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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112화 (112/150)

112화.

때가 되면 알게 될

라엔은 나를 멍하니 바라봤다. 자기가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되새겨 보는 것처럼.

“옆에서 치료라도 계속해 볼까요? 그거라면 효과가 있을지도 몰라요. 안 되더라도 형이 잘 수 있도록 어떻게든 해 볼게요.”

“아니요, 아무것도 안 해도 괜찮아요.”

그는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면 그냥… 옆에 있어 줄래요?”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요?”

“하고 싶은 거라도 있나요?”

“그런 건 아니지만….”

“봐요. 나도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서 그걸로도 충분해요. 지금은요.”

내가 가만히 있으면 라엔이 잠드는 데 무슨 도움을 줄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의 말이 그렇다니 나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벤치에서 일어서서 그의 앞에 섰다.

“알았어요. 그러면 자러 가요.”

라엔은 나를 올려다보며 곰곰이 생각하다가 입을 열었다.

“잘 때까지만 옆에 있어 주는 거면 잠들기가 아쉬울 것 같은데요.”

“네?”

“그러니까 같이 누울까요. 침대도 넓은데.”

라엔이 내 양손을 마주 잡으며 살포시 웃었다.

새삼스럽게 그걸 왜 물어보는 걸까. 지금까지 용사 중에서 누군가는 내 옆에 누워서 같이 잤을 터였다. 방은 두 개뿐이었고, 널찍하긴 했어도 각 방에 침대는 하나뿐이었으니까. 물론 내가 가장 일찍 잠들고 가장 늦게 일어나니 확인할 방법은 없었지만.

“다른 형들도 자고 있을 것 같아서, 침대에 자리가 있으면 그렇게 해요.”

“이 시간에는 다들 안 잘 거예요.”

“아하….”

라엔은 내가 생각한 게 귀엽기라도 하다는 것처럼 가볍게 웃었다. 아니, 모를 수도 있지.

“그러니까 먼저 차지하는 사람이 임자예요.”

“침대요?”

라엔이 일어서서 매달리듯이 나를 끌어안고는 등을 두어 번 다독였다.

“비슷해요. 이제 갈까요.”

방에 들어와 보니 라엔의 말처럼 아무도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다들 뭘 하느라 이 시간까지 밖에 돌아다니는 걸까. 아니면 혹시 다들 여기가 아니라 옆 방에 있을지도 몰랐다.

라엔은 느릿한 동작으로 축 늘어지듯 침대에 걸터앉았다. 그러고는 로브도 벗지 않고 자리를 잡고 누웠다. 그가 자기 옆자리를 손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누워 줄래요? 사실 좀 힘들었거든요. 오늘은 이한 덕분에 눈 붙일 수 있겠네요.”

“나는 그냥 가만히만 있으면 되나요? 그러면 잠이 와요?”

“네. 이한은 그냥 안겨 있으면 돼요. 내가 안을 거고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묘하게 늘어지는 말끝이 간질간질했다.

“…내가 방금 뭐라고 했나요? 미안해요. 피곤해서 말이 헛나왔어요. 이한, 안고 있으면 말랑… 품에 쏙 들어오니까, 그래서…. 아니, 그냥 못 들은 걸로 해 줄래요?”

라엔의 이런 모습은 처음 봤다. 이렇게까지 횡설수설하는 걸 보니 정말 피곤하긴 한 것 같았다. 그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여서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떨리는 목소리를 들으니 아마도 라엔의 얼굴은 그의 머리칼처럼 붉게 달아올라 있을 것이 분명했다.

“형이 저번에도 수면 유도 마법 약을 꺼내고 있던 걸 봤어요. 한참 전이지만요.”

“그랬나요.”

라엔은 내가 말을 돌리자 안심한 듯했지만 어쩐지 조금은 아쉬워 보이기도 했다. 옆으로 다가가서 누우니 그가 이불을 끌어 올려서 내게 덮었다.

“평소에도 잠을 못 자요?”

“생각할 게 많으면 가끔 그래요. 늘 그렇지는 않아요.”

“이번에는 뭐를 생각하느라요?”

“…….”

라엔은 이불 위로 나를 가만히 다독였다. 이러다간 내가 먼저 잠들 수도 있겠다, 싶을 때쯤 그가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이한. 신과 대화했다고 했죠. 뭘 들었나요? 선택받은 용사와 관련된 것도 들었나요?”

“그건 다음에 물어볼 생각이에요. 왜요?”

“들은 게 없다면 괜찮아요. 아니에요.”

내가 몇 번을 더 끈덕지게 물어보고 나서야 라엔은 이야기를 꺼냈다.

“리더 형의 눈동자에 붉은빛이 어릴 때가 있어요. 주로 마물을 처리하고 나서요. 그게 뭘 의미하는지… 가설을 세워 보고 있어요. 그래서요.”

“무슨 가설인데요?”

“…그건 말하고 싶지 않아요. 말하면 사실로 굳어질 것 같아서요. 다만 어떤 상황이 닥치든 그 상황 속에서 내가 무언가 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에요. 그걸 위해서 노력하고 있고요.”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나도 신과 대화하면서 뭔가를 알게 된다면 형에게도 말할게요.”

“고마워요.”

한참을 망설이다가 대답하는 라엔이 괴로워 보여서 나는 그에게 묻는 걸 그만뒀다. 라엔이 말한 것에 대해서도 신에게 물어봐야지. 생각을 정리하고 몸을 일으켜 앉았다.

“형, 이제 벗어요.”

“…네?”

라엔은 벙찐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거였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그에게로 손을 뻗었다.

“로브요. 편하게 자야죠.”

“아.”

그는 그제야 내 말을 제대로 이해한 듯 표정을 갈무리하고 웃었다.

“이한은 좀 더 명확하게 말할 필요가 있겠어요. 뭐, 지금도 좋지만요. 로브는 내가 벗을게요.”

“아니요. 형은 편하게 있어요. 내가 벗겨 줄게요. 어떻게든 형 생각을 덜어 주고 싶은데 내가 그건 어떻게 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라도 뭔가 해 주고 싶어서요.”

라엔이 내 손길에 따라 몸을 움직여서 로브를 더 수월하게 벗길 수 있었다. 이 정도면 내가 벗겨 준 게 아니라 그가 벗어 준 거나 마찬가지였다.

“걱정하지 마요. 지금 다른 생각은 하나도 안 들어요.”

“그러면요?”

“이한 생각밖에 안 하고 있어요, 지금.”

“그래요. 말이라도 고마워요.”

“안 믿네요. 정말인데.”

내가 로브를 잘 개어서 머리맡에 두자마자 라엔이 나를 덥석 껴안아서 자기 품에 넣었다. 베게 대신에 그의 팔을 베었다.

“이렇게 귀여운 행동만 하는데 내가 어떻게 안 좋아할 수가 있겠어요.”

“그건 아닌데요. 내가 언제요?”

“가만히 안겨 있잖아요.”

“형이 그러면 잠들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으니까요.”

내가 라엔의 등을 작게 토닥이자 그가 나를 더 힘주어 끌어안았다. 그에게서는 달콤한 향기가 났다.

“고마워요. 지금은 마음이 편해졌어요. 이한 덕분이에요. 오늘도 못 잘 줄 알았는데 이제 졸린 것 같아요.”

“음, 내가 한 건 없지만 그래도 다행이에요. 나는 언제든 좋으니까 괜히 혼자 밤새우지 말고 말해요. 약도 잘 안 듣는다면서요. 같이 자요.”

“…꿈인가 싶어요. 내가 벌써 잠들었나.”

평소와 다르게 나른한 라엔의 목소리가 좋아서 나도 모르게 웃었다.

“지금이 벌써 꿈이면 어떻게 하려고요.”

“욕심낼래요. 안 놓을 거예요. 그리고….”

그리고? 나는 그 뒷말을 들을 수 없었다. 고른 숨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라엔은 잠들고 나서도 나를 껴안은 손을 풀지 않은 채였다.

“오늘도 기도실에 갈 건가요?”

내게 아침 겸 점심을 챙겨 주며 묻는 라엔을 바라봤다.

당연히 내가 먼저 일어날 줄 알았건만 그는 내가 일어나기 한참 전에 깼다고 한다. 지금까지 라엔이 느지막이 일어났던 건 실은 그가 늦게까지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기에 그랬던 것인 듯했다.

“아직 답을 들어야 할 게 남아서요.”

“알았어요. 우리도 서고에서 문서를 찾아보고 대신관에게도 물어보며 정보를 모으고 있어요. 그러니까 너무 무리하지 마요.”

“네, 형도요.”

밥을 다 먹은 후에 어제처럼 기도실에 들어가서 단상 위에 섰다. 내가 올라서자마자 물빛 꽃이 코끝을 스쳤다. 신은 내게 태연하게 말을 걸었다.

【왔구나, 아이야.】

“당신이 말했던 대로 돌아가서 푹 쉬고 멀쩡하게 다시 왔어요. 이제 저번에 하던 얘기를 이어서 해 주시겠어요?”

【물론이란다. 지난번에 네가 받았던 퀘스트가 무슨 의미인지 물었었지.】

“네, 퀘스트 이름이 ‘숭고한 희생을 돕는 힐러’였어요. 선택받은 용사만 사용할 수 있다던 검이 내 손에 쥐어졌고, 시스템의 빛은 율이 형에게로 이어져 있었어요. 제대로 말해 주셨으면 해요.”

【그건 네가 해야 할 일에 대한 힌트란다.】

“그래요. 저번에도 당신이 말하려다가 말았던, 그 ‘해야 할 일’이라는 게 대체 뭔데요?”

【답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재차 물어보는구나.】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 생각이 틀렸으면 했는데.

“내가 율이 형을… 찔러야 하나요?”

【심장을 찔러야 한단다.】

태연하게 이어지는 말에 피가 차게 식었다. 분명히 말을 이해했는데도 여전히 실감조차 나지 않았다.

【이런, 당장 해야 한다는 게 아니란다. 그러니 벌써 낙담할 필요 없어.】

“아니요, 그럴 리가 없어요. 그리고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요?”

【때가 되면 알게 될 거란다. 그 방법밖에 없다는 것도 자연히 알게 될 테고.】

“이유는 안 말해 주겠다는 거네요. 그 방법뿐이라도 나는 절대 그렇게 하지 않을 거예요.”

【아이야, 누구나 정해진 운명이 있단다. 다만 너는 나의 힘을 받아 내었으니 그 운명이 끊어진 상태지.】

“그렇다면 더더욱….”

【그럼에도 네가 선택할 수 있는 건 없단다. 내가 네게 단 한 문장만은 남겼으니. ‘할 수 있는 일을 하렴.’ 이것이 너의 행동을 이끄는 바탕이 되는 문장이란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을 알게 된다면, 너는 그걸 할 수밖에 없어.】

그건 내가 지금껏 수없이 생각해 왔던 거였다. 그런데 당연하잖아. 할 수 있는 일이라면 해야지.

【그렇지. 그리고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언젠가 때가 되었을 때 선택받은 용사의 심장을 그의 검으로 찌르는 거란다. 그래야만 세상을 구할 수 있어. 이건 처음부터 정해진 일이었단다. 네게 용사들의 짐을 덜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그러니까 선택받은 용사의 죽음이 어떻게 세상을 구하는 방법이 된다는 건데요? 이유를 말해 주지 않을 거라면 그 얘기는 더 이상 하지 마요.”

신의 목소리가 잠깐 멈춘 사이에 조금 진정하고 말을 이었다.

“내가 실패했던 퀘스트 보상이 ‘그와의 대화’였잖아요. ‘그’는 누구였나요.”

【선택받은 용사, 그 아이란다. 그에게는 네가 쥐었던 검이 보이지 않았을 거야. 네가 그를 찌르는 시늉이라도 했다면 퀘스트를 성공할 수 있었겠지. 그러면 그 아이는 자기가 알고 있는 걸 네게 모두 털어놓았을 거란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알고 있는 걸 털어놓았을 거라니, 박율은 지금 뭔가를 알고 있나? 그건 중요한 정보인 건가? 아니, 침착하자. 이미 지나간 퀘스트에 대해 생각해 봤자 달라지는 건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는 내가 정해요. 당신이 정해 주는 게 아니… 어라.”

흘러내리는 코피를 익숙하게 닦아 냈다.

“내 몸에는 이상 없는 게 맞죠?”

【물론이지. 너는 신의 힘을 받았으니 괜찮을 거란다.】

“그런데 당신과 대화할 때 코피가 난 게 벌써 두 번째인데요. 이건 페널티 때문인 게 맞나요?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나요?”

【자, 오늘은 더 무리하지 말고 돌아가려무나. 시간이 많이 흘렀구나. 언제든 오렴, 너와의 대화를 늘 기다리고 있단다. 네가 무엇을 알든 혹은 모르든 결국 끝은 같을 테지만 너는 궁금한 게 많을 터이니.】

“…저기, 말 돌리는 거 아니죠?”

아니, 이건 말 돌리는 게 맞았다. 신과의 대화는 거기에서 끊겼다. 저번처럼 코피를 지혈한 후에 기도실에서 나왔다.

방으로 돌아가자마자 박율과 마주쳤다. 그를 보자마자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그에게 언젠가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 현실감이 들었고, 그래서 숨이 턱 막힐 듯이 가슴이 조였다.

눈물이 울컥 차올랐다. 박율은 그런 나를 보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내게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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