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화] 캐스팅 보트 (1)
시간은 흘러 9월 초가 되었다.
비록 외상이지만, 겨울은 최성진 부회장이 보유하고 있던 지분을 매입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대한 그룹의 3대주주로 등극했다.
H&J 컨설팅은 예정대로 8월 초에 탄자니아, 케냐, 우간다를 연결하는 철도 건설공사에 대한 국제입찰 공고를 냈다.
그동안의 폭발적인 사세 확장으로 인해 증가한 직원들 때문에 강남역 인근에 위치한 초고층 빌딩으로 사옥을 이전했다.
8월 초에는 태스크포스에 파견 나가 있던 김종학 상무가 합류했고, 어제 날짜로 대한 그룹 아프리카 법인장이던 추성민 전무가 H&J 컨설팅에 합류했다.
지금은 정명훈 사장의 주재로 경영진 회의가 진행되고 있는 중이었다.
“추 전무, 우리 회사에 합류한 소감이 어떻습니까?”
자리에서 일어난 추성민 전무는 회의 참석자들에게 정중한 자세로 인사한 후, 침착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지난달 말까지 대한 그룹 아프리카 법인에서 근무한 추성민이라고 합니다. 그동안의 직장 생활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H&J 컨설팅이 세계적인 회사로 발돋움 할 수 있도록 일조하겠습니다.”
“우리 모두 추 전무를 환영의 박수로 맞이해 줍시다.”
짝짝짝.
박수 소리가 작아지자, 정명훈 사장이 말을 이어 나갔다.
“여러분도 알고 계시다시피, 우리 회사는 급속도로 사세를 키워 나가고 있습니다. 이에 조직개편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고, 인사팀과 비서실이 중심이 돼서 조직 확대개편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신 실장이 조직개편 내용을 여러분께 발표할 예정이니,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신지훈 실장이 결재판의 덮개를 열어 안에 들어 있는 서류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지금부터 발표하는 조직개편 내용은 사장님과 두 부사장님이 사전에 합의했다는 점을 밝혀 드립니다.”
긴장감을 높이려는 의도였는지 신지훈 실장이 말을 끊었다가 이어 나갔다.
“먼저 H&J 컨설팅부터 발표하겠습니다. 각 대륙을 담당하는 조직을 신설했고, 제일 중요한 아프리카 대륙은 추성민 전무께서 담당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아시아는 김종학 상무께서…….”
신지훈 실장의 발표를 귀담아 듣고 있던 김윤중 전무는 무언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H&J 컨설팅에서 제일 중요한 조직 중에 하나인 자원거래 팀에 대한 언급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물어보려고 입을 떼려는 순간, 신지훈 실장의 입에서 자원거래 팀에 대한 얘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맨 마지막으로 자원거래 팀은 H&J 컨설팅에서 분리한 후, H&J 트레이딩으로 새롭게 출발할 예정입니다, 김윤중 전무께서는 인사팀, 법무팀 등의 도움을 받아서 9월 말까지 분사를 완료하셔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마음의 부담을 덜었다는 듯 김윤중 전무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려왔다.
“이제 조직 확대개편에 따른 승진인사를 발표하겠습니다. 먼저 정명훈 사장님은 부회장으로, 세 회사의 CEO는 사장으로, 나머지 임원들은 한 단계씩 승진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번에 새롭게 임원으로 승진한 사람들은 남우영 인사팀장, 강진권 자원거래팀장, 최홍진 총무팀장입니다. 호칭은 지금 이 순간부터 적용되오니, 착오 없으시기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신지훈 실장이 발표를 끝내고 자리에 착석하자, 정명훈 부회장이 입을 열었다.
“각 회사의 조직책임자들은 최대한 빨리 조직이 안정될 수 있도록 역량을 발휘해 주세요.”
“네, 부회장님.”
“그리고 철도 건설 공사 국제입찰은 추성민 부사장이 진행하고, 김종학 전무가 백업해 주는 것으로 하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추 부사장 환영식은 오늘 밤에 할 예정이니까, 참고하고 계세요.”
“네, 알겠습니다.”
“이제 일터로 돌아가서 활기찬 하루를 시작하십시오.”
회의를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온 겨울은 하도진 실장과 대화를 이어 갔다.
“하 실장님, 회의시간 내내 표정이 어둡던데 좋지 않은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사실 하도진 실장은 살짝 서운한 감정이 일었다.
직장인의 꿈은 뭐니 뭐니 해도 승진이다.
비록 자기가 겨울의 비서실장이라는 중책을 맡고 있지만, 여전히 직위는 이사였다.
따라서 이번에 상무로 승진할 것으로 내심 기대하고 있었는데, 이름조차 언급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불만을 겨울에게 털어놓을 정도로 바보 멍청이는 아니었다.
“아무 일도 없습니다. 환절기라서 그런지 몸이 무거워서 그럽니다.”
겨울은 하도진 실장의 기분이 다운되어 있는 이유를 대충 눈치채고 있었다.
“하 실장님, 이번 승진 인사에 불만이 있으시죠?”
“아, 아닙니다. 없습니다.”
“그럼 왜 말을 더듬는 겁니까?”
“사장님이 훅 치고 들어오는 바람에 당황해서 그런 겁니다.”
“천하의 하 실장님이 당황할 때가 있습니까? 솔직하게 얘기해 보세요.”
“…사장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겨울에게 속내를 들킨 하도진 실장은 한참 만에 대답했다.
겨울은 빙긋 웃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이제부터 제가 하는 얘기는 하 실장님만 알고 계셔야 합니다.”
“사장님도 제 입이 무거운 것은 이미 알고 계시잖아요.”
“하하, 알았어요. 신 실장님, 하 실장님, 장 사장님의 비서실장인 그리븐 실장도 이번에 승진이 결정됐는데, 공개적으로 발표하지 않았습니다.”
하도진 실장은 어떤 이유 때문에 비공개 처리를 했는지 단숨에 알아챘다.
H&J 컨설팅과 H&J Investment의 경영진들은 거의 대부분 대한 그룹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이다.
그런 이유로 사내에는 알게 모르게 그들만의 위계질서가 형성되어 있었다.
만약에 자기가 대한 그룹 입사 선배들보다 먼저 파격 승진한다면, 그들로부터 시기와 질투를 한 몸에 받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정명훈 부회장은 이 점을 고려해서 비서실장들에 대한 승진 사실을 비공개 처리한 것이다.
“사장님, 제 직위는 무엇으로 결정됐습니까?”
“전무입니다.”
“네? 상무가 아니라 전무라고요?”
“직속상사이던 김종학 전무님이 삐칠 수 있으니까, 당분간 비밀로 하셔야 합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염려 붙들어 매십시오.”
“이제 추 부사장님과 김 전무님을 불러 주세요.”
“넵! 알겠습니다.”
잠시 후, 호출을 받은 두 사람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두 사람이 비어 있는 자리에 앉자, 겨울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부사장님, 누가 쫓아옵니까?”
“사장님이 급하게 찾는다고…….”
이제야 어떤 상황인지 눈치챈 추성민 부사장이 끝말을 흐렸다.
“하 실장이 삐쳐서 두 분께 장난 친 거니까, 이해해 주십시오.”
“하 실장이 저희한테 삐칠 이유라도 있습니까?”
“이번 승진인사에 누락됐잖아요.”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 김종학 전무가 입을 열었다.
“하 실장, 대한 그룹 입사 동기들 중에 임원은 고사하고 부장도 몇 명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
“전무님의 논리대로라면, 사장님의 입사 동기들 중에는 대리도 한 명 없습니다.”
“없기는 왜 없어. 장 사장님이 계시고, 이재성 대리와 송지유 과장도 있잖아.”
“아이고, 제가 졌습니다.”
하도진 실장이 익살스런 표정으로 두 손을 높게 치켜들었다.
잠시 후, 비서가 시원한 음료수를 내왔다.
목이 타던 두 사람은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음료수를 들이켰다.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겨울이 이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말문을 열었다.
“추 부사장님은 이번 주 안으로 김 전무께 철도 건설 공사 국제입찰 건에 대한 업무를 인수받으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아프리카 무역팀의 규모를 확대하시고 가쿠타 부장을 임원으로 승진시켜 주는 방안을 고려해 보십시오.”
“연말 정기인사 시즌에 반영하도록 하겠습니다.”
추성민 부사장과 대화를 마무리한 겨울은 시선을 김종학 전무에게 옮기며 말을 걸었다.
“김 전무님, 철도 건설 공사와 관련해서 건설 회사들의 동향은 어떻습니까?”
“저희가 예상한 대로 대한건설 컨소시엄과 YCM 컨소시엄의 2파전으로 진행될 것 같습니다.”
“YCM 건설 컨소시엄의 움직임은 어떻습니까?”
“아직까지 ACS와 접촉하지 않고 있습니다.”
겨울은 어떤 상황인지 대충 감이 잡혔다.
YCM 건설 컨소시엄이 ACS를 파트너로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큰 폭의 양보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80억 달러를 세 나라에 기부한 YCM 건설과 완커건설은 자칫하면 손해 볼 수도 있는 상황.
그런 이유로 그들은 ACS를 파트너로 끌어들이는 것을 주저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 대한건설 컨소시엄 측이 ACS와 접촉하지 않는 것도 한몫 차지하고 있을 것이고.
머뭇거리는 그들에게 긴장감을 심어 줄 필요가 있었다.
“하 실장님, 조 실장께 전화해서 저를 바꿔 주십시오.”
겨울의 지시를 받은 하도진 실장은 즉시 조병석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 실장, 오랜만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장님께서 실장님과 통화하고 싶어 하십니다.”
[한 부사장이 사장으로 승진했습니까?]
“네. 9월 1일자로 승진하셨습니다. 참고로 정명훈 사장님은 부회장으로 승진하셨습니다.”
[좋은 정보 알려 줘서 고맙습니다.]
“하하, 별말씀을요. 이제 한 사장님을 바꿔 드리겠습니다.”
하도진 실장에게 핸드폰을 건네받은 겨울은 조병석 실장과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은 후, 본격적인 안건을 꺼내 들었다.
“조 실장님, YCM 건설 컨소시엄을 조금 흔들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저희 회장님과 함께 ACS의 테베즈 회장을 만나기 위해서 내일 오전에 스페인으로 출장 떠날 예정입니다.]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저희가 스페인 출장에서 돌아오면, 승진 턱을 크게 내십시오.]
“정 부회장님의 지갑을 거덜 내는 게 먼저인 듯합니다.”
[아차, 정 부회장님이 계셨지요?]
“스페인 출장 후에 뵙겠습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딸깍.
조병석 실장이 전화를 끊자, 송훈석 회장이 서동호 실장한테 말을 걸었다.
“H&J 컨설팅의 신 실장한테 연락해서 승진한 사람들을 파악한 후, 축하 난을 보내 주라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나저나 최성진 전 부회장은 요즘 뭐하고 있나?”
“지난 달 초에 개인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회사의 회장으로 취임했고, 요즘은 사세를 확장하기 위해서 바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조 실장, 최성진 회장한테 우리들의 스페인 출장 사실을 알려 주라고.”
“네, 알겠습니다.”
짧게 대답한 조병석 실장은 그 자리에서 최성진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 실장이 뜬금없이 웬일입니까?]
“용돈 좀 벌어 보려고 연락드렸습니다.”
[어서 얘기해 보세요.]
“내일 오전에 송 회장님이 스페인으로 출장 떠날 예정입니다.”
[ACS 측과 접촉하기 위함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모레 오전에 테베즈 회장과 담판이 예정되어 있습니다.”
[담판이라고요?]
묻는 최성진 회장의 목소리에 놀람이 담겨 있었다.
“지난 열흘 전부터 대한건설의 파트너인 VINCH가 ACS 측과 은밀하게 접촉하고 있습니다.”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제가 일전에 말씀드렸듯이 ACS가 캐스팅보트를 쥐고 있는 상황입니다. 대한 그룹이 ACS를 파트너로 끌어들이면, YCM 건설 컨소시엄은 죽었다 깨어나도 입찰에서 성공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최대한 빨리 서두르십시오.”
[알았어요. 우리들도 스페인으로 떠나겠습니다.]
이제야 목적을 달성한 조병석 실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최성진 회장과 통화를 이어 나갔다.
“저도 송 회장님과 동행할 예정이니, 참고하고 계십시오.”
[조 실장, 스페인에서 연락해도 되겠습니까?]
“제가 중간 중간에 연락드리는 게 나을 듯합니다.”
[그건 그렇고, 정보 제공 비용은 얼마를 지급해야 합니까?]
“저희가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까, 100만 달러만 주십시오.”
[네! 100만 달러라고요?]
“제가 스페인에서 최 회장님께 전해 드리는 정보 제공 비용까지 포함된 금액입니다.”
[아, 무슨 말인지 감 잡았습니다. 30분 내로 송금해 드리겠습니다.]
“스페인에서 뵙겠습니다.”
뚝.
조병석 실장이 전화를 끊자, 송훈석 회장이 가볍게 농담을 건넸다.
“조 실장, 너무 적게 부른 것 아니야?”
“네? 100만 달러가 적다고요?”
조병석 실장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나하고 서 실장은 손가락 빨고 있어야 해?”
“아이고…….”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