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플랜 E (3)
“아이고, 죽겠다.”
카펫 위를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기어간 호영이 힘겹게 냉장고 문을 열고 생수를 꺼내 벌컥벌컥 들이켰다.
빈병은 휴지통에 집어 던지고 비틀거리며 소파로 이동해서 큰대자로 뻗어 버렸다.
그의 모습을 측은한 모습으로 지켜보고 있던 겨울이 위로의 말을 건넸다.
“몸 생각을 하고 술을 마셔야지.”
그 순간, 호영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자리에 벌떡 일어나 앉으며 겨울에게 화를 쏟아 냈다.
“이 치사한 인간아, 너는 그런 말할 자격 없어.”
겨울은 속으로 뜨끔했다.
자신들은 인도에서 요키치 장관에게 보드카의 위력을 두 번이나 경험했다.
때문에 자고에프 대통령과의 술자리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사리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보드카의 위력을 잘 모르고 있던 호영이 술 상무 노릇을 대신했다.
그에 대한 결과로 호영이 가장 먼저 필름이 끊긴 것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개떡 같은 인간아, 눈치라도 줬어야지.”
“나도 그러려고 했는데… 뭐, 미처 경황이 없었다.”
“하, 어젯밤에 내가 너희 회사를 위해서 몸 받쳐 충성했으니까, 성과급이라도 두둑하게 챙겨 줘라.”
“…마치 사전에 계획된 행동인 것처럼 말한다?”
“알면서 왜 물어?”
“어휴. 내가 졌다, 졌어.”
겨울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양손을 위로 들어올렸다.
“그나저나 자오린 부총리가 플랜 E를 선택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
“그 사람이랑 쑹 장관의 욕심 많은 성격을 감안하면, 높은 확률로 선택할 가능성이 높겠지.”
“자 부총리가 커미션의 일부를 쑹 장관에게 나눠 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생각해 봐. 혼자 먹으면 배탈 난다는 사실을 산전수전 모두 겪은 사람이 과연 모르고 있을까?”
“하긴, 네 말이 맞는 것 같다.”
“그보다 속 쓰려 죽겠다. 속이나 달래러 가자”
* * *
같은 시각.
러시아로 향하는 전용기의 회의실에서는 자오린 부총리 주재로 회의가 진행 중에 있었다.
“판젠둥 국장, 우리들이 모스크바에 도착한 이후의 일정에 대해 보고해 봐.”
“저희는 모스크바 시간으로 오후 1시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간단하게 환영 행사를 끝마치고 곧바로 숙소인 영빈관으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잠깐, 러시아 측이 영빈관을 우리한테 숙소로 제공해 준다고?”
사실 판젠둥 국장도 그 점이 의문스러웠다.
러시아 측은 어제 오후까지도 모스크바 시내에 위치한 특급 호텔을 숙소로 제공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젯밤 늦게 베르첸카 보좌관에게 전화가 걸려왔고 자신들에게 영빈관을 숙소로 제공하겠다고 통보해 왔다.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보니, 보이지 않는 힘이 움직인 결과라는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판젠둥 국장은 자오린 부총리에게 어젯밤부터 새벽까지의 일을 가감 없이 보고했다.
“…새벽 무렵에 러시아 측으로부터 최종 확정된 일정표를 받은 상태입니다.”
자오린 부총리는 보이지 않는 힘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단숨에 캐치했다.
정명훈 사장이 자신들에게 영빈관을 제공하라고 자고에프 대통령을 움직인 결과이리라.
‘정 사장의 영향력이 이렇게 강했나?’
속으로 의문을 품으며 판젠둥 국장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어찌됐든 우리가 러시아 측으로부터 대접을 받는다니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쑹쩐밍 장관이 발언권을 요청했다.
“H&J 컨설팅 측이 부총리님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서 모종의 역할을 수행한 것이 아닐까요?”
“이렇게 센스 빠른 친구가 어젯밤에는 왜 그랬어?”
“부총리님, 충분히 반성하고 있습니다.”
“내가 자네 때문에 어젯밤에 주석님께 싫은 소리를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아는가?”
“그 점에 대해서는 입이 열 개가 있어도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을 테니까, 앞으로 행동을 똑바로 하라고.”
“네, 알겠습니다.”
“판 국장, 계속 보고해 봐.”
“TTM은 셀러 측이 묵고 있는 포시즌즈 호텔에서 오후 네 시부터 시작할 예정입니다.”
“일정을 너무 빡빡하게 수립한 거 아니야?”
“부 총리님, 제가 대신 말씀드리겠습니다.”
판젠둥 국장보다 쑹쩐밍 장관의 입이 먼저 열렸다.
“얘기해 봐.”
“러시아 측이 데드라인으로 설정한 7월 1일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쑹 장관, 러시아 측의 요구를 아무 조건 없이 수용해 줄 생각이야?”
목적한 바가 있는 자오린 부총리는 마음에도 없는 질문을 던졌다.
“러시아 측의 요구가 지극히 정상적인 상황이기 때문에 저희가 마땅히 사용할 수 없는 카드가 없는 상황입니다.”
“만약에 우리나라가 러시아 측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할 경우에 연간 얼마 정도의 비용이 추가로 발생하는가?”
“약 180억 달러 정도의 비용이 발생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습니다.”
“쑹 장관, 180억 달러가 누구네 집 강아지 이름이야!”
“…….”
“TTM을 왜 하는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비용을 줄여야 하는 것 아니야?”
“…죄송합니다.”
“후우… 그래서 하는 말인데, 무역 보복 카드를 사용하는 건 어떨까?”
사실 쑹쩐밍 장관도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서 히든카드로 무역 보복을 생각해 놓고 있었다.
하지만 무역 보복 카드는 양날의 검.
잘못 사용하면 자신들도 베일 위험성이 있었다.
때문에 가급적이면 사용하지 않으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자오린 부총리가 무역 보복을 언급하고 있었다.
“부총리님, 무역 보복은… 상당히 위험한 카드입니다.”
“나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야.”
“알고 계시면서 무역 보복 카드를 언급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무역 보복 카드는 내가 아니라 주석님이 먼저 언급하셨어.”
그렇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작금의 중국에서는 시쥔량 주석의 말이 곧 법이었으니까.
“무슨 말씀인지 감 잡았습니다.”
“무역 보복 카드를 적절하게 사용해서 우리나라가 부담하는 비용을 최소화시켜 보라고.”
“네, 부총리님.”
“나는 이제 밖으로 나갈 테니까, TTM을 우리 페이스대로 끌고 갈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해 봐.”
“네, 알겠습니다.”
회의실 밖으로 나온 자오린 부총리는 널찍한 의자에 몸을 파묻으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내뱉었다.
“이제 됐겠지?”
* * *
“자오린 부총리님, 러시아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전용기에서 내린 자오린 부총리는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을 영접하러 나온 사람이 러시아의 2인자인 바체슬라프 블로딘
총리였기 때문이다.
“블로딘 총리님께서 저를 마중 나와 주시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블로딘 총리는 순간 어젯밤의 일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하루 일정을 끝마치고 퇴근해서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느닷없이 자고에프 대통령의 호출을 받았다.
그의 지시를 거역할 수 없어서 급하게 크레물린 궁전으로 들어가니, 메흐타 장관과 데사이 국장, 그리고 처음 보는 한국 사람들이 그곳에 있었다.
요키치 장관에게 그들이 누구인지 소개받았고, 호출 받은 이유까지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
짧게 생각을 갈무리한 그는 자오린 부총리와 대화를 이어 나갔다.
“원래는 자고에프 대통령님께서 자 부총리님을 맞이하려 했는데, 예정된 일정을 취소할 수 없어서 제가 대신 마중 나온 겁니다.”
“네? 자고에프 대통령님께서요?”
“우리나라의 자원들을 제일 많이 수입해 주는 중국에서 귀한 손님들이 오셨는데, 어찌 홀대할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 저희를 환대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VIP 라운지에 자리를 마련해 놓았습니다. 못 다한 얘기는 그곳에서 나누는 게 어떻겠습니까?”
“좋습니다.”
VIP 라운지.
베르첸카 보좌관과 판젠둥 국장의 소개로 간단하게 상견례를 끝낸 양측은 본격적인 대화를 바로 시작했다.
“자고에프 대통령님께서는 중국 측의 통 큰 양보에 대해서 매우 감사하게 여기고 계십니다. 모쪼록 우리나라에 머무는 동안에 편안하게 지내다 돌아가십시오.”
자오린 부총리는 블로딘 총리가 기선잡기를 위해서 이런 말을 꺼냈다고 판단했다.
이번에 진행되는 TTM은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차피 자신들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
하지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어 내기 위해서 절대로 먼저 꼬리를 내릴 수 없었다.
“블로딘 총리님, 아직 TTM을 시작조차 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저는 이미 결론 난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아니었습니까?”
“그렇습니다. 저희가 가지고 있는 카드가 강력하기 때문에 러시아 측도 잔뜩 긴장하고 있어야 할 겁니다.”
요키치 장관은 자오린 부총리가 허세 부리는 이유를 즉시 알아챘다.
그는 플랜 D를 실현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자국에 강경책을 구사하려는 것이다.
‘후후후, 우리가 자 부총리님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요키치 장관이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도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됐다.
“자 부총리님, 가지고 있는 카드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지금 말씀드릴 수는 없고, 나중에 TTM할 때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요.”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TTM은 내일 오전부터 시작하는 게 어떨까요?”
“그 문제는 요키치 장관과 상의해 보십시오.”
블로딘 총리가 2선으로 물러났고, 그 자리를 요키치 장관이 차고앉았다.
“자 부총리님, TTM을 내일로 연기하려는 이유를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시차가 맞지 않아서 그런지 상당히 피곤하네요.”
“그렇다면, 내일 오전 10시로 TTM을 연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 정도면 적당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H&J 컨설팅 측에 그렇게 통보하겠습니다.”
“저희의 편의를 봐줘서 정말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이제 숙소인 영빈관으로 모시겠습니다.”
자동차 안.
지그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겨 있던 블로딘 총리가 눈을 뜨며 요키치 장관에게 질문을 던졌다.
“중국 측이 보유하고 있는 카드가 뭘까요?”
“총리님, 이미 결론이 나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중국 측이 가지고 있는 카드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만… 궁금하지 않습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궁금하기는 합니다.”
“H&J 컨설팅 측은 알고 있지 않을까요?”
“잠깐만 기다려 보십시오.”
블로딘 총리와 대화를 중단한 요키치 장관은 H&J 컨설팅에서 두뇌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겨울에게 전화 걸었다.
[네, 장관님.]
“중국 측에서 TTM을 내일로 연기하자고 제안했고, 동의해 준 상태입니다.”
[중국 측이 만만디 전략을 사용하겠다는 뜻인가요?]
“저는 그렇게 해석했습니다. 그리고 자 부총리는 중국 측이 강력한 카드를 보유하고 있다고 선전포고를 날렸습니다.”
[선전포고라…….]
겨울이 생각할 것이 있는지 끝말을 흐렸다.
요키치 장관은 그가 어떤 생각하고 있는지 빤히 알고 있었지만, 말을 걸어올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차분한 그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요키치 장관님, 자 부총리가 원하는 것을 얻어 내기 위해서 사전에 밑밥을 깐 것으로 판단됩니다.]
“역시 제 생각과 같군요. 한 부사장님은 중국 측이 가지고 있는 카드가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까?”
[중국 측이 사용할 수 있는 카드는 무역 보복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이 카드는 중국 측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이기 때문에 쉽사리 사용할 수는 없을 겁니다.]
“자 부총리가 플랜 D를 실현시키기 위해서 무역 보복 카드를 꺼낼 거라고 판단하면 됩니까?”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중국 측의 의도에 대해서 저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합니까?”
[장관님,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우고 싶지 않습니까?]
요키치 장관은 겨울의 의도가 무엇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럴 때는 말을 꺼낸 사람한테 물어보는 것이 최선이었다.
“한 부사장님, 저는 무슨 말씀하시는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만약에 저희가 강력하게 대처하면 자 부총리가 생각을 바꿔먹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 부총리가 플랜 D를 E로 상향조정 한다는 뜻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하하하,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저희는 중국 측에 강력하게 맞대응하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하도록 하겠습니다.]
“당연히 그렇게 해야겠지요.”
[그럼 나중에 통화하겠습니다.]
딸깍.
요키치 장관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는 듯 블로딘 총리가 조심스런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한 부사장이 뭐라고 했습니까?”
“저희의 주머니를 두둑하게 채워 주겠답니다.”
“하하하!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