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4화] 질투심 유발 작전
“이야! 이제 드디어 검은 대륙 아프리카로 출발하는구나.”
전용기의 작은 창문을 통해 밖을 내다보던 호영이 감회 어린 표정으로 한마디 했다.
“촌놈.”
“하여간 감성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놈이라니까,”
겨울이 빈정거리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호영이 곧바로 되받아쳤다.
“내가 너하고 무슨 말을 하겠냐? 잠이나 자야겠다.”
겨울이 의자를 뒤로 젖히고 잠에 빠져들자, 하도진 실장이 호영에게 들릴락 말락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 이사님, 한 부사장님이 삐친 이유를 알고 있습니까?”
“하하하.”
“그렇게 웃지만 마시고, 부사장님과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주세요.”
호영은 한 시간 전쯤에 신기한 경험을 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겨울과 티격태격거리며 공항으로 이동하던 도중에 전화가 걸려왔고, 발신자를 확인하니 오매물망 그리던 송지유였다.
전화를 받으니, 아프리카에 같이 못가서 미안하다며 몸 건강히 잘 다녀오라는 안부전화였다.
그래서 통화 도중에 겨울을 바꿔 주겠다고 했더니, 싫다면서 전화를 매몰차게 끊는 것이 아닌가.
그녀의 마음이 겨울에게 기울었다고 판단하고 마음을 접으려고 했는데, 알고 보니 자신만의 착각인 모양이었다.
호영은 잠든 척하고 있는 겨울을 약 올리기 위해서 일부러 큰 목소리로 그 일을 언급했다.
“저하고 한 부사장이 김포공항으로 이동하는 도중에 송 회장님의 무남독녀…….”
하도진 실장은 송지유가 어떤 이유로 그런 행동을 취했는지 단숨에 캐치했다.
그녀를 뜨뜻미지근하게 대하고 있는 겨울의 질투심을 유발할 목적으로 호영을 끌어들인 것이리라.
세 사람의 연애사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일찌감치 세워 놓고 있었지만, 분위기가 워낙 삭막해서 이번만 예외적으로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정 이사님, 송 과장이 매몰차게 전화를 끊은 이유를 제가 알고 있는데, 원하시면 얘기해 줄 수 있습니다.”
“네. 말씀해 보세요.”
“제가 판단기로는 질투심 유발 작전인 것 같습니다.”
“하하하!”
잠든 척하며 누워 있던 겨울은 의자를 똑바로 세우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호영은 하도진 실장의 말을 믿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언제나 팔은 안으로 구부러지는 법이니까.
“하 실장님이 한 부사장과 친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거 다 알고 있습니다.”
“정 이사님이 저한테 내기하자고 제안하면 얼마든지 응할 수 있습니다.”
“좋습니다. 내기 금액은요?”
“제 전 재산을 걸도록 하겠습니다.”
그때를 기다라고 있었다는 듯 겨울이 대화에 동참했다.
“정 이사, 하 실장님은 빼고 나하고 내기하는 게 어때?”
“콜.”
“내기 금액은 깔끔하게 커미션 토해 내기?”
호영은 재빨리 내기의 승산을 따져 보았다.
‘만약에 하 실장님의 말씀처럼 질투유발 작전이라면, 커미션을 모두 토해 내야 하고 평범한 월급쟁이로 전락할 위험성이…….’
이런 결론에 도달하자, 양손바닥에서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혹시 모를 만약을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커미션을 토해 내는 것은 도박이니까, 그렇게 할 수는 없어.”
“그럼 네가 원하는 조건을 얘기해 봐.”
“상징적인 의미로 1달러 어때?”
“에라이, 좀팽이 같은 놈.”
“이 개떡 같은 인간아, 너는 커미션 0.3%를 잃어도 타격이 별로 없지만, 나는 극빈층으로 전락한다는 말이야! 그렇게 되면 내 원대한 꿈인 아스날을 인수할 수…….”
“정호영!”
화들짝 놀란 겨울이 가차 없이 말을 잘라 버렸지만, 이미 때는 늦어 버렸다.
앞자리에서 두 사람의 대화를 귀담아 듣고 있던 정명훈 사장이 몸을 돌리며 말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정 이사, 방금 전에 얘기한 아스날이 프리미어 리그의 명문구단인 그 아스날을 말하는 것인가?”
“아, 아닌데요?”
“갑자기 말을 더듬는 이유가 뭐야?”
“사장님이 갑자기 물어오는 바람에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을 뿐입니다.”
“그럼 당황한 이유를 얘기해 봐.”
점점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이제는 도저히 도망갈 길이 없다고 판단한 호영은 사실대로 털어놓기로 결정했다.
“이곳에서 말씀드리기에는 곤란한 측면이 있습니다.”
“알았어. 우리 회의실에서 차분하게 대화를 나눠 보자고.”
“네, 사장님.”
호영의 대답을 들은 정명훈 사장은 겨울에게 시선을 옮기며 말을 걸었다.
“한 부사장도 회의에 참석하는 게 맞겠지?”
“…저도요?”
겨울이 회의실에 끌려가기 싫다는 뜻을 분명히 내비쳤으나 정명훈 사장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 이사가 단독으로 아스날을 인수할 수는 없잖아.”
“…….”
“하 실장도 관여되어 있는 것 같으니까, 회의에 참석하고.”
“하아…….”
일을 키운 것을 뒤늦게 깨달은 하도진 실장은 비행기 바닥이 꺼져라 커다란 한숨을 내뱉었다.
회의실.
상석에 앉은 정명훈 사장은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 이사, 어떻게 된 상황인지 얘기해 봐.”
“사실은…….”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송훈석 회장을 비롯한 여러 명이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바람에 호영의 설명은 자동적으로 중단됐다.
“정 사장, 우리도 같이 들으면 안 될까요?”
“전혀 문제없습니다. 이곳에 앉으십시오.”
정명훈 사장이 상석을 비켜 주자, 송훈석 회장이 그 자리에 앉았다.
그는 낯빛이 시커멓게 죽어 있는 호영을 힐끗 쳐다본 후, 정명훈 사장에게 말을 걸었다.
“정 사장, 어떤 상황인지 얘기해 줄 수 있나요?”
“한 부사장, 정 이사, 하 실장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의 명문 구단인 아스날을 인수하려는 것 같습니다.”
“아스날을 인수할 생각을 했다니 정말 의외네요.”
“저도 회장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정 이사, 아스날 인수 계획에 대해서 자세히 얘기해 주세요.”
송훈석 회장의 요청을 받은 호영은 천천히 말문을 틔웠다.
“저는 어린 시절에 축구를 잘하는 한 부사장과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해 있는 조강석 선수를 지켜보면서 원대한 꿈을 하나 수립했습니다. 제가 프리미어리그의 명문 축구 클럽을 인수해서 두 선수들을 한 팀에서 뛰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꿈은 꿈일 뿐이라는 현실을 깨달았고, 자연스럽게 원대한 꿈은 기억 속에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저한테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 찾아왔습니다.”
호영은 러시아와 중국과의 자원거래 과정에 일어난 사건들을 간략하게 입에 올렸다.
하지만 민감하다고 판단되는 내용은 철저하게 숨겼다.
“…한 부사장이 커미션 0.1%를 저한테 나눠 주는 바람에 제 몫이 0.3%로 늘어났고, 연간 수령하는 금액은 약 9억 달러가 넘는 엄청난 돈이었습니다. 이 돈을 어디에 사용할까 생각하다가 어릴 때 꾼 원대한 꿈이 문득 생각났습니다. 그때부터 매물로 나와 있는 프리미어리그의 명문 축구 클럽들을 찾아보기 시작했고, 마침 아스날이 매물로 나와 있었습니다. 아스날을 인수하려면 최소 20억 달러는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한 부사장에게 공동으로 인수하자고 제안했고, 어렵지 않게 동의를 이끌어 낼 수 있었습니다.”
“하 실장은 어떻게 아스날 인수에 참여하게 됐나요?”
“한 부사장의 운전기사가 얘기를 꺼내는 바람에 알게 됐고, 아스날 인수를 총괄하는 조건으로 참여시키기로 했습니다.”
“흠…….”
송훈석 회장은 끝말을 흐리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호영은 그의 의도가 빤히 들여다보였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른 후, 드디어 생각을 끝내고 그가 입을 열었다.
“정 이사, 우리 대한 그룹도 아스날 인수에 동참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호영은 대한 그룹이 아스날 인수전에 동참해 주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아무리 하도진 실장이 능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혼자서 아스날을 상대하기에는 벅찬 감이 분명히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문제는 자기가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은 없었다.
“회장님, 아스날 인수에 제일 많은 돈을 투입하는 사람은 제가 아니라 한 부사장입니다.”
즉, 겨울에게 동의를 받으라는 얘기였다.
“한 부사장, 내 제안을 수용해 줄 수 있겠죠?”
“대한 그룹이 아스날 인수에 참여하려는 이유를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아스날 유니폼에 우리 대한 그룹의 로고를 집어넣으려고 합니다.”
“유니폼 스폰서로 선정되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비용을 지급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대한 그룹도 합당한 비용을 지급할 생각이니까,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마세요.”
“만약에 제가 동의한다면, 대한 그룹은 몇 %의 지분을 요구하실 생각입니까?”
“5% 어때요?”
송훈석 회장의 욕심 많은 성격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겨울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30% 이상 요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고작 5%라니.
자기가 모르고 있는 이유가 있는 것이 분명했지만, 굳이 물어볼 생각은 없었다.
“회장님께서 전제 조건을 수용해 주신다면, 대한 그룹의 동참을 받아들일 생각이 있습니다.”
“어떤 전제 조건인지 얘기해 보세요.”
“하 실장과 함께 아스날 인수에 참전해 주십시오.”
사실 송훈석 회장은 아스날 인수전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극적으로 참여를 결정한 이유는 겨울, 호영, 하도진 실장 때문이었다.
자신들은 영국 사람들과 30년 넘게 비즈니스를 진행해 오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비즈니스 스타일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영국 사람과 비즈니스를 진행한 적이 없는 세 사람은 아니었다.
그들의 비즈니스 스타일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본격적으로 아스날 인수전에 돌입한다면 상당한 어려움이 따를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세 사람에게 약간의 도움을 주고자, 5%의 지분을 확보하고 아스날 인수전에 참여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해 줄게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겨울과 대화를 마무리한 송훈석 회장은 시선을 하도진 실장에게 옮기며 말을 걸었다.
“하 실장, 아스날 인수 스케줄은 어떻게 됩니까?”
“11월까지 제반 준비를 모두 끝내고, 12월부터 협상에 돌입해서 내년 2월에 인수를 마무리 지을 생각입니다.”
“영국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성격이 급한 편이 아닙니다. 내년 2월에 아스날 인수를 마무리 지으려면, 아무리 늦어도 다음 달부터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저희도 그러고 싶지만, 11월이나 되어야 아스날 인수 자금이 마련될 것 같습니다.”
“본 계약은 내년 1월, 또는 2월에 진행될 예정이니까, 자금 마련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에 아스날 측에서 자금증명서를 제출해 달라고 요구하면 어떻게 하죠?”
“우리가 빌려주면 되잖아요.”
“아, 그렇게 하면 되겠군요.”
근심으로 휩싸여 있던 하도진 실장의 표정이 정상으로 돌아오는 데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조 실장, 하 실장하고 태스크포스를 구성해서 아스날을 인수하도록 하라고.”
“네, 회장님.”
잠시 대화가 중단된 틈을 타서 서동호 실장이 발언권을 요청했다.
“회장님, 이왕 이렇게 모였는데, 짧게라도 회의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러는 게 좋겠군. 정 사장, 정말로 해외 출장비용을 H&J 컨설팅에서 부담할 생각입니까?”
“그렇게 하는 편이 마음 편할 것 같습니다.”
“전용기와 관련한 비용은 우리가 부담하고, 현지 숙박비는 H&J 컨설팅이 부담하는 것으로 합시다.”
“회장님, 현지 숙박비는 우간다와 콩고민주공화국 정부가 부담하는 것으로 결정됐습니다.”
정명훈 사장의 철벽방어에 송훈석 회장은 답답했다.
하지만 이처럼 힘차게 칼을 뽑은 마당에 슬그머니 칼집에 집어넣을 수는 없었다.
“그럼 VIP들한테 술을 거하게 사는 게 어떨까요?”
“그럼 회장님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호영이 겨울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한 부사장, 정 사장님을 말려야 하는 거 아니야?”
“왜?”
“VIP들이 겁나게 비싼 술을 마시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예비군이 대기하고 있으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예비군이 누구인데?”
“너.”
“나? 내가 왜?”
전혀 예상외라는 듯 호영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너희 회사도 우리 회사의 전략적 파트너잖아.”
“그렇다면 우리 사장님이 술값을 부담해야지, 내가 왜 부담해야 하는데?”
“네가 너희 사장님보다 겁나게 부자잖아.”
“커미션은 7월 말부터 받을 예정이기 때문에 나 돈 없어.”
“내가 빌려줄게.”
“아니, 나 참…….”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