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 (1)
우간다 엔테베 국제공항 VIP 라운지.
추성민 법인장과 김종학 지점장은 송훈석 회장이 타고 있는 전용기가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김 지점장의 대한 그룹 생활도 이제 며칠 남지 않았네?”
“네, 법인장님.”
“곧바로 H&J 컨설팅에 합류할 예정인가?”
그렇지 않아도 김종학 지점장은 며칠 전에 정명훈 사장에게 전화해서 그 문제에 대해서 상의해 보았다.
그는 탄자니아, 케냐, 우간다를 연결하는 철도 건설 프로젝트의 타당성 검토를 위한 태스크포스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중이라면서 곧바로 합류하기를 원했다.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정 선배도 독한 면이 있단 말이야.”
“뭐가 말씀입니까?”
“그동안 이곳에서 죽어라 고생했는데, 며칠 정도 휴가를 줄 수도 있잖아.”
“그게 직장인의 비애 아니겠습니까.”
“나도 곧 자네를 따라갈 테니,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김종학 지점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정명훈 사장의 특명으로 추성민 법인장은 아프리카 법인에서 최소 2년 정도 근무하는 것으로 확정된 상태였다.
그런데 그는 ‘곧’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H&J 컨설팅으로의 이직을 언급하고 있었다.
“법인장님, 아직 시간이 남아 있는 것 아닙니까?”
추성민 법인장은 일주일 전의 일을 기억에서 끄집어 냈다.
아침에 출근해서 업무를 보고 있는 도중에 오랜만에 겨울이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H&J 컨설팅의 규모가 급속도로 커지고 있는 것에 비해 정명훈 사장을 보좌할 수 있는 경영진이 부족하다며 H&J 컨설팅으로 이직을 서둘러 줄 수 없냐는 부탁을 해 왔다.
이는 자기도 바라던 일이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중대한 직책을 맡고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지만, 마음은 콩밭에 가 있은 지 오래였으니까.
그 즉시 이진호 사장에게 전화 걸어서 겨울에게 부탁받은 내용을 보고했다.
그러자 곧바로 송훈석 회장에게 전화가 걸려왔고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눈 끝에 최종 허락이 떨어졌다.
“며칠 전에 회장님께 전화 받았는데, 나는 대한 그룹에서 필요 없다고 하더군. 그래서 7월 말 일자로 잘리기로 확정된 상태야.”
“에이, 정 선배님이 수작 부렸군요?”
“아니. 한 부사장님의 작품이야.”
“네? 그게 정말입니까?”
전혀 예상치 못했다는 듯 김종학 지점장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내가 김 지점장한테 거짓말할 이유가 뭐가 있어?”
“그렇긴 합니다만… 어찌됐든 축하드립니다.”
“내가 대한 그룹에서 잘린다는 사실을 정 선배는 모르고 있으니까, 7월 말까지는 비밀이야.”
“뭐, 알겠습니다.”
“이제 다른 얘기를 잠깐 해 보자고. 최준하는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나?”
“최준하요? 아휴, 말도 마십시오. 그놈이 콩고 지점에 배치된 이후에 출근한 날짜보다 결근한 날짜가 많습니다.”
“결근 사유가 뭔데?”
“아파서 출근하지 못했다며 진단서를 제출했는데, 모두 허위로 발급된 거였습니다.”
“결국 무단결근이라는 얘기네?”
“네, 그렇습니다.”
무단결근은 근로자와 회사 사이의 신뢰 관계를 깨는 행위이기 때문에 매우 엄격하게 다룬다.
대한 그룹의 경우에도 3일 이상 연속 무단결근, 또는 연속적이지는 않지만 일주일 이상 무단결근을 할 경우 징계위원회 개최 없이 해고 처리할 수 있다.
그러니 한 달 가까이 무단결근한 최준하는 당연히 징계해고감이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김종학 지점장은 최준하를 그냥 내버려 두고 있었지만.
추성민 법인장은 이유가 무엇인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사실은 지난달 말에 해고로 처리하려고 했는데, 최성진 부회장이 사정하는 바람에 지켜보고 있는 중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인가?”
“제가 퇴사하기 전에 마무리 지을 예정입니다.”
“최 부회장이 반발하지 않을까?”
“이미 한차례 경고했기 때문에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할 수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 * *
“송 회장님, 우간다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송훈석 회장이 비행기에서 내리니 기다리고 있던 마사카 부통령이 다가와 인사말을 건넸다.
“이렇게 늦은 시간인데도 저희를 맞이해 주신 것에 진심으로 감사 말씀드립니다.”
“귀한 손님들이 오시는데, 어떻게 모른척할 수 있겠습니까? VIP 라운지에 자리를 마련해 놨으니까, 못다 한 대화는 그곳에서 나눴으면 합니다.”
“알겠습니다.”
VIP 라운지.
송훈석 회장이 자리에 앉으며 마사카 부통령에게 질문을 던졌다.
“다른 분들은 도착하셨습니까?”
“토탈의 뿌요네 회장님은 오늘 오후에 도착했고, 마자리 대통령님을 비롯한 탄자니아…….”
마사카 부통령의 설명을 듣고 있던 정명훈 사장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송유관 건설공사 착공식에 참여할 VIP들 중에서 루퍼트 국무장관이 누락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를 생각하는 도중에 그의 설명이 끝났다.
그의 모습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는지 무세베니 실장이 즉시 질문을 던져 왔다.
“정 사장님, 방금 전에 고개를 갸웃거리셨는데, 저희가 초대하지 않은 VIP가 있습니까?”
“그게 아니라… 제가 월 초에 루퍼트 국무장관과 통화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루퍼트 장관께서는 월 말에 아프리카에서 만나자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상하네요. 저희는 미국 측으로부터 아무런 연락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 순간, VIP 라운지의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미국의 권력 서열 4위인 루퍼트 국무장관이 내뱉은 말은 결코 가볍지 않다.
따라서 그가 예정대로 아프리카에 출장 올 가능성은 상당히 높은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우간다 측에 연락해 주지 않았다는 얘기는 송유관 건설공사 착공식에 참석하지 않고 잉가 3댐 건설과 도로확포장 공사 착공식에 참석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기 때문에 루퍼트 장관이 우간다를 방문하지 않는 것이겠지만, 당사자인 우간다 측은 기분 나쁠 만도 했다.
분위기가 더욱 다운되기 전에 수습해야 한다고 판단했는지 장대산 부사장이 눈치껏 발언권을 요청했다.
“무세베니 실장님, 지난 월 초에 제 아버지 생신파티에 루퍼트 장관님이 참석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그분께서는 일대일로 프로젝트에서 탈퇴하려는 나라들을 방문하느라 매우 바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틀림없이 그 이유 때문에 송유관 건설공사 착공식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 같으니,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호영이 한국어를 사용해서 겨울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한 부사장, 깜짝 파티가 아닐까?”
“조금 전에 장 부사장이 하는 얘기 듣지 못했어?”
“혹시 모르니까 내가 전화 한번 해 볼까?”
“전화해서 뭐하려고?”
“알면서 왜 물어?”
이 말과 함께 호영은 루퍼트 장관에게 전화 걸었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바로 전화를 끊었다.
“무슨 일인데”
“핸드폰 전원이 꺼져 있어.”
이번에는 겨울이 고개를 갸우뚱했다.
루퍼트 장관은 시간을 분 단위로 쪼개서 사용할 만큼 바쁘게 살고 있기 때문에 핸드폰 전원을 여간해서는 꺼 놓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핸드폰 전원을 꺼져 있다면 잠자는 시간, 회의 하는 시간, 비행기를 타고 이동하는 시간 정도일 것이다.
현재 미국은 낮이기 때문에 첫 번째 경우는 해당 사항이 없다.
회의할 때도 마찬가지.
다른 사람들과 수시로 연락을 주고받아야 하기 때문에 핸드폰을 무음, 또는 진동으로 설정해 놓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그렇다면 비행기를 타고 있다는 확률이 높다는 뜻.
겨울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무세베니 실장에게 말을 걸었다.
“실장님, 미국 대사의 연락처를 알고 계십니까?”
“알고는 있습니다만…….”
무세베니 실장이 의도적으로 끝말을 흐렸다.
즉, 질문한 의도를 밝히라는 의미였다.
“정 이사가 루퍼트 장관님께 전화 걸어 봤는데, 핸드폰 전원이 꺼져 있습니다.”
“아… 무슨 말씀인지 감 잡았습니다.”
역시 무세베니 실장의 센스도 일반 사람들보다 확연히 뛰어났다.
“실장님이 미국 대사님께 여쭤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무세베니 실장은 우간다 주재 미국 대사에게 전화 걸어서 몇 마디 대화를 주고받더니, 느닷없이 핸드폰을 겨울에게 건네주었다.
“한 부사장님, 조지 하프만 대사님이 통화하고 싶답니다.”
“네? 저를요?”
“이유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무세베니 실장한테 핸드폰을 건네받은 겨울은 하프만 대사와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시작했다.
[한 부사장님, 요 근래에 루퍼트 장관님과 통화하신 적 있습니까?]
“없습니다만, 저한테 묻는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사실은 중국의 정보기관 요원들이 루퍼트 장관님의 뒤를 쫓아다니고 있는 상황입니다.]
“일대일로 프로젝트 때문입니까?”
[본국에서는 그렇게 판단하고 있습니다.]
“저희도 루퍼트 장관님과 통화할 일이 있으면 항상 주의해야겠네요.”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대사님, 루퍼트 장관님은 지금 우간다로 오고 계시는 중입니까?”
[오늘밤 자정 무렵에 도착하실 예정입니다.]
“제가 우간다 정부 측에 이 사실을 알려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만, 가급적이면 비밀을 지켜 달라고 말씀드려 주십시오.]
“그 점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하, 알겠습니다. 내일 착공식장에서 뵙겠습니다.]
“네, 대사님.”
딸깍.
겨울이 전화를 끊자 마사카 부통령이 득달같이 질문을 던져 왔다.
“한 부사장님, 루퍼트 장관이 우리나라를 방문한답니까?”
“네, 그렇습니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이제야 마음이 놓았다는 듯 마사카 부통령이 환한 표정으로 웃음을 터트렸다.
겨울은 하프만 대사와 통화한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면서 당부사항을 잊지 않았다.
“…장 부사장님께서는 루퍼트 장관님의 연락처를 알고 계신 분들에게 도감청이 불가능한 핸드폰을 지급해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 * *
호텔로 이동하는 자동차 안.
깊은 생각에 잠겨 있던 송훈석 회장은 한참 만에 조수석에 앉아 있는 추성민 법인장에게 말을 걸었다.
“추 법인장, 미안한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네, 말씀하십시오.”
“아프리카 법인의 조직 확대개편까지 마무리해 주고 H&J 컨설팅으로 이직하면 안 될까?”
추성민 법인장은 송훈석 회장의 의도가 무엇인지 단숨에 간파했다.
대부분의 회사들은 내년도 사업 계획을 8월부터 수립하기 시작해서 12월에 확정 발표한다.
따라서 그 일을 마무리 짓고 12월 말에 H&J 컨설팅으로 이직하기를 은연중에 바라고 있는 것이리라.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조심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추 법인장이 무언가 오해한 것 같은데, 한 달 정도만 이직을 늦춰 달라는 얘기야.”
“회장님, 조직 확대개편을 상반기 마감 후에 시작하라는 말씀입니까?”
“8월 말까지 마무리해 줄 수 있지?”
“최대한 서둘러 보겠습니다.”
“후임 법인장은 H&J 컨설팅과 호흡을 잘 맞출 수 있는 사람을 선정해 줬으면 좋겠어.”
“회장님, 인사권은 제가 아니라 이진호 사장에게 있습니다.”
“하지만 아프리카 사정은 자네가 더 잘 알겠지. 내가 추 법인장한테 권한을 위임해 줬다고 이 사장한테 언질해 놓겠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이제 다른 얘기를 잠깐해 보자고. 최준하는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나?”
“그렇지 않아도 김종학 지점장한테 물어봤는데, 회사를 놀이터로 생각하고 있답니다.”
“그런 놈을 지금까지 가만히 내버려 뒀다는 말이야!”
송훈석 회장의 말에 노기가 실려 있었다.
“사실은 김 지점장이 최준하에게…….”
추성민 법인장은 김종학 지점장과 나눈 대화 내용을 자세하게 보고했다.
“그놈한테 이달 말일자로 해고를 통보한다고?”
“네, 그렇습니다.”
그때, 서동호 실장이 발언권을 요청하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회장님, 최준하에 대한 해고 통보를 며칠 정도 뒤로 늦춰야 할 것 같습니다.”
“이유가 뭐야?”
“저희가 콩고민주공화국에 체류하는 날짜가 다음달 2일까지입니다.”
송훈석 회장은 서동호 실장이 무엇을 걱정하는지 단숨에 캐치했다.
대한 그룹에서 해고당한 최준하가 눈이 뒤집혀 자신들에게 해코지 할 가능성을 우려하고 있는 중이었다.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그의 조언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추 법인장, 최준하는 다음달 10일쯤에 해고시켜 버려.”
“네, 회장님.”
최준하의 대한 그룹에서의 생활이 종지부를 찍게 되는 순간이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