거야?”
이번 질문에 내가 답했다.
“사람이 아무리 많아도 첨단 농업에 대해서 지식이 있는 농부는 없어요.”
“단순히 계약 액수만 커진 게 아니었네.”
“맞아요, 지리산 농부들이 세계로 뻗어 나갈 기회가 생겼어요.”
* * *
하동에서 어머니 아버지가 아들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계셨다.
어머니가 달려와 물었다.
“고생했다. 어디 아픈 데는 없고?”
“네, 잘 다녀왔어요. 그리고 이건 두바이에서 산 선물이에요.”
“뭘 이런 것까지 사 오고.”
어머니가 선물을 챙기는 사이 아버지가 나에게 다가왔다.
“곶감은 잘 전달했냐?”
“네, 두바이 왕자에게 잘 전달했어요.”
모하마드에게 준 곶감은 아버지와 내가 만든 것이다.
“계약도 아주 잘됐다고 들었다. 이제 좀 쉬어라.”
“사무실에 잠시 다녀오려고요.”
“좀 쉬지, 그래? 여독도 안 풀렸을 텐데.”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아서요.”
* * *
사무실에 도착하자 동료들이 모두 일어나 박수를 쳤다.
가장 크게 손뼉을 치는 이는 이동춘이다.
그가 기쁜 얼굴로 외쳤다.
“고생 많았습니다.”
“아버님은 별일 없으셨고요?”
“저는 대표님 말씀대로 교육 준비를 열심히 하고 있었습니다.”
“저보다 고생 많으셨네요.”
“실은 업무 시간 이외에도 일했습니다. 교육 준비를 더 잘하고 싶은 마음에. 물론 회식도 하지 않고요.”
“그럼 제가 없는 동안 회식도 한번 안 하신 건가요?”
“대표님이 타지에서 고생하는데, 저희끼리 회식을 할 수 없죠.”
이동춘의 말에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오래간만에 목장에서 회식할까요?”
“그 말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목장 식구들이 보고 싶기도 했다. 수경 재배를 시작한 이후로 목장에 들를 틈이 없었다.
* * *
목장 동료들에게도 오랜만에 회식을 하자고 전했다. 사무실 사람들은 서둘러 퇴근 준비를 했다.
부모님에게도 목장에서 회식이 있다고 전했다.
오늘은 지리산 농부들의 모든 식구가 목장으로 모이는 날이다.
오랜만에 보는 목장 풍경이 정겨웠다.
가을 들판을 거닐고 있는 젖소들의 모습은 명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설민주가 반가운 얼굴로 다가왔다.
“두바이 일이 잘됐다고 들었어요.”
“네, 민주 씨 덕분이죠.”
“제가 뭐 한 일이 있다고…….”
“그런 말 마세요. 목장이 든든하게 받쳐 주고 있어서, 더 힘이 나는 거니까요.”
설민주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녀는 기쁜 얼굴로 말했다.
“오늘은 모처럼 지리산 농부들이 다 모였네요.”
그녀의 말대로 목장이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동춘은 벌써 삼겹살을 굽고 있었다.
“대표님도 어서 오세요.”
나도 사람들 틈에 끼어 기분 좋게 음식을 즐겼다. 두바이에서 축하 파티를 할 때보다 기분이 더 좋았다.
어머니 품에 안긴 것 같은 푸근함이 느껴졌다.
사람들이 돌아가며 술을 권했다.
기분이 좋아서 그런지 취기가 돌지 않았다.
김상철이 내 잔에 술을 따르며 물었다.
“이제 지리산 농부들은 세계로 나가는 건가요?”
“네, 세계로 나가야죠.”
“정말 생각도 못 한 일이에요. 처음엔 그저 시골에서 농사만 지을 거라고만 생각했어요.”
김상철의 말에 사람들이 껄껄거리며 웃었다.
맞은편에 있던 한기탁이 큰 소리로 외쳤다.
“상철아, 오늘은 절대 과음하면 안 된다. 그때처럼 사고 치면 알지?”
김상철은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가 한껏 무르익었다. 모두 기분 좋게 회식 자리를 즐겼다.
웃고 떠들썩한 와중에 유독 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설강인의 표정이 평소와 다르게 굳어 있었다.
난 자리에서 일어서 조용히 그를 불렀다.
“설 팀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
“아무 일도 없습니다.”
말투도 평소와 다르다.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럼 어디 안 좋으신 데라도 있으세요? 표정이 안 좋으셔서.”
설강인이 가만히 내 눈을 바라보았다. 할 말이 있는 얼굴이다.
“이런 말을 해도 좋을지 모르겠지만…….”
“뭐든 말씀하세요.”
그는 잠시 주저하더니 입을 열었다.
“실은 좀 소외당하는 기분이 드는군요.”
“소외요?”
“지리산 농부들이 화제가 되는 게 모두 수경 재배와 첨단 농업이니까요…….”
설민주와 만났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그들의 마음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지리산 농부들이 첨단 농업을 시작할 수 있었던 건, 목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대표님이야 말씀은 늘 그렇게 하시죠.”
“공치사로 하는 말이 아니고요, 목장에 로봇 착유기를 들인 게 첨단 농업의 시작이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건 수경 재배 시설처럼 지리산 농부들이 만든 게 아니라서…….”
“로봇 착유기도 저희가 직접 만들 계획입니다.”
설강인은 놀란 얼굴로 날 바라보았다.
“제가 청년 농부들을 많이 모으는 이유 중 하나입니다.”
“그런 생각까지 하시는 줄은 몰랐네요. 내가 속 좁은 이야기를 한 것 같아 부끄럽군요.”
“아닙니다. 바쁘다는 핑계로 설 팀장님과 말씀을 나누지도 못한 제 잘못도 있습니다. 그리고 설 팀장님에게 한 가지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게 뭔가요?”
“지리산 농부들이 지금에 이르기까지 목장은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수경 재배와 첨단 농업을 시도할 수 있었던 건 목장에서 난 수익이 있었기 때문이죠. 지금까지도 안정적으로 수익을 내고 있고요. 모두 설강인 팀장님 덕분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설강인이 젖은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우린 다시 자리로 돌아가 회식을 즐겼다.
설민주는 아까부터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것 같다.
그녀는 아버지의 표정을 살폈다.
설강인의 웃는 얼굴을 보자 안심이 됐는지 미소를 지었다.
* * *
회식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다.
한기탁이 날 불렀다.
얼굴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지만, 정신은 멀쩡해 보였다.
“덕명아, 내가 곰곰이 생각해 봤거든. 그런데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하나 있어.”
“무슨 문제요?”
“재배 시설을 만들기 전에 청년 농부를 모집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모집하는 청년 농부가 너무 많아. 연수원으로는 감당이 안 될 거 같아.”
“그렇잖아도, 두바이에서 그 부분에 대해 고민도 많이 했어요. 해결 방법을 생각해 놨어요.”
“어떻게 할 생각이야?”
한기탁은 내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거액의 기부자
방송을 통해서 청년 농부 모집 계획을 밝혀 왔다.
재배 시설을 완공하기 전에 청년 농부를 모집할 계획이었다.
새로 모집할 청년 농부들은 수경 재배 등의 첨단 농업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태다. 재배 시설을 짓기 전에 수경 재배에 대해서 교육은 필수였다.
기술 교육으로 청년 농부들과 함께 재배 시설에 들어갈 장비도 함께 만들 계획도 있었다.
베테랑 기술자 이동춘이 열심히 교육 준비를 하는 까닭이다.
난 교육을 위해 전 하동 군수인 김창대에게 공무원 연수원을 요청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 장소면 충분할 거라고 여겼다.
두바이에 다녀오고 상황이 변했다. 현지의 재배 시설을 관리하는 일도 지리산 농부들이 맡았기 때문이다.
한기탁의 말대로 연수원 시설만으로는 200여 명의 청년 농부를 감당할 수 없다.
청년 농부를 교육할 장소가 문제였다.
한기탁이 회식 자리에서도 고민하는 이유였다.
난 한기탁에게 말했다.
“하동 대학을 빌려 볼 생각이에요.”
“하동 대학을 빌린다고?”
* * *
다음 날, 재배 시설을 짓고 있는 현장으로 향했다.
너른 부지에서 재배 시설을 짓기 위한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공사가 끝나면 샐러드 재배 시설을 포함해 사무동과 연구동 등 여러 개의 건물이 지어지게 된다.
공사가 끝나기까지 아직 1년이란 시간이 남았다.
함께 현장을 찾은 한기탁이 나에게 물었다.
“두바이도 곧 공사가 시작되겠지?”
“네, 조만간 차종문 대표가 두바이로 떠날 거예요.”
“우리 쪽에서도 사람이 같이 가야 하지 않아?”
“이장우가 갈 거예요.”
이장우에겐 이미 이야기를 마친 상태다. 두바이에서 기초 공사를 할 때도 수경 재배 전문가의 의견이 필요했다.
“그럼 우리 대표님은 한국에 계시는 건가?”
“기초 공사가 끝나고 내부에 재배 시설을 만들 때는 저도 두바이로 가 봐야 할 거예요.”
공사를 시작한 지금은 자문 정도면 충분했다.
“그나저나, 하동 대학을 빌리겠다는 건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예요. 하동 대학을 청년 농부들의 교육 장소로 쓸 생각이에요.”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게 쉽겠냐는 뜻이야. 거기 문제가 많은 걸로 알고 있는데.”
“말 나온 김에 저랑 같이 하동 대학에 가 볼까요?”
한기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하동 대학>은 하동군이 야심 차게 기획한 프로젝트였다.
지역 경제를 살리고, 점점 고령화되고 있는 하동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다.
취지는 좋았으나 생각처럼 일이 잘 진행되지는 않았다.
해양과 조선 등 특색 있는 학과를 신설하고 공고를 냈지만, 지원자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처음엔 그럭저럭 운영됐다. 미달이 속출했지만, 지자체의 지원을 받아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다.
흡사, 죽어 가는 사람에게 산소 호흡기를 부착하고 살아나길 바라는 것과 같았다.
지원자는 갈수록 떨어지고 교직원들에게 월급도 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대학은 개교한 지 몇 년도 안 돼서 폐교 위기에 처했다.
결국, 한계에 부딪혀 문을 닫고 말았다.
난 굳게 닫힌 교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말대로 이곳을 우리가 쓸 수 있으면 금상첨화일 거 같아. 하지만 이곳을 쓰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아.”
한기탁의 말대로 하동 대학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았다.
이미 하동 대학의 학교 법인은 공중 분해된 상태다.
그들에게는 협조를 구할 필요가 없다. 다만, 학교 법인이 사라졌다고 소유자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하동군과 개인 기부자가 하동 대학의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하동군에 협조를 구하는 건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신임 군수는 지리산 농부들에게 우호적인 입장이다. 그를 만나 허락을 받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하동 대학을 설립할 당시 거액의 기부자가 있었다. 기부자의 돈이 없었다면 하동 대학을 세울 수 없었다.
기부자는 대학을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했다.
하동 대학에 거액의 돈을 기부하는 조건이었다.
“하동 대학, 지금도 잡음이 많은 거 알지?”
한기탁이 나에게 물었다.
하동 대학을 놓고 하동군과 기부자가 감정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하동 대학이 폐교하면서 벌어진 일이다. 기부자 입장에서는 감정이 상할 만도 했다.
거액의 돈을 들여 대학을 설립했는데 얼마 안 가서 폐교했으니 말이다.
기부자가 하동군을 상대로 소송을 건다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학교 운영을 제대로 못 한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다. 다행히 소문일 뿐 소송까지 가진 않았다.
한기탁도 이런 복잡한 사정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가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이유다.
“기부한 사람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고 들었어. 학교 이외 다른 시설로 사용하는 건,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야.”
“그래도 한번 설득해 보려고요. 이곳이 청년 농부들을 교육할 최적의 장소니까요.”
“네 말대로 최적이긴 해. 기숙사도 있고, 장비를 만들 장소까지 다 갖춰져 있으니까.”
한기탁의 말대로 하동 대학엔 청년 농부들에게 필요한 공간이 충분했다.
강의실을 포함해 기숙사 그리고 수경 재배 시설을 만들 장소까지 있었다.
해양과 조선에 관련한 학과를 만들며 실습 공간을 만들었던 거다. 그곳에서 수경 재배 시설에 필요한 장비를 만들고 다용도로 이용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직접 보니까 나도 여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
한기탁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너무 겁쟁이처럼 말했던 것 같아. 나도 같이 가서 설득해 볼까?”
“그 일은 제가 혼자 할게요.”
“내 도움 필요한 건 없고?”
“거액의 기부자에 대해서 알아봐 주세요.”
“그 정도는 문제없지. 당장 알아볼게.”
* * *
한기탁에게 일을 맡기고, 하동 군청으로 향했다.
하동 군수의 비서에게는 미리 연락했다. 하동 군수는 오전 행사를 마치고 군청으로 복귀하는 길이다.
내 전화인 것을 알자, 군수는 직접 전화기를 들고 언제든 찾아오라는 말까지 남겼다.
하동 군청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나왔을 때, 손짓하는 이가 있었다.
하동 군수 이병휘다. 그는 싱글벙글 웃으며 날 바라보고 있었다.
“똑같이 도착했네요.”
이병휘의 얼굴이 좋아 보였다. 남산처럼 나온 배도 귀엽게 느껴질 정도다.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할까요?”
비서가 녹차를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이병휘는 차를 마시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기사를 봤습니다. 두바이 일이 아주 잘됐다고요.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조만간 청년 농부들도 모집할 거라고 했던 말도 기억나네요?”
“네, 빠른 시일 내에 모집할 생각입니다.”
“덕명 씨 덕에 하동이 젊어지겠어요, 허허.”
이병휘는 환한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얼굴만 봐도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지리산 농부들의 활약을 주목하고 있었다. 지리산 농부들의 성과에 따라 그의 업적도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전 군수 김창대보다 좋은 평가를 받고 싶은 것이리라.
“오늘 군수님을 찾아뵌 건, 어려운 부탁을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부탁이요? 빈집을 수리하는 일이라면 이미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 문제가 아니고 청년 농부들이 교육할 공간이 필요합니다.”
“공무원 연수원 시설을 이용한다고 들었습니다만?”
“그곳에서는 인원을 다 수용하기 힘들어 같아서요.”
“연수원 시설만으로도 안 된다고요? 그렇게 인원이 많나요? 청년 농부를 몇 명 모집한다고 말씀하셨죠?”
“200명 정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200명이요오?”
이병휘는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저도 보도를 통해 보긴 했지만, 장기적으로 늘려 갈 계획인 줄 알았습니다. 처음부터 200명을 뽑을 예정인지는 몰랐습니다.”
“두바이 재배 시설을 관리하는 것도 지리산 농부들이 맡았습니다. 청년 농부 200명을 선발해 전문 교육을 하고, 그중 절반 정도는 두바이로 보낼 겁니다.”
“하동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놀랍네요!”
이병휘는 녹차를 냉수 마시듯 벌컥벌컥 들이켰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려는 것 같았다.
“연수원으로 부족하다면…… 어디, 따로 생각해 둔 장소가 있으신가요?”
“하동 대학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동 대학이요?”
이병휘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난 듯이 흔들렸다.
그는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하동 대학이라면, 그게, 문제가 쉽지는 않습니다.”
“하동군에 지은 대학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폐교 상태라 비어 있고요.”
하동군의 애물단지이자 아픈 손가락이다. 신임 군수인 그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덕명 씨 말이 모두 맞는 말입니다. 하동 대학은 하동군이 나서서 만든 학교지만, 아쉽게도 폐교하고 말았죠. 그런데 말입니다, 폐교된 대학이라도 그곳을 사용하는 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병휘는 얼굴에서 웃음을 지우고 말했다.
“하동 대학을 만들 때 거액의 기부금을 낸 분이 계십니다. 최금자라는 분이죠. 그분과 함께 합의한 내용이 있습니다.”
“저도 내용을 알고 있습니다.”
“덕명 씨도 알고 계셨군요.”
“그분에게도 허락받을 생각입니다.”
“덕명 씨가 직접 허락을 받겠다는 말인가요?”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이죠. 그전에 군수님의 허락을 받고 싶었습니다.”
“저야 당연히 지리산 농부들에게 협조할 생각입니다.”
“건물 사용에 따른 비용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제야 이병휘의 얼굴이 밝아졌다.
예상대로 하동 군수는 협조적으로 나왔다.
문제는 최금자다.
“그런데, 최금자 씨가 보통 사람이 아닙니다. 쉽지만은 않을 겁니다.”
* * *
한기탁은 하동 대학에 거액을 기부한 최금자에 대해서 몇 가지 정보를 알아냈다.
최금자는 요식업으로 성공한 사업가다.
하동에서 가장 큰 한정식집의 사장님이기도 했다. 그녀는 하동과 진주 그리고 부산에도 직영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요리 솜씨만 있는 게 아니라 사업 수완도 겸비한 인물이었다.
최금자는 지독하게 일하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일 년 삼백육십오 일, 하루도 쉬는 날이 없었다.
지독하게 일하는 까닭은 아픈 과거를 잊기 위함이었다.
그녀의 아들은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최금자는 슬픔을 잊기 위해 오로지 일에만 매달렸다. 그렇게 번 돈으로 하동에 대학을 지었다.
죽은 아들은 교수가 되는 게 꿈이었다. 대학을 지어서 일찍 떠난 아들의 꿈을 이뤄 주려고 한 것이다. 하동 대학 안에도 아들의 이름을 딴 건물이 있었다.
하동 대학을 학교 이외에 다른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만든 결정적인 이유 같았다.
난 한기탁이 꼼꼼하게 정리한 정보를 머릿속에 담았다.
* * *
‘하동 제일 한정식.’
최금자가 운영하는 한정식집 아래서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그녀에게는 하동 대학 문제로 상의드릴 게 있다고 전했다.
김덕명이란 이름을 말하자 그녀는 흔쾌히 만남에 응했다.
손님이 없는 한적한 시간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하얀 얼굴에 한복을 입은 여자가 날 맞았다.
“김덕명 씨인가요?”
“네.”
“저를 따라오시죠.”
식당은 규모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넓었다. 하얀 한지가 붙은 수많은 방이 눈에 들어왔다.
내부에 잉어가 헤엄치는 인공 연못도 있었다.
안내하던 여자가 방문을 열었다.
“여깁니다.”
최금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간에 잡힌 3자 주름이 고집스러운 성격을 보여 준다.
그녀와 나 사이에 커다란 테이블이 놓여 있었다.
마치 건널 수 없는 강처럼 느껴졌다.
안내하던 여자는 문을 닫고 조용히 나갔다.
“최금자라고 합니다.”
“김덕명입니다.”
“<하동 대학> 문제로 상의하고 싶은 게 있으시다던데, 어떤 일인가요?”
그녀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나도 말을 돌릴 생각은 없었다.
“최금자 여사님에게 허락을 구하고 싶습니다.”
“허락이요?”
“대학을 사용하고 싶습니다.”
“사용한다니 그게 무슨 뜻인가요?”
“청년 농부들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하고 싶습니다.”
“학교를 돈벌이 수단으로 이용할 생각이군요.”
그녀는 매서운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미래를 위한 투자
난 최금자의 얼굴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여사님께서 하동 대학을 만든 이유는 지역을 발전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었나요?”
“미래를 위해서 투자했을 뿐입니다. 김덕명 씨처럼 돈을 벌려는 사람들을 위해서 지은 건 아니었습니다.”
최금자는 가소롭다는 듯한 말투로 답했다.
“하동 대학을 돈벌이 수단으로 사용할 생각은 없습니다. 저도 농업의 미래와 청년 농부들의 미래를 위해 지금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학교를 사용할 수 있게 허락해 주신다면, 당장은 청년 농부들을 위한 공간으로 활용할 테지만, 재배 시설이 다 지어지면 다시 대학을 살릴 계획입니다.”
“대학을 다시 살린다고요?”
그녀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네, 하동 대학을 다시 정상으로 돌려놓을 생각입니다.”
“입에 발린 말로 지금 나를 설득하려는 건가요?”
“최금자 여사님을 속이려는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사실을 말씀드린 겁니다. 전 하동 대학을 첨단 농업 전문 대학교로 만들고 싶습니다.”
최금자는 솔깃한 표정을 보였다가, 생각에 잠긴 눈으로 날 쳐다보았다.
그때 하얀 얼굴의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녀는 녹차가 담긴 찻잔을 내 앞에 놓았다.
녹차 향만으로도 최고급인 것을 알 수 있었다.
차를 마시며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하동 대학을 다시 살려 내겠다는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요?”
최금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미간 사이에 잡힌 3자 주름이 선명하게 보였다.
“양초 학교를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양초 학교요?”
그녀는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지리산 농부들은 장학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열악한 환경의 청소년들에게 장학금과 교육의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양초를 만들어서 용돈을 주기도 하죠.”
“그래서 양초 학교라고 부르는군요?”
“미래를 위한 투자입니다.”
“김덕명 씨가 그런 일도 하는지는 몰랐습니다.”
최금자의 표정이 달라졌다. 매섭게 쏘아보던 눈빛도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녀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물론입니다.”
* * *
최금자를 만나고 삼 일 뒤 전화가 왔다.
양초 학교의 책임자 정가희다.
그녀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톤이 높았다.
“양초 학교에 이상한 사람이 왔었어.”
“이상한 사람?”
“김덕명과 잘 아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양초 학교에 대해서 꼬치꼬치 캐물었다니까? 장학생을 선발하는 기준이며, 지금까지 했던 일들까지.”
“나랑 잘 아는 사람이라고?”
“최금자라는 분인데 정말 아는 사람 맞아?”
“맞아, 며칠 전에 만난 분이야.”
“그런데 양초 학교에 대해서 뭐가 그리 궁금한 거야?”
“내가 그분에게 양초 학교를 걸고 맹세한 게 있거든.”
“뭐라고? 양초 학교를 걸고 뭘 맹세했다고?”
정가희는 흥분한 듯 목소리 톤이 더 높아졌다.
“김덕명, 너 혹시 엉뚱한 일 벌이고 있는 거 아니야? 무슨 맹세를 했는지 빨리 말해.”
“하동 대학을 빌리고 싶다고 했어.”
“거긴 폐교된 학교잖아?”
그녀에게 최금자를 만난 사정을 말했다.
“청년 농부를 정말 많이 뽑을 생각이구나?”
“두바이 건도 그렇고. 사람들이 많이 필요해. 지금으로서는 하동 대학이 최적의 장소야.”
“잘 알겠어, 다음에 그분 또 오시면 친절하게 대할게.”
“너 혹시, 최금자 여사님에게 실수한 건 아니겠지?”
“실수는 무슨, 깍듯하게 잘 모셨다고. 다음번에 오면 대접도 잘해 드리겠다는 뜻이야.”
“그래, 고마워.”
* * *
그렇게 일주일이 지났다.
최금자에게 아직 연락이 없었다.
한기탁은 매일 나에게 물었다.
“오늘도 여사님 연락 없어?”
“네, 아직은 연락이 없네요.”
“양초 학교까지 다녀간 걸 보면 분명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 같은데…….”
한기탁은 초조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재배 시설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는 상황이다.
장소가 확보돼야 다음 스텝을 밟을 수 있었다.
“곧 연락이 올 거예요.”
“나도 그럴 거라고 믿어.”
한기탁은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날 오후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
수화기 너머 최금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처럼 저희 가게로 와 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오늘은 저녁을 먹으면서 이야기하고 싶은데 시간 괜찮나요?”
“좋습니다.”
전화를 끊고 한기탁의 어깨를 두드렸다.
“최금자 여사님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왔어요.”
“정말?”
한기탁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만나자고 한 거면 허락하겠다는 뜻이겠지?”
“저녁도 같이 먹자는 걸 보면 좋은 신호 같아요.”
“저녁까지 같이 먹자고 했어? 그럼 다 됐네.”
“아직 확정된 건 아니에요.”
“그래, 이럴 때일수록 침착해야지.”
* * *
‘하동 제일 한정식.’
저녁때라 그런지 손님들이 많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하얀 얼굴의 여자가 인사했다.
최금자에게 날 안내했던 여자다. 그녀도 날 알아봤다.
“사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최금자와 처음 만났던 그 방이다.
그때처럼 그녀 혼자 커다란 방을 지키고 있었다.
그녀는 처음 봤을 때와는 달리, 한결 부드러운 눈빛으로 날 맞이했다.
미간에 잡힌 3자 주름조차 편안하게 느껴졌다.
“바로 식사를 준비해도 될까요?”
“네, 안 그래도 배가 고팠습니다.”
최금자는 하얀 얼굴의 여자에게 손짓했다. 곧 테이블이 음식들로 가득 찼다. 떡갈비와 생선구이가 먹음직스럽게 보였다.
“먹으면서 이야기하죠.”
그녀가 젓가락을 들며 말했다.
놋쇠 접시에 담긴 음식들은 하나같이 정갈했다. 음식을 접시에 담을 때도 정성을 들이는 게 느껴졌다.
최금자가 요식업으로 성공한 비결 같았다.
“음식이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요.”
“맛을 보니 알겠습니다. 이곳을 하동 제일이라고 부르는 이유를요.”
최금자가 처음으로 웃음을 보였다.
밥을 먹던 중 그녀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김덕명 씨에 대해서 좀 알아봤습니다. 처음엔 그저 잘나가는 젊은 사업가라고만 여겼습니다.”
“전 사업가보다 농부라는 말을 더 좋아합니다.”
농부라는 말에 그녀가 미소를 지었다.
“김덕명 씨는 그저 돈만 벌려고 일하는 사람이 아니더군요. 양초 학교에 가 보고 생각을 바꿨습니다.”
“여사님께 다시 말씀드리지만, 하동 대학을 살리겠다는 말은 진심입니다.”
“저도 김덕명 씨에 대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하동 대학을 사용해도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최금자가 내 진심을 알아준 게 기뻤다.
난 그녀가 하동 대학을 죽은 아들을 위해서만 지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도 지역이 살아나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고 짐작했다. 그 마음 하나만큼은 서로 통한다고 믿었다.
최금자가 웃으며 말을 꺼냈다.
“양초 학교 선생님이 아주 당찬 분이시더군요.”
정가희를 말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입을 가리고 ‘호호호’ 웃었다
정가희와 얽힌 에피소드가 떠오른 모양이다.
“양초 학교에서 재미난 일이라도 있었나요?”
“정가희 선생님이 했던 말이 아직도 잊히지 않네요.”
“그분이 뭐라고 했나요?”
“아주 당당한 말투로 말했어요. 양초 학교 학생들이 세상을 구원할 거라고.”
정가희다운 말이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 * *
하동 대학 문제가 해결됐다.
이제 지리산 농부들은 언제든지 하동 대학을 사용할 수 있었다.
하동 대학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하동 군청과 최금자에게 허락받았다.
난 한기탁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
“역시, 김덕명이네. 지리산 농부들의 대표다워!”
“오늘은 전체 회의를 할까 해요.”
“좋아, 내가 사람들을 부를게.”
“연구실의 동료들과 목장의 설강인 팀장님도 불러 주세요.”
“네, 대표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청년 농부를 모집하는 것뿐만 아니라, 지리산 농부들의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 공유할 예정이다.
회의실이 사람들로 가득 찼다.
수경 재배 팀의 이장우, 민요한, 이동춘이 앞자리에 앉았다.
많은 동료들 가운데 목장을 책임지고 있는 설강인의 모습도 보였다. 연구소의 서우영과 이영호도 회의에 참석했다.
모처럼 지리산 농부들의 주요 인력이 한자리에 모였다.
“조만간 청년 농부들을 모집할 계획입니다. 언론에 밝혔듯이 청년 농부를 200명 뽑을 예정입니다.”
“그 많은 사람이 있을 장소가 있나요? 아직 공사도 끝나지 않았는데.”
이동춘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하동 대학을 사용할 계획입니다.”
“하동 대학이라면 폐교된 학교를 말하는 건가요?”
백민석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그곳을 사용하기로 허락받았습니다.”
허락을 받았다는 말에 모두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런데 너무 빠른 거 아닌가요? 아직 공사가 끝나려면 1년이나 남았는데. 두바이에 갈 인력을 교육한다고 해도 좀 이른 감이 있네요.”
민요한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다른 이들도 그의 말에 수긍하는 표정이다.
“전 그곳에서 수경 재배의 전문가를 길러 낼 생각입니다. 재배 시설을 만드는 엔지니어부터, 작물 재배 전문가와 영양액 전문가까지 육성할 계획입니다. 하동에 짓고 있는 재배 시설과 두바이 재배 시설에 필요한 인력들이겠죠.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여기 계신 모두가 청년 농부들의 교육을 맡게 될 겁니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동료들의 표정을 살피고 말을 이었다.
“지금부터 청년 농부를 선발하는 이유는 유럽 진출을 준비하기 위해서입니다.”
“유럽이요?”
이동춘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두바이를 유럽 진출의 교두보로 삼을 생각입니다. 두바이는 관세와 법인세, 수출세, 정부 수수료가 전혀 없습니다. 항만 시설과 공항도 잘 정비가 돼 있고요. 두바이에 재배 시설을 짓는 동안 그곳에 사무실을 내고 유럽 시장을 노려 보고 싶습니다.”
“멋진 계획이에요. 대표님 말대로 유럽 시장으로 진출하기에 두바이만큼 좋은 장소도 없으니까요. 그런 계획이라면 청년 농부를 지금 뽑는 것도 이해가 가네요.”
민요한이 경쾌한 말투로 말했다. 내가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알겠다는 표정이다.
다른 동료들도 모두 내 뜻을 이해하는 얼굴이다.
“지리산 농부들도 조직 개편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분야별로 전문가를 육성해야 하니까요. 엔지니어 파트와 작물 재배 그리고 영양액까지 분야를 나눠서 청년 농부들을 교육할 생각입니다.”
이동춘이 엔지니어 파트를 책임진다. 민요한이 작물 재배를 맡는다. 그리고 영양액과 비료 관련 부분은 연구소의 서우영이 맡을 것이다.
“유통과 마케팅 전문가도 육성할 계획입니다. 그 부분은 한기탁 팀장님이 책임질 겁니다. 인터넷 쇼핑몰과 관련해서는 백민석 팀장님이 교육을 맡아 진행할 겁니다.”
“지리산 농부들이 아니라 지리산 학교네요.”
이동춘의 말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다들 아시겠지만, 첨단 농업은 아직 미개척 분야입니다. 인터넷으로 농산물을 판 것도 지리산 농부들이 선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지리산 농부들이 첨단 농업의 1세대란 뜻이죠. 청년 농부들을 체계적으로 교육하는 것도 우리의 몫입니다.”
“지리산 농부들의 손에 한국 농업의 미래가 달려 있네요.”
조용히 이야기를 듣던 설강인 팀장이 입을 열었다.
“네, 설 팀장님 말씀대로 우리 손에 한국 농업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이제 로봇 착유기를 만드는 일도 지리산 농부들의 손으로 직접 진행하려고 합니다.”
수입산 로봇 착유기가 아닌 우리가 만든 착유기를 쓸 계획이다.
낙농업 농가에 저렴한 비용으로 보급하고 싶었다.
“그럼 이제 청년 농부를 모을 일만 남았네요.”
이동춘이 말했다. 기분이 좋은지 입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난 조만간 두바이로 떠나는 거 맞지?”
이장우가 날 보며 물었다.
“늦어도 다음 주 중으로는 떠나야 해.”
“오케이, 준비하고 있을게.”
이장우는 웃으며 말하고 있었지만, 아쉬움이 느껴졌다.
“이제 회의는 끝난 건가?”
한기탁이 나에게 물었다.
“한 가지 더 결정해야 할 일이 있어요.”
“결정, 그게 뭔데?”
“두바이에 한 명이 더 가야 해요.”
“한 명 더?”
“두바이는 단지 수경 재배 시설만 지으러 가는 곳이 아니니까요.”
“하긴 그렇지, 유럽 진출 교두보로 삼으려면. 그럼 누가 두바이로 가는 건가?”
난 회의실에 모인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이장우를 제외하고 모두 내 눈을 피하고 있었다.
이동춘은 신발 끈이 풀어졌는지, 테이블 아래로 얼굴을 숨겼다.
“너무 겁내지 마세요. 두바이 아주 좋아요. 아버지도 고개 좀 드시고요.”
이장우가 웃으며 말했다.
난 동료들에게 물었다.
“혹시 자원자 있으신가요?”
그때 누군가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원하던 인물이었다.
지역을 살리는 사람
모든 이들의 시선이 손을 든 이에게 향했다.
경영지원팀의 박태호가 손을 번쩍 들고 있었다.
“박태호, 날 떠나겠다는 거야?”
한기탁이 박태호를 보고 소리쳤다. 그에게는 하나뿐인 팀원이었다. 서운한 눈빛이 역력했다.
“떠나는 게 아니라 두바이 출장이죠.”
박태호는 웃으며 답했다.
“자원하는 이유를 동료들에게 말해 줄 수 있나요?”
난 박태호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장 큰 이유는 대표님 때문입니다.”
“저 때문이라고요?”
“남극에서부터 두바이까지 전 세계를 누비는 대표님의 모습을 동경했으니까요. 기회가 온다면 저도 대표님처럼 도전해 보고 싶었어요.”
동료들이 박태호의 말을 들으며 모두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엔 민요한을 보낼 생각도 있었지만, 곧 생각을 바꿨다.
민요한은 새로 모집할 청년 농부들을 교육해야 했다.
박태호는 민요한 다음으로 생각한 인물이다.
그는 샐러드 컨테이너 사업을 벌일 때 많은 관심을 보였다.
한기탁과 함께 교육에 참여하기도 했다. 샐러드 컨테이너 보급 사업을 벌일 때는 뛰어난 영업력을 보였다.
박태호를 두바이로 보낼 생각을 한 가장 큰 이유는 그의 언어 능력 때문이다. 그는 영어에 능했다.
다행히도 그가 자발적으로 나서 줬다.
난 두바이를 유럽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교두보로 이용하고 싶었다.
유럽 시장에 처음 내놓을 물건은 샐러드 컨테이너다. 충분히 경쟁력이 있을 거로 판단했다.
박태호는 샐러드 컨테이너에 대한 이해와 영업력 그리고 언어 능력까지 겸비한 인재였다.
“마음은 알겠는데, 아쉬운 마음은 지울 수가 없네.”
한기탁의 목소리에 기운이 없었다. 하나뿐인 팀원을 두바이로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것 같았다.
“청년 농부들을 뽑으면 경영지원팀도 증원할 거예요. 너무 아쉬워하지 말아요.”
“그래도 우리 태호랑은 다르지.”
한기탁은 박태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 말도 그에게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때 민요한이 나섰다.
“송별회를 하면 어떨까요?”
“송별회요?”
“아쉬움을 달래고 행운을 비는 의미로요.”
“그거 아주 좋네요.”
이동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난 동료들을 보고 말했다.
“지리산 농부들이 하동 대학을 사용할 수 있게 협조해 주신 분이 계십니다. ‘하동 제일 한정식’집을 운영하시는 사장님이기도 하죠. 그곳에서 송별회를 하면 어떨까요?”
“한정식집이요?”
이동춘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마음에 안 드세요?”
“그게 아니라 가격이 부담돼서요. ‘하동 제일 한정식’은 비싸기로 유명하잖아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지리산 농부들은 부자니까요.”
난 웃으며 말했다. 두바이 재배 시설을 계약하고 계약금이 들어온 상태였다.
지리산 농부들의 통장엔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액수가 찍혀 있었다.
최금자 여사님에게도 감사의 뜻을 표하고 싶었다.
* * *
‘하동 제일 한정식’집에 지리산 농부들이 모두 모였다.
최금자 여사님이 지리산 농부들을 반겼다.
난 준비한 선물을 그녀에게 건넸다.
목장에서 만든 우유와 요거트다. 매장에서 만든 약과도 있었다.
“이런 것까지 가져오시고, 감사합니다.”
최금자 여사는 선물을 받으며 활짝 웃었다.
“저희가 더 감사합니다. 하동 대학을 사용하도록 허락해 주셨는데.”
이동춘이 정중한 말투로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다른 동료들도 방으로 들어가며 그녀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최금자는 사람들이 모두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인사에 답해야 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방으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그녀가 기쁜 얼굴로 말했다.
“오늘은 저도 실력 발휘를 해야겠네요. 곧 음식을 들이겠습니다.”
산해진미가 가득 놓인 식탁이 등장했다.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다. 그녀와 이곳에서 식사할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임금님 수라상을 보는 것 같았다. 음식 가짓수를 셀 수조차 없었다.
이동춘은 차려진 음식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고기에 생선, 거기에 내가 좋아하는 간장 게장까지. 없는 게 없네요.”
“남기시면 안 됩니다.”
“당연하죠. 혹시라도 남으면 싸 가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식사 전에 난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이장우 씨와 박태호 씨 앞으로 나와 주세요.”
두 남자가 내 양옆에 섰다.
“이 두 사람은 조만간 두바이로 떠날 겁니다. 이장우 씨는 재배 시설의 자문 역할을 할 거고, 박태호 씨는 그곳에서 유럽 진출을 위해 준비 작업을 할 겁니다. 두 사람의 건강과 행운을 빌기 위해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건강히 잘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두 분도 동료들에게 한마디씩 하세요.”
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장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두바이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떠나게 됐네요. 두바이 수경 재배 시설은, 지리산 농부들의 자존심을 걸고 만들겠습니다.”
동료들의 박수와 함성이 이어졌다.
그의 뒤를 이어 박태호가 나왔다.
“새로 뽑는 청년 농부들을 보지 못하고 출장을 가는 게 가장 아쉽습니다. 그리고, 한기탁 팀장님, 저 간다고 너무 서운해하지 마세요. 두바이에서 돌아오면 팀장님 옆자리에 꼭 붙어 있을 테니까요.”
“그래, 태호야. 돌아오면 내 옆에 꼭 붙어 있어라.”
한기탁의 말에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곧 식사가 이어졌다.
지리산 농부들의 즐거운 저녁 만찬 자리다.
이동춘은 출장 가는 아들에게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었고, 박태호는 한기탁 옆에 붙어 그의 마음을 달랬다.
목장 식구들은 새로 태어난 송아지 이야기를 하며 웃고 떠들었다.
연구소의 서우영과 이영호는 새로 개발 중인 영양액을 놓고 토론을 벌이고 있었다.
동료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배가 부르고 웃음이 절로 났다.
그때 백민석이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청년 농부들은 언제 뽑을 생각이야?”
“다음 주 중으로 공고를 낼 생각이야.”
“빠르네. 그럼 면접은 하동 대학에서 보는 건가?”
“하동 대학은 정비가 필요해. 폐교된 뒤로 관리를 안 해서.”
“그럼 면접 볼 장소가 없잖아?”
“이미 빌려 둔 곳이 있어.”
“아, 맞다. 연수원이 있었지.”
백민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전 하동 군수 김창대에게 부탁해 빌려 둔 연수원이 있었다.
하동 대학을 정비하는 동안 연수원을 이용할 생각이다.
“우리 대표님이 미리미리 준비해 둔 덕에 문제가 하나도 없네.”
백민석이 유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때 구석에서 박태호의 구슬픈 목소리가 들렸다.
“팀장님.”
“태호야.”
“잘 다녀올게요. 건강 잘 챙기고.”
두 남자가 서로 부둥켜안고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다.
모두 그 장면을 보고 껄껄 웃었다.
* * *
인천 공항에서 두 사람을 떠나보냈다.
이장우에게는 두바이 재배 시설의 철저한 감독을 부탁했다.
난 인천 공항에서 서울로 향했다.
벤처 크라우드의 공대식과 약속이 잡혀 있었다.
최금자의 허락을 받았던 날, 그에게 청년 농부 모집 건에 대해서 말했다.
공대식 대표가 반가운 얼굴로 날 맞았다. 그의 금테 안경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김 대표님이 말씀하신 대로 청년 농부를 모집하는 일을 진행 중입니다.”
벤처 크라우드는 지리산 농부들의 펀딩 때부터 청년 농부 모집 건에 대해서 광고하고 있었다.
그때는 구체적인 일정을 확정하진 않았다. 펀딩이 끝나고 난 뒤에 일정을 발표하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두바이 계약 건으로 모집하는 청년 농부도 2배로 늘었다.
난 공대식 대표에게 청년 농부 모집에 따른 구체적인 내용을 전달했다.
“두바이 계약도 성공적으로 마쳤으니, 이제 청년 농부도 많이 모일 겁니다.”
“많은 젊은이가 관심을 가졌으면 하고 바랍니다.”
“대표님의 활약 덕에 이미 많은 이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마케팅을 통해 더 많이 알리겠지만요.”
안경 속 두 눈이 반짝였다.
“저희가 슬로건을 제작해 봤습니다.”
그가 나에게 슬로건이 적힌 종이를 건넸다.
‘남극에서 두바이까지, 청년 농부의 꿈을 이루세요.’
마음에 드는 표어다. 남극과 두바이를 오가던 순간이 떠오르기도 했다.
“인터넷 광고를 통해 마케팅을 펼칠까 합니다. 아무래도 청년들이 많이 접하는 매체니까요.”
“좋습니다, 광고비는 걱정은 마시고 집행해 주십시오.”
“펀딩을 할 때보다 더 신경을 쓰겠습니다. 김덕명 대표님의 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방송에서 내가 했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난 펀딩만큼이나 청년 농부를 모집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 * *
벤처 크라우드의 마케팅과 그동안 쌓은 지리산 농부들의 이미지가 청년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청년 농부 지원자가 3,000명이 넘었다.
재배와 기획, 기술, 연구, 유통 등의 지원 분야별로 나눠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검토했다.
나와 동료들은 이력서를 보느라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한기탁이 이력서를 검토하며 말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지원할지 몰랐어.”
“지리산 농부들의 비전을 높이 평가한다는 거겠죠.”
“하긴, 우리만큼 비전이 큰 곳도 없지. 첨단 농업 기술만 따지면 대한민국 최고니까.”
한기탁이 여유 있는 표정으로 말했다.
“어때, 쓸 만한 친구들 있어?”
“지원자 중에 특별한 사람이 많은 거 같아요.”
“특별한 사람?”
“지리산 농부들과 같은 꿈을 꿀 사람들이요.”
* * *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검토하는 작업이 끝났다.
이제 면접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면접자들이 많이 며칠에 나눠서 면접을 진행해야 했다.
면접이 시작되자 하동은 청년들로 들썩였다.
수백 명의 청년이 하동을 찾은 건 이례적인 일이다.
하동 대학이 만들어졌을 때도 없던 일이다.
면접 첫날 전직 하동 군수인 김창대가 연수원을 찾았다.
그는 청년 농부 지원자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평생 이런 날이 올 거라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사람들이 많아서 놀라셨나요?”
“놀랐다기보다 감동적이네요. 하동이 살아나고 있는 것 같아요. 김덕명 씨가 지역을 살리고 있습니다.”
“다 군수님이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전직 군수일 뿐입니다.”
그가 겸손한 말투로 말했다.
그때 노해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김창대와 나에게 종이봉투를 건넸다.
“이거 드세요.”
“이게 뭔가요?”
“청년 농부 지원자들에게 줄 간식이요.”
목장 우유와 김꽃님 할머니가 만든 꿀 약과다.
김창대는 약과를 한입 베어 물고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나도 그와 함께 우유와 약과를 먹었다.
항상 느끼지만 꿀 약과와 목장 우유의 궁합이 좋았다.
“지원자들도 기운이 날 것 같네요.”
김창대가 웃으며 말했다.
김상철도 나서서 지원자들에게 꿀 약과와 우유를 나눠 주고 있었다.
선배들이 미래의 청년 농부들을 챙기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이제 면접을 봐야 할 시간이다.
연수원 강당은 면접 장소로 변해 있었다.
지원자들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술 부분과 연구 부분은 경력자들도 많았다. 고무적인 현상이다.
평균 연령이 가장 낮은 분야는 내가 맡은 재배와 기획 분야였다.
앞으로 수경 재배 전문가가 될 사람들이다.
난 한기탁, 민요한과 함께 심사를 봤다.
“지리산 농부들에 지원한 동기가 뭔가요?”
“목표가 뭔가요?”
그들에게 지원 동기와 목표를 물었다.
다양한 답변이 돌아왔다.
난 뚜렷한 동기와 목표가 있는 청년 농부를 뽑고 싶었다.
많은 지원자가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기백이 돋보이는 이도 있었지만, 마음에 차진 않았다.
지원자들의 천편일률적인 답변에 지칠 때였다.
호리호리한 체격의 지원자가 내 눈앞에 등장했다.
소년 같은 얼굴이지만 스무 살이 된 청년이다.
“지리산 농부들에 지원한 동기가 뭔가요?”
“이곳에서 제 꿈을 이루고 싶습니다.”
“꿈이 뭔가요?”
“농사로 세상을 풍요롭게 하는 일입니다.”
난 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양초 학교 출신의 아이였다.
200명의 청년 농부
지원자의 이름은 성도윤이다.
그는 이력서와 자기소개서에 양초 학교 출신이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의 얼굴을 뚜렷하게 기억하는 이유가 있다.
2년 전, 정가희의 다급한 전화로 양초 학교에 간 일이 있었다.
양봉 수업 중에 한 아이가 쓰러진 사건 때문이었다. 그 아이는 무심코 벌집을 만지다 벌에 쏘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가볍게 넘길 일이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남달랐다.
벌침에 과민성 쇼크 반응을 일으켰다. 온몸에 발진이 생기고 혈압이 심하게 떨어져 의식까지 잃었다.
그는 특정 항원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었다. 특히 벌 독에 아주 예민하게 반응했다.
난 병원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수액을 맞고 잠들어 있었다.
정가희는 문제없을 거라며 날 안심시켰다. 다행히도 그는 병원 치료를 받고 회복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사고 후에도 그가 양봉 수업을 꾸준히 들었다는 것이다.
정가희가 말려 보기도 했지만, 그는 안전 장비를 잘하면 된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때 병원에 있던 아이가 지금 내 앞에 앉아 있었다. 지금은 청년 농부 지원자가 됐다.
가늘고 긴 눈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었다.
난 그에게 물었다.
“농사로 세상을 풍요롭게 한다고 했는데, 구체적인 방법을 생각해 본 게 있나요?”
“크라우드 펀딩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도윤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말했다.
나와 함께 심사를 보던 한기탁과 민요한도 그 말에 반응했다. 유심히 그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크라우드 펀딩을 어떻게 이용한다는 말일까요?”
“농부가 농사 계획을 사이트에 올리면 소비자가 돈을 미리 지급하는 방식입니다.”
“미리 돈을 준다고요?”
“네, 농부는 미리 확보된 자금으로 생산할 농산물의 양을 가늠하고, 정해진 양만큼만 생산하는 방식입니다. 그렇게 하면 품질 좋은 작물을 수확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약 자연재해 등으로 농부가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어떻게 되나요?”
시원시원하게 말하던 그가 잠시 머뭇거렸다.
내가 예상치 못한 질문을 한 것이다.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농부들에게 자연재해는 가장 큰 숙제입니다. 제가 청년 농부에 지원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첨단 농업으로 자연재해를 극복하고 싶습니다.”
“답변 잘 들었습니다.”
성도윤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이다.
한기탁이 그에게 물었다.
“농사 크라우드 펀딩에 대한 아이디어는 어디서 착안했나요?”
“지리산 농부들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우리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고요?”
한기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지리산 농부들의 펀딩을 보면서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대규모 수경 재배 시설을 짓기 위해 사람들에게 돈을 모았으니까요. 저도 적은 돈이지만 펀딩에 참여했고요.”
“그런 뜻이군요. 잘 알았습니다.”
한기탁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 *
며칠 동안 이어진 마라톤 면접이 끝난 날이다.
한기탁이 웃으며 말했다.
“오늘 좋은 소식이 있어.”
“무슨 소식이요?”
“장호형 변리사에게 연락이 왔어.”
장호형은 ‘원스톱특허’의 변리사다. 지리산 농부들의 특허를 담당하고 있었다.
이미 국내 특허 출원은 끝난 상태였고, 국제 특허를 기다리던 중이었다.
“이제 국제 특허까지 작업이 끝났어.”
한기탁이 ‘원스톱특허’에서 보내온 서류를 건넸다.
그의 말대로 수직 재배에 따른 국제 특허증이 나왔다.
“오늘 조촐하게 한잔 어때?”
“이런 날, 다 같이 가야죠?”
“요즘 회식이 너무 잦았어. 저번에 한정식집에서는 출혈이 컸다고.”
지리산 농부들의 안방마님다운 발언이다.
“좋아요. 오늘은 조촐하게 하죠. 저도 조용히 할 말이 있으니까요.”
“조용히 할 말이 있다고?”
그날 저녁 한기탁과 함께 단골 포장마차로 향했다.
사장님이 유쾌하게 우릴 반겼다.
한기탁은 웃으며 외쳤다.
“여기 꼼장어랑 소주 한 병 주세요.”
한기탁은 소주가 나오기도 전에 물었다.
“이제 말해 봐. 조용히 하고 싶다는 말.”
“아직 술도 안 나왔는데.”
“내가 너무 급했나?”
그가 머리를 긁적이는 사이 소주와 콩나물국이 나왔다.
주문하지 않은 반건조 오징어도 있었다.
“이모, 오징어 잘못 나왔어요.”
한기탁이 사장님을 쳐다보며 말했다.
“그거 서비스야.”
“오늘은 시작부터 서비스를 주시고, 무슨 좋은 일 있으세요?”
“좋은 일 있지.”
“무슨 일인데요?”
“지리산 농부들 덕에 매상 올라갈 일.”
후덕한 인상의 사장님이 웃으며 말했다. 지리산 농부들이 청년 농부를 모집하는 건 하동 사람들이 다 아는 일이었다.
그녀도 애정을 갖고 우릴 지켜보고 있었다.
“부족한 거 있으면 말하고, 꼼장어도 얼른 구워다 줄게.”
“역시, 우리 이모 최고.”
한기탁이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와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시원한 소주가 목을 타고 내려갔다.
한기탁이 오징어를 질근질근 씹으며 물었다.
“이제 말해 봐.”
“성도윤이란 친구 기억나시죠?”
“당연히 기억나지, 농사 크라우드 펀딩 말했던 지원자. 그 친구 마음에 들더라고.”
“성도윤 지원자, 양초 학교 출신이에요.”
“양초 학교 출신이라고?”
오징어를 씹던 한기탁이 입을 떡하니 벌렸다.
놀란 얼굴이다. 놀랄 만도 했다.
성도윤은 양초 학교 출신이란 사실을 어디에도 기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말이야? 이력서나 자기소개서에도 그런 말은 없었던 것 같은데?”
“아이들이 양초 학교 출신이란 걸 숨겼어요.”
“아이들? 그럼 성도윤 말고도 더 있었다는 뜻이야?”
“맞아요. 성도윤 말고도 몇몇이 더 있었어요.”
한기탁은 생각에 잠긴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양초 학교 출신이란 걸 숨긴 이유가 뭐지?”
“다른 지원자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는 생각이었나 봐요.”
“아무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 법이니까. 양초 학교 출신이라고 말하면 심사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겠지.”
한기탁은 소주를 한잔 들이켜며 말했다.
“그런데 넌 그 사실을 어떻게 안 거야?”
“남아영을 통해 알게 됐어요. 양초 학교 아이들이 서로 약속했다고 하더라고요. 성도윤을 포함해서 낯익은 얼굴이 보여서 남아영에게 물어봤죠. 면접이 끝난 뒤라 자연스럽게 이야기해 주더라고요.”
“감동인데~! 지리산 농부들이 장학금을 준 아이들이 청년 농부 지원자가 됐다는 게? 아주 멋지게 성장했어!”
한기탁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정말 감동한 사람 같았다.
그때 사장님이 꼼장어를 가지고 왔다.
그녀가 한기탁을 보고 물었다.
“벌써 취한 거야?”
“취하긴요? 아직 시작도 안 했다고요.”
“눈이 취한 눈인데……?”
그녀가 구시렁거리며 자리를 피했다.
“양초 학교 아이들이 지원할 줄은 생각도 못 했어.”
“저도 그래요.”
“아무튼 기분 좋다!”
한기탁이 잔을 들며 말했다. 그와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아이들이 생각나서인지 술맛이 좋았다.
“참, 그리고 저 내일 상주에 좀 다녀올게요. 선배가 합격자들에게 연락 좀 해 주세요.”
“알겠어, 연락은 내가 알아서 할게. 그런데 상주에는 무슨 일로?”
“황유신 선생님 좀 만나 뵈려고요”
* * *
오래간만에 상주를 찾았다.
감나무만 봐도 계절의 변화를 알 수 있었다.
감이 주홍빛으로 무르익고 있었다. 이제 곶감을 만들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았다.
멀리 황유신 선생의 집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속도를 냈다.
집 앞에서 황유신 선생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호랑이 눈썹이 토끼처럼 순하게 보였다.
황유신의 커다란 손이 내 어깨 위로 올라왔다.
“들어가자.”
그의 누이동생인 황정아 여사도 날 반겼다.
황유신 선생의 방은 예전 모습 그대로다.
이곳에서 그에게 유황 훈증 없이 곶감을 만드는 법을 배웠다.
그때를 생각하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얼굴이 좋아 보이는구나.”
“선생님도 좋아 보이십니다!”
“나야 뭐, 더 늙었지.”
문을 열고 황정아 여사가 들어왔다. 그녀가 수정과를 건넸다.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때도 그녀가 수정과를 내주었던 게 생각났다.
신기하게도 맛이 그때와 똑같았다.
“네가 이곳을 처음 찾을 때 했던 말이 떠오르는구나.”
“제가 뭐라고 했나요?”
“농촌에 새로운 희망을 만들고, 청년 농부들을 모으겠다고 했다. 그들을 부자 농부로 만들겠다는 말도 했지.”
황유신 선생은 인자한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넌 그 말을 행동으로 옮겼구나.”
“이제 시작하는 단계입니다. 결실을 보려면 아직 멀었습니다.”
“나도 청년 농부를 모집했다는 말은 들었다.”
“오늘 선생님을 찾아뵌 건 인사만 드리려는 게 아닙니다. 부탁을 드리고 싶어서입니다.”
“부탁이라니?”
“선생님을 특별 강사로 초빙하고 싶습니다.”
“특별 강사?”
“청년 농부들에게 곶감 만드는 방법을 알려 주십시오.”
“네가 첨단 농업을 하는 걸로 알고 있다. 곶감과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구나?”
“선생님의 말씀처럼 지리산 농부들의 주력은 첨단 농업으로 변했습니다. 하지만 청년 농부들에게 곶감을 만드는 일도 가르치고 싶습니다.”
“첨단 농업을 하겠다는 농부가 뜬금없이 곶감이라니, 이유나 들어 보자?”
“농부의 기본자세를 알려 주고 싶습니다. 선생님이 저에게 알려 주셨던 것처럼요.”
황유신의 호랑이 눈썹이 기분 좋게 꿈틀거렸다.
“그런 일이라면 언제든지 돕겠다.”
“농부의 자세만을 배우는 일은 아닙니다. 곶감을 수출할 계획도 있습니다.”
“곶감을 수출하겠다고?”
황유신 선생은 놀란 얼굴로 날 쳐다보았다.
“외국 사람들도 곶감을 먹는다는 말이냐?”
“외국에 나갈 때마다 곶감을 선물로 가져갔습니다. 한국 곶감은 다른 나라에는 없는 특별한 식품이니까요. 곶감을 선물로 줄 때마다 반응이 좋았습니다. 저는 해외에서도 한국 곶감이 통할 거로 생각합니다.”
“네 말대로만 된다면 곶감 농가에도 좋은 일이 되겠구나!”
* * *
청년 농부 합격자 발표가 끝나고, 지리산 농부들은 바쁘게 움직였다.
하동 대학을 새롭게 단장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재배 시설이 완공되기 전까지 지리산 농부들이 새롭게 이용할 장소였다.
지리산 농부들이 농업 지원 센터를 벗어나는 일이기도 했다.
우린 전문 분야별로 사무실을 배치했다. 모든 공간이 전보다 더 넓어졌다.
대학 시설을 최대한 살리는 방향에서 정비가 이뤄졌다. 일 년 뒤에는 하동 대학을 본래대로 돌려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넉넉한 강의실에선 청년 농부들의 교육이 진행될 것이다.
하동 대학의 기숙사는 청년 농부들의 임시 주거 시설로 사용하기로 했다.
지리산 농부들의 신축 재배 시설 공사가 끝남과 동시에 하동군과 함께 진행 중인 빈집 고치기 프로젝트도 끝난다.
그때는 청년 농부들에게 집을 나눠 줄 예정이다.
한기탁이 사무실 정리를 마치고 말했다.
“휴, 이제 우리 사무실이 생겼네.”
백민석도 정리를 마치고 경영지원팀 사무실로 들어왔다.
“너무 넓어서 이상할 정도예요.”
백민석이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연구원 이영호도 모습을 드러냈다.
“대학이 있던 곳이라 그런지 연구 공간도 좋네요.”
“공사가 끝나면 더 좋은 환경에서 일하게 될 겁니다.”
난 이영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동춘도 정리를 마치고 왔다.
“여기서 샐러드 컨테이너를 만드는 건 문제없을 것 같습니다. 운동장도 넓어서 축구도 할 수 있을 거 같고요.”
그의 말에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이사와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이제 지리산 농부들과 함께 일할 청년 농부를 받는 일만이 남았다.
청년 농부들은 한날한시에 이곳으로 모이기로 했다.
언론사에선 그날에 맞춰 취재하고 싶다는 요청이 왔다.
두바이 계약 성공 후 청년 농부 모집까지 지리산 농부들은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거기에 하동 군수도 빠질 수 없었다. 그는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 하고 싶다고 말했다.
기다리던 순간이 다가왔다.
200명의 청년 농부들이 지리산 농부들의 새로운 공간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콧수염 축구단
대강당 안에 200명의 청년 농부가 모였다. 기자들과 하동 군수도 자리하고 있다.
연단에 오르니, 200명의 청년 농부들이 반짝이는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대표 김덕명입니다. 먼저, 지리산 농부들의 일원이 되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우리는 곶감 농사로 시작했습니다. 그 뒤에 양봉과 낙농업으로 조금씩 범위를 확대했습니다. 지금은 첨단 농업의 중심에 서 있으며, 세계로 뻗어 나가는 중입니다. 이곳에 계신 여러분, 청년 농부들 가운데는 두바이로 떠날 사람도 있을 겁니다. 첨단 기술로 무장한 대한민국 농부가 세계를 놀라게 하는 순간이 되겠죠. 전 여러분들과 함께 부자 농부의 꿈을 이뤄 나갈 것입니다.”
연설이 끝나자 박수가 터져 나왔다.
청년 농부들이 나에게 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