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용감한 사람이 미인을 얻는다
“지유 씨, 어느 가방이 마음에 드세요?”
겨울이 양손에 든 명품 가방들을 저울질하며 송지유에게 물었다.
“가방을 사용할 사람이 누구인데요?”
“20대 아가씨요.”
“참, 여동생이 있다고 하셨죠? 여동생이 사용할 거라면 왼손에 들고 있는 가방이 조금 더 나아 보이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역시 지유 씨는 안목이 뛰어나시네요.”
“고마워요.”
톡톡.
뒤에 서 있던 호영이 겨울의 등을 건드리며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한 부사장, 뒤에 있는 내가 안 보여? 제발 부탁인데, 볼일 다 봤으면 좀 비켜 주라.”
“어? 어.”
겨울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물러나자, 호영이 양손에 여자 옷을 들고 송지유에게 말을 건넸다.
“지유 씨, 둘 중에 어느 것이 괜찮아 보여요?”
“강희한테 선물할 옷이라면, 오른손에 들고 있는 옷이 예뻐 보이네요.”
“강희라니요? 저하고 강희는 사귀는 사이가 아닙니다.”
“어머! 미안해요. 제가 실언했네요.”
마치 그때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겨울이 재빨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정호영, 이렇게 화려한 옷을 너희 어머님이 소화하실 수 있을까?”
“미안하지만, 울 엄마한테 선물할 옷이 아니거든.”
“그럼 작은어머님께 선물할 거야?”
“그것도 아니야.”
“이상하다. 그러면 더 이상 네 주위에 여자가 없는데?”
‘에이, 진드기 같은 놈.’
속으로 한마디 내뱉고 호영은 겨울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내가 너한테 얘기해 줄 의무가 있을까?”
“설마하니 지유 씨한테 선물하려는 건 아니겠지?”
호영은 순간 딜레마에 빠졌다.
겨울의 말대로 자기는 송지유에게 옷을 선물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난감한 상황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적당히 거짓말을 둘러대는 것이 맞았으나, 그러지 않기로 했다.
용감한 사람이 미인을 얻는다는 말을 굳게 믿고 화끈하게 질러 보기로 결심했으니까.
“잘 알고 있네.”
“네?! 정말인가요?”
두 사람의 대화를 관심을 갖고 지켜보던 송지유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네, 맞아요. 지유 씨한테 선물할 생각이었어요. 제 성의를 받아 주시겠어요?”
“글쎄요… 그래도 되나 모르겠네요.”
“부담 갖지 말고 선택해 봐요. 파리에 온 기념이니까.”
“그렇다면 오른쪽 것으로 받을게요.”
겨울은 호영을 향해 눈을 치켜떴다.
호영은 무언가에 꽂히면 끝을 보려고 하는 저돌적인 추진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다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볼 수 있다는 생각에 초조감이 머리를 훅 치고 지나갔다.
그래서 과감하게 행동으로 나서기로 결정했다.
“지유 씨, 제 선물도 받으세요.”
“그 가방은 한가을 씨한테 선물해 줄 거 아니었어요?”
“저는 20대 아가씨가 사용할 예정이라고 얘기했을 뿐입니다.”
겨울의 유치하면서도 무모한 행동에 송지유는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다.
자신만의 관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니까.
“이렇게 비싼 선물을 제가 받아도 되나 모르겠네요.”
“지유 씨, 저 옛날의 가난하던 한겨울이 아닙니다. 이 정도 가방은 언제든지 선물해 줄 수 있어요.”
“고마워요. 잘 메고 다닐게요.”
“한겨울, 너 이러는 거 아니다.”
아니나 다를까, 호영이 눈을 부라리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정호영, 신사협정을 먼저 깬 사람은 너라는 사실을 명심해 주길 바란다.”
“너도 지유 씨한테 가방을 선물할 생각이었잖아?”
“적어도 나는 많은 사람들이 쳐다보는 앞에서 선물을 건네줄 생각은 없었어.”
“그게 그거 아냐?”
호영이 한마디 툭 내뱉고 계산을 치르러 자리를 떴다.
겨울도 뻘쭘한 분위기를 피하기 위해서 얼른 호영의 뒤를 쫓아갔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양경운 과장은 씨익 웃으며 한마디 했다.
“하하, 송지유 쟁탈전을 지켜보는 재미가 쏠쏠한데?”
“오빠, 아빠한테 말하면 안 된다?”
“왜?”
“오빠도 아빠의 못 말리는 그 성격을 알고 있잖아.”
“암, 알고말고. 그나저나 두 사람 중에 네 마음을 훔쳐 간 사람이 누구냐?”
“후후, 비밀이야.”
* * *
같은 시각.
리츠 파리 호텔의 회의실에서는 한창 심도 깊은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
그중에는 VINCH의 페키르 회장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 사장님, 잉가 3댐 건설 공사는 저희 대한건설 컨소시엄과 어떤 조건으로 계약할 예정입니까?”
“기존에 약속한 대로 130억 달러에 계약할 생각입니다.”
“저희는 120억 달러에 제안서를 제출했잖아요?”
“10억 달러는 VINCH의 노하우에 대한 로열티라고 생각하십시오.”
“하하하, 고맙습니다.”
“그 대신에 도로 확포장 공사는 170억 달러에 계약을 체결할 생각인데, 페키르 회장님과 송 회장님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저희는 불만 없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세 사람과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부투야 실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들은 도로 확포장 공사를 H&J 컨설팅과 200억 달러에 계약했다.
H&J 컨설팅이 대한건설 컨소시엄과 170억 달러에 계약을 체결하면, 무려 30억 달러라는 엄청난 이익이 발생하는 셈.
자기에게 지급할 커미션 3억 달러와 각종 부대비용을 공제해도 최소 25억 달러 이상 남는 금액이다.
지금까지 정명훈 사장을 지켜본 결과, 그는 정도를 걷는 사람이었지 과욕을 부리는 사람이 절대 아니었다.
그러다가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정 사장님, 우리나라와 H&J 컨설팅이 체결한 계약서를 수정해야 합니까?”
“네. 180억 달러로 금액을 낮출 생각입니다.”
“20억이나 낮게 책정하다니. 우리나라를 신경 써 줘서 정말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다 하십니다. 저희는 콩고민주공화국에 160억 달러만 빌려줄 생각인데, 그 정도면 충분히 가능하겠지요?”
자신들은 도로 확포장 공사와 관련해서 완커건설로부터 40억 달러를 기부 받은 상태였다.
그리고 H&J Investment로부터 160억 달러를 지원받는다면, 필요한 자금 200억 달러를 확보하는 셈.
이 중에서 180억 달러를 H&J 컨설팅에 지급하면, 20억 달러가 남는다.
갑자기 그 금액만큼 여유가 생겨 버렸다.
“정 사장님, H&J Investment로부터 지원받는 금액을 150억 달러로 줄이고 싶습니다.”
사실 정명훈 사장이 노린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콩고민주공화국에 150억 달러로 금액을 낮춰 지원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160억 달러를 언급한 이유는 부투야 실장이 빚지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성향을 감안해 그에게 선택권을 주기 위함이었다.
역시 자신의 예상대로 부투야 실장은 10억 달러를 줄인 150억 달러를 지원받겠다는 의사를 표명해 왔다.
잘됐다고 생각하며 부투야 실장의 물음에 대답했다.
“부투야 실장님께서 원하는 대로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하하, 고마워요.”
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문두야 부통령, 마사카 부통령이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문두야 부통령은 비어 있는 자리에 앉으며 유쾌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 사장님, 오다가 얘기 들었습니다. 정말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하하, 고맙습니다.”
“욕심 많기로 소문난 천쥐펑 부회장이 두 건의 공사를 쉽게 포기한 이유를 저희한테 들려주실 수 있습니까?”
“가장 큰 이유는 대한건설 컨소시엄이 저희한테 파격적인 제안을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어젯밤에 뿌요네 회장님의 저택에서 축하 파티가 끝난 후, 한 부사장이 저를 은밀히 찾아왔습니다.”
정명훈 사장은 어젯밤부터 오늘 오전까지의 일들을 비교적 상세하게 들려주었다.
“…해서 천 부회장이 만세를 부른 것입니다.”
“천 부회장이 정 사장님의 제안을 덜커덕 수용하면 어쩌려고 그랬습니까?”
“천 부회장은 건설업계에서 30년 넘게 몸담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수용하지 않을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래도 긴장했을 텐데, 배짱이 대단하네요.”
“한겨울 부사장의 선경지명을 철썩같이 믿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하여간 두 분의 케미가 부러울 따름입니다.”
“감사합니다. 이제 페키르 회장님께 철도 건설 프로젝트에 대해서 상세하게 설명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러겠습니다. 5년 전에 우리 탄자니아, 우간다, 케냐는 물류 인프라 개선을 위해서…….”
문두야 부통령은 철도 건설 프로젝트에 대해서 간략하게 입에 올렸다.
“…H&J Investment에서 철도 건설 프로젝트에 투입되는 비용을 투자해 준다고 해서, 다시 추진될 예정입니다.”
문두야 부통령의 말이 끝나자마자 정명훈 사장이 입을 열었다.
“철도 건설 프로젝트가 추진되기 위해서는 타당성 검토가 먼저 이뤄져야 하는 상황입니다. 따라서 저희 회사에서 타당성 검토를 위한 태스크 포스를 운영할 생각입니다. 태스크 포스에는 저희 회사, 대한건설, VINCH, 탄자니아, 우간다, 케냐가 참여했으면 좋겠는데,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의견 주십시오.”
“정 사장님, 저희가 태스크 포스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마사카 부통령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철도 건설 프로젝트가 최대한 빨리 추진되기 위해서는 세 나라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저희 우간다는 태스크 포스에 참여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탄자니아도 마찬가지입니다.”
“문두야 부통령님께서는 케냐의 루사토 부통령님께 의견을 여쭤보시고 저한테 알려 주십시오.”
“그렇게 해 드리겠습니다.”
그때, VINCH의 샹바르 사장이 발언권을 요청하고 입을 열었다.
“정 사장님, 태스크 포스의 베이스캠프는 어디에 차릴 예정입니까?”
“저희 회사를 생각하고 있습니다만…….”
상뱌르 사장의 의견을 들어 보려는 목적으로 정명훈 사장이 일부러 끝말을 흐렸다.
“태스크 포스가 본격적으로 가동되면, 어떤 형태로든 소문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정명훈 사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무리 자신들이 비밀로 부친다 해도 한국에 차릴 경우, 최성진 부회장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
얼마 지나지 않아서 천쥐펑 부회장의 귀에도 당연히 들어갈 것이다.
그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 대한건설과 VINCH를 참여시키지 않으면 되지만, 그럴 수도 없다.
철도 건설 프로젝트에 대한 타당성을 검토하는 데 상당히 많은 시간이 소요될 것이기 때문에.
무언가 특단의 대책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샹바르 사장님, 좋은 아이디어가 있습니까?”
“가장 좋은 방법은 태스크 포스의 베이스캠프를 아예 VINCH에 차리는 것입니다.”
“태스크 포스에 참여하는 분들에 대한 숙식 제공은 저희가 책임지겠습니다.”
샹바르 사장의 뒤를 이러서 페키르 회장이 한마디 거들었다.
두 사람의 얘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마사카 부통령이 입을 열었다.
“저도 샹바르 사장님의 제안에 적극적으로 찬성합니다.”
“이유를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우리나라를 비롯한 세 나라는 프랑스와 시차가 거의 없기 때문에 의사결정이 신속하게 이뤄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고, 한국보다 프랑스를 오고가는 것이 훨씬 편하기 때문입니다.”
“송훈석 회장님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사실 송훈석 회장은 샹바르 사장의 제안이 그다지 썩 내키지 않았다.
YCM건설과 완커건설이 아무리 용을 쓴다고 하더라도 철도 건설 프로젝트는 자신들의 호주머니에 들어올 예정이었으니까.
물론 자기가 고집을 피우면 베이스캠프를 한국에 차릴 수 있겠지만, 이번에는 양보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결정권을 가지고 있는 정명훈 사장의 생각이 프랑스 쪽으로 기운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샹바르 사장의 제안을 수용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샹바르 사장님은 태스크 포스 운영계획을 최대한 빨리 수립해서 관련 당사자들한테 송부해 주십시오.”
페키르 회장은 뒷짐 지고 있다가 엄청난 규모의 일을 하루아침에 따낸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 기분 좋은 날을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오늘 저녁을 제가 샀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페키르 회장님, 오늘 저녁은 제가 사기로 했습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저녁은 제가…….”
부투야 실장부터 마사카 부통령 실장까지 기분 좋은 언쟁에 끼어들었고, 결국 기부를 제일 많이 받은 부투야 실장이 저녁을 사는 것으로 결정됐다.
도저히 방법이 없다고 판단한 페키르 회장은 플랜 B를 꺼내들었다.
“부투야 실장님, 언제 본국으로 돌아가실 예정입니까?”
“내일 오후에 출발할 예정입니다.”
“다른 두 분은요?”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예약한 비행기 티켓을 모두 취소하십시오.”
“이유를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제 전용기를 이용해서 여러분을 고국으로 보내드리겠습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