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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러는 멀쩡하니 세상이나 구하세요-96화 (96/150)

096화.

외면하지 말아요

“누구세요?”

지금까지 시스템과 관련된 무엇도 내게 이렇게 직접 말을 건넨 적은 없었기에 내뱉는 목소리가 저절로 떨려 왔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너는 뭐지? 이건 일개 신관이 가질 만한 신력이 아닌데. 그렇다고 선택받은 용사라고 하기에는 다른 이가 검을 가지고 있고….」

나에 대한 것을 묻는 걸 보면 내게 말을 거는 주체는 시스템 그 자체가 아니다. 시스템은 나보다 나에 대해 더 많이 아는 듯했으니까. 그렇다면 아마 눈앞에 있는 이 하얀 형체가 말을 거는 것이겠지.

그가 손가락으로 뺨을 툭툭 두드렸다. 동작 외에는 상황을 유추할 만한 단서가 없었음에도 그가 고민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내가 뭐라고 대답하기도 전에 띠링, 하고 불안하게 울리는 맑은 소리에 고개가 옆으로 휙 돌아갔다. 그곳에는 퀘스트 창이 떠 있었다.

<필수! 퀘스트> ‘송하견-외면하지 말아요!’Ⅰ

성공 시: 송하견의 직면 획득

실패 시: 기절 2분 페널티

제한 시간: 2분

아니, 이게 왜 지금…?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며 송하견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이 자리에 없었다. 내가 보이지 않으니 돌아간 것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설마 송하견이 외면하는 대상이 나인 건가?

「신력이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 건 처음 보는데. 너는 새로운 존재구나. 어떻게 해 줄까. 네가 기절하고 2분 뒤에 깨워 줄까? 그러면 내게 네가 어떤 존재인지 알려 줄 거야?」

그에게도 퀘스트 창이 보이는 듯했다. 내가 고개를 격하게 끄덕이자, ‘그래. 그러면 잠시 후에 보자.’ 하는 글자가 상태 창 위로 지나갔다. 짧은 제한 시간이 지나고, 나는 곧장 정신을 잃었다.

「일어나.」

「야, 일어나.」

눈을 감고 있는데도 눈앞에 빛이 깜빡이는 게 느껴져서 찡그리며 눈을 떴다. 일어나라는 짧은 문장이 적힌 상태 창이 내 주위로 무수히 많이 떠 있다가 내가 정신을 다 차리자마자 한순간에 사라졌다.

<필수! 퀘스트> ‘송하견-외면하지 말아요!’Ⅱ

성공 시: 송하견의 직면 획득

실패 시: 고열 2시간 페널티

제한 시간: 2시간

2시간이면 넉넉했다. 아마도. 그전까지 아까 있던 여관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이제는 익숙해진 연계 퀘스트 창을 없애려다가 슬쩍 물었다.

“아까 이걸 신력이라고 했었죠. 맞나요?”

「네가 먼저 네 존재에 대해 알려 주기로 했잖아. 질문은 그다음에.」

자기에 대해서 소개하라고 하면 어떤 말을 꺼내야 하는 걸까. 기껏해야 이름이나 나이, 그런 것들을 말하는 게 평범한 소개겠지만 그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나는 내가 아는 것과 시스템 때문에 겪었던 것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너는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네가 가지고 있는 그 힘은 신력이 맞아. 네가 시스템이라고 부르는 것도 신력이 맞고. 다만 조금 불안정할 뿐이지. 그래서 멋대로 작동하는 게 아닐까. 뭐, 정확한 건 신만 알고 있겠지.」

「그리고 너는 알 수 없겠지만, 내게는 이 퀘스트라는 것들의 이면에 있는 조건이 보여. 이런 퀘스트는 네 힘으로는 절대 깰 수 없으니까 일찌감치 포기하는 게 좋아.」

「왜 그들 스스로에 대한 극복을 빌미로 네가 피해를 받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세계란 득과 실 같은 것조차 균형을 맞춰야 굴러가기에 결국 네게도 뭔가 득이 있겠지. 그러니 너무 억울하게 생각하지는 말아.」

순식간에 지나가는 문장을 멍한 기분으로 읽었다. 스스로에 대한 극복. 내가 곱씹듯이 중얼거리자 ‘그래, 그러니까 네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하는 문장이 새로 적혔다가 사라졌다.

퀘스트의 대상이 내가 아니라 그들이 아닐까 하는 의심은 은연중에 있었다. 그러나 막상 그렇다는 대답을 듣고 나니 생각보다 뒤통수가 얼얼한 느낌이었다. 처음부터 줄곧 헛다리를 잡고 있었구나.

“당신은 누구인데요?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을 수 있나요?”

「나 역시도 선택받은 용사였어. 그러니 내게도 신력이 잠시나마 깃들었었고, 그래서 네 안에 있는 신력도 알아볼 수 있었던 거야. 나를 믿고 말고는 네 자유니까 달리 해 줄 말이 없네.」

“알았어요. 믿을게요. 그러면 당신은 선택받은 용사였다면서 왜 여기에 이런 모습으로 있나요? 혹시 모든 선택받은 용사가….”

「아니. 나는 미련이 남았기에 여기에 발이 묶인 것뿐이지, 모든 선택받은 용사의 끝이 이렇지는 않아. 안심해. 그렇다고 너무 함부로 대하지는 말고. 후회는 늦고 시간은 돌이킬 수 없으니까.」

“그게 무슨 뜻….”

「네가 궁금한 게 많다는 거 알아. 그래도 이제 돌아갈 때가 됐어. 나야 괜찮지만 네게는 시간제한이 있지 않니. 나는 너를 만질 수 없으니 네가 아까처럼 쓰러지면 너를 데려다주지 못해.」

「나는 선택받은 용사도 신관도 아닌 네게 묘한 신력이 느껴져서 그걸 물어보고 싶었던 거야. 다음에 나를 만나고 싶다면 이 자리로 와. 아마 이 근방에서 돌아다니고 있을 거니까.」

그는 일방적으로 상태 창 위로 문자를 쏟아 냈다. 나를 밀어 내는 것처럼 불어오는 바람에 뒤로 살짝 물러났다.

눈앞에는 여전히 하얀 형체가 사라지지 않은 채였지만 더 이상 상태 창을 통해서 내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 그가 이제 가라는 것처럼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가볍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그곳을 빠져나와 여관으로 돌아갔다.

“하견 형, 왔어요.”

문을 열고 들어가 아까 송하견이 있었던 가장 위층으로 올라가려고 했으나 그는 텔레포트를 쓴 건지 아니면 빠르게 이동한 건지 어느새 내 앞에 와 있었다.

“어디 있었어?”

“미안해요. 걱정하게 했나요? 내가 신력이 있어서 나만 잠깐 다른 공간에 들어갔던 것 같아요. 아무런 일도 없었어요.”

“…아무 일도 없었다고.”

“아, 그런데 이 도시의 뒤틀린 부분을 되돌릴 방법은 못 찾아냈어요.”

이것도 물어볼걸. 물어볼 것들이 많았는데, 아무리 퀘스트 제한 시간이 닳기 전에 나를 여관으로 되돌려 보내기 위함이었다지만 그는 나를 너무 급하게 쫓아냈다. 다음에 꼭 한 번 더 찾아가야지.

멍하니 생각하다가 송하견에게서 한참 대답이 들려오지 않았다는 것을 자각하고 그제야 입을 열었다.

“형, 혹시 내가 형을 걱정하게 한 게 아니라 화나게 한 건가요…?”

내가 죽었다 돌아온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송하견에게 괜히 미안했다. 한편으로는 그의 시선에 집요하면서 어딘가 어두운 구석이 있어서 긴장되는 마음에 허리가 빳빳하게 펴졌다.

“아니, 화날 리가. 그냥 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어… 나를요? 어떻게 하는데요?”

“그걸 모르겠어. 내가 어떻게 하고 싶은 건지.”

송하견의 멍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너를 놓칠 때마다 이렇게 마음이 아픈 걸까.”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송하견이 나를 잡아끌었다.

“올라가서 쉬자. 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었는지 알려 줘.”

“네, 알았어요. 아까 말했던 것처럼 정말 별일 아니었어요. 올라가서 바로 말할게요.”

계단을 오르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당신은 당신의 무엇을 외면하고 있는 걸까.

내가 송하견에게 설명할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았다. 시스템이나 퀘스트와 관련된 것은 말 할 수 없었기에 그저 이번에 알아낸 것이 없으니 다음에 한 번 더 그 자리에 가 봐야 할 것 같다고 전할 뿐이었다.

“그런 건 괜찮아. 너는 위험하지 않은 거야?”

내가 멀쩡히 돌아온 것을 두 눈으로 확인했고, 심지어 내게 몇 번이나 확답을 받았음에도 걱정스럽다는 듯이 물어 오는 그에게 자꾸만 미안함이 더해졌다.

아무것도 숨기지 말고 시스템에 대한 것도 말해 버릴까, 하다가 내가 받은 퀘스트 중에 송하견에 대한 것도 있음을 다시 한번 상기하고 마음을 내리눌렀다.

이건 내가 끝까지 안고 가야 할 일이었다. 내가 해야 할 일은 이걸 솔직하게 털어놓는 게 아니라 그의 퀘스트를 어떻게든 성공시키는 것이었다. 송하견뿐만 아니라 라엔과 민주혁의 퀘스트도.

「제한 시간: 34분」

눈을 흘끗 굴려서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이 정도 시간이면 송하견과 몇 마디 나눈 후에 혼자 자겠다고 말하고 다른 방으로 들어가면 될 듯싶었다. 남는 방도 많고, 고열 페널티도 2시간이면 끝날 테니까.

그러나 내가 한 가지 간과했던 것은 송하견이 나를 혼자 두지 않으려고 한다는 점이었다.

“자러 갈 건데… 여기 방도 많으니까 아무 데나 들어갈게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어? 여기서 자. 이불 깔아 줄게.”

내게는 거절할 명분이 마땅치 않았다. 레데오에 있을 때 나는 송하견과 같은 방을 썼고, 그렇기에 누군가 같이 있으면 잘 수 없다는 변명도 통하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형은 뭐 하고 있을 건데요?”

“할 건 많아.”

송하견이 침대 맞은편에 있는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서 내게 보란 듯이 한 손으로 수첩을 가볍게 흔들었다.

“그러니까요. 내가 방해될 것 같아서요.”

“그런 걱정은 할 필요 없어.”

송하견이 손을 가볍게 휘저어서 이불로 나를 느슨하게 휘감아 침대에 눕혔다. 별수 없이 자리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이어지는 그의 말을 들었다.

“너는 항상 조용하게 자. 잠든 게 아니라 기절한 것처럼. 그러니까 그냥 자.”

“네, 고마워요….”

이렇게까지 말하니 남은 선택지가 없었다. 자리에 가만히 누워 있다가 시스템의 알림음에 눈을 반짝 떴다.

<필수! 퀘스트> ‘송하견-외면하지 말아요!’Ⅱ 실패!

페널티 ‘고열’이 지속 시간 ‘2시간’ 동안 유지됩니다.

상태 창을 눈앞에서 치웠다. 이제 이 퀘스트가 정확히 뭘 원하는지 알게 되었으니 앞으로는 성공시킬 방법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가 있었다.

<필수! 퀘스트> ‘송하견-외면하지 말아요!’Ⅲ

성공 시: 송하견의 직면 획득

실패 시: 메스꺼움 2일 페널티

제한 시간: 2일

다음으로 떠오른 퀘스트 창을 확인하고 머리끝까지 이불을 끌어 올렸다. 내가 내뱉는 더운 숨이 지금 이불 속이기 때문인 건지 고열 페널티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몽롱한 기운이 잠들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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