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작하는 농부의 자식
행운이 찾아왔다. 인생을 바꿀 절호의 기회였다.
행운의 여신이 불쑥 나타난 건, 불운이 극으로 치닫던 순간이었다.
* * *
난 광고 대행사의 기획자였다. 보통은 AE(Account Executive)라고 부른다.
한마디로 정의하면 광고주들의 매출을 올리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사람이다.
이 직업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했다. 내 수준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때는 돈이 절실했다.
부모님이 거액의 빚을 떠안은 상태였다. 맏아들인 내가 넋 놓고 앉아 있을 때가 아니었다.
무조건 돈을 벌어야 했다.
모든 직장인이 그렇지만 회사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한 푼이라도 더 주는 곳이기에 선택한 직장이었다.
적성과 성격 따윈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광고 대행사는 나와 맞지 않는 부분들이 많았다.
“우리 담당은 개처럼 일할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광고주들은 복종하는 AE를 선호했다. 돈값을 하란 소리인데, 광고를 집행하는 동안은 일 잘하고 고분고분한 노예를 원했다.
대놓고 그런 말을 할 때도 맞장구를 쳐줘야 했다. 널린 게 대행사였다. 광고주는 기분에 따라 대행사를 바꿀 수 있었다.
변덕스러운 광고주를 관리하는 것은 AE는 최우선 과제였다.
문제는 내 성격이었다. 개가 되진 못할지언정 하는 척도 잘하지 못했다. 실력만으로 인정받기는 한계가 있었다.
“밤을 새우든, 외주의 외주를 고용하든 무조건 시간 맞추세요.”
외주업체를 쪼는 일도 AE의 몫이었다. 대행사는 하나의 광고 프로젝트를 관리 감독하는 동안 사이트 구축이나 영상 등의 일들은 외주업체로 넘겼다.
광고에 필요한 콘텐츠는 외주를 통해 제작하는 것이다. 하청의 하청이다. 당연히 갈구는 능력도 훌륭한 AE의 자질 중 하나였다.
시간을 맞추지 못했거나, 조금만 문제가 있어도 트집을 잡았다. 그걸 빌미 삼아 돈을 주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직장 동료들보다 외주업체 직원들이 나를 더 좋아했다. 특별히 한 일은 없었다. 그들도 똑같은 동료라고 생각하고, 동등하게 대했을 뿐이었다.
그게 화살이 되어 심장에 박힐 줄은 몰랐다.
인사 평가서에 관리능력 부족이라고 기재됐다. 누군가 그 사실을 소문냈고, 동료들에게 외면당했다.
“이 바닥은 끝까지 살아남는 놈이 승자야.”
광고주 관리와 외주업체를 쪼는 일 말고도 할 일이 많았다. 내부 경쟁에서도 살아남아야 했다.
생존전략을 세우고 매일같이 긴장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다. 휴일에도 시간을 쪼개, 광고 효율을 분석하는 프로그램을 배우는 건 기본이었다.
최근 트렌드의 동향에 관련한 세미나와 모임에도 주기적으로 참석해줘야 했다.
하루도 편안한 날은 없었다.
‘왜 이러고 살지?’
삼십 대 중반에 성적표를 확인했다. 좆 빠지게 일했지만, 낙제 수준이었다.
건강도 안 좋았다. 얼굴을 해골 같고 몸은 고사목처럼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나이에 비해 혈압과 간 수치가 높았다.
일 년에 한 번 병원 신세를 지는 게 연중행사가 됐다.
그래도 버텨야만 했다. 아직 남은 빚이 있었다.
머릿속에선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외로워서 힘든 거야.’
외로워서 멘탈이 흔들린다고 확신했다. 하지만 나에게 연애는 사치였다.
결국, 결혼정보업체에서 만난 여자와 석 달 만에 결혼했다. 외모며 환경을 따지지 않았다.
함께 살고자 하는 의지면 충분했다. 나머지는 살면서 맞추면 될 거라고 여겼다. 그때까지만 해도 결혼이 안식처가 돼줄 거라고 믿었다.
순진한 생각이었다.
“우리 헤어져!”
환상이 깨지는 건,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결혼 생활은 직장에서 펼쳐지는 레이스보다 뜨겁고 치열한 게임이었다.
아내는 매달 부모님께 돈을 부치는 걸 못마땅하게 여겼다. 사소한 다툼은 언제나 큰 싸움으로 번졌다. 가족에 대한 험담과 치부를 찌르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아이가 생기면 달라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더 큰 화만 부르고 말았다. 그녀는 육아 스트레스를 감당하지 못했다.
나도 더는 그녀를 감당할 수 없었다.
우린 잠도 따로 자고, 밥도 같이 먹지 않았다. 서로 위로하는 부부가 아니라, 세상에 둘도 없는 원수가 된 것이다.
결혼 5년 만에 우린 합의 이혼했다. 양육권은 그녀가 가져갔고, 난 양육비나 토해내는 기계로 변했다.
그때부터 일상의 모든 것들이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제 게임은 끝났다.’
마흔을 넘기고 직장에서 나왔다. 자발적인 퇴사가 아니었다. 그 뒤로 한동안 집 밖을 나가지 않았다. 사람을 만나기도 싫었다.
유일하게 하는 일은 약속된 시간이 돈을 부치는 일이었다. 이혼한 아내에게 보낼 양육비와 부모님께 부칠 돈이었다.
퇴직금이 바닥날 무렵엔 불안해 잠을 잘 수 없었다. 평생 누구에게 돈 한 번 빌린 적 없었지만, 빚쟁이가 된 기분이었다.
다시 뭔가를 시작해야 했지만,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정확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모든 걸 포기하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하필이면 엄마였다.
한참을 망설인 끝에 전화기를 들었다.
“엄마.”
입을 여는 순간,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덕명아. 아버지가······.”
어머니는 아버지의 죽음을 전했다. 순간 머릿속에 깜깜해졌다. 영혼이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아들마저 세상을 등진다면.’
생각은 거기서 멈췄다.
난 당장 하동으로 내려갔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