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2화] 메인게임 (3)
이런저런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2일차 TTM은 포시즌즈 호텔의 비즈니스 룸에서 오전 10시에 시작됐다.
도바초프 사장은 셀러 맨데이트인 정명훈 사장과 인사를 나누자마자, 예열도 거치지 않고 본격적인 TTM에 돌입했다.
“셀러 측은 바이어 측과 사전에 협의 없이 일방적으로 가격을 인상시키는 경우가 어디에 있습니까?”
“도바초프 사장님께서 모르고 계신 것 같은데, 저희는 연초에 가격을 현실화해 달라고 바이어 측에 통보했습니다. 하지만 바이어 측은 저희의 요구를 단번에 거절했습니다.”
“계약 기간이 아직 남아 있는데, 가격을 현실화시켜 줄 바이어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도바초프 사장님은 저희와 바이어가 기존에 체결한 계약서를 읽어 보셨습니까?”
“당연히 읽어 봤습니다.”
“계약서에는 가격인상 요인이 발생하면 셀러와 바이어는 즉시 협상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한다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이어는 저희 측의 협상 요구에 응했어야죠,”
“저희는 가격인상 요인이 발생하지 않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셀러 측의 요구에 응하지 않은 겁니다.”
도바초프 사장은 정명훈 사장에게 한 치도 밀리지 않고 강하게 부딪혔다.
사전에 짜인 각본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비교적 편한 자세로 두 사람의 언쟁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그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쑹쩐밍 장관과 판젠둥 국장은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언쟁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초조해하는 두 사람의 표정을 힐끗 쳐다본 정명훈 사장은 어느 정도 작전이 먹혀들었다고 판단 내리고, 도바초프 사장에게 은밀한 신호를 보내주며 언쟁을 이어 나갔다.
“바이어는 저희로부터 몇 십 년 동안 석유를 포함한 자원들을 저렴하게 수입하고 있는 중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동의하십니까?”
“네, 동의합니다.”
“그동안에 저희는 연방이 해체되고 1998년에는 모라토리엄을 선언하는 등 많은 부침이 있었고, 아직까지도 경제상황은 신통치 않은 상황입니다. 이에 비해 바이어는 어땠습니까? 1978년 개혁 개방 정책을 실시한 이후로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해서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과 어깨를 견줄 만큼 국력이 향상된 상태입니다.”
정명훈 사장은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일부러 말을 끊었다가 이어 나갔다.
“저희가 모라토리엄을 선언했을 당시에 바이어는 어떤 태도를 보였습니까? 저희를 도와주기는커녕 막대한 외환보유고를 이용해서 러시아의 알짜배기 회사들과 자산을 인수하는 행태를 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는 바이어 측에 수출하고 있던 자원들의 가격을 현실화시켜 달라고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바이어는 저희보다 GDP가 10배 이상 차이 날 정도로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이래도 자원들에 대한 가격 인상 요인이 없습니까?”
“좋습니다. 가격을 인상시켜 드리겠습니다. 다만, 가격 인상에 대해서 준비해야 할 시간이 필요하니까, 6개월 동안의 유예기간을 주십시오. 가격에 대해서는 내년에는 5%, 2년 후에는 6%, 3년 후에는 7%로 인상시켜 드리겠습니다.”
“저희는 바이어 측의 제안을 수용할 수 없습니다. 좀 더 진전된 양보안은 없습니까?”
“셀러 측이 제시하는 양보안을 먼저 들어 보는 것이 순서인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저희는 양보안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때,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두 사람의 언쟁을 지켜보고 있던 쑹쩐밍 장관이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정 사장님, 벼랑 끝 전술은 우리한테는 먹히지 않습니다.”
사실 정명훈 사장은 최종 결판은 쑹쩐밍 장관과 볼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따라서 적당한 시점에 그를 대화의 장에 끌어들일 계획을 수립해 놓은 상태였고.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시점에 그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마침 잘됐다고 생각하고, 그와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했다.
“쑹 장관님, 저는 지금 바이어로부터 협상 권한을 위임받은 맨데이트와 대화를 나누고 있습니다. 저한테 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정식으로 발언권을 요청하는 것이 예의인 듯싶습니다.”
“저는 TTM도 전쟁의 일종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전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데, 언제 예의를 따집니까?”
“그럼 도바초프 사장을 건너뛰고 쑹 장관님과 대화를 나눠도 되겠습니까?”
“마음대로 하십시오.”
“좋습니다. 바이어는 저희가 사용할 벼랑 끝 전술을 어떤 방법으로 막아 내실 겁니까?”
정말 중요한 순간이었다.
자신의 말 한 마디로 인해서 TTM의 향방이 결정될 수 있었기 때문에.
어제 오후에 도바초프 사장과 대화 나눌 때 얻은 힌트를 바탕으로 초강수를 두기로 결정했다.
“셀러 측이 저희의 제안을 수용해 줄 때까지 러시아와의 모든 교역을 중단할 예정입니다.”
그 순간, 비즈니스 룸에 깊은 침묵이 찾아왔다.
겨울은 쑹쩐밍 장관이 수출 중단 카드를 사용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지만, 모든 교역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할 줄은 미처 몰랐다.
이는 곧 국교를 끊겠다는 말과 같은 의미였으니까.
‘쑹 장관이 교역의 뜻을 모르고 있는 거 아니야?’
속으로 한마디 하며 정명훈 사장에게 귓속말로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사장님,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서 한 템포 쉬어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안 그래도 그럴 생각이었어.”
겨울과 짧은 대화를 끝낸 정명훈 사장은 심각한 표정을 풀지 않고, 쑹쩐밍 장관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쑹 장관님, 저희에게 대책을 마련할 시간을 주실 수 있습니까?”
“얼마든지요.”
“이곳에서 30분 정도만 기다려 주십시오.”
정명훈 사장이 블로딘 총리 등과 함께 비즈니스 룸을 빠져나가자, 도바초프 사장이 근심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쑹전밍 장관에게 말을 걸었다.
“제가 어제 드린 말씀을 잊으셨습니까?”
“도바초프 사장님, 러시아는 우리나라에서 생활용품의 대부분을 수입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우리나라가 러시아에 생필품 수출을 중단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 것 같습니까? 국민들이 폭동을 일으켜서 나라 전체가 마비될 것 같지 않습니까?”
“쑹 장관님께서 잘못 알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뭐가 말씀입니까?”
“생활용품은 반드시 대체재가 있습니다. 중국이 우리나라에 생활용품을 수출하지 않으면, 한국 등으로부터 가격이 조금 비싼 생활용품을 수입해서 공급하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석유와 천연가스는 대체재가 없습니다. 러시아가 맞대응 카드로 두 품목을 중국에 수출을 중단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지겠습니까?”
그때,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자오린 부총리가 실망 가득한 표정으로 한마디 내뱉었다.
“에이, 모자란 친구.”
* * *
반면에 다른 비즈니스 룸에서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되고 있었다.
블로딘 총리가 넉넉한 표정을 지으며 겨울에게 말을 걸었다.
“한 부사장님, 이제 우리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더 이상 시간 끌지 말고, 오늘 모든 결판을 냈으면 좋겠습니다.”
“자세한 방법을 얘기해 주세요.”
“쑹 장관이 어떤 의도 인지는 모르겠지만, 러시아와의 모든 교역을 중단하겠다고 했습니다. 이 말에는 러시아로부터 수입하는 모든 품목에 대해서도 수입을 중단하겠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으하하하!”
겨울이 말 속에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눈치챘다는 듯 블로딘 총리가 화통한 웃음을 터트렸다.
블로딘 총리의 웃음이 잦아들 무렵에 요키치 장관이 입을 열었다.
“한 부사장님, 커미션을 1% 정도 올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요?”
“1%를 올리려면 상당한 부담이 뒤따를 텐데, 그래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제가 어제 오후에 자고에프 대통령님께 TTM 진행상황에 대해서 보고하는 도중에 커미션 금액에 대한 얘기가 언급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고에프 대통령님의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았던 것이 마음에 걸려서 그럽니다.”
“자고에프 대통령님께 배정된 0.5%가 적다는 말씀입니까?”
“저는 그렇게 해석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중국 정부는 7%를 커미션으로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합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던 호영이 발언권을 요청했다.
“블로딘 총리님, 중국 측에 퇴로를 열어 주면서, 커미션 비율을 올리는 것이 어떨까요?”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 겁니까?”
“중국이 원하는 것은 6개월 유예와 가격인상 최소화입니다. 그들의 요구를 조금 양보…….”
호영은 생각해 놓고 있던 아이디어를 차분한 목소리로 꺼내놓았다.
블로딘 총리는 즉시, 자고에프 대통령에게 전화 걸어서 호영의 아이디어를 보고하고 컨펌을 요청했다.
[나는 0.5%만 해도 충분하다니까, 굳이 커미션을 올려 주려는 이유가 뭡니까?]
표현은 이렇게 했어도 목소리에는 주체할 수 없는 흥분이 어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연간 24억 달러에 가까운 엄청난 액수의 돈이 뒷주머니로 들어오는데, 흥분하지 않을 사람이 몇 명이나 있겠는가.
‘후후후, 좋으면 좋다고 하십시오.’
속으로 웃음을 흘리며 자고에프 대통령과 통화를 이어 나갔다.
“저희가 대통령님을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하하하, 알았어요. 정호영 이사의 아이디어대로 TTM을 진행하도록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대통령님.”
[그리고 정 이사한테 내 몫의 0.1%를 떼어 주도록 하세요.]
“정 이사가 엄청나게 좋아하겠는데요?”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준 보답이라고 얘기해 주세요.]
“네, 대통령님.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딸깍,
블로딘 총리가 전화를 끊기 무섭게 호영이 조심스런 목소리로 물어왔다.
“총리님, 대통령님께서 컨펌해 주셨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자고에프 대통령님께서는…….”
호영은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자신에게 배정된 0.1%의 커미션은 무려 2,800억에 가까운 엄청난 돈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단발성이 아니라 월급처럼 매월 받는 커미션이었기 때문에 흥분은 더욱더 배가됐다.
‘2,800억을 12로 나누면… 매월 230억이 넘는 돈을 커미션으로 받게 되는구나. 겨울을 따라서 러시아에 왔으니까 이런 보상을…….’
호영이 즐거운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블로딘 총리의 얘기가 끝이 났다.
“…정 이사님, 그냥 입 닦고 넘어갈 것은 아니겠죠?”
“염려 마십시오. 제가 커미션을 받으면 여러분께 화끈하게 쏘도록 하겠습니다.”
“하하하, 그때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제 바이어를 상대하러 가 보실까요?”
“네, 좋습니다.”
* * *
회담장으로 돌아간 정명훈 사장은 비어 있는 자리에 앉으며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바이어 측의 엄포에 대해서 자고에프 대통령님께서는 심각한 우려를 표명하셨습니다.”
“엄포라뇨?”
약세를 보이면 안 된다고 판단한 쑹쩐밍 장관이 강하게 대응하고 나왔다.
“엄포가 아니면 뭡니까? 저는 머리가 나빠서 그러니까, 당시의 상황에 적절한 단어를 말씀해 보십시오.”
“끄응.”
“이제부터 자고에프 대통령님께서 하신 말씀을 전달해 드리겠습니다. 우리 러시아는 중국 측이 원하는 대로 모든 교역을 중단하도록 하겠으며 지금 이 순간부터 적용됩니다.”
“…….”
“이제 더 이상 TTM을 진행해 봐야 의미가 없는 것 같습니다. 저희는 자리에서 일어나겠습니다.”
이 말과 함께 정명훈 사장이 비즈니스 룸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이와 동시에 블로딘 총리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도 뒤따라 나갔다.
이제 비즈니스 룸에는 바이어 측 사람들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 도바초프 사장이 발언권을 요청했다.
“쑹 장관님, 제가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 같아서 무역 보복 카드를 사용하지 말라고 한 겁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제가 셀러 측을 설득해 볼 테니까, 영빈관으로 돌아가서 기다려 주십시오.”
이 말을 남기고 도바초프 사장도 재빨리 비즈니스 룸 밖으로 나가 버렸다.
마치 그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자오린 부총리가 입에서 불을 뿜어냈다.
“이 친구야! 러시아에서 자원을 수입하지 못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몰라!”
“…….
“대책도 마련해 놓지 않고 무작정 지르면 어떻게 해!”
“…….”
“대답 안 해!”
“…죄송합니다.”
“에이, 저렇게 모자란 친구가 우리나라 에너지 장관이라니.”
쾅!
자오린 부총리 또한 거칠게 비즈니스 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버렸다.
“하아…….”
쑹쩐밍 장관이 멍한 눈으로 천장을 쳐다보며 커다란 한숨을 내뱉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