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화] 이제 기다리면 되겠군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간 겨울은 깜짝 놀라 눈을 휘둥그레 떴다.
프랑스로 출장을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허허벌판처럼 썰렁해 보이던 집 내부가 완벽하게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다.
겨울은 가을의 높은 인테리어 안목에 감탄하며 이곳저곳을 둘러보았다.
“가을아, 인테리어 하느라고 고생 많이 했다.”
사실 가을은 인터넷을 통해서 가전제품을 구입할 생각이었으나, 곧바로 접었다.
겨울이 프랑스로 출장 가기 며칠 전에 서동호 실장의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대한 그룹 계열사 중에 대한하우징이라는 인테리어 전문 회사를 소개시켜 주면서, 인테리어를 염가에 시공해 주겠고 제안했다.
그의 성의를 고맙게 여긴 가을은 깊게 고민하지 않고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인테리어 공사는 겨울이 프랑스로 출장을 떠난 다음 날부터 시작해서 어제 오후에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인테리어 회사가 고생했지. 내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어.”
“이 정도면 비용이 꽤 나왔겠는데?”
가을도 그 점이 몹시 의문스럽긴 했다.
인테리어 도중에 현장소장이 가구와 가전제품도 일괄 구매해서 설치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안해 왔다.
별다른 고민 없이 동의해 주니, 현장소장은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가구와 가전제품의 카탈로그를 들이밀었다.
그녀가 한 일이라고는 그의 조언에 따라 마음에 드는 가구와 가전제품을 선택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자기가 아무리 인테리어 분야에 문외한이라지만, 인테리어 비용, 가구, 가전제품의 가격이 얼마인지 대충은 알고 있다.
그런데 대한하우징 측은 인테리어를 포함한 모든 비용으로 3,000만 원을 청구했다.
현장소장에게 청구한 금액이 너무 적은 것 같다며 다시 확인을 요청했지만, 적정 가격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지금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 가을은 겨울에게 거꾸로 물었다.
“오빠, 이 정도 인테리어 수준이면, 비용이 얼마 정도 나올 것 같아?”
“글쎄다. 아무리 적어도 3,000만 원은 넘지 않을까?”
“아, 그렇구나.”
순간, 겨울은 가을의 표정에서 무언가 이상한 점을 잡아냈다.
“뭐야? 한가을, 설마 바가지 쓴 건 아니겠지?”
“대한 그룹 계열사인 대한하우징에서 인테리어를 해 줬는데, 설마 우리한테 바가지를 씌우겠어?”
“그럼 그 표정은 뭐야?”
“대한하우징에서 인테리어 비용으로 3,000만 원을 청구했거든.”
“흐음, 가구랑 가전제품을 구입하는 데는 얼마 들었는데?”
“그 3,000만 원에 모두 포함되어 있어.”
“뭐라고?!”
깜빡 놀란 겨울이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가을은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는 듯 조심스런 목소리로 물었다.
“오빠, 서동호 실장님이 우리한테 편의를 제공해 준 게 맞겠지?”
겨울은 일련의 과정을 추리해 보았다.
자신의 이사 소식을 전해 들은 송훈석 회장은 서동호 실장에게 염가로 인테리어 해 주라고 지시했을 것이다.
자기에게 얘기를 꺼내면 거절할 것이 분명하다는 판단에 따라 가을이를 공략한 것이고.
인테리어는 자기가 관여하지 못하도록 프랑스 출장 기간을 이용해서 후다닥 해치운 것이리라.
겨울은 자기가 대한 그룹에 도움 준 것에 대한 보답의 일환이라 생각하고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기로 했다.
“아마도 그런 것 같다.”
“아 참, 설마하니 파리까지 갔는데 빈손으로 오지는 않았겠지?”
“글쎄다? 흠흠, 가방 정리 좀 부탁해도 되냐? 비밀번호가 뭔지는 알지?”
“오빠 생일?”
“샤워하고 나올 테니까 알아서 열고 있어 봐.”
가을은 열심히 살아온 자신의 삶에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요즘에 자격지심이 생겼다.
H&J Investment의 투자분석 검증 팀에는 모두 열한 명의 여자들이 근무하고 있다.
그녀들은 모두 최소한 명품 가방 한두 개쯤은 가지고 있었다.
하다못해 유명 축구선수를 오빠로 둔 조강희조차도.
만약에 자기가 최대주주인 겨울의 여동생이 아니었다면, 값비싼 명품 가방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을 것이다.
명품 브랜드가 아니더라도 품질 좋은 제품은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의 신분이 발목을 잡아 버렸다.
그래서 월급을 타면 꼭 명품 가방 하나를 장만해야겠다며 마음먹고 있었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캐리어 안에는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명품 가방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빠가 내 마음을 어떻게 알고 있었지?”
캐리어 정리를 끝낸 가을은 샤워를 끝내고 나온 겨울에게 진심을 담아 고마움을 전했다.
“오빠, 선물 정말 고마워.”
“웬일이냐? 나한테 고맙다는 소리를 다 하고.”
“하여간 여자의 마음은 쥐뿔도 모른다니까.”
가을은 겨울에게 레이저를 한 방 쏘아 보내고 2층으로 올라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바라보는 겨울이었다.
* * *
월요일 아침.
겨울, 가을 남매를 뒤에 태운 홍석훈 기사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둘의 사이가 한바탕 싸움이라도 한 것처럼 냉랭해 보였기 때문이다.
“부사장님,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제가 선물 준 것 때문에 삐졌나 봅니다.”
홍석훈 기사는 지난 토요일 오후에 인천공항에 겨울을 픽업하러 갔다가, 그에게 귀국 선물로 명품 지갑을 받았다.
자기에게 그렇게 비싼 선물을 사줄 정도인데, 여동생인 가을에게 하찮은 선물을 사 줬을 가능성은 없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가을의 싸늘한 표정을 보아하니 그게 아닌 것 같았다.
“부사장님,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한테 너무 짜게 구신 것 아닙니까?”
“홍 기사님은 5,000유로(약 650만 원)가 넘는 명품 가방이 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게 아니면 왜…….”
의도한 것이 있다는 듯 홍석훈 기사가 일부러 끝말을 흐렸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가을 씨, 왜 화났어요?”
사실 가을이 삐친 이유는 명품 가방이 아니라 겨울의 무심한 행동 때문이었다.
자기와 겨울은 큰 집으로 이사할 때 서로 약속한 것이 있었다.
집안일은 자기가 주로 하더라도, 설거지 정도의 가벼운 것 정도는 겨울이 하기로.
그런데 겨울은 저녁 식사를 끝내자마자 아무 말도 없이 방으로 들어가는 게 아닌가.
해외 출장에서 돌아왔기 때문에 피곤해서 그럴 수 있다 판단하고 그때는 가볍게 넘어갔다.
그렇지만 어제 아침은 달랐다.
잠도 충분히 잤기 때문에 자기가 아침밥상을 차렸으니, 당연히 설거지는 겨울이 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겨울은 아예 그럴 생각이 없다는 듯, 숟가락을 내려놓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버리는 게 아닌가.
겨울에게 선물 받은 명품 가방을 생각하며 다시 한번 꾹 참았다.
하지만 오늘은 월요일.
게다가 남자들보다 출근 준비하는 데 시간이 훨씬 많이 걸리는 여자가 아닌가.
오늘 아침은 설거지해 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아니나 다를까.
출근 준비도 끝내지 못했는데, 설거지까지 급하게 하다 보니 아침부터 정신이 쏙 빠져나갔다.
“홍 기사님, 제가 화난 이유는…….”
홍석훈 기사는 겨울과 가을의 마음을 동시에 이해했다.
겨울은 콩고민주공화국을 포함한 세 나라에서 발주 받은 품목들을 공급할 방법을 궁리하느라 다른 일에 신경 쓸 여력이 없는 상태.
그의 성격상 세세한 사정을 가을에게 얘기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사정을 모르는 가을은 겨울이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해서 섭섭한 마음을 가졌을 것이고.
앞으로도 이 문제 때문에 두 남매는 바람 잘 날 없이 싸울 것이 분명했다.
또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넓은 집을 관리하는 일이 커다란 문제로 대두될 것은 틀림없었다.
두 사람의 평화를 위해서 자기가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서기로 했다.
“부사장님, 아예 입주 도우미를 고용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말은 하지 않았지만, 사실 겨울도 그 문제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자기는 비즈니스 때문에 해외 출장이 잦을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그 큰 집에 가을이 혼자 남아 있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신경 쓰였다.
처음에는 해외 출장 갈 때마다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께 올라와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으나, 부모님 또한 나름대로 사정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지 못했다.
농사짓는 분들이니 농번기에 시골집을 비우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입주 도우미를 들이는 것을 고민하고 있었는데, 마침 홍석훈 기사가 그 얘기를 꺼냈다.
“홍 기사님, 추천해 주실 만한 사람이 있습니까?”
“제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남편과 사별하고 혼자 살고 계신 분이 있습니다. 지금은 식당에서 일하고 있는데, 그분을 입주 도우미로 고용하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분은 자식이 없나요?”
“중소기업에 다니는 아들이 한 명 있는데, 며느리와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은지 왕래가 거의 없습니다.”
“가을아, 네 생각은 어때?”
“나야 무조건 좋지. 오빠만 좋다고 하면, 반대하지 않을게.”
가을의 동의를 얻어 낸 겨울은 홍석훈 기사와 대화를 이어 나갔다.
“홍 기사님, 그분은 믿을 만한 분입니까?”
“김윤중 전무님도 그분을 잘 알고 계십니다.”
즉, 믿을 만하다는 말이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월말, 또는 5월 초에 출장 갈 일이 있으니까, 그전에 만나 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주세요.”
“네, 부사장님.”
회사에 출근한 겨울은 정명훈 사장의 호출을 받고 사장실로 직행했다.
그곳에는 자원중개라는 책임을 떠맡아 동분서주 중에 있는 김윤중 전무가 이미 도착해 있었다.
겨울의 뒤를 따라 H&J 컨설팅과 H&J Investment의 임원들이 속속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하도진 실장을 마지막으로 모든 임원들이 도착하자, 비서가 사람 숫자에 맞게 모닝커피를 서빙해 왔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정명훈 사장은 잔을 내려놓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우리 회사는 프랑스 출장에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얻었습니다. 각 임원들은 우리가 체결한 계약이 어려움 없이 진행될 수 있도록 만전을 기해 주십시오. 특히 투자분석 검증팀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니까, 이승훈 상무는 각별히 신경 써 주세요.”
“네, 사장님.”
“이미 공지 받았겠지만, 오전 10시부터 SH무역과 긴급 대책 회의가 있습니다. 상당히 중요한 비즈니스니까, 모두들 활발한 의견 개진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제 다른 얘기를 잠깐 해 봅시다. 김 전무님, 아프리카 국가들과 인도 정부와의 TTM은 언제가 적당할 것 같습니까?”
김윤중 전무는 4월 마지막 주에 TTM을 진행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모든 계획을 수립해놓고 있었다.
그런데 인도에 자원을 수출하겠다는 나라에 모잠비크와 케냐가 추가됨으로 인해서 상황이 복잡하게 꼬여 버렸다.
모잠비크가 수출하겠다는 천연가스와 자원들은 인도 정부가 수입하겠다고 일찌감치 확답을 준 상태였기에 큰 문제가 없었지만, 케냐가 문제였다.
그래서 겨울에게 지시를 받자마자 케냐의 루사토 부통령에게 인도에 수출할 수 있는 자원들을 통보해 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 케냐 정부가 자원 리스트를 보내오고 있지 않았다.
그 바람에 TTM 일정을 확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김윤중 전무는 현재까지 진행 상황에 대해서 자세하게 보고했다.
“…케냐 정부에서 자원 리스트를 보내오는 시점에 따라서 TTM 일정이 결정될 것 같습니다.”
“케냐가 리스트를 보내오지 않은 이유를 알고 있습니까?”
“저도 이유가 궁금해서 지난 금요일에 루사토 부통령님께 전화해 봤는데, 통화하지 못했습니다.”
“무슨 말인지 알았습니다.”
이 말과 함께 정명훈 사장은 핸드폰을 들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정 사장님.]
자다가 전화를 받았는지 목소리가 심하게 잠겨 있었다.
“부투야 실장님, 새벽 시간에 연락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 있습니까?]
“케냐의 루사토 부통령님과 통화하고 싶은데, 늦은 시간에 전화하는 것이 실례라서 실장님께 연락드렸습니다.”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케냐가 인도에 수출할 자원 리스트를 저희가 받아 보지 못한 상태입니다. 이로 인해서 아직 TTM 일정을 확정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시간을 끌다가는 콩고민주공화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들의 자원 수출이 7월 이후로 넘어갈 수 있는 상황입니다.”
[정 사장님, 10분 안에 루사토 부통령이 전화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주겠습니다.]
뚝.
부투야 실장이 전화를 급하게 끊었다.
“이제 기다리면 되겠군.”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