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마음에 들 거야
바다까지 다 살펴봐야 한다는 말에 내가 얼이 빠져 있자 박율이 가볍게 웃으며 나를 천천히 끌어당겼다.
“다 방법이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우선 마을 안으로 들어가서 여관을 잡자.”
“다행히 지금은 사람이 많지는 않을 시기네요.”
“그래. 방을 잡는 게 어렵지는 않겠어.”
“사람이 많은 시기와 적은 시기가 따로 있어요?”
“보통은 그래. 먼 지역으로 떠났던 배들이 항구에 들어올 때쯤이면 장이 크게 서고 다른 지역에서도 사람이 몰리거든. 그때는 여관이 거의 만실이야. 지금은 그 시기가 아니니까 대부분 비어 있겠지만.”
박율의 말이 맞았다. 마을에 들어서자 한산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붐비는 것도 아닌 적당히 활기 있는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돌아다니는 사람이 꽤 있어서 우리에게 눈길이 쏟아지는 일도 없었다. 그때의 마을과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서 긴장이 조금 풀렸다.
“박율 형님. 여관은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잡았으면 합니다.”
“그래, 좋은 의견이야. 형도 그럴 생각이었거든. 또 신경 써야 할 만한 건 뭐가 있지? 치안…은 대부분 괜찮을 테고. 상점가가 근처에 있는 곳이 나으려나.”
“네. 그래도 길이 복잡한 곳은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길을 잃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며 무의식적으로 나를 바라본 라엔과 시선이 맞았다.
“나 길은 잘 찾을 수 있어요.”
“음…. 알아요. 내가 길치여서요.”
“정말요?”
“네.”
군더더기 없이 대답하는 라엔을 미심쩍게 바라봤다. 그러자 라엔이 재빨리 덧붙였다.
“정말이에요. 나중에 내가 길 잃어버리면 이한이 찾으러 와 줘야 해요.”
이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까 사실인 듯했다. 괜히 의심했던 게 미안해서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노력할게요.”
“…고마워요.”
라엔이 어쩔 줄 몰라 하다가 살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순진한 어린애를 속인 게 미안하기도 하고 홀랑 속은 모습이 귀엽기도 하다는 듯이 수많은 감정이 찰나의 순간에 그의 얼굴에 스쳐 지나간 것 같았다. 물론 내 착각일 테지만.
상점가를 지나자 거리에 내어놓고 파는 음식들이 많이 보였다.
“먹고 싶은 건?”
“괜찮아요.”
“생기면 말해.”
송하견은 여기저기 정신이 팔려서 천천히 걷는 내게 걸음을 맞춰 주었다. 그러다가 내가 한곳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자 먼저 물어봐 왔다.
“먹어 보고 싶어?”
“아, 그냥 처음 보는 과일인 것 같아서, 신기해서요.”
주먹만 한 크기의 동그란 과일은 바다를 닮은 새파란 색을 띠고 있었다. 위에 달린 조그만 꼭지에는 초록빛의 나뭇잎이 하나씩 달려 있었다. 실제 과일이 아니라 모형 같았다.
“여행객인가요?”
바로 옆에서 불쑥 들려오는 목소리에 놀라서 송하견에게 바짝 붙었다. 송하견이 괜찮다는 듯이 내 등을 차분히 다독이며 말을 건 사람에게 긍정의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구나. 이 과일을 처음 본다고 해서 그런 것 같았어요. 여기 특산품이거든요.”
갑자기 누군가 말을 걸어올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기에 놀랐을 뿐이지 사람이 무섭거나 한 건 아니었다.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몸을 틀자 노란색의 하늘하늘한 원피스를 입은 내 또래처럼 보이는 여자가 내게 눈을 맞춰 왔다.
“놀라게 해서 미안해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거의 금발에 가까운 연한 갈색의 머리칼이 허리께에서 찰랑였다. 구불구불한 머리칼이 바람에 부드럽게 흔들렸다.
“새콤한 거 좋아해요?”
“음, 별로 안 좋아해요.”
“그러면 그냥 먹기에는 입맛에 맞지 않을 거예요. 레몬처럼 신맛이 나거든요. 그래도 향은 좋아요. 맡아 볼래요?”
그녀가 들고 있던 종이봉투에서 과일 하나를 꺼내서 내 손에 쥐여 줬다. 허브처럼 진한 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의외로 달콤한 느낌의 향이었다.
“그렇네요. 고마워요.”
“청을 담가서 차로 마시면 맛있어요. 잘 상하지 않으니까 방 안에 방향제처럼 둬도 좋고요. 아, 그건 그냥 가져가요. 여기 온 선물이에요. 사실 묶음 할인이라고 신나서 너무 많이 사 버렸거든요.”
“그래도 괜찮아요. 마음만 받을게요. 감사합니다.”
돌려줄 수 없는 호의는 받기 어려웠다. 내가 종이봉투 안에 과일을 다시 넣어 놓자 그녀가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다는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푸스스 웃었다.
“숙소는 정했어요?”
“아직이요.”
“제가 오빠랑 여관을 운영하고 있거든요. 생각 있으면 들러 봐요. 상점가에서 우측으로 틀어서 길을 따라가다 보면 있는 곳이에요. 건물을 세운 지 얼마 안 돼서 유명하진 않지만 지내기에 나쁘지는 않을 거예요.”
“엇, 거기가 혹시 이 여관 아닙니까?”
박율이랑 라엔과 함께 지도를 보며 여관을 고르고 있던 민주혁이 우리의 대화를 듣다가 끼어들었다. 민주혁이 짚는 위치를 보고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네요. 형님들, 이쪽 여관도 생각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안내해 줄 수 있나요?”
박율의 말에 그녀가 앞장서며 당차게 대답했다.
“물론이죠! 마음에 드실 거예요.”
여관은 상점가에서 멀리 있지 않았다. 그녀의 말처럼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건물이어서 외관이 말끔했고, 여관 앞쪽으로 바다도 보였고, 주변 길이 복잡하지도 않았다. 이곳에서 지내기로 결정하고 여관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은 손님이 한 분도 없어요. 아마 다른 여관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특별히 원하는 방이 있다면… 헉, 오빠.”
그녀가 책상에 옆드려서 자고 있는 남자를 보자마자 기겁하며 달려갔다.
“오빠, 좀 일어나. 손님들 오셨어.”
“으응? …어, 안녕하세요.”
그는 졸음기 가득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부스스한 몰골이었음에도 그녀와 쌍둥이처럼 닮아 보였다. 내 시선을 알아챈 그가 웃었다. 웃는 모습도 비슷했다.
“쌍둥이 맞아요. 닮았다는 얘기를 많이 듣거든요. 제가 오빠고, 윤재영이에요. 재영이라고 불러요. 쟤는 윤진이에요.”
“저도 진이라고 불러도 돼요.”
“여기 소개랑 그런 건 얘가 다 해 줄 거예요.”
소개를 마친 윤재영이 다시 자리에 엎드려서 자려고 하자 윤진이 그의 옷을 잡아서 일으켜 세웠다.
“그럴 거면 들어가서 자.”
“안 잘 거야.”
“맘대로 하든가. 휴, 이런 모습 보여 드려서 죄송해요. 얼마나 있으실 건가요?”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두 달… 아니지, 넉넉하게 세 달 정도 지낼 생각이에요.”
박율의 대답에 윤진이 고개를 갸웃했다.
“오래 머무시네요. 장이 서기 전까지는 여기에 그렇게 볼 게 많지는 않을 텐데….”
“느긋하게 온 여행이라서요. 바다를 좋아하는 일행이 있기도 하고요.”
다른 이유를 대는 박율의 모습이 익숙해 보였다. 괜히 마물이니 균열이니 하는 말을 꺼내는 것보다 이렇게 둘러대는 편이 훨씬 나으니까 지금까지 그렇게 해 온 듯했다.
“하긴, 여유로운 게 좋죠.”
윤진이 계산기를 톡톡 두들겼다.
“1층은 식당이고, 방은 2층하고 3층에 있어요. 점심이랑 저녁때에는 식당을 열어서, 내려와서 바로 식사하실 수 있어요.”
“좋네요.”
“나름 맛집이에요. 지금은 아니지만 장이 설 때면 사람이 줄을 서서 먹을 정도니까요. 여기, 방 다섯 개에 세 달로 계산했어요. 지금은 손님이 아무도 없어서 원하시는 방 아무 곳이나 정해서 사용하면 돼요. 3층이 가장 인기가 많더라고요.”
박율이 계산기를 보더니 가늠하듯 흐음, 하고 말을 뱉었다. 윤진이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그… 다른 데보다 값이 좀 나가는 편이죠? 그래도 건물을 새로 짓기도 했고 방도 넓어서, 그런 걸 생각하면 비싼 편은 아니에요. 오래 묵을 거라고 하셔서 어느 정도 깎았고요. 방 한번 보실래요? 아니면… 이 정도까지는 더 할인해 드릴 수 있어요.”
큰맘 먹은 것처럼 계산기를 다시 두들기려는 진을 박율이 막아 세웠다.
“아니, 괜찮아요. 시설이 좋다니 마음에 드네요. 어떤 게 값을 치르기 적당할지 고민하는 중이었어요. 고민이 너무 길어졌나 보네요.”
박율이 손바닥을 펼쳤다. 소환된 보석이 가볍게 그 위에 내려앉았다.
“오.”
그전까지 심드렁하던 윤재영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러고는 보석을 꼼꼼하게 살폈다.
“안 적당한데요. 이거면 여기 건물 전체를 세 달 동안 빌리고도 남아요.”
“네.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고, 괜찮다면 부탁하고 싶은 것도 있어서요.”
“그래도 이건 너무 과한….”
“아니요, 부탁 먼저 들어 볼게요. 뭔데요?”
윤재영이 윤진의 말을 끊고 열의 가득한 눈으로 박율을 바라봤다.
“배를 빌리려고 해요. 그쪽 분야는 잘 몰라서, 적당한 걸 빌릴 수 있도록 한 번만 동행해 주셨으면 해요.”
“배까지 빌린다고요?”
윤재영처럼 나도 놀라서 박율을 바라봤다. 바다 쪽에 있는 균열을 돌아볼 방법이라는 게 배를 빌리는 거였구나. 텔레포트는 거리에 따라 마나가 소모되는 양이 다르다고 했으니 확실히 좋은 방법이긴 했다. 그렇다고 놀랍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윤재영은 보석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하긴, 이런 걸 이렇게 턱턱 꺼낼 정도면 그럴 만도 하겠다….’ 하고 혼자 뭔가를 납득했다.
“잘 생각하셨네요. 다른 건 모르겠는데 배를 빌리는 거라면 외지인한테는 쉽지 않죠. 그리고요?”
“이게 전부예요.”
“…끝이라고요?”
“부탁은요. 이제 묻고 싶은 것만 남았네요.”
박율이 책상 위에 올려둔 보석을 윤재영이 공손히 가져갔다.
“뭐든 물어보세요. 우선 방부터 잡으시겠어요?”
◇
윤진의 말처럼 3층의 방이 가장 인기 있을 만했다. 커다란 창문 밖으로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넓은 침대와 포근한 이불도 가지런히 개어 있었다. 작은 책상과 의자, 그리고 책을 몇 권씩 꽂을 수 있는 작은 책꽂이도 구석에 마련돼 있었다.
창문을 열자 바닷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그렇게 잠깐 가만히 서 있는데 똑똑, 하고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요.”
“누군 줄 알고 함부로 들어오라고 해요?”
한 손으로 방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윤재영이었다. 손에 들린 나무 쟁반에는 파란 음료가 담긴 투명한 유리잔이 올려져 있었다.
“마셔요. 윤진이 전해 달라고 하던데요. 여기 특산품인 과일로 담근 청이에요. 이건 새콤달콤해서 입맛에 맞을 거라는 말도 전해 달래요.”
자기가 직접 할 것이지, 하고 투덜거린 윤재영이 쟁반을 책상 위에 올려 뒀다.
아까 내가 과일을 안 받아서 이렇게 전해 주는구나. 입가에 슬쩍 미소가 지어졌다.
“문도 안 잠그고 있었나 봐요. 여기 손잡이 돌리면 잠글 수 있….”
문손잡이를 딸깍이며 시범을 보이던 윤재영이 나를 바라보더니 말을 멈췄다. 그러고는 내게로 불쑥 다가왔다.
“눈 색, 원래 이래요?”
“어… 네?”
“아까는 잠결이라 몰랐나 봐요. 너무 예쁜데. 보석 같아.”
윤재영이 멍하니 나를 내려다봤다. 그의 시선이 내 눈동자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가 내 얼굴로 손을 뻗으려는 찰나, 쾅 소리를 내며 방문이 열렸다.
“야, 선이한.”
민주혁이 급하게 온 것처럼 숨을 골랐다. 그는 평소의 장난스러운 웃음과는 달리 불쾌한 상황에서 억지로 짓는 것 같은 인위적인 웃음을 얼굴에 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