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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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민주에게 내가 직접 아버지를 만나보겠다고 전했다.

“엄마와도 상의했어요. 대표님이 아버지를 만나는 일에 대해서.”

그녀는 잠시 뜸을 들였다.

“엄마와 제 생각은 같아요. 아버지도 이곳에서 함께 일했으면 좋겠어요.”

“반가운 소리네요.”

“그런데, 쉽지 않을 거예요.”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모녀도 아버지를 설득하지 못할 거라는 얼굴이었다.

“제가 아버지를 설득해 보겠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정말 좋을 거 같아요. 가족이 함께 목장에서 일하다니... 그 일을 겪고, 그런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요.”

기대와 두려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설민주에게 집 주소를 받았다.

곧장, 설강인을 만날 생각이었다.

“좋은 소식 가지고 돌아오겠습니다.”

설강인을 만나러 진주로 출발했다. 원래 집은 경기도 양평이었다. 목장을 접고 친가가 있는 진주로 온 것이다.

설강인은 지금은 목수 일을 배워 집 짓는 일을 하고 있었다.

“실례합니다.”

아무리 외쳐도 감감무소식이다.

“누구요.”

몇 번을 외친 끝에 문이 열렸다. 반백의 남자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

“따님과 함께 일하는 김덕명이라고 합니다.”

그는 날 가만히 바라보았다.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곧 입을 열었다.

“들어오게.”

집안은 바깥과 달리 안은 정리가 잘 돼 있었다.

“같이 한잔하겠나?”

설강인이 잔을 주며 말했다. 사발에 우윳빛 막걸리 보였다.

그가 직접 담근 막걸리였다.

잔을 받았다. 만나자마자 술을 마시는 건 처음이었다. 그 맛이 궁금하기도 했다.

막걸리 한 잔을 쭉 들이켰다.

맛이 보통의 막걸리와 달랐다. 걸쭉하면서도 막걸리 특유의 쏘는 맛이 없었다.

요거트와 절묘하게 어울리는 맛이었다. 일부러 이렇게 담근 건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요거트의 비밀은 확실히 그의 막걸리에 있는 듯했다.

“그런데 여기까지 온 이유가 뭔가?”

“어르신을 뵙고 싶어서 왔습니다.”

“무슨 용건인가?”

함께 목장에서 일할 것을 말했다. 그는 가만히 듣기만 했다.

자연 방목과 단일 목장에 대한 계획도 이야기했다.

마지막엔 시제품으로 만들 막걸리 요거트도 말했다.

설강인은 말을 끝까지 듣고 입을 열었다.

“난 막걸리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네.”

“알고 있습니다. 어르신은 젖소를 기르고 목장을 운영하는 분이라는 걸.”

“알고 있다면, 막걸리나 한잔하고 가게나.”

예상대로 그의 반응은 차가웠다.

설강인은 갈증이 났는지, 막걸리를 시원하게 마셨다.

난 그가 잔을 내려놓기만을 기다렸다.

“목장을 다시 찾을 방법이 있습니다.”

설가네 목장 사람들

설강인은 눈을 반짝였다. 갑자기 술이 깬 사람 같았다.

“그게 무슨 말인가? 목장을 찾을 방법이 있다니?”

그는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지금 운영 중인 목장이 성공을 거두면, 제 2의 목장을 만들 계획입니다. 경기도 양평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르신이 목장을 했던 지역이지요. 그 목장은 어르신께 맡길 생각입니다.”

“지금 나와 장난을 하는 건가?”

설강인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어르신이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보고 판단한 겁니다. 장난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지금 있지도 않는 목장을 나에게 맡기겠다는 거지 않나?”

“당장 목장을 만든다고 말씀드리진 않았습니다. 지금 운영하는 목장이 성공을 거둔다는 전제하에 말씀드리는 겁니다.”

설강인은 차가운 눈빛으로 날 노려보았다.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지금 운영하는 목장이 성공한다는 보장이라도 있는가?”

“처음부터 성공을 보장할 수 있는 일은 어떤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차별화 전략에 따라 성공의 여부가 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차별화 전략이라니, 그게 무슨 말인가?”

“목장을 운영하는 사람들은 시작부터 우유를 납품할 생각부터 합니다. 저희 목장의 주력 상품은 우유가 아닙니다.”

“우유가 주력이 아니라니, 이상하군. 목장에서 우유를 파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그 당연한 일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목장을 잃었습니다. 우유 대란이 났을 때, 우유 쿼터제가 도입됐습니다. 할당받은 우유 말고는 모두 헐값에 넘겨야 했습니다. 목장이 무너지는 순간이었죠.”

말이 끝나자, 한숨이 이어졌다.

설강인도 피해를 본 농부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과거의 아픔을 들추고 싶어서 꺼낸 이야기는 아닙니다. 목장이 나아갈 방향과 차별화 전략을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자네의 차별화 전략은 요거트란 말이군.”

“맞습니다. 설가네 목장에서 만들었던 막걸리 요거트입니다.”

“자네가 말한 차별화 전략이 요거트라는 것은 알겠네만, 그래도 이해할 수 없는 게 있네. 막걸리 요거트가 잘 팔릴 거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나?”

“당장 막걸리 요거트가 팔릴 거라고 단언 드릴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저한테 어떤 계획이 있는지는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계획이 뭔가?”

“전 막걸리 요거트의 고정고객을 모을 생각입니다.”

“고정고객?”

“막걸리 요거트를 필요로 하는 고객들이죠.”

“누가 막걸리 요거트를 원한다는 말인가?”

“식품이든 물건이든 원하는 고객이 있으면 시장이 형성됩니다. 막걸리 요거트는 변비에 탁월한 효과가 있습니다. 따님도 막걸리 요거트의 덕을 본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전 막걸리 요거트를 원하는 소비자들에게 다가갈 생각입니다.”

설강인의 표정이 변했다. 한결 부드러워져 있었다.

“자네가 무턱대고 목장을 운영한다고 여겼네. 처음부터 거절한 까닭이지. 내가 속단을 한 것 같구먼.”

그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젖소를 키워 우유를 팔 생각만 하는 줄 알았네. 자네와 같은 생각은 하지 못했지.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어디에서 모을 생각인가? 자네가 말하는 고정고객 말일세.”

“각종 커뮤니티와 카페를 통해서 모을 생각입니다.”

설강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경청했다.

그는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정도 수긍하는 표정이었다.

함께 일할 것을 다시 한번 제안했다. 그는 한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석 달 기한으로 일해 보겠네. 자네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해 보고 싶군.”

“감사합니다.”

3개월이란 기한을 정했지만, 마음이 돌아선 것은 확실했다.

나에게 이루지 못한 꿈을 말하기도 했다.

설강인의 꿈은 목장에 체험 학습장을 만드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송아지에게 젖을 먹이고, 뛰어노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했다.

생각보다 순박한 면이 있는 남자였다. 그는 당장 일어서 목장으로 가자고 말했다. 목장이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하는 얼굴이었다.

성격이 급했다.

난 그를 붙잡았다. 많이 마시진 않았지만, 막걸리를 마신 상태였다.

당장 움직일 순 없었다.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새벽에 떠나기로 결정했다.

새벽까지 그와 목장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설강인에게 로봇 착유기를 구입할 계획도 말했다. 낙농업 경력이 20년이 넘었지만, 처음 듣는 이야기라고 했다.

유럽에서도 로봇 착유기의 역사가 짧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도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젖소 관리부터 유기농 사료를 만드는 법까지. 그는 풍부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와 함께라면 목장이 한층 업그레이드될 것 같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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