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화] 적의 적은 아군
겨울 일행을 태운 대한 그룹 전용기는 오후 2시 무렵에 인디라 간디 국제공항에 무사히 착륙했다.
공항에 마중 나온 샤르마 장관을 포함한 고위인사들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후, 곧바로 호텔로 출발했다.
샤르마 장관이 미안함을 담아서 정명훈 사장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정 사장님, 많은 사람들이 이동해야 하기 때문에 승차감이 떨어지는 승합차를 준비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샤르마 장관님, 저희는 그 점에 대해서 전혀 개의치 않으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렇다면 다행이고요. 우리나라에 오신 소감이 어떻습니까?”
“너무 오랜만에 와서 그런지 모든 것이 생소합니다.”
“우리나라에 와 보신 적이 있다는 말씀으로 들리는데, 사실입니까?”
“제가 대한 그룹의 아프리카 법인으로 발령 나기 전에 이곳 뉴델리에서 3년간 근무했습니다.”
“아, 그렇군요. 당시에 비해서 우리나라가 어떻게 변한 것 같습니까?”
정명훈 사장은 몰디브에서 가진 술자리에서 샤르마 장관의 성격을 확실하게 파악했다.
한마디로 솔직하고 화통한 성격이었다.
이런 성격의 소유자들은 화려한 미사여구를 사용해 찬사를 늘어놓는 것보다 느낀 점을 솔직하게 얘기해 주는 것이 훨씬 잘 먹힌다.
“예전보다 도시가 매우 깨끗해진 것 같습니다. 그런데 공기는 여전하군요.”
“아이고, 우리나라의 아픈 곳을 정확히 찌르시는군요.”
“우리나라 서울도 뉴델리보다는 덜하지만, 공기의 질이 좋지 않은 편입니다.”
“중국 때문이라는 언론 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보상이라도 받아 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들이 자기들 잘못이 아니라고 우기는데, 무슨 수로 보상을 받겠습니까?”
“하여간 한국도 날강도 같은 이웃을 만나서 고생이 많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정명훈 사장과 대화를 마무리한 샤르마 장관은 고개를 돌려 뒷자리에 앉아 있는 겨울에게 말을 걸었다.
“한 부사장님, 요키치 장관과 통화했다고 들었는데, 통화 내용을 얘기해 줄 수 있습니까?”
“그가 인도에서 저희를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네? 그렇게 콧대 높은 인간이 먼저 만나자고 했다고요?”
샤르마 장관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그렇습니다.”
“그자가 한 부사장님을 만나자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나이지리아가 석유와 천연가스를 인도에 수출한다고 언론에 대대적으로 홍보한 것이 주효한 것 같습니다.”
“벌써 언론에 기사가 나갔다고요?”
“네. 나이지리아 시간으로 어제 오후에 기사가 나갔습니다. 모르고 계셨습니까?”
“저희는 내일 오전쯤에 기사를 내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아차,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샤르마 장관은 급하게 누군가에게 전화 걸어서 5분여 정도 대화를 주고받은 후, 통화를 종료했다.
“휴우, 다행이다. 이제 우리나라도 두세 시간 후부터 언론기사화 될 예정입니다.”
겨울은 어젯밤 나이지리아 언론에 올라온 기사들을 검색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아냈다.
만약에 인도 정부가 언론기사 내용을 확인하지 않고 그대로 기사를 낸다면, 나중에 낭패를 볼 수도 있었다.
“샤르마 장관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나이지리아가 언론에 어떤 내용으로 홍보했는지 반드시 확인하고 기사화하십시오.”
“네? 우리나라가 석유 1,300백만 배럴과 천연가스 7,000만 입방미터를 나이지리아에서 수입할 예정이라고 기사화하면 되는 것 아닙니까?”
“아닙니다. 나이지리아는 몰디브에서 계약한 물량까지 포함해서 언론에 홍보한 상태입니다.”
샤르마 장관은 요키치 장관이 겨울을 빨리 만나 보려고 한 이유를 이제야 확실하게 깨달았다.
자국은 나이지리아와 1차로 석유 1,000만 배럴, 천연가스는 5,000만 입방미터 수입하는 것으로 계약 체결했다.
따라서 2차로 수입하는 물량을 포함하면, 기존에 러시아에서 수입하는 양보다 많아진다.
정확한 속사정을 모르고 있는 러시아는 거래가 끊길 것을 우려해서 겨울과 미팅을 급하게 추진한 것이리라.
“한 부사장님, 힌트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이 말과 함께 샤르마 장관은 누군가에게 전화 걸어서 급하게 지시를 내린 후, 통화를 종료했다.
“샤르마 장관님, 이제 급한 용건은 얼추 끝났습니까?”
“네. 대충 그런 것 같습니다.”
“저희가 내일 오전에 요키치 장관을 만나서 대화를 나눠야 하는데, 사전에 파악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게 무엇인지 얘기해 보세요.”
“인도 정부가 러시아로부터 석유와 천연가스를 수입할 수 있는 최대치를 알려 주십시오.”
샤르마 장관은 고개를 갸우뚱했다.
자신들과 H&J 컨설팅이 수립해놓은 계획은 갑질을 일삼고 있는 러시아의 버르장머리를 고치는 것이었다.
그 시발점이 러시아와의 거래를 중단하고, 나이지리아로부터 석유와 천연가스를 추가로 도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겨울은 기존보다 러시아와의 거래를 더 확대할 것처럼 얘기하고 있었다.
이유가 무엇인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인도 경제가 더 이상 발전하지 않고 제자리에 머무를 거라면, 러시아로부터 두 품목을 수입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제 말이 맞겠지요?”
“네. 당연히 맞습니다.”
겨울의 말에 대해 인정한다는 듯 샤르마 장관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게 되면, 인도는 러시아가 아닌 다른 나라로부터 석유와 천연가스를 수입해야 하는데, 좋은 조건으로 수입하기는 어려울 겁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저희도 인정합니다. 이제 저희가 최대치를 알려 줘야 하는 이유를 말씀해 보세요.”
“모두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만, 세 번째 이유는 장 부사장이 설명할 겁니다. 저희는 두 품목에 대해서 볼륨 DC(Volume Discount)를 요구해 보려고 합니다.”
“볼륨 DC라뇨?”
“물건을 대량으로 구입하면 가격을 할인해 주는 제도가 볼륨 DC입니다. 이 제도를 이용해서 러시아 측에 두 품목에 대해서 할인을 요구할 생각입니다.”
“과연 러시아 측에서 동의할까요?”
“저희가 수립해 놓은 아이디어는…….”
겨울에게 설명을 듣고 있던 샤르마 장관은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만약에 겨울의 아이디어가 실현된다면, 자국은 두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한 부사장님, 아이디어 끝내주는데요?”
“하하, 감사합니다. 두 번째 이유는 별도로 말씀드리지 않아도 되겠죠?”
“물론입니다.”
“세 번째 이유는 장 부사장이 말씀드릴 겁니다.”
겨울이 장대산 부사장한테 바통을 넘겨주고 2선으로 물러났다.
“세 번째 이유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함입니다.”
“네? 중국이라뇨?”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나라들이 하나둘씩 탈퇴함으로 인해서 중국은 필요한 석유와 천연가스 수급이 점차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최악의 상황에 몰리면 중국이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두 가지입니다. 주변의 자원부국과 전쟁을 일으켜서 자원을 강탈하는 방법과 자원부국인 러시아로부터 두 품목을 늘려 수입하는 방법입니다. 미국은 후자의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지금 러시아를 우군으로 끌어들이겠다는 겁니까?”
샤르마 장관보다 데사이 국장의 입이 먼저 열렸다.
“정확하게 보셨습니다.”
“우리나라와 러시아는 과거에는 사이가 좋았지만, 지금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닙니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하, 무슨 말씀인지 감 잡았습니다.”
“일단 러시아와의 관계부터 확실하게 정리하고, 국방력 강화 프로젝트에 대해서 논의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합시다.”
* * *
“하여간 이상하단 말이야.”
소파에 앉은 호영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문을 열었다.
“뭐가 이상한데?”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필이면 네가 세 번 연속으로 내 룸메이트가 된 이유가 뭘까?”
“내가 룸메이트가 된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이야?”
“뭐, 그렇지.”
시큰둥한 호영의 대답.
시간이 제법 지났지만, 두 사람의 사이는 여전히 틀어져 있었다.
이 모든 발단의 원인은 송지유 때문이었다.
“알았어. 내가 신 실장님께 룸메이트를 바꿔 달라고 얘기할게.”
“누구로 바꾸려고?”
“장 부사장.”
“됐다. 곰보다는 속이 시커먼 늑대가 낫지.”
“네가 죽고 싶어서 아주 무덤을 파는구나.”
“날도 더운데 샤워나 해야겠다.”
위험을 느낀 호영이 후다닥 욕실로 뛰어 들어갔다.
평소에 호영의 샤워 시간은 길어야 10분.
그런데 20분이 지나도록 호영은 욕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겨울은 걱정스런 마음에 욕실 문을 노크했다.
“정 이사, 무슨 일 있니?”
덜컹!
갑작스럽게 욕실 문이 열리고 호영이 밖으로 나왔다.
이상했다.
호영의 복장은 욕실 안으로 들어갈 때와 똑같았기 때문이다.
“샤워 안 하고 욕실 안에서 뭐 한 거야?”
“인도 언론사들이 올린 속보들을 살펴보고 있었어.”
“네가 힌디어를 어떻게 알고?”
“영어로 올라온 기사들도 많거든.”
“내용이 어떤지 얘기해 봐.”
“그냥 싱비어천가라고 보면 돼.”
“북한이나 중국도 아닌데, 싱비어천가가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나한테 그러지 말고, 네가 직접 신문기사를 읽어 봐.”
* * *
같은 시각.
총리관저에서는 싱 총리가 샤르마 장관, 데사이 국장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데사이 장관, 신문기사 내용을 국민들이 믿을까요?”
“일부 과장이 섞여 있기는 하지만, 모두 팩트라서 믿을 수밖에 없을 겁니다.”
“언론사 기자들이 후속 취재할 것이 빤한데, 나중에 문제되지 않을까요?”
“저희 정보국은 언론사에 사실에 입각한 정보를 제공했고, 나이지리아와 몰디브 등에 미리 손을 싸놨기 때문에 문제 될 것이 없을 겁니다.”
“댓글들을 분석해 봤습니까?”
“거의 대부분의 내용이 총리님을 칭송하는 내용입니다.”
“야당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멘붕 상태입니다.”
“으하하하!”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은지 싱 총리가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총리님, 공항에서 호텔로 이동하던 도중에 한 부사장 일행과 상의한 내용을 보고 드리겠습니다.”
“빨리 얘기해 보세요.”
“먼저 러시아의 요키치 석유장관이 한 부사장한테 만나자고 요청했답니다.”
데사이 국장과 샤르마 장관은 겨울 등과 나눈 대화 내용을 상세하게 보고했다.
“…오늘 저녁까지 러시아에서 수입하게 될 석유와 천연가스 물량을 산출해서 한 부사장한테 알려 줘야 합니다.”
“샤르마 장관, 한 부사장이 러시아로부터 볼륨 DC를 이끌어 낼 수 있을까요?”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손해 보는 게 없기 때문에 가능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석유와 천연가스를 할인해 주면, 러시아가 오히려 손해 보는 것이 아닌가요?”
“그 대신 자국에 러시아산 무기를 판매할 수 있잖아요.”
“하여간 한 부사장한테 성과를 내 달라고 부탁해 보세요.”
“네, 알겠습니다.”
샤르먀 장관과 대화를 끝낸 싱 총리는 시선을 옮겨 데사이 국장에게 말을 건넸다.
“우리가 H&J 컨설팅에 약속한 게 무엇이 있습니까?”
“저희는 몰디브에서 H&J 컨설팅 측에 K―9 자주포 200문, K2 흑표 전차 100대, 1,400톤급 잠수함 세 척과 3,000톤급 잠수함 네 척을 발주하기로 약속한 상태입니다.”
“추가로 줄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습니까?”
“제일 먼저 해군력 강화 프로젝트…….”
데사이 국장의 보고를 받고 있던 싱 총리는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 급히 보고를 중단시켰다.
“지난번에 국방부 장관이 노후 전차를 최대한 빨리 대체해야 한다고 보고했는데, 어떤 내용인지 얘기해 보세요.”
“우리나라 육군은 현재 5,000여 대에 가까운 전차를 운용하고 있는데, 이중에 도입한지 40년이 넘는 T―72 전차가 2,400대 가까이 있습니다. 국방부에서는 T―72 전차를 전량 교체해 달라고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중이지만, 예산이 부족해서 교체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만약에 T―72 전차를 한국산 K2 흑표 전차로 교체한다면, 예산이 얼마 정도 소요될까요?”
“포탄을 포함한 부대비용까지 모두 포함하면, 넉넉잡고 150억 달러면 충분할 겁니다.”
“생각보다 비용이 적게 드네요?”
“K2 흑표 전차의 가성비가 워낙 좋아서 그런 겁니다.”
“국방부에 K2 흑표 전차를 도입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하라고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의도하지 않게 뜻밖의 선물을 받은 H&J 컨설팅이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