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참새가 봉황의 뜻을 어찌 알까
양경운 과장과 송지유는 호텔 로비에서 겨울과 호영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지유야, 아직 귀국 선물을 구입하지 못한 거 있니?”
“아니. 없어.”
“그럼 호영 씨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인 이유가 뭐야?”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그저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대답했을 뿐.
그러나 자신의 속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면, 송훈석 회장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
만약을 위해서라도 다른 변명거리를 만들어 내야 했다.
“한 부사장님과 호영 씨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어서.”
“도움이라니?”
“여자에게 줄 선물은 여자가 골라야 실패하지 않거든.”
“여자라… 아차, 한 부사장님한테 여동생이 있다고 했지?”
때마침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다른 두 사람을 더 데리고.
양경운 과장은 대화를 중단하고 그들에게 다가갔다.
“하 실장님과 장 부사장님도 귀국 선물을 사시려고요?”
“호텔에 있기 심심해서 한 부사장님을 따라나선 거야.”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양경운 과장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겨울에게 물었다.
“한 부사장님, 이곳에서 멀지않은 곳에 백화점이 있으니까, 그곳에서 쇼핑하는 게 어떨까요?”
“걸어가도 되는 거리입니까?”
“어제 송지유 씨하고 걸어 봤는데, 15분 정도 걸렸습니다.”
“그 정도면 충분히 걸을 수 있겠네요. 자, 출발합시다.”
백화점을 향해 걸어가던 도중에 양경운 과장이 하도진 실장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하 실장님, 어떻게 됐어요?”
완커건설과 YCM건설 컨소시엄을 무사히 단념시켰는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하도진 실장은 당시의 순간을 생각만 하면 아직도 가슴이 벌렁거렸다.
정명훈 사장이 YCM건설 컨소시엄에 그런 조건을 제시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으니까.
그것보다 더 놀라운 점은 두 건의 공사를 수주하기 위해서 무려 65억 달러, 아니, 66억 달러를 사용한 천쥐펑 부회장이 미련 없이 정명훈 사장의 제안을 거절했다는 거였다.
점심 식사 도중에 정명훈 사장에게 파격적인 제안을 한 이유를 물어봤지만, 그는 언제나 그렇듯 웃기만 할뿐 시원스럽게 답을 내놓지 않았다.
때문에 그 점에 대해서 아직도 의문을 품고 있는 중이었고.
“기존에 계획한 대로 잘 마무리됐어.”
“최 부회장과 천 부회장이 반발하지 않았어요?”
“반발하기는커녕 오히려 고마워하는 눈치더라고.”
양경운 과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성진 부회장과 천쥐펑 부회장이 두 건의 공사를 수주하기 위해서 비록 기부하는 형식을 빌렸지만, 얼마를 사용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두 건의 공사를 수주하지 못했으니 열 받아서라도 반발하는 것이 이치상 맞지 않은가.
그런데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고마워했단다.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졌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사장님이 천쥐펑 부회장에게 대한건설 컨소시엄이 제안한 조건을…….”
영문을 모르기는 지금 설명하는 하도진 실장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 있었던 일을 기계적으로 언급하면서도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 사장님이 천 부회장한테 말도 안 되는 조건을 제시한 이유를 알고 있나요?”
“나 같은 참새가 봉황의 뜻을 어찌 알겠어.”
장대산 부사장은 정명훈 사장이 천쥐펑 부회장에게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할 때, 비즈니스 룸의 분위기를 파악하는 데 주의를 기울였다.
얘기를 꺼낸 당사자인 정명훈 사장의 표정은 비장했고, 부투야 실장을 포함한 다른 사람들의 표정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유일하게 겨울만은 평소와 다름없이 포커페이스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를 제시한 사람이 겨울이라고 본능적으로 감이 왔다.
기회가 되면 물어보기로 마음먹고 있었는데, 모두가 궁금해하는 지금이 얘기를 꺼내기 좋은 순간이라고 판단했다.
“한 부사장님, 어떻게 된 영문인지 이제 자세한 진상을 밝혀 주시죠?”
“장 부사장님은 알고 계셨어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감이 그렇습니다.”
“그, 그럼 부사장님의 아이디어였습니까?”
한 템포 늦게 하도진 실장이 심하게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네, 맞습니다.”
“부사장님, 저기 보이는 카페에서 자세한 얘기를 들었으면 좋겠습니다.”
“하 실장님, 저희는 지금 백화점에 귀국 선물을 구입하러 가는 중입니다.”
겨울이 얘기해 주기 싫다는 뜻을 에둘러 표현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일행들 모두가 두 눈을 초롱초롱하게 빛내며 자세한 진상을 듣고 싶어 했으니까.
결국 겨울 일행은 오후의 햇살이 따뜻하게 내려쬐는 카페의 야외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았다.
웨이터가 서빙해 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겨울이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미 알고 계시다시피 저희는 YCM건설 컨소시엄을 포기시킬 계획을 수립해 놓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완벽하지는 않아서 그 계획을 사용하면 부작용이 발생할 수 있다는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죠.”
장대산 부사장은 부작용이 무엇인지 단숨에 알아챘다.
설영석 이사가 녹음해 온 음성 파일.
그것이 공개될 경우 효과는 좋겠지만, 최성진 부회장은 틀림없이 범인을 찾기 위한 작업에 돌입할 것이다.
범인으로 몰린 설영석 이사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서 송훈석 회장에게 지시받은 내용을 미주알고주알 털어놓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다.
그럴 경우, 최성진 부회장이 H&J 컨설팅과 대한 그룹이 같은 편이라는 사실을 알아내는 것은 시간문제.
그렇게 되면 자신들에게 해코지를 해 올 가능성도 있었다.
겨울은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서 묘안을 생각해 냈고 그 긴박한 상황을 비집고 정명훈 사장에게 은밀하게 전달한 것이다.
장대산 부사장이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겨울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CTG와 ACS 컨소시엄은 잉가 3댐 건설 공사와 관련해서 공사비 140억 달러, 공사 기간 11년을 제안해서 입찰을 수주했습니다. 그리고 도로 확포장 건설 공사는 공사비 200억 달러, 공사 기간 10년을 제안한 상태였고요.”
겨울은 목이 마른지 진한 커피로 목을 축인 후,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런데 대한건설 컨소시엄은 잉가 3댐 건설 공사는 공사비 120억 달러, 공사 기간 7년을 제안했습니다. 그리고 도로 확포장 공사는 공사비 170억 달러에 공사 기간 6년을 제안했고요. 저는 YCM건설 컨소시엄은 죽었다 깨어나도 대한건설 컨소시엄과 같은 조건으로 공사를 수행하지 못할 것이라고 직감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있습니까?”
“천쥐펑 부회장은 틀림없이 CTG로부터 미리 정보를 취득했을 테니까요.”
하도진 실장은 이제야 모든 의문이 풀렸다.
천쥐펑 부회장은 분명 CTG가 산출한 공사 조건을 밑바탕에 깔고 협상에 임했을 것이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대한건설 컨소시엄이 VINCH의 도움을 받아서 공사비는 각각 20억 달러와 30억 달러를, 공사 기간은 각각 4년을 적게 산출해서 제출했다.
완커건설은 VINCH라는 훌륭한 파트너를 가지고 있지 않다.
때문에 천쥐펑 부회장은 대한건설 컨소시엄이 제안한 조건을 맞추지 못할 것으로 판단 내리고 울며 겨자 먹기로 포기를 선언한 것이리라.
그러다가 갑자기 궁금한 것이 하나 생겼다.
“한 부사장님, YCM건설 컨소시엄이 편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 보지 않았나요?”
“그들은 VINCH가 보유한 노하우가 없기 때문에 편법을 사용한다 하더라도 대한건설 컨소시엄이 제안한 조건을 맞출 수 없었을 겁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양경운 과장이 발언권을 요청했다.
“한 부사장님, YCM건설 컨소시엄이 불량 자재를 사용하고 야간 공사를 실행하면 조건을 맞출 수 있지 않을까요?”
“야간 공사를 실행하면, 공사비와 기타 비용이 큰 폭으로 늘어날 수 있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저는 무슨 말씀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야간 공사의 경우에는 인건비가 1.5배로 늘어납니다. 더구나 캄캄한 밤에 공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조명을 비롯한 부대공사비가 많이 들어가고요. 그것을 모두 감안한다고 해도 야간 공사는 주간 공사에 비해서 능률이 그다지 높지 않습니다.”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잠시 대화가 중단된 틈을 타서 하도진 실장이 입을 열었다.
“한 부사장님, 결과적으로 적을 속이기 위해서 아군부터 속인 것이 되네요?”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저희를 속인 기념으로 오늘 저녁에 한턱내셔야겠습니다.”
“오늘 저녁에 한턱낼 사람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는데, 과연 저한테까지 순서가 올까요?”
“아차, 제가 그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네요.”
“이제 모든 의문이 풀렸으면 귀국 선물을 사러 일어나시죠?”
* * *
같은 시각.
최성진 부회장의 스위트룸에서도 같은 내용으로 격론이 벌어지고 있었다.
“천 회장님, 저한테 상의 없이 두 건의 공사를 포기한 이유가 도대체 뭡니까?”
“최 회장님, 이미 지난 일을 들춰내서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냥 덮고 넘어갑시다.”
“도로 확포장 공사는 몰라도 잉가 3댐 건설 공사건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겠습니다.”
‘모든 것이 YCM건설 때문이잖아요.’
이 말이 식도를 타고 올라와서 입 안에 머물렀지만, 아직은 오월동주 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공사 기간 때문에 포기했습니다.”
“공사 기간이라뇨?”
“우리가 7년 안에 잉가 3댐 건설공사를 끝내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야간 공사를…….”
최성진 부회장은 자신도 모르게 등줄기를 따라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만약에 자신들이 정명훈 사장의 제안을 덜컥 수용했더라면, 보나마나 큰 폭의 적자를 볼 것이 확실했으니까.
천쥐펑 부회장은 그 점을 일찌감치 감안하고 과감하게 포기를 선언한 것이다.
아프리카 대륙의 건설 시장에 뛰어들기 위해서 18억 달러라는 거액의 수업료를 지불한 것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천 부회장님, 저는 그렇게 깊은 뜻이 숨어 있는지 미처 몰랐습니다.”
“이제라도 아신다니 다행이네요.”
“그런데 대한건설 컨소시엄이 그 조건으로 공사할 수 있을까요?”
“VINCH가 가지고 있는 노하우를 최대한 활용하면, 충분히 가능할 겁니다.”
“아, 그렇군요.”
“그나저나 부투야 실장의 숙박비를 지급하지 못하겠다고 한 이유가 뭡니까?”
이제 공수가 바뀌었다.
최성진 부회장은 이와 같은 질문이 나올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고, 완벽하지는 않지만 대책을 마련해 놓은 상태였다.
“사실은 천 부회장님과 부투야 실장한테 서운한 감정이 남아 있어서 그랬습니다.”
“서운한 감정이라뇨?”
“저는 두 분이 철도 건설 프로젝트에 대한 대화를 나눌 때, 적어도 YCM건설도 언급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두 분은 YCM건설에 대해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고, 결국 목마른 제가 우물을 팠습니다.”
‘에이, 좀팽이 같은 인간.’
천쥐펑 부회장은 속으로 한마디 해 주고, 최성진 부회장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어차피 부투야 실장의 숙박비는 임 회장님이 부담했으니까, 이쯤에서 덮고 넘어갑시다.”
“제가 원하던 바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철도 건설 프로젝트를 어떻게 수주해야 할지 상의해 봅시다.”
최성진 부회장은 철도 건설 프로젝트에서 발을 뺄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직은 천쥐펑 부회장에게 언급하면 안 된다.
따라서 그가 완벽하게 속을 수밖에 없도록 대책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저는 저희와 완커건설의 역할을 분리했으면 좋겠습니다.”
“묘안이라도 있습니까?”
“철도 건설 프로젝트의 핵심적인 키는 H&J 컨설팅이 쥐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천쥐펑 부회장도 그 점에 대해서는 최성진 부회장과 생각이 같았다.
그래서 시간 날 때마다 정명훈 사장과 비밀리에 만나 볼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나, 지켜보고 있는 눈들이 제법 많았기 때문에 적어도 이곳에서는 아니었다.
천쥐펑 부회장이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도 최성진 부회장의 얘기는 계속됐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저희가 H&J 컨설팅의 정명훈 사장을 책임지고, 완커건설이 세 나라의 VIP들을 책임지는 데 주력하면 어떻겠습니까?”
“최 부회장님, 정 사장을 어떤 방법으로 공략할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사실 최성진 부회장은 정명훈 사장을 책임질 생각이 전혀 없었다.
다만, 천위펑 부회장을 속이기 위해서 립 서비스를 해 준 것일 뿐.
그런데 예상과 달리 그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 물어오고 있었다.
재빨리 짱구를 굴려서 그럴듯한 대답거리를 만들어 냈다.
“돈이면 되지 않을까요?”
“아, 그렇군요.”
“이제 모든 것을 잠시 묻어 둡시다. 프랑스에서의 마지막 밤을 화끈하게 보내는 것이 어떨까요?”
“하하하,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