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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113화 (113/150)

113화.

나는 준비됐어요

“누구야?”

박율은 대뜸 그렇게 물으며 허리를 숙여 내 눈가를 쓸었다. 고장 난 것처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눈물방울이 그의 손을 적셨다.

“누가 그랬어.”

“아무도….”

흐느끼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서 입술을 깨무느라 제대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내가 가만히 고개를 젓자 박율이 한층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말하고 싶지 않아?”

“…….”

“물어보지 말까?”

“…네.”

“그렇구나. 그러면 이거 하나만 대답해 줄래? 지금 어디 다녀왔어? 기도실? 아니면 네 스승… 대신관의 집무실?”

나를 달래는 손길에 겨우 숨을 고르고 ‘기도실이요.’ 하고 대답했다. 그러자 박율이 쓰게 웃더니 내 머리칼을 헝클였다.

“형이 울린 거였네.”

“네?”

박율의 생각의 흐름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는 나를 천천히 끌어당겨서 방금까지 자기가 앉아 있던 의자에 앉혔다.

“네 스승과 만나고 온 거라면 너와 관련된 일이었겠지. 그게 아니라 기도실에 다녀온 거라면, 신에게서 뭔가를 들었겠구나. 그건 아마 선택받은 용사에 대한 얘기일 테고.”

“어떻… 어떻게….”

“형을 보자마자 그렇게까지 서럽게 눈물을 쏟을 때부터 어느 정도 눈치채고 있기는 했어.”

박율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본인의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기에는 가벼운 목소리였다.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렸다. 내가 소매로 눈가를 문질러 닦자 그가 내 팔을 부드럽게 잡아 내리고는 품에서 손수건을 하나 꺼내 내 손에 쥐여 줬다.

지금 이런 건 필요 없었다. 손수건을 꾹 말아 쥐었다.

“이한이가 이렇게 울 정도로 형을 소중하게 생각해 준다니 좋네.”

‘당연한 거 아닌가요?’라는 짧은 대답은 히끅이는 소리 때문에 조각조각 잘려서 내뱉어졌다. 우느라 호흡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아서 말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물이라도 마셔야겠는데.’

탁자 위에는 박율이 방금까지 보던 두꺼운 자료가 쌓여 있었고, 그 옆에 유리잔이 하나 놓여 있었다. 내가 흘끗 유리잔을 보자마자 박율이 몸을 일으켰다.

“물 마실래? 잠깐만, 여기서는 마법을 쓸 수가 없어서. 금방 새로 따라 줄…. 이미 마셨네. 그거 형이 입 댄 건데.”

“알아요. 괜찮아요.”

“네가 괜찮으면 됐어.”

박율은 다시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더니 내가 물을 다 마셔서 텅 빈 유리잔에 다시 물을 따라 줬다. 내가 어느 정도 진정하자 그가 말을 이었다.

“아까 약속했으니까 형은 더 안 물어볼게. 대신 이한이가 형한테 물어봐.”

“그러면 사실대로 다 말해 줄 건가요?”

“가능한 선에서는 최대한.”

믿음직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당장 그가 알고 있는 미래를 전부 말해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미래시를 섣불리 입 밖에 내면 안 되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아마 그도 알고 있을 터였다.

“형도 신에게서 형의 마지막에 대해 들은 적이 있나요?”

“네가 그걸 묻는다는 건 이미 너는 그 주제에 대해 알고 있다는 뜻이겠지.”

나는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피하는 쪽을 택했다.

“선택받은 용사의 마지막이라면 알고 있어.”

“말도 안 돼….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태연할 수 있어요?”

“정해져 있는 일이니까. 그건 두렵지 않거든.”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런데 이한아.”

나를 바라보는 박율의 눈이 어둡게 빛났다. 묘한 호기심, 혹은 떨림. 표면적으로는 그런 것을 읽을 수 있었으나 그 아래 보이는 무거운 감정은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정말 두려운 건 뭔지 알아? 운명으로 정해져 있지 않은, 인연조차 닿아 있지 않을 게 분명한 사람을 우연히 만나고, 우연히 가까워지고….”

내게는 운명이 없다고 했었지. 그러니 박율이 이렇게 말하는 것일 터였다.

박율은 내 턱을 가볍게 쥐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는 말만이 아니라 실제로도 내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어서 코앞에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눈동자에 내 모습이 들어차 있었다. 그도 나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이건 두려운 게 아니야. 그러면 뭘까. 왜 이렇게 네게 깊은 마음을 주게 되었을까.”

“…나한테 물어보는 거예요?”

“아니, 답은 한참 전에 찾았거든.”

“뭔데요?”

그는 대답 없이 환하게 웃었다. 단단한 손이 내 눈꺼풀 위로 덮였다. 시야가 가려져서 박율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팔을 뻗어서 그의 목에 감았다. 그는 내가 당기는 대로 순순히 고개를 숙였다.

“뭐든 상관없어요. 지금 여기에 우리가 같이 있잖아요. 나는 형이랑 같이 있는 이런 시간이 소중해요. 그러니까 내가 형한테 그럴 일은 절대 없을 거예요.”

“그래도 되는데.”

“네?”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당신의 심장을 찔러도 좋다고?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울컥 차오르는 것이 서러움인지 화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뭐라고 말을 하기도 전에 뺨에 보드라운 감촉이 느껴졌다. 뜨거운 눈물 위로 맞닿은 입술. 그 생경한 감촉에 머리가 멍해졌다. 박율은 그제야 내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떼어 냈다.

“웃…어요?”

“응, 예뻐서.”

일단 생각을 정리하자. 달아오르는 얼굴을 애써 모른척하며 침착하게 머리를 굴렸다.

“그래도 된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형한테 선 넘어도 된다고.”

“네?”

“형한테 그럴 일은 없을 거라며. 절대 선 넘지 않겠다는 다짐 같은 거 아니었어?”

장난스럽게 웃고 있기는 했지만 박율은 내게 지금 거짓을 말하고 있지는 않은 듯했다.

‘자기가 희생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지만, 내가 검으로 찔러야 한다는 건 모르고 있어.’

확실했다.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반응할 리가 없었다. 그건 모른다니 오히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어서 나도 얼굴에 허술한 웃음이 지어졌다.

“그래요. 형이 그렇게 말했으니까 선 넘을게요.”

몸을 일으켜서 박율이 내게 했던 것처럼 그의 뺨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의 몸이 경직되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는 내 허리를 안아 올렸다.

“이게 선 넘은 거야?”

“아니에요?”

“아니지.”

내 귓가에 속삭이듯이 말한 박율이 그대로 내 귓불을 잘근 물었다. 익숙하지 않은 감각에 몸이 움찔 튀었다.

“왜… 왜요?”

“귀엽네.”

“뭐가요.”

“반응이?”

귀를 깨무는 것도 선을 넘는 것에 포함되는 걸까? 쉽지 않았다.

박율은 나를 자연스럽게 안아 올려서 침대로 데려갔다. 심장이 두근대는 게 맞닿은 피부로 전해질까 봐 괜히 긴장됐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뭐를요?”

“글쎄.”

그는 명확한 답을 내어 주지 않은 채로 이제 잘 시간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나를 부드럽게 다독였다.

“이제야 울음 그쳤네.”

“…형이 놀라게 해서요.”

“그래. 다행이다.”

생각해 보니 박율의 말처럼 어느샌가 진정해 있었다.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의 숨을 끊어 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무서웠다. 신도, 시스템도, 퀘스트 같은 것도 다 싫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그게 뭐든, 어떻게든 괜찮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좌절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포기하지 않을 거고,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거니까. 박율은 숭고한 희생 같은 걸 하지 않을 것이다.

“신전에는 너를 상처 입히는 것들이 너무 많아. 어서 돌아가야겠다.”

“이제 괜찮아요.”

사실이었다. 이제는 정말 괜찮아졌다.

다음날 눈을 뜨자마자 고심 끝에 기도실로 향했다. 내가 일어난 시간이 늦었기에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마지막으로 물을 것이 있어요.”

【마지막이라니 섭섭하구나. 그래, 말하렴.】

“내가 율이 형의 심장을 찔러야 한다고 했죠. 그게 죽을 정도로 깊게 찌르라는 말은 아니죠?”

【심장을 찌르라는 건 심장을 관통해야 한다는 말이란다.】

잔인했다. 내게도 잔인한 말이었지만, 박율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 말은 살아날 여지가 없다는 뜻이잖아.

“그러니까 왜요?”

【그건 아직 말해 줄 수 없단다.】

“이유도 안 알려 주고 그런 말을 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닌…. 하, 진짜.”

주륵 흘러내리는 코피를 소매로 닦아 냈다. 지금까지 간헐적 코피 페널티가 이렇게 연속적으로 이어진 적은 없었다. 괜히 간헐적이라는 말이 붙었겠는가.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으로 유추할 수 있는 건 하나밖에 없었다.

“당신과 대화하는 게 내 몸에 악영향을 주나요?”

지금도 체력적으로 뭔가 이상이 있는데, 여기에서 더 문제가 생긴다면 그건 좀 심각했다.

【원래대로라면 아무런 영향이 없는 게 맞단다. 너는 나의 힘을 받아 낸 제물이니 세상을 구할 때까지 아프지도 죽지도 않을 테지. 다만 확언하기는 어렵구나. 전언을 이렇게 오랫동안 길게 듣는 건 네가 처음이니.】

하긴, 전언은 보통 한두 문장뿐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 네가 물을 것이 이제 없다면 서둘러 돌아가는 게 좋겠구나.】

“아니요, 하나 더 남았어요.”

이건 내가 어제 잠들기 전까지 고민 끝에 도출해 낸 최선의 방법이었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율이 형이 죽어야만 하는 거라면 그걸 내가 대신할 수는 없나요? 당신도 내가 용사들의 짐을 나눠 들라고 했잖아요.”

죽음이라는 단어를 꺼내니 나도 모르게 눈가가 뜨거워졌다. 내가 죽는 게 두려운 건 아니었다. 다만 그 단어가 주는 위압감이 너무 무거울 뿐이다. 숨을 고르고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준비됐어요. 지금이라도 죽을 수 있어요.”

신에게서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안 되는 건가? 왜지?

“선이한.”

신의 음성 대신에 뒤쪽에서 내 이름을 부르는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등골에 소름이 돋으며 몸이 경직됐다.

“방금, 무슨 말이야?”

삐걱거리며 몸을 틀어서 뒤를 돌아봤다. 민주혁이었다. 아니, 소리도 못 들었는데 기도실 안까지는 언제 들어왔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들은 걸까. 할 말을 찾지 못하고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민주혁은 내게 가까이 다가와서 내 얼굴을 흘끗 보더니 코를 막은 내 손을 잡아 내렸다. 얼굴을 타고 흘러내린 코피가 바닥으로 톡톡 떨어지며 원을 그렸다.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뭐가?”

“죽지 마. 그런 말 하지 말고, 그런 생각 하지도 마.”

품에서 손수건을 꺼낸 민주혁이 코를 눌러 지혈했다. 비릿한 피 냄새 사이로 그의 체취와 비슷한 청량한 향이 났다.

“그렇게 힘들면서 왜 나한테는 아무 말도 안 했어.”

잠깐. 민주혁의 말이 요지를 좀 벗어나 있는 것 같았다.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뭐라고 하는 걸 들었는데?”

“…지금 당장이라도 죽을 준비가 됐다고.”

확실히 오해할 만한 내용이긴 했다. 민주혁이 모든 내용을 듣지 않아서 다행이기는 하였지만 이 상황도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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