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7화.
딱 하나만
민주혁의 표정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뻔뻔했다. 이제 완전히 괜찮아진 것이 틀림없었다.
허벅지를 묵직하게 눌러 오는 무게에 슬쩍 벗어날까도 생각해 봤지만, 민주혁이 방금까지 몸이 안 좋았던 건 맞으니 내가 봐주기로 했다.
눈을 깜빡이면서 나를 올려다보는 민주혁의 눈가를 손으로 덮었다. 내가 잠들지 못할 때면 다들 내게 이렇게 해 줬던 것 같았다. 민주혁의 입꼬리가 호선을 그리는 모습이 보였다.
“어제 내가 방어 마법을 어떤 식으로 써야 하는지 감을 잡았다고 했잖아.”
“어. 그랬지.”
“그걸 형님들한테도 확실히 말씀드려야 하니까 여러 가지 경우를 따져 봐야 했거든.”
“방어하는 건 너뿐만이 아니라 각자 신경 쓰기로 했으니까?”
“맞아. 그래서 방어막에 마나를 더 불어 넣어야 할 부분이나, 그랬을 때 마나가 얼마나 더 들어가는지 그런 걸 시험해 보고 경우에 맞춰서 정리했어.”
민주혁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앞으로 실수 없이 하겠다는 말은 진심이었구나. 무리 없이 하겠다는 말은 거짓이었고.
“밤새 그걸 하느라 마나를 고갈되기 직전까지 쓴 거야?”
“고갈되기 직전까지는 아니고.”
민주혁이 내 손목을 감싸 쥐고 제 눈을 가린 손을 떼어 냈다.
“아무튼 고마워.”
나와 눈을 마주하고 씩 웃은 민주혁이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닿아 오던 무게감이 떨어지자 왠지 허전한 것 같았다. 누군가가 떠난 자리는 원래 이렇게 또렷하게 느껴지는 걸까.
◇
아침을 먹고 숙소를 나서서 마을로 나왔다.
민주혁은 마나가 어느 정도 회복되려면 시간이 필요하다고 해서 숙소에서 쉬라고 했고, 다들 오늘은 본격적으로 마물을 상대하는 게 아니라 주변 조사를 할 뿐이라서 내가 합류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하긴 이동을 많이 할 거라면 내가 안 가는 게 차라리 낫지.’
텔레포트를 쓰는 것이든 걸어서 이동하는 것이든 방해가 될 게 틀림없었다. 돌아보기만 하는 거라면 돌발 상황이 있지 않은 이상 크게 위험할 일도 없을 터였다.
아담한 마을을 쭉 걸었다. 여름의 더운 공기 속에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와 웅성거림이 녹아 있었다. 흙먼지 냄새가 났다. 거리에 듬성듬성 가게 같은 것들도 보였다.
‘어떻게 물어봐야 하지.’
자신 있게 길을 나섰지만 나는 신전에 있을 때는 밖으로 나가 본 적이 없었고, 신전을 나온 후에도 지금 같이 지내는 네 명 외에 딱히 다른 사람들을 만난 적이 없었다. 혼자서 거리에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새삼 그동안 함께 지내면서 그들이 내게 얼마나 다정한 시선을 보내온 건지 깨달았다. 지금 나에게로 따갑게 꽂히는 것 같은 시선을 감당하기가 벅차서 도망치듯 근처에 있는 아무 상점의 문을 열었다.
딸랑.
문에 달린 작은 종이 울리는 소리와 함께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조그만 상점 안에 들어와 있는 채였다. 연한 갈색의 나무 선반이 벽면을 빙 둘러싸고 있었다. 선반 위에는 알록달록하고 동그란 것들이 들어 있는 유리병이 줄지어 있었다.
맞은편에는 머리를 틀어 올려 묶은 중년의 여자가 나무로 된 안락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움직이던 손을 멈춘 채로 눈을 커다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분이 상점 주인분이신가? 그런데 왜… 저런 표정이지? 잘못 들어왔나? 나가야 하나? 흔들리는 눈으로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데 곧 분주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용사님이 여기는 어쩐 일이시람. 마을이 좁아서 오셨다는 소식이 다 전해졌어요. 필요한 게 있으셔요? 그런데 안색이 왜 그래요. 물약은 저쪽 옆 건물에서 가면 있는데. 아니, 그럴 게 아니라 거기 서 있지 말고 일단 들어오셔요. 이쪽으로 앉으시고. 당신, 여기 좀 나와 봐요.”
어느새 그녀의 옆으로 큼직한 안락의자가 하나 더 생겨 있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내게 손짓하는 동시에 상점 뒤쪽에 있는 방으로 고개를 돌려서 누군가를 부르고 있었다.
어…. 이게 무슨 일이지. 정신이 없었다. 내가 문 앞에 멍하니 서 있자 그녀가 내게로 다가오려는 것처럼 보였다.
아니, 그런 수고를 할 필요는 없었다. 일단 재빨리 걸음을 옮겨서 의자 위에 걸터앉았다. 내가 앉자 의자가 앞뒤로 조금씩 흔들렸다. 의자 밑면이 둥그런 모양이어서 그런 것 같았다.
“아, 안녕하세요.”
내 목소리가 떨리는 것처럼 나왔다. 이렇게 많은 말을 빠른 속도로 한 번에 듣는 건 처음이었다. 그녀가 무슨 말을 했는지 다 파악하지도 못했다.
정신 차리자. 물어볼 게 있었다. 그렇지만 내가 입을 여는 것보다 상점 뒤쪽 방에서 누군가 나오는 게 더 빨랐다. 그 역시도 나를 보며 깜짝 놀란 표정을 했다.
“용사님이 생각보다 더 젊으시네.”
“어머, 이이도 참. 처음 뵙는 분께 그러면 써요?”
“생각만 한다는 게 나도 참. 그런데 정말 그래 보이셔서. 성년은 되셨나 모르겠네.”
“어, 아니요….”
일단 나는 용사가 아니었지만 그걸 설명할 틈을 주지 않았기에 그냥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말하는 용사라는 건 아마 선택받은 용사인 박율을 말하는 거겠지? 박율도 용사로 처음 선택됐을 때는 성년이 채 안 되었을 나이였을 텐데.
그런데 용사가 선택된 다음에 모두에게 알리거나 하는 과정은 거치지 않는 건가? 이 사람들은 용사에 대해서 무관심하지는 않아 보이는데도 알고 있는 것이 몇 없는 듯했다.
‘생각해 보면 나도 마찬가지지.’
나는 심지어 신전에 살았는데도 용사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조차 몰랐었으니까. 왜 대대적으로 공표하지 않는 걸까. 충분히 알릴 만한 일 아닌가? 한참 생각하고 있을 때 탄식하는 듯한 목소리가 앞에서 들렸다.
“아이고, 어떡해….”
두 명이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내가 어리다고 생각해서 그러는 것 같은데, 성년이 안 된 사람을 어리다고 치부해선 안 됐다. 두 사람의 말이 멈춘 사이에 재빨리 입을 열었다.
“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그럼요. 대답할 수 있는 건 뭐든 말씀드릴게.”
“그래요. 뭐가 궁금하… 아차, 내 정신 좀 봐.”
그녀가 내게 유리잔 하나를 쥐여 줬다. 안에 네모난 얼음 조각이 들어 있었고 음료가 넘쳐서 흘러내릴 것처럼 가득 채워져 있었다.
“들어요. 날이 더워서 안색이 좀 창백한 것 같네.”
사실 조금 어지럽긴 했다. 날이 더워서가 아니라 지금 이 상황 때문이었다. 내가 한 마디를 하면 두 마디가 돌아왔다. 어른들이 나를 이렇게 대하는 건 처음이었다. 신관님들 말고 어른들을 만나 본 적이 없긴 하지만.
“그래서 뭐가 궁금하셔요?”
“여기에 혹시 신께 기도드릴 수 있는 장소가 있나요?”
“아뇨, 여긴 신을 믿는 사람이 없어서. 그, 신께 기도드릴 건물은 없는데, 저 위쪽으로 돌아가면 종탑이 하나 있어요.”
“맞네, 거기는 한번 가 보셔요. 저짝에 있는 골짜기를 왜 구름 흐르는 골짜기라고 부르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거기 올라가 보면 알 거예요. 그건 직접 봐야 눈에 탁 들어오니까.”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신과 대화할 수 있을 만한 장소가 없을 거라는 건 조금은 예상했었다. 아쉽긴 했지만 달리 방법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데 종탑이 왜 있어요? 종을 치나요?”
“하루가 끝날 때 저절로 종이 울려요. 자정에요.”
그랬나? 어젯밤에는 못 들은 것 같은데. 내가 가만히 생각하고 있자 그가 내 얼굴을 보더니 미소를 띠고는 입을 열었다.
“일찍 주무셨구나. 잠들면 들리지 않아요. 깨어 있어야만 들리는 종소리거든요.”
뭔가 마법으로 울리는 종이구나. 하긴 자고 있는데 종소리가 들리면 그것도 힘들 테니까.
이제 슬슬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그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이 멀리까지 와서 고생이 많아요.”
“맞지, 이 산골까지 들어오셔서. 안 그래도 골짜기 쪽을 막아 뒀다고 해서 무슨 일이 생길까 노심초사했거든요. 아, 당신. 거기 과자도 좀 더 담고.”
무슨 과자? 뒤를 돌아보니 한 아름 껴안아야 들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종이 가방 안에 뭔가가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그, 건,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저 이제 가 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문 앞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내 바로 앞에 종이 가방이 둥실 떠올라 있었다.
“이거라도 가져가요. 다른 건 뭐 드릴 수 있는 게 없네.”
“여긴 애들 간식밖에 없어서. 입에 맞을지는 모르겠는데 가져가셔요.”
“아니면 급한 일 없으면 천천히 더 있다 가요.”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이런 상황은 생각해 본 적도 없어서 당혹스러웠다. 눈앞에서 떠다니는 종이 가방이 너무 무거워 보였다. 물건의 무게가 아니라 다른 무게 때문인 것 같았다. 부담이라는 무게라든가.
“아이고, 선하셔라. 아무것도 받질 않으시겠다네.”
“그러면 딱 하나만 골라 가요, 용사님. 그 정도는 괜찮지요?”
“……감사합니다.”
내가 뭐라도 하나 가져가지 않는 이상 이 대화는 끝나지 않을 것이 틀림없다. 종이 가방에 손을 쑥 집어넣었다. 손끝에 걸리는 가느다랗고 미끈한 막대 하나를 빼내며 등을 돌리고 재빨리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조심히 들어가요, 하는 따뜻한 목소리가 얼핏 들린 것 같았다.
딸랑.
문을 닫고 나와서 숨을 천천히 골랐다. 마을의 평화로운 거리가 보였다. 아까와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이 여전히 그대로였다.
하늘에는 푸른 아침 기운이 사라지고 노란 햇살이 내려앉아 있었다. 꼭 다른 세상에 들어갔다 온 것 같았다.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 있었다.
‘세상이 이렇구나.’
마음이 이상했다. 이런 세상이라면…. 어쩌면 박율도, 송하견도, 라엔도, 민주혁도 그래서 그렇게까지 희생하며 최선을 다해서 세상을 구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따뜻한 사람들이었다. 따뜻한 세상이었고. 내 시야가 좁았다. 나는 신전이 세상의 전부인 줄만 알았다. 그곳의 사람들과 그곳에서의 생활이 내 세상의 전부였으니까.
그렇지만 아니었다. 세상은 이렇게나 넓었고, 짧은 만남과 짧은 시간조차 이렇게나 따뜻했다. 세상 사람들이 당신들처럼 다정한 사람들이라면 분명 이런 세상을 외면하기는 힘들 것이었다.
이제야 나는 당신들이 왜 세상을 그렇게 구하려고 하는지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 맞다. 내가 뭘 골라온 거지.’
손에 쥔 것은 화려한 무지개 색깔의 커다랗고 납작한 막대 사탕이었다. 음…. 좋아. 이건 나중에 천천히 먹기로 하자. 품에 조심히 넣으니 고작 사탕 하나의 가벼운 무게였음에도 왠지 묵직하게 느껴졌다.
마을 저편의 끝 즈음에 솟아 있는 커다란 종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아직 나온 지 시간이 많이 지나진 않았으니 종탑에 올라갔다가 다시 돌아가도 될 것 같았다.
‘종탑까지 정말 금방 도착했네.’
마을 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외진 곳이었음에도 워낙 작은 마을이어서인지 걸어서 순식간이었다. 주위에 사람도 건물도 아무것도 없었다.
적갈색 벽돌이 차곡차곡 높게 쌓여 있었고 위쪽에 아치형으로 뻥 뚫린 공간이 보였다. 꼭대기 지붕은 흰색 칠이 된 채로 뾰족하게 솟아 있었다.
‘저기까지 올라갈 수 있을까.’
생각보다 높았다. 내 체력을 생각해 보면 쉽지는 않을 것 같았지만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래쪽에 나 있는 입구로 성큼 들어갔다.
사방이 막혀 있어서인지 여름인데도 내부가 조금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오래된 건물 특유의 향기가 났다. 안쪽에 빙글빙글 돌며 이어져 있는 계단을 올랐다. 그렇게 마지막 계단을 밟았을 때.
“와.”
여름의 더운 바람이 훅 불어왔다. 중앙의 천장에 내 몸보다 커다란 은색 종이 매달려 있었다. 광이 나는 건 아니었지만 하나도 녹슬지 않은 것이 꽤 말짱해 보였다. 표면을 손끝으로 쓸어 보니 쇠의 까끌까끌한 촉감이 느껴졌다.
뻥 뚫린 벽 쪽으로 가서 자리에 무릎을 꿇고 앉으니 높이가 딱 바깥을 볼 수 있는 높이였다. 노란 햇살로 따스하게 물든 하늘이 바로 앞에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왜 구름 흐르는 골짜기라고 부르는 걸까.’
그걸 고민하며 먼 곳으로 시선을 옮길 때, 갑자기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잠깐, 이건 익숙했다. 급하게 몸을 돌려서 벽에 제대로 기대어 앉았다. 동시에 정신이 깊은 곳으로 빨려 들어갔다.
후욱.
뿌연 안개. 옅은 노을. 바람에 흩날리는 갈색 머리칼의 뒷모습. 안개 때문인지 또렷하게 보이지는 않았다.
자리에 곧게 서 있는 그의 앞에서 선명한 푸른빛이 반짝 터졌다. 동시에 푸욱, 하는 섬뜩한 소리가 얼핏 들린 것 같았다. 무릎이 꺾였다.
화악.
정신이 들었다.
「<미래시 중급> 스킬 사용!」
눈앞에 상태 창이 떠 있었다. 그리고 누군가 내 몸을 살짝씩 흔들고 있었다. 앳된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렸다.
“…용사님, 용사님! 정신 차려요!”
입에서 피가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지금 이게 다 무슨 상황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