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8화.
용사 외 치료하기
눈을 깜박이다가 눈동자를 살짝 굴렸다. 벽에 기대어 앉은 내 옆에 조그만 아이가 나를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고사리처럼 작은 손이 내 어깨를 꾹 쥐고 최선을 다해서 흔들고 있었다.
“콜록, …욱.”
소매로 급하게 입을 막았다. 흰 소매가 순식간에 붉게 물들어 갔다.
아이의 눈에서 눈물이 방울져 떨어지고 있었다. 많이 놀란 게 틀림없었다. 아니, 그런데 왜 아이가 여기 있지? 그런 의문이 들었으나 일단은 피가 좀 멈춘 다음에 상황을 정리해야 했다.
“요, 용사님…. 괜찮아요?”
“…잠깐만. 기다려, 줄래요?”
최대한 피를 뱉는 소리를 안 내려고 노력하며 조심히 말했다.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아이가 끅끅거리며 입을 다물고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피가 언제 멈출지 모르니 아이를 이대로 세워 둘 수 없어서 아직도 내 어깨를 그러쥐고 있는 자그만 손을 살짝 떼어 냈다.
“옆에, 앉아 있을래요?”
아이가 순식간에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왜 이렇게 긴장해 있는 거지. 내가 뭔가 무섭게 말했나 생각해 봤지만 그게 아니라 피를 봐서 놀란 것 같았다. 계속 이어지는 훌쩍거리는 소리에 마음이 쓰였다.
피는 언제쯤 멈추는 걸까. 소매로 입을 막고 피를 뱉으려니까 숨이 조금 찼다. 옆에서 울먹이는 목소리가 자그맣게 흘러나왔다.
“용사님…. 죽으면 안 돼요….”
이 나이대의 아이를 보는 건 처음이어서 가늠은 잘 못 하겠지만 아마 예닐곱 살쯤 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아이들의 상상력이란 참 신기한 것 같다고 생각하며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안 죽어요. 잠깐만, 쉴게요.”
“아, 안, 안 돼요!”
아이가 돌연 벌떡 일어서더니 다급하게 나를 붙잡아 왔다. 내가 죽지 않겠다고 몇 번을 약속하고 나서야 간신히 진정시킬 수 있었다.
아이는 다시 내 옆에 얌전히 앉았다. 조금 진이 빠지는 기분이었다. 아직 피는 멈추지 않았지만 아이가 조금 차분해졌으니, 눈을 감고 아까 미래시로 본 장면을 다시 떠올렸다.
‘민주혁의 뒷모습이었지. 그 안개 같은 건 구름 흐르는 골짜기에 있을 만한 것이었고.’
노을이 지는 시간대라는 것 빼고는 정확한 날짜도 시간도 알 수가 없었다. 주위가 온통 뿌옇게 보여서 옆에 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분명히 정신이 들기 직전에 살이 꿰뚫리는 소리를 들었다. 마물인가? 전투 중에 그렇게 되는 건가? 긴장되는 마음에 불안하게 뛰는 심장의 울림이 온몸으로 번져 나가는 것 같았다.
‘돌아가야 돼.’
민주혁의 옆에 있어야 했다. 당장 오늘부터. 아직 노을이 지기까지는 시간이 남은 것 같지만 마음이 급했다.
당분간 민주혁의 옆에서 떨어질 수 없을 것 같았다. 문득 노을 지는 시간대가 싫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번에 라엔도…. 아니, 이건 생각하지 말자. 이번에는 반드시 일이 터지기 전에 막아야 한다.
그렇게 결심할 무렵 속에서부터 울컥 차오르던 피가 서서히 멎어 가는 것을 느꼈다. 품에서 클린 마법이 담긴 종이를 꺼내서 찢어서 주변을 정리했다.
“용사님, 이제 괜찮아요?”
옆에서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가 어느새 울음을 뚝 그치고 말끔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괜찮아요. 무슨 일이에요?”
여기까지 올라온 이유가 궁금해서 물었을 뿐인데 내 말이 끝나자마자 아이의 눈에 다시 투명한 눈물이 차올랐다.
“왜…. 미안해요. 많이 놀랐어요?”
“용사님. …말을 낮추세요. 아니, 낮추어 주세요.”
원래 이 나이대의 아이가 이런 성숙한 말을 쓸 줄도 아는 건지, 아니면 내 생각보다 나이가 더 많은지 알 턱이 없었다.
“나는 용사가 아니에요. 그래서 무슨 일이에요?”
내 의사를 명확하게 전달했으나 아이는 눈물을 흘릴 듯 말 듯 하며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결국 원만한 타협점을 찾고 나서야 아이는 무슨 일인지 입을 뗐다.
“형아,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
“뭐를?”
“저… 친구가. 아파서 못 깨어나는데, 용사님이 오면 깨워 달라고 부탁하고 싶었어요.”
아이가 조그만 손을 만지작거렸다. 이렇게 작은 아이가 이 정도로 간절한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
아이들은 용사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할 테니까 얼마나 기대했을지 뻔했다. 그렇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안타까워하고 있을 때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용사 외 치료하기.’
맞다, 그게 있었는데. 아이의 머리칼을 쓸며 입을 열었다.
“같이 한번 가 보자. 그런데 이거 비밀로 해야 하거든. 말 안 할 수 있겠어?”
“네!”
내가 아이의 친구를 치료했을 때 혹시라도 그게 알려지면 곤란했다. 용사 외의 사람을 치료할 기회는 한 번뿐이었으니까.
아이가 반짝반짝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그리고는 내 손가락을 끌어당겨서 자기 새끼손가락을 걸고는 자기가 사람이 아무도 지나다니지 않는 샛길을 안다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집에는 지금 네 친구밖에 없는 거야? 어른은?”
“원래 친구 아빠가 있는데, 잘 안 들어와요. 깨울 방법을 알아보느라 바쁘대요.”
하긴 아이가 아파서 깨어나지 못한다는데 제정신이 아닐 터였다. 일어나서 걸음을 옮기는데 앞장서서 걷는 아이가 다리를 살짝 절었다. 아이를 불러 세웠다.
“다리 다쳤어?”
“놀다가요.”
아이는 다치면서 크는 거라지만 막상 눈앞에서 다친 아이를 보니 안쓰러웠다. 보상으로 용사 외 가져오기도 있으니 상태를 보고 심각하면 써 줘야겠다 싶었다.
“다쳤는데도 여기까지 올라온 거야?”
“용사님을 만나려고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더라면 어떻게 하려고.”
“왜요? 용사님이잖아요.”
“…….”
아이를 천천히 안아 들고 신중하게 계단을 내려갔다. 아이가 내 목을 조그만 팔로 감쌌다. 어려서 그런지 체온이 높았다. 여기서 삐끗하면 끝장이었기에 내딛는 발걸음이 긴장되고 등줄기에 땀이 주륵 흘러내리는 것 같았다.
‘다들 어떻게 나를 가뿐하게 안아 들고 다녔던 거지.’
생각해 보면 박율도, 송하견도, 라엔도, 민주혁도 모두가 그랬다. 마법을 안 쓰고도 나를 툭하면 번쩍 안아 들었다. 내가 가벼운 편도 아닌데.
아무래도 다들 평균 이상으로 힘이 센 게 틀림없었다. 나는 이런 조그만 아이를 안아 들기도 조금 벅찬데. 물론 아주 힘든 건 아니지만.
“형아, 몸이 떨려요.”
“계단을 내려가니까.”
“팔도 떨려요.”
“…그렇지는 않을걸?”
아이들은 솔직하구나. 종탑에서 나와서 샛길로 들어서니 무성히 자란 나무가 햇빛을 중간중간 끊어 내고 있었다. 빽빽하게 자라난 풀이 발아래로 밟혔다.
아이는 덥지도 않은지 이제는 내 머리칼을 배배 꼬며 장난을 치고 있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형아가 대장이에요?”
“어? 그게 무슨 말이야?”
“다른 용사님들이 형아를 제일 좋아하는 것 같아서요.”
아이가 내 머리칼을 살짝 잡아당기는 느낌이 났다. 그런데도 머리가 멍해서 아픈 감각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눈도 못 떼던데요. 그래서 형아를 따라온 거예요.”
“…그래. 그런데 뭐 하고 놀다가 다친 거야?”
다들 나를 지나치게 신경 쓰고 있다는 건 조금 자각하고 있긴 했지만, 이렇게 말로 들으니까 뭔가 부끄러웠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아서 재빨리 주제를 바꿨다.
“그냥요. 굴러떨어졌대요.”
기억을 제대로 못 하는 거라면 머리 쪽도 같이 다친 걸지도 몰랐다. 아이에게 이따 용사 외 가져오기 보상을 꼭 써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혹시 다리 말고도 다친 곳이 있으면 그것도 가져올 수 있을 테니까.
“그때 그 친구도 저랑 같이 있었는데…. 아, 저 건물이에요. 도착했어요.”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난 통나무로 지어진 집이 하나 있었다. 커다란 창이 뚫려 있었고 이 마을의 모든 집이 그렇듯 담장도 대문도 없었다. 아이가 내 품에서 폴짝 내려오더니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서 그대로 문을 열었다.
“그냥 들어가도 되는 거야?”
“저는 매일 들어갔어요. 저랑 제일 친했던 친구라서….”
“어어, 그랬구나. 이제 들어가 볼까?”
아이의 목소리에 또 울먹임이 묻어 나와서 급하게 말을 이었다. 아이는 내 말이 끝나자 그새 진정한 듯 고개를 씩씩하게 끄덕이고는 집 안으로 쏙 들어갔다.
끼익.
문을 닫고 집에 들어서자 청량하고 마른 나무 냄새가 났다. 아이는 저쪽에 있는 방문을 하나 열었다.
“형아, 여기예요.”
방 안에는 커다란 침대가 있었다. 아이의 또래 정도 되어 보이는 친구가 침구에 폭 파묻힌 채 누워 있었다. 단정한 갈색 머리칼이 베개 위로 흩어져 있었다. 앞머리는 느슨하게 땋아서 뒤로 넘겨져 있었다.
창문의 닫힌 커튼 사이로 가느다랗게 들어오는 햇살이 창백한 얼굴을 비췄다. 옷에 가려진 목 부분부터 얼굴 반절 정도까지가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몸이 흠칫 떨렸다.
“왜….”
내가 걸음을 멈추자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아서 다리를 달랑 흔들던 아이가 말을 이었다.
“처음에는 목에만 그랬는데 점점 퍼졌어요. 형아, 깨워 주면 안 돼요? 얘 이름은 연서아고요, 저랑 나이가 똑같아요. 사과파이를 제일 좋아하고요, 그리고…”
아이의 목소리가 점점 흐릿하게 들렸다. 눈앞이 빙글 도는 것 같았다. 새까만 그림자가 꼭 마물에 물든 것처럼 보였다. 애써 걸음을 옮기며 말을 이었다.
“이런 사람들이 또 있어?”
“어, 저랑 연서아랑 둘이서 골짜기에 놀러 갔다가…. 기억은 잘 안 나는데 그다음부터 이렇게 됐거든요.”
아이가 자기 왼쪽 바지 밑단을 슬쩍 걷었다. 발목 부근부터 그 위쪽까지가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래서 저랑 얘만요. 다른 사람들은 괜찮아요. 골짜기에 출입 못 하게 바로 막았대요.”
아이가 천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근데 이건 비밀이에요. 부모님이 말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아프지는 않아?”
“저는 안 아파요. 그냥 걷는 데 좀 불편해요. 근데 서아는 아닌가 봐요.”
“얼마나 됐어?”
“어, 작년에 추워질 때쯤에요.”
그러면 그때다. 마물이 다른 물체에 스며들 수 있다는 걸 확인했을 무렵.
어제 박율이 마기가 목 안에 스며드는 것 같다고 말한 게 이거였나? 방치하면 이렇게 되는 건가? 제대로 생각해야 했다. 보상으로 치료하기와 가져오기가 있었으니까….
침대에 누워 있는 연서아에게 손을 뻗었다. 내가 치료하기 보상을 사용하겠다고 생각하자 그대로 눈앞에 상태 창이 떠올랐다.
「‘용사 외 치료하기(1회)’ 사용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