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6화] 캐스팅 보트 (2)
한편, 조병석 실장과 통화를 끝낸 최성진 회장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한건설 컨소시엄의 다른 멤버인 VINCH의 존재를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대한건설 컨소시엄이 ACS와 손잡고 철도 건설 공사를 수주 받는다면, 모든 책임은 자신들이 떠안아야 한다.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지.”
각오를 다지며 급하게 박철헌 사장을 집무실로 불러들였다.
“찾으셨습니까, 회장님.”
“빨리 와서 앉아.”
“표정이 어두워 보이는데, 좋지 않은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박철헌 사장이 빈자리에 앉으며 조심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그동안 송 회장이 우리의 뒤통수를 치고 있었어.”
“뒤통수라면…….”
무언가 생각난 것이 있는지 박철헌 사장이 말끝을 흐렸다.
“맞아. 그 인간은 나한테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VINCH를 ACS와 접촉하도록 만들었어.”
“이런 나쁜 인간.”
“송 회장이 내일 오전에 스페인으로 출장 간다고 조 실장이 알려 주더라고.”
“그 인간이 공짜로 알려 주지는 않았을 것 같고, 말도 안 되는 대가를 요구하지 않았습니까?”
“스페인에서 스파이 역할을 해 주는 조건으로 100만 달러를 송금해 주기로 했어.”
“그 정도면 충분한 것 같네요.”
“만약에 대비해서 우리도 오늘 오후에 스페인으로 출발하자고.”
“네, 회장님.”
인천 국제공항 퍼스트 클래스 라운지.
임지태 회장은 성진수 실장과 함께 최성진 회장을 기다리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성 실장, 우리가 철도 건설 공사를 수주한다 하더라도 과연 이익을 창출할 수 있을까?”
성진수 실장은 불가능할 것이라 판단하고 있었다.
해외 건설 공사의 경우 이익률은 10∼15% 수준.
공사규모가 500억 달러 정도인 철도 건설 공사의 경우, 이익은 최대 75억 달러 수준이다.
그런데 자신들은 이미 세 나라에 80억 달러를 뇌물로 찔러 준 상태.
따라서 철도 건설 공사를 수주한다 하더라도 최소 5억 달러라는 적자가 발생한다.
물론 설계변경 및 불량자재를 사용해서 손실을 만회할 계획이지만, 그게 말처럼 쉽겠는가.
그러나 항상 팔은 안으로 굽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을 밝힐 수는 없었다.
“저는 쉽지 않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매형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텐데, 욕심을 부리고 있는 이유가 뭘까?”
“본전 생각과 송 회장에 대한 복수가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제가 판단할 때에는…….”
아주 공교로운 순간에 최성진 회장과 박철헌 사장이 퍼스트 클래스 라운지에 모습을 드러내는 바람에 성진수 실장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다.
최성진 회장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비어 있는 자리에 앉으며 임지태 회장에게 말을 건넸다.
“처남, 일찍 왔네?”
“어떻게 하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그나저나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입니까?”
“송 회장이 우리 몰래 VINCH를 움직여서 ACS와 접촉하고 있었어.”
최성진 회장은 조병석 실장과 통화한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래서 우리도 테베즈 회장과 담판 짓기 위해서 스페인으로 출발하려는 거야.”
“매형, 테베즈 회장을 만날 방법은 생각해 놓으셨습니까?”
최성진 회장은 임지태 회장의 질문 의도를 단숨에 캐치했다.
그는 지금 자기와 테베즈 회장과 일면식이 없다는 점을 꼬집은 것이다.
난감한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까 궁리하던 차에 문득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맞아, 조 실장이 있었지? 그나저나 테베즈 회장과 미팅시켜 주는 대가로 많은 돈을 요구할 것이 빤한데, 어떻게 하지? 일단 전화나 한번 해 보자.’
최성진 회장은 조병석 실장에게 전화 걸어서 자신들이 처해 있는 상황을 설명하고 부탁 얘기를 꺼냈다.
“…조 실장이 테베즈 회장과 다리를 놔줬으면 좋겠습니다.”
[최 회장님이 처해 있는 사정은 알겠지만, 저는 이적행위를 할 수는 없습니다.]
역시 자신의 생각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졌다.
“테베즈 회장과 미팅을 주선해 준다면, 수고비로 100만 달러를 더 지급해 주겠습니다.”
[일단 시도해 보기는 하겠지만, 큰 기대는 하지 마십시오.]
“나는 조 실장의 능력을 믿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최 회장님은 스페인으로 언제 출발할 예정입니까?]
“지금 공항에 있습니다.”
[역시 최 회장님의 실행력 하나는 끝내주시는군요.]
“하하, 칭찬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그럼, 스페인에서 통화하겠습니다.]
딸깍.
조병석 실장이 전화를 끊자, 송훈석 회장이 잔뜩 호기심을 품고 말을 건네 왔다.
“지금 어떤 상황이야?”
“최 회장이 저한테 테베즈 회장을 만나게 해달라고 청탁해 왔습니다.”
“맨입에?”
이번에는 조병석 실장이 장난을 쳤다.
“아까 받은 100만 달러로 퉁 치자고 하던데요?”
“에이, 선수끼리 왜 그래?”
“진짜입니다.”
“나중에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면, 어떻게 되는지 알고 있지?”
“여기는 왜 이렇게 더운지 모르겠네요.”
조병석 실장이 후다닥 집무실 밖으로 도망쳤다.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송훈석 회장이 서동호 실장한테 말을 걸었다.
“조 실장한테 마드리드에서 술 한 잔 사라고 전해.”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리도 이제 슬슬 일어나보자고.”
“어디 가시게요?”
“점심 무렵에 정 부회장하고 통화했는데, 오늘 추 부사장의 환영식을 해 준다며 같이 축하해 주자고 하더라고.”
* * *
이틀 후.
ACS의 테베즈 회장은 송훈석 회장 등을 기다리며, 파블로 안토니 건설부문 사장, 디에고 루이즈 비서실장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안토니 사장, 우리가 단독으로 철도 건설 공사를 수주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 봤나?”
“아프리카 대륙에서 건설공사를 제일 많이 수주한 건설 회사는 저희, VINCH, 대한건설, CTG, CSCEC, 완커건설 순입니다. 이중에 VINCH는 대한건설과, 완커건설은 CTG, CSCEC, 한국의 YCM 건설과 컨소시엄을 구성한 상태입니다. 따라서 저희가 단독으로 철도 건설 공사를 수주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결국 두 개 컨소시엄 중에 하나와 손을 잡아야한다는 말인가?”
“네, 그렇습니다.”
테베즈 회장은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안토니 사장과 루이즈 실장은 그가 어떤 생각하고 있는지 빤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난 후.
드디어 생각을 끝냈는지 테베즈 회장이 눈을 뜨며 입을 열었다.
“안토니 사장은 우리가 어디와 손을 잡았으면 좋겠나?”
“양쪽 모두 장단점이 있는 상황이라서 쉽사리 결정하지 못하겠습니다.”
“양족의 장단점을 얘기해 봐.”
“먼저 대한건설 컨소시엄의 경우에는 뛰어난 시공능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공기 안에 공사를 끝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단점은 저희가 영향력을 발휘하는 데에 한계가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YCM 건설 컨소시엄은 그 반대의 경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무슨 말인지 알았네.”
잠시 대화가 중단된 틈을 타서 루이즈 실장이 발언권을 요청했다.
“안토니 사장님, YCM 건설 컨소시엄이 움직이지 않고 있는 이유가 뭘까요?”
“대한건설 컨소시엄이 저희한테 어떤 제안을 했는지 확인해 보고 접촉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대한건설 컨소시엄과 담판을 지으면 안 되겠네요?”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똑똑.
그때, 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송훈석 회장 일행이 도착했다고 보고했다.
“안으로 모시고, 사람숫자에 맞도록 커피를 가지고 와.”
“네, 회장님.”
비서의 안내를 받아 송훈석 회장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난 테베즈 회장이 반갑게 인사말을 건넸다.
“송 회장님, 오랜만입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제 일행 중에 서동호 실장과 샹바르 사장은 알고 계실 것 같고…….”
간단하게 상견례를 끝난 뒤, 비서가 서빙한 커피를 마시며 탐색전에 돌입했다.
“저는 대한건설 컨소시엄에 그다지 좋은 감정이 없습니다.”
“테베즈 회장님, 저는 잉가 3댐 건설 공사에 대해서는 서로 승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네? 저희가 승자라뇨?”
“ACS는 CTG 측에 위약금과 정신적인 피해 보상금으로 15억 달러를 받아 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테베즈 회장은 속으로 적잖이 놀랐다.
자신들이 잉가 3댐 건설 공사 해지와 관련해서 위약금을 받아 낸 사실은 CTG의 리위춘 회장과 부투야 실장밖에 모르고 있는 극비사항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송훈석 회장의 입에서 그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모른척하고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서 직설적으로 물어봤다.
“부투야 실장이 CTG의 리위춘 회장을 콩고민주공화국으로 불러들일 수 있도록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이 H&J 컨설팅의 한겨울 사장입니다. 참고적으로 H&J 컨설팅은 저희 대한 그룹의 전략적인 파트너입니다.”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이제야 이해했다는 듯 테베즈 회장이 고개를 아래위로 끄덕였다.
“H&J 컨설팅과 특수한 관계에 놓여 있는 저희가 철도 건설 공사를 수주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상태입니다. 그러니, 저희와 손을 잡았으면 좋겠습니다.”
“송 회장님, 저희가 대한건설 컨소시엄의 파트너가 된다면 어떤 혜택을 주실 생각입니까?”
“저희는 우간다 구간을 ACS에 양보할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 케냐의 나이로비, 우간다의 캄팔라를 연결하는 철도 건설 공사 프로젝트는 우간다 구간이 제일 짧다
때문에 테베즈 회장은 매우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아마추어처럼 내색하지는 않았다.
자신들에게는 YCM 건설 컨소시엄이라는 플랜 B가 있었으니까.
“알겠습니다. 저희가 언제까지 답변해 드리면 되겠습니까?”
“YCM 건설 컨소시엄 측의 제안을 들어보시고 답변 주십시오.”
“송 회장님, 그들은 저희한테 연락조차 없었습니다.”
“YCM 그룹의 임지태 회장이 지금 마드리드에 체류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그에게 연락을 취해 놓을 테니까, 한번 만나보십시오.”
“그것참 이상하네요. YCM 건설 컨소시엄은 대한건설 컨소시엄의 적이 아니었습니까?”
“그렇기는 하지만,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테베즈 회장님을 만나보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하루 빨리 만나 보는 게 저희한테도 유리합니다.”
“하여간 알겠습니다.”
* * *
[통화를 끝내는 즉시 테베즈 회장의 핸드폰 번호를 전송해 드리겠습니다.]
“조 실장, 전화를 끊기 전에 하나만 더 물어봅시다. 송 회장은 테베즈 회장한테 어떤 제안을 했습니까?”
[우간다 구간을 넘겨준다고 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았습니다. 수고비는 10분 내로 송금해 주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딸깍.
최성진 회장은 귀를 쫑긋 세우고 있는 일행들한테 통화 내용을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박 사장은 조 실장한테 100만 달러를 송금해 주고, 우리들은 오후에 테베즈 회장을 만나보자고.”
“네, 알겠습니다.”
ACS 회장실.
오후에 테베즈 회장을 방문한 최성진 회장은 짧게 인사를 끝내고 철도 건설 공사에 대한 안건을 바로 꺼냈다.
“테베즈 회장님, 대한건설 컨소시엄이 어떤 제안을 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들은 공사 구간이 제일 짧은 우간다 구간을 넘겨준다고 했습니다.”
최성진 회장은 테베즈 회장의 발언에서 한 가닥 희망을 엿볼 수 있었다.
즉, 자신들이 조금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한다면, 파트너로 끌어들일 수도 있다는 희망을.
그러기 위해서는 테베즈 회장의 엉덩이부터 시원하게 긁어 주어야 한다.
“그들은 ACS가 세계 건설시장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네요.”
“역시 저하고 최 회장님은 통하는 점이 많은 것 같습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YCM 건설 컨소시엄은 저희한테 어떤 제안을 할 겁니까?”
“케냐 구간은 중국 건설회사 세 곳이 선점했으니까 곤란하고, 탄자니아 구간을 ACS 측에 넘겨드리겠습니다.”
테베즈 회장은 이게 웬 떡인가 싶었다.
세 나라에 뇌물을 1달러도 지급하지 않고, 제일 긴 공사구간을 자신들이 차지했으니까.
“좋습니다. YCM 건설 컨소시엄의 제안을 수용하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감사합니다.”
크게 기뻐하는 최성진 회장의 목소리가 테베즈 회장의 집무실에 울려 퍼졌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