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97화 (97/150)

097화.

어쩌면 나는

“선이한. 잠깐 일어나 봐.”

이불을 걷어 내는 손길과 함께 들려오는 차분한 목소리에 거의 가라앉아 있던 의식이 끌어 올려졌다. 열을 재듯이 내 이마를 짚는 송하견의 서늘한 손이 느껴졌다. 돌아누운 채로 몸을 더 둥글게 말자 그가 혼잣말처럼 내뱉었다.

“왜 갑자기….”

정신이 멍해서 이어지는 말을 제대로 듣지는 못했으나 그 내용이 무엇이었을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왜 갑자기 열이 이렇게 올랐지,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내가 조금 전까지 멀쩡했던 걸 송하견도 보았을 테니까.

“괜찮아요. 잠깐 있으면 열 내릴 거예요.”

목소리를 가다듬고 최대한 태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으나 이 대답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듯했다. 송하견이 내 어깨를 감싸 쥐고 나를 바르게 돌려 눕혔다.

“그걸 어떻게 확신해.”

“…항상 그랬으니까요. 이번에도 그럴 거예요.”

송하견이 탄식인지 한숨인지 모를 숨을 조그맣게 내뱉었다. 내 이마에 약초 향이 나는 종이를 익숙하게 붙이는 그를 향해 눈동자를 굴렸다. 그가 내 시선을 알아챘는지 곧장 내게로 눈을 맞춰 왔다.

송하견의 태도는 평소와 같았다. 아니, 평소처럼 거침없으면서도 내가 어딘가 아픈 것처럼 보일 때면 늘 그랬듯 나를 조심스럽게 다루는 손길이었다. 그러나 묘하게 찌푸려진 미간을 보니….

“무슨 고민 하고 있어요?”

“고민은 아니고. 네가 얘기를 좀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

“얘기… 지금 하고 있지 않나요?”

송하견이 어이없는 대답을 들었다는 듯이 잠깐 표정을 풀고 웃다가 다시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있잖아. 당장 해결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도움은 되겠지.”

그가 마법을 써서 허공에 플라스크를 띄웠다. 달각거리는 소리를 들으니 약을 만드는 듯했다.

“알아요.”

“그러면 얘기를 해. 뭐든.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 말하지 않으면 몰라. 알아도 너무 늦어. 지금처럼.”

끼어들 틈 없이 이어지는 송하견의 말을 조금 멍한 기분으로 들었다. 그가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게 낯설기도 했고, 이런 비슷한 말을 어디서 들었던 것 같기도 해서였다. 언제였더라, 생각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네? 뭐가 늦어요?”

“네가 이렇게 될 때까지 몰랐으니까.”

“아니, 지금 괜찮….”

만들고 있던 약에서 눈을 떼고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고 하는 것처럼 나를 지그시 바라보는 송하견에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나는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다. 송하견은 약을 만들 수 있으니 내가 정말 상태가 안 좋다면 그에게 말하는 편이 낫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도 말하지 않은 건 정말 괜찮기 때문이었다. 그저 조금 몽롱할 뿐이다.

“…뭐든 말을 하라고요.”

“응.”

생각만 한다는 것이 그만 입 밖으로 목소리가 나왔다. 그의 짤막한 대답을 들으니 이번에 어처구니가 없는 것은 나였다.

‘그게 누가 누구한테 할 소리야.’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말이 없는 건 내가 아니라 송하견이다. 송하견이 자기 얘기를 한 적이 있던가, 내가 그에게 뭔가를 직접 들은 적이 있던가 생각해 보았지만 그런 기억은 없었다.

‘송하견의 퀘스트.’

어쩌면 그건 스스로에 대한 외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그 퀘스트는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것들이라고 했으니 꽤나 신빙성 있는 추측이었다.

“하견 형, 혹시….”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흥분해서 나도 모르게 재빨리 몸을 일으켜 앉았다. 동시에 눈앞이 핑 돌았다.

“…아.”

“선이한.”

방금까지 약을 만드는 데 집중하던 송하견이 순식간에 나를 감싸 안으며 지탱했다. 그의 어깨에 이마를 기댔는데도 머리가 흔들리는 것 같은 착각이 들어 그의 옷자락을 살짝 그러쥐었다.

“급하게 일어나서 그래. 괜찮아. 눈 감고 있어.”

라엔과 민주혁의 퀘스트를 실패한 후 고열 페널티를 받았을 때도 이 정도였나? 그때는 몸 상태가 좀 더 나았던 것 같은데. 그러나 원래 지나간 기억은 미화되기 마련이니 정확하게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송하견은 내 등을 다독이며 진정시키다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몸이 너무 뜨거운데.”

송하견이 내 턱을 조심스럽게 쥐고 고개를 들어 올려서 내 입을 살짝 벌렸다. 입에 흘려 넣어 주는 약을 삼키고 다시 머리를 기대자 그가 나를 더 단단히 안았다.

“많이 안 좋아? 열이 심한데, 속은 괜찮아?”

뭉뚱그려서 ‘괜찮아요.’ 하고 말하려다가 생각을 고쳐먹고 입을 열었다.

“다 괜찮은데 그냥 몸이 좀 처져서요. …잠깐만 이렇게 있고 싶어요. 형 어깨 안 무거우면요.”

“지금 네가 무거울까 봐 걱정하는 건 아니지.”

“괜찮으면 다행이고요.”

어이없다는 듯 말하는 송하견의 목소리를 들으니 웃음이 나왔다. 이만하면 됐다 싶어 고개를 들자 나를 바라보는 그의 얼굴이 코앞에 보였다.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어때요? 나 방금 솔직하게 말했잖아요.”

“…응. 몸이 불덩어린데 잘 웃네.”

송하견은 괜히 내 뺨을 한 손으로 감싸며 멍한 목소리로 주제를 돌렸다. 그런 그에게 말려들지 않고 꿋꿋하게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형도 솔직하게 말해 주세요.”

“뭐를.”

“아무거나요. 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요.”

송하견에게 퀘스트 이야기를 할 수는 없으니 돌아가더라도 천천히 접근해야만 했다. 그는 내 말의 의미를 파악하려는 것처럼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다가 슬쩍 웃었다.

“그게 갑자기 왜 궁금해.”

“갑자기는 아니고 항상 궁금했어요. 그냥 물어보는 걸 지금 한 거예요.”

“표정이 진지해졌는데.”

“진지하니까요. 형 얘기가 듣고 싶어서 나도 노력한 거거든요.”

송하견은 약병을 손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생각하다가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너.”

“…나요? 내 생각을 한다고요?”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었다. 당황해서 되물으니 그가 여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응. 지금은.”

“그…렇겠죠. 지금은 같이 있으니까요. 그러면 지금 말고 전에는요?”

“전에도. …네가 나를 처음 치료해 줬을 때부터.”

송하견은 말하고 나서 그제야 뭔가 깨달았다는 얼굴이었다. ‘그때부터였나.’ 하는 혼잣말을 들으며 그에게 다시 물었다.

“나에 대해서 무슨 생각을 했는데요?”

“글쎄.”

송하견이 자기에게 기대 있던 나를 침대에 천천히 눕혔다.

“그냥. 그만 좀 앓으라고.”

“둘러대는 거 다 알아요.”

“…이제까지의 네 몸 상태를 생각해 봐.”

그만 앓으라는 게 송하견이 생각한 전부가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었지만 안타깝게도 반박할 말이 없었다.

“나를 만나기 전에는 어떻게 지냈어요? 형에 대한 것도 궁금해요.”

“약 먹어서 졸릴 텐데.”

“형이 대답해 주기 전까지는 안 잘 거예요.”

“눈이라도 감고 있어.”

눈꺼풀 위로 덮이는 손바닥이 시원해서 가만히 눈을 감자 송하견이 손을 다시 떼어 냈다. 그는 한참 동안 대답이 없더니 노트를 펼쳤는지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아직 안 자고 있어요. 기다리는 중이에요.”

종이가 사락거리는 소리가 잠깐 멈췄다가 다시 이어졌다.

“…나도 고민하는 중이야.”

“그러면 좋아요. 사실 기다리는 것도 좋아하거든요.”

“그런 걸 왜 좋아해.”

“이 기다림에는 끝이 있을 거라는 걸 아니까요.”

“내가 말하는 것보다 네가 잠드는 게 더 빠를지도 몰라.”

“어… 음, 내가 그냥 잠들어도 나중에 다시 말해 줄 거죠?”

“응, 그러니까 자.”

웃음기가 옅게 어린 목소리에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의식이 점차 가라앉았다. 거의 잠에 다 빠져들 무렵 송하견이 속삭이듯 말했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드러내지 말라고 배웠어. 전부 약점이 될 거니까.”

송하견은 내가 완전히 잠들었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자조적인 목소리로 말할 리가 없으니까.

“그 말이 틀렸다는 건 언젠가부터 알았지만 이미 습관처럼 굳어진 후였어. 드러내지 않는 게 더 편하니까. 내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도 딱히 생각해 본 적도 없어.”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말을 꺼낼 수 없는 분위기였기에 꾹 참고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어쩌면 나는, 내가 좋아하는 건….”

졸음이 몰려오며 송하견의 목소리가 점점 아득하게 들렸다.

문밖에서 희미한 발소리가 이어지더니 문이 열리는 소리가 잠결에 들렸다. 목소리가 작아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누군가의 속삭임에 송하견이 대답하는 듯했다. 곧이어 내 이마를 짚어 오는 손에 눈을 떴다.

“아, 내가 깨웠어?”

“…아니.”

“더 자.”

머리가 뜨거운 걸 보니 아직 페널티는 끝나지 않은 듯했다. 말없이 민주혁의 손 위로 내 손을 올려서 치료하자 그가 재빨리 손을 떼어 냈다.

“나 이제 너한테 손도 못 대겠어.”

“뭐를? 아무튼 이제 괜찮아.”

송하견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 있었는데 다들 돌아온 이 상황에서는 말을 꺼낼 수가 없어 결국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내가 잠깐 잠들었나요?”

“응, 한 시간쯤.”

그러면 이제 됐다. 몸을 일으켜 침대에 기대앉아 박율과 라엔을 바라봤다. 막 일어나서인지, 열 때문인지 알 수 없었지만 시야가 흐려서 눈을 비비니 누군가 내 손을 잡아끌었다.

“눈이 아파요?”

라엔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저으며 라엔의 손을 마주 잡아 자연스레 치료하자 그가 ‘아차’ 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이제 박율만 남았다. 박율은… 쉽지 않은데. 어떻게 하지. 아니, 애초에 내가 왜 치료할 기회를 노려야 하는 거지? 알아서들 나한테 치료받을 수는 없나. 그런 건방진 생각을 하는 중에 박율이 입을 열었다.

“하견이한테 들었어. 찾아볼 게 있다면서.”

“네. 오늘 괜찮아지면….”

“오늘? 며칠은 무리하지 말아야 할 것 같은데.”

부드럽지만 단호한 목소리에 실없이 웃으며 순순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한 시간만 지나면 멀쩡해지긴 할 텐데. 그래도 괜히 조급해하는 기색을 보이지 말아야겠다. 박율이 선택받은 용사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이 있다면 이번에 알아낼 수 있을 테니까.

“형님들이랑 도시를 돌아봤을 때 크게 위험한 곳은 없었어.”

“골치 아픈 곳은 있었지만요.”

“그렇긴 하지만, 워낙 넓기도 하고…. 아무튼, 마을 건물은 다 그대로 남아 있어. 나중에 한번 둘러봐도 되겠던데.”

박율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는 나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가 보고 싶은 데 있으면 형한테 말해 줘. 데려다줄게. 건물 안은 안전하니까 괜찮아.”

“맞아. 서점도 있고 상점도 많더라. 화실도 있던데 나랑 같이 가 볼래?”

“지금은 더 쉬게 내버려 둬요.”

어느새 내 옆에 걸터앉아, 내게 몸을 가까이 붙이며 말하는 민주혁을 라엔이 끌어냈다. 그러고는 민주혁을 문밖으로 밀어 내며 슬쩍 뒤돌아서 나와 시선을 맞췄다.

“다음에….”

“네?”

“음, 아니에요. 다 나으면요. 쉬어요.”

달칵, 하고 문이 닫혔다. 이렇게 말을 하다가 말다니. 언젠가 느꼈던 적이 있지만, 어쩌면 라엔은 나를 계속 신경 쓰이게 만들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 거라면 성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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