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너 주려고
민주혁의 시선이 나에게서 미끄러져서 윤재영에게 닿았다.
“지금 뭐 하십니까?”
“음? 우리 뭐 했나요, 이한?”
“…내가 이름을 말한 적이 있던가요?”
“부르는 걸 들었죠. 나도 귀가 있으니까요. 내 이름도 알면서 뭐 어때요?”
그렇게 말하는 모습이 당당함을 넘어서 뻔뻔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기분이 묘했다.
민주혁이 문을 가볍게 노크해서 윤재영의 시선을 자기에게로 돌렸다. 가볍게 노크한 건 맞겠지? 거의 쾅쾅 소리가 나긴 했는데 그냥 문 자체가 소리가 크게 울리는 재질일지도 몰랐다.
“볼일은 다 본 것 같은데, 문은 이쪽입니다.”
“아하…. 무슨 걱정하는 건지는 알겠는데 그런 거 아니에요.”
“가깝습니다. 떨어지십시오.”
“그렇게 몰아가면 좀 억울한데요.”
윤재영이 ‘내 얘기를 들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나.’ 하고 중얼거리며 과장되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고는 순순히 방을 나가나 싶더니 몇 걸음 옮기다가 몸을 휙 틀었다. 나와 눈이 딱 맞았다.
“갈게요. 일행분께 해명 좀 해 줘요. 아, 그리고 다음에는 제대로 보여 줘요.”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가 사르르 웃으며 자기 눈가를 톡톡 쳤다. 그러고는 방 밖으로 재빨리 빠져나갔다.
‘시스템을 보게 되면서부터 눈동자 색이 바뀌었었지. 그래서 좀 특이해 보이나?’
나도 처음에는 거울을 볼 때마다 어색했었는데 그건 적응이 안 되어서 그런 거였고, 지금은 딱히 아무렇지도 않았다. 나보다 더 연하고 밝은 눈동자 색을 가진 박율과 라엔이 있으니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멍하니 생각하며 눈가를 매만졌다. 민주혁은 아직 문 앞에 서 있는 채였다.
“안 들어와?”
“너는 아무렇지도 않아?”
고집스럽게 팔짱을 낀 채로 나를 바라보는 민주혁은 조금 언짢은 표정이었다. 나 때문이 아니라 아까까지 이 자리에 있었던 윤재영 때문인 듯했다.
“뭐에 대해서? 아무 일도 없었는데.”
“아무 일도 없긴 뭐가 없어.”
“정말이야. …아, 저 주스? 나한테만 준 건가. 같이 마실래?”
“됐다. 위기감이 아예 없네. 네가 아무렇지 않대도 나는 신경 쓰이거든.”
“그러니까 뭐가?”
“어쩔 수 없지. 내가 알아서 잘해 볼게.”
민주혁은 맥이 탁 풀린 것처럼 축 늘어져서 내 침대 위로 몸을 던졌다. 멀쩡히 있는 자기 방을 두고 남의 방에 들어온 것치고는 꽤나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게다가 내 질문에 대답해 줄 생각 역시 없는 듯했다.
그는 이렇게 은근히 자기 멋대로인 면이 있었다. 물론 그게 싫지는 않았다. 나도 만만찮게 멋대로인 면이 있으니까. 내가 주스가 담긴 유리잔을 들어서 그의 뺨에 살짝 가져다 대자 그가 몸을 흠칫 떨었다.
“앗, 차가. 난 진짜 됐으니까 너 많이 마셔. 나는 단 거 그렇게 안 좋아해.”
“너 전에 항상 사탕 같은 거 가지고 다니지 않았어?”
“그건 너 주려고.”
“…어?”
내가 멍하니 되묻자 민주혁이 키득 웃으면서 나를 올려다봤다.
“좋아하는 것 같길래. 왜, 새삼 감동이야?”
방금 무슨 말을 들었는지 제대로 인식하자마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무렇지 않은 척 침착하게 그에게서 등을 돌려 침대에 걸터앉았다.
“…고마워.”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다시 책상에 올려 두었다. 차가운 걸 마시고 나니까 좀 진정되는 것 같았다. 예기치 못한 데서 그의 시선이 내게로 향해 있었다는 걸 깨닫게 되어 괜스레 마음이 떨렸다.
“주스 맛있다. 새콤달콤하고 향도 좋아. 식전이나 식후에 먹기 좋겠다. 이 과일이 여기 특산품이라고 할 만하네.”
부끄러운 마음에 다른 이야기로 어색하게 주제를 돌리는데 민주혁이 내 허리를 덥석 안고는 자기 품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너는 피부가 하얘서 빨개지는 게 다 보여.”
가벼운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몸을 일으키려고 힘을 줬지만 민주혁이 한쪽 팔로 내 허리를 단단히 안고 있는 감촉만 선명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가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면 나로서는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
그의 말처럼 달아올라서 빨개져 있을 내 목덜미에 민주혁이 얼굴을 묻었다.
“놔. 더워.”
“선이한. 너 잘 먹고는 있는 거야? 허리가 무슨 한 줌이야.”
“아… 흐읏, 간지러워.”
신음처럼 숨을 급하게 들이켜며 몸을 구부렸다. 그 큼직한 손으로 내 옆구리를 가만가만히 눌러 보는데 안 간지러울 리가.
민주혁이 나를 간지럽힐 의도였을 거라고 확신했지만, 막상 내 목소리를 듣고는 나 못지않게 놀라선 숨조차 멈추는 걸 보니 아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등을 그에게 맞댄 채로 안겨 있어서 표정을 볼 순 없었지만 어쩐지 긴장한 듯한 분위기였다.
지금은 안 간지러우니까 괜찮은데. 그렇게까지 굳어 있을 필요 없다는 뜻으로 민주혁의 팔뚝을 쿡쿡 찌르며 말을 이었다.
“지금까지 밥 같이 먹었잖아. 내가 배부르다고 해도 다들 한 숟갈씩 꼭 더 먹이는 거 봤으면서. 심지어 너도 그랬잖아.”
“…어. 그랬지, 참.”
민주혁은 어딘가 얼이 빠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로 나를 안고 있기만 하기에 결국 내가 다시 말을 꺼냈다.
“아까 무슨 일 있어서 왔던 거 아니야? 나는 왜 찾았어?”
“아, 맞다.”
그제야 목적을 떠올린 민주혁은 상점가에 같이 가기 위해서 나를 찾았다고 말했다. 형들은 이 도시가 마물에게서 안전한 게 맞는지 확인할 겸 주변을 둘러보러 갔고, 자기는 막내의 특권으로 나와 함께 있을 시간을 확보했다고 덧붙이는 모습이 퍽 신나 보였다.
“거의 데이트 아니야?”
“그래, 맞아.”
데이트라는 말을 굳이 강조하다가 내 반응이 시원찮다며 불만을 내비치는 민주혁의 투덜거림을 한 귀로 흘렸다. 내가 보기에는 다들 민주혁의 텐션을 감당하기 어려워서 내게 맡길 겸 두고 간 것이 분명했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민주혁은 묘하게 들떠 보였다.
“가자.”
지금도 자리에서 몸을 훌쩍 일으켜서 나를 끌다시피 데리고 나가는 걸 보니 확실했다.
◇
“뭘 사야 하는데?”
“멀미약. 여기는 항구 도시라서 뱃멀미용 약을 판다고 들었거든.”
상점가는 활기가 넘쳤다. 민주혁은 느긋하게 가판대를 둘러보다가 동글동글한 떡이 꽂힌 꼬치를 내게 기어코 사 줬다. 물론 맛있었다. 민주혁이 자기 건 안 사고 굳이 내가 먹던 꼬치를 한 입 먹은 걸 너그럽게 봐줄 만큼.
사실 봐주고 말고 할 것도 없긴 했다. 어차피 그가 사 준 거니까. 그런데 자기가 한 입 뺏어 먹었다는 이유로 또 다른 걸 사 주려고 하길래 한사코 말릴 수밖에 없었다. 멀미약을 사러 간다더니 이러다간 먹기만 하다가 해가 질지도 몰랐다. 게다가 배부르고.
민주혁은 조그만 별 모양 사탕이 가득 담긴 유리병을 사서 내 손에 들려 주고 나서야 마법 약 상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입에서 순식간에 녹아서 사라지는 사탕이 달콤했다.
“와, 넓다.”
“그렇지? 여기 마법 약 상점이 규모가 있는 편이야. 지금은 빠진 물건이 많아도 장이 열릴 때쯤이면 가득 채워질걸.”
민주혁의 말처럼 텅 빈 선반이 몇 개 있었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확실히 넓었다. 그는 멀미약이라고 적혀 있는 선반 위에 놓인 손바닥만 한 유리병들을 흥미롭게 살펴봤다.
“전에는 멀미약에 맛 같은 거 없었는데. 야, 너는 딸기 맛이랑 포도 맛 중에서 어느 게 좋아? 아니면 아무 맛도 안 나는 거? 이렇게 세 가지 중에서 골라.”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네가 마실 거니까.”
그는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얼굴로 나를 봤다. 내가 전에 마차를 탈 때 멀미한다는 걸 핑계로 댔던 걸 이제야 떠올렸다. 괜히 헛걸음하게 한 것 같아 양심이 조금 찔렸다.
“나는 뱃멀미 안 해. 혹시 나 때문에 일부러 온 거야? 그럴 필요는 없었는데.”
“또 무조건 괜찮다는 말부터 하지. 네가 뱃멀미하는지 안 하는지 어떻게 알아. 배 타 봤어?”
그렇게 묻는다면 할 말이 없었다. 하긴 시스템이 통증은 안 느끼게 해 주지만 메스꺼움 같은 건 없애 주지 않는 듯했다. 약을 먹어 둔다고 해서 나쁠 것도 없으니 그냥 수긍하고 넘어가도 괜찮을 듯싶었다.
“그… 미안. 내가 생각 없이 말했어. 나도 배 타 본 적은 몇 번 없어. 너도 이제 타 볼 거고. 그치?”
내가 생각에 오래 잠겨 있었는지 민주혁이 급하게 말을 이었다. 어쩐지 달래는 듯한 목소리로 안절부절못하며 내 얼굴을 살피는 것 같기도 했다. 체격도 큰 애가 이러고 있으니 꼭 풀 죽은 커다란 강아지 같아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대체 뭐가 미안해? 신경 쓸 것도 많다. 걱정해서 한 말인 거 알아, 고마워. 내 것만 사면 돼?”
“어? 아…. 라엔 형님 거랑 하견 형님 것도.”
“너랑 율이 형은 괜찮은가 보네.”
“맞아.”
그새 원래 모습을 회복한 민주혁이 점원에게 물어보고 올 게 있으니 그동안 어떤 맛을 먹고 싶은지 고민해 보라고 말하고는 순식간에 카운터 쪽으로 갔다. 그러고는 몇 마디를 나누더니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표정으로 돌아왔다.
“더 강화된 버전의 멀미약은 없다고 하네. 라엔 형님은 이 약이 효과가 없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그래도 사 가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러려고. 형님들은 아무 맛 안 나는 걸 선호하실 테고. 너는?”
“…나는 딸기 맛.”
“그럴 것 같았어. 꼭 자기 같은 걸 먹네.”
민주혁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아까 살펴보니 딸기 맛이나 포도 맛이라고 어린이용인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민주혁이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애 같아서 뭔가 부끄러웠다. 송하견이랑 라엔과 한 살 차이밖에 안 나고, 심지어 민주혁과는 동갑인데도.
“이왕이면 맛있는 게 낫잖아.”
“그래, 그래.”
내가 논리적으로 반박했음에도 부러 건성으로 대답하는 건 나를 놀리려는 의도였다. 그래도 맛있는 건 맛있는 거다. 단 걸 싫어한다는 민주혁은 모르겠지만.
마법 약 상점에서 나와서 송하견의 부탁으로 여기서만 구할 수 있다는 약초까지 산 후에 여관으로 돌아왔다.
◇
짠 바다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지금 내 눈앞에 적당한 크기의 배가 바다 위에서 출렁이고 있었다. 이제 곧 저 배 위로 올라타 바다로 향할 예정이었다.
윤재영은 건들거리는 듯한 겉모습과는 다르게 일은 꼼꼼하게 처리하는 성격이었다. 박율이랑 라엔과 며칠 동안 꼬박꼬박 밖으로 나가서 항구를 둘러보는 듯하더니 좋은 배를 구했다.
딸기 맛이 나는 멀미약은 역시나 좋은 선택이었고, 균열을 살펴보러 가는 것이니 마냥 설레할 수만은 없었지만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을 맞고 있으니 마음도 조금 떨리는 듯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지만.
“라엔 형, 괜찮아요?”
라엔은 입술을 짓씹은 채로 파도의 움직임에 따라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는 배를 바라봤다. 아직 배에 오르지 않았는데도 벌써 안색이 하얗게 질린 채였다.
“네. 이한은 약 잘 마셨죠?”
나는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라엔이 지금 나를 신경 쓸 때가 아닌 것 같은데. 같이 갈 수는 있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