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플랜 E (1)
“내가 러시아에 따라가야 하는 이유를 얘기해 봐.”
겨울의 옆자리에 앉은 호영이 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대답하기 전에 거꾸로 하나만 물어보자. 네가 인도에 남아 있으려는 이유가 도대체 뭐냐?”
“음… 먼저 무기 계약 협상에 투입되어야 하고, 아프리카 나라들에 T―72 전차를 판매해야 하잖아.”
“무기 계약 협상에는 너희 회사 사장님을 포함한 전문가들이 계시니까, 너에 대한 활용가치는 크게 없어. 이 점에 대해서는 너도 인정하지?”
“나를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야?”
호영이 반발할 것을 예상했다는 듯 겨울은 표정변화 없이 말을 이어 나갔다.
“네가 무기에 대해서 인도에 남아 있는 전문가들보다 더 많은 지식을 보유하고 있다면, 정식으로 사과할게.”
“…네가 나의 아픈 곳을 찌르는구나.”
“결정적으로 인도 국방부는 아프리카 국가들에 T―72 전차를 당장 매각할 수도 없어.”
“왜?”
“T―72 전차를 당장 매각하면 전력 공백이 발생할 텐데, 인도 국방부가 그런 결정을 쉽게 내리겠냐? 인도 국방부가 K2 흑표 전차 1차분을 도입하기 전까지는 그림의 떡이야.”
순간, 호영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부투야 실장을 비롯한 바이어들은 지금 당장 T―72 전차가 필요하다는 뉘앙스를 보였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전화해서 양해를 구해야 하는데, 불행히도 러시아로 향하는 여객기 안이었으니.
“우리가 모스크바에 몇 시에 도착할 예정이냐?”
“갑자기 왜 물어?”
“으응, 부투야 실장 등에게 인도 국방부가 처해 있는 정확한 사정을 알려 줘야 할 것 같아서.”
“러시아에 도착해서 전화해도 될 거야.”
“할 수 없지. 이제 내가 러시아에 따라가야 하는 이유를 얘기해 봐.”
“중국과 TTM할 때 너의 번뜩이는 재치가 필요할 것 같아서.”
“네가 이제야 내 진가를 알아주는구나?”
“예전부터 알고 있었거든.”
“믿어 주지. 설마하니… 나를 공짜로 부려먹을 생각은 아니겠지?”
“네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얘기해 봐.”
“너희 회사에서 성과급을 받았으면 좋겠어. 그것도 아주 겁나게 많이.”
겨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지난 월말에 정상호 사장이 그동안의 호영의 공적을 치하하며 엄청난 액수의 성과급을 줬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포상금을 받기는 받았는데, 코끼리 비스킷 수준이야.”
“10억이 코끼리 비스킷 수준이냐?”
“너는 나보다 몇 백배 많이 받을 예정이잖아.”
“우리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하자. 그 돈은 포상금이 아니라, 지분에 해당하는 배당금이야.”
“그게 뭐 어때서?”
“그나저나 포상금을 받아서 어디에 사용하려고?”
“나도 이제 슬슬 결혼 준비를 해야 하잖아.”
“누구와 결혼할 건데?”
“알면서 왜 물어?”
“으이구. 일단 사장님께 너의 건의사항을 말씀드려 볼게.”
“기대하고 있으마. 그건 그렇고 장 부사장이 갑자기 미국으로 떠난 이유가 뭐야?”
겨울은 어젯밤에 장대산 부사장과 나눈 대화 내용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호영의 질문에 대답했다.
“금요일이 해리슨 상원의원의 생신이란다.”
“뭐야? 생신파티에 참석하려고 미국에 갔다는 말이야?”
“설마 그러겠냐. 가족들한테 이수진 씨를 인사시켜 줄 계획을 가지고 있더라.”
“서프라이즈로?”
“어.”
“이제 다른 얘기를 잠깐 해 보자. 메흐타 장관과 데사이 국장의 의도가 무엇일까?”
인도가 러시아로부터 도입할 예정인 S―400 5개 포대와 SU―35 전투기 30대에 대한 계약은 중국과의 TTM이 끝난 후에 체결하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다.
따라서 메흐타 장관을 비롯한 인도 측 사람들은 일정에 맞춰서 러시아를 방문하면 된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그들은 오늘 아침에 공항에 모습을 드러냈고 현재 같은 비행기를 타고 러시아로 향하고 있는 중이었다.
겨울은 라운지에서 대기하는 동안에 메흐타 장관에게 이유를 물었고 그들로부터 생각지도 못한 답변을 들은 상태였다.
“중국이 러시아와 우리들로부터 굴욕당하는 모습을 지켜보기 위함이란다.”
“안 바쁘대?”
“그동안 열심히 일했으니까, 며칠 동안 휴식을 취해도 된다더라.”
“인도에서 진행되고 있는 협상은 어떻게 하려고?”
“국방 차관에게 협상에 대한 전권을 위임해 놓아서 문제없단다.”
“하여간 알았다.”
“러시아에 도착하면 바빠질 것 같으니까, 이제 좀 쉬자.”
* * *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베르첸카 수석 보좌관이 다급한 표정으로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장관님, 큰일 났습니다.”
“뭐가 큰일 났다는 거야?”
“TTM에 참석하는 명단을 중국 측에서 보내왔는데, 수석대표가 쑹쩐민 장관이 아닌 자오린 부총리입니다.”
“그게 사실이야?”
진심으로 놀랐다는 듯 요키치 장관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네, 장관님.”
요키치 장관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오기 시작했다.
자신들은 TTM에 쑹쩐밍 장관이 수석 대표로 참석하는 것으로 알고 모든 계획을 수립해 놓은 상태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자오린 부총리라니.
문제는 그가 TTM에 참석함으로 인해서 자신들이 수립해 놓은 계획들을 모두 쓰레기통에 버려야 한다는 데에 있었다.
그렇다고 오겠다는 사람을 오지 말라고 할 수도 없는 상황.
“베르첸카 보좌관, 정보국에 자 부총리에 대한 자료를 요청해.”
“네, 장관님.”
“그건 그렇고, H&J 컨설팅 측 사람들은 언제 도착할 예정인가?”
“이제 공항으로 출발하면 될 겁니다.”
모스크바 셰레메티예보 국제공항 VIP라운지.
요키치 장관은 겨울 일행이 도착하기를 기다리며 베르첸카 보좌관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베르첸카 보좌관, 중국 측은 언제 도착한대?”
“내일 오전에 도착한다고 연락받았습니다.”
“자 부총리에 대한 자료는 언제쯤이면 받아 볼 수 있을까?”
“아무리 늦어도 내일 오전에는 받아보실 수 있을 겁니다.”
적과 전쟁을 벌이기 전에 적장이 누구인지 파악하는 것은 기본 중에 기본.
정보국이 내일 오전에 자오린 부총리에 대한 정보를 건네준다고 하지만, 늦어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정보국을 닦달해서라도 오늘밤까지 자 부총리에 대한 자료를 입수해 봐.”
“서둘러 보겠습니다.”
“그나저나 메흐타 장관이 우리나라를 빨리 방문하는 이유를 파악해 봤나?”
“인도 대사관에 문의해 봤는데, 개인적인 용무가 있어서 우리나라를 방문한다고 합니다.”
“도대체 개인적인 일정이 무엇일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때,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문을 열고 들어와 인도에서 출발한 여객기가 활주로에 착륙했다고 보고했다.
비행기 출입문이 열리고 겨울 일행이 브리지에 내리자, 요키치 장관이 밝은 표정을 지으며 인사말을 건넸다.
“정 사장님, 러시아 방문을 환영합니다.”
“요키치 장관님, 저희를 반겨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메흐타 장관님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하하, 제가 러시아를 방문한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고 계셨습니까?”
“공항 측에서 알려 줘서 알았습니다. 저희 때문에 다른 승객들이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VIP 라운지로 이동했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십시다.”
그들의 뒤를 따라가던 호영이 겨울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한 부사장, 상황이 별로 좋지 않는 것 같다.”
그 점에 대해서는 겨울도 같은 생각이었다.
요키치 장관의 말투가 평소에 비해서 딱딱했을 뿐만 아니라, 베르첸카 보좌관의 표정에도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으니까.
“도대체 어떤 일이 발생한 걸까?”
“장 부사장한테 물어봤으면 좋았을 텐데, 하필이면 미국으로 떠나 가지고.”
“내 말이.”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생각은 정명훈 사장도 가지고 있었다.
VIP 라운지에 도착해서 자리에 앉자마자, 궁금함을 담아서 말문을 열었다.
“요키치 장관님, 돌발 상황이라도 발생한 겁니까?”
“그다지 좋지 않은 상황이 발생한 것은 사실입니다.”
“어떤 상황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중국 측으로부터 TTM에 참석하는 사람들의 명단을 통보받았는데, 쑹전밍 장관이 수석대표가 아니라 자오린 부총리로 확정됐습니다.”
“하하하.”
느닷없이 정명훈 사장이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H&J 컨설팅 직원들도 웃음 행렬에 동참했음은 물론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요키치 장관과 베르첸카 보좌관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고.
VIP 라운지를 가득 채웠던 웃음소리가 사그라지자, 궁금함을 참지 못한 요키치 장관이 득달같이 질문을 던졌다.
“정 사장님, 어떤 상황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저희는 자 부총리가 어떤 사람인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네? 그게 정말입니까?”
요키치 장관이 전혀 믿기지 않는 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지난 5월에 몰디브에서 나이지리아를 포함한 아프리카 대륙의 7개 나라와 인도가 자원거래를 위해서 TTM을 진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에 발생한 모종의 사건을 뒷수습하기 위해서 자 부총리가 몰디브를 급하게 방문했습니다. 그때 그를 만나서 점심 식사를 같이한 적이 있었습니다.”
“정 사장님, 모종의 사건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죄송합니다만, 저는 말씀드릴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제가 대신 말씀드릴까요?”
이때다 싶었는지, 데사이 국장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래 주실 수 있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하지만 워낙 폭발력이 강한 내용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들려 줄 수는 없습니다.”
“베르첸카 보좌관, 실무자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내고, VIP 라운지 근처에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못하도록 해.”
“네, 장관님.”
잠시 후.
모든 조치가 끝난 것을 확인한 데사이 국장이 침착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현재 중국은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가입한 나라들의 탈퇴를 막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전개하고 있는 중입니다. 몰디브를 방문한 7개 나라 중에 다섯 나라는 지난 3월에 일대일로 프로젝트에서 탈퇴했고, 케냐와 모잠비크는 탈퇴를 기정사실화 해 놓고 있었습니다.”
데사이 국장은 숨을 고르기 위해서 잠시 말을 끊었다가 말을 이어 나갔다.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에 놓여 있는 케냐와 모잠비크가 일대일로 프로젝트에서 탈퇴하면 중국은 아프리카 대륙의 나라들과 교역에 상당한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중국 정부는 두 나라가 일대일로 프로젝트에서 탈퇴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서 천유런 전 외교부장을 몰디브에 급하게 보냈습니다. 몰디브를 방문한 그는 불리한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서…….”
데사이 국장은 당시에 벌어졌던 사건들 중에서 중요한 내용만 간추려서 요키치 장관에게 설명해 주었다.
당연히 민감한 내용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감출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자 부총리는 35억 달러라는 거액을 뒷주머니에 챙길 수 있었습니다.”
“쑹 장관은 바늘 도둑이고, 자 부총리는 소도둑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정명훈 사장의 얘기를 끝으로 길고 길던 설명이 모두 끝이 났다.
“정 사장님, 자 부총리에게 지급할 커미션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자 부총리한테 커미션 조건에 대해 살짝 언급해 주면, 본인이 알아서 해답을 만들어 올 겁니다.”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윙윙―
그때, 베르첸카 보좌관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라운지 구석으로 이동해서 상대방과 제법 길게 통화한 후, 자신의 자리로 돌아왔다.
“베르첸카 보좌관 무슨 일인가?”
“방금 전에 중국 측에서 연락이 왔는데, 자오린 부총리가 바쁜 일이 있어서 우리나라를 방문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럼 수석대표는 누구야?”
“기존대로 쑹쩐밍 장관이 수석대표를 맡기로 했답니다.”
“에이, 좋다 말았네.”
베르첸카 보좌관과 대화를 끝낸 요키치 장관은 시선을 돌려 정명훈 사장에게 말을 건넸다.
“공식적인 일정은 내일 오전부터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저희가 예약해 놓은 호텔로 이동해서 휴식을 취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창밖으로 모스크바 시내의 풍경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정명훈 사장이 시선을 차 안으로 옮기며 입을 열었다.
“한 부사장, 자오린 부총리가 TTM에 참석하는 편이 유리하겠지?”
“전혀 얼굴을 모르는 쑹쩐밍 장관을 상대하는 것보다는 훨씬 유리할 겁니다.”
“역시 내 생각과 같군.”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