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1화]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다
창밖의 경치를 쳐다보며 말없이 생각에 빠져 있던 천쥐펑 부회장은 문득 생각난 것이 있다는 듯 리스롱 사장에게 물었다.
“리 사장, 내가 송유관 건설 공사를 포기한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비록 3억 달러는 허공에 날려 버렸지만, 부회장님의 선택은 탁월했다고 생각합니다.”
천쥐펑 부회장은 리스롱 사장과 30년 가까이 호흡을 맞춰 왔다.
그러니 입에 발린 소리라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를 얘기해 봐.”
“정명훈 사장은 저희가 어떤 편법을 사용할지 이미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습니다. 만약에 그게 사실이라면, 저희는 추가로 3억 달러 넘게 손해를 입었을 겁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천쥐펑 부회장도 생각이 같았다.
정명훈 사장이 편법을 하나하나 언급할 때마다 얼마나 놀랐는지, 당시를 생각하면 아직도 식은땀이 흘러내릴 정도로 아찔했다.
“리 사장, 잉가 3댐 건설 공사와 도로 확포장 공사와 관련한 수주전략을 다시 세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두 건의 공사를 무리 없이 수주할 수 있는 신박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있나?”
“대한건설이 H&J 컨설팅에 제안한 조건보다 근소하게 좋은 조건을 제시하면 될 것 같습니다.”
리스롱 사장의 말대로 되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대한건설이 H&J 컨설팅에 제안한 조건이 무엇인지 알아내야 한다는 점이었다.
좋은 방안이 있는지 물었다.
“설영석 이사는 알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천쥐펑 부회장도 그와 생각이 같았지만, 심각한 문제도 있었다.
설영석 이사와 접촉하기 위해서는 최성진 부회장을 거쳐야 하는데, 그가 현재 잔뜩 삐쳐있다는 점이었다.
그를 달래주기 위해서는 삐친 원인이 무엇인지 파악하는 것이 먼저였다.
“리 사장, 최 부회장이 나한테 삐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리스롱 사장은 대화의 주도권을 차지하기 위한 다툼으로 일찌감치 결론 내려놓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의견을 밝히면, 천쥐펑 부회장은 무조건 화부터 낼 터였다.
그의 성질을 돋워서 좋은 일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감추기로 결정했다.
“부회장님한테 내기에서 진 앙금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것 같습니다.”
“음… 그렇다는 말이지?”
“저는 최 부회장과 화해하기 위해서라도 10억 달러는 돌려주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이유를 얘기해 봐.”
천쥐펑 부회장은 내키지 않다는 반응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먼저 부회장님은 정당한 방법으로 내기에서 이기지 않았고, 지금은 설 이사의 도움이 필요한 상태입니다. 마지막으로 철도 건설 프로젝트를 수주하기 위해서는 최성진 부회장과의 협업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맨 마지막 이유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봐.”
“저희가 철도 건설 프로젝트를 수주하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작업에 돌입해야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두 나라에 기부금을 가장해서 뇌물을 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되지 뭐가 문제야.”
“문제는 최 부회장이 우간다와 탄자니아의 정부 계좌번호를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천쥐펑 부회장은 이제야 리스롱 사장의 의도를 완벽하게 이해했다.
틀림없이 최성진 부회장 쪽에서도 철도 건설 공사 프로젝트를 수주하기 위해서 나름의 작업에 돌입할 것이고, 십중팔구 자기들처럼 뇌물을 제공할 계획을 세워 놓고 있을 것이다.
자기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뇌물을 제공하더라도, 계좌를 가지고 있는 최성진 부회장에 이어서 두 번째로 뒤쳐질 확률이 높다.
1등은 쉽게 기억되지만, 2등은 쉽게 잊히는 것이 비즈니스 세계의 이치.
물론 최성진 부회장보다 훨씬 많은 뇌물을 제공하면 기억에 오랫동안 남겠지만, 돈이 많이 들어간다는 단점이 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와 손을 잡는 것이 현재로서는 최선이었다.
생각을 끝낸 그는 핸드폰을 들어 최성진 부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입니까?]
아직도 삐쳤다는 듯 냉랭한 목소리.
“최 부회장님, 호텔에 도착하는 즉시, 10억 달러를 되돌려 드릴 테니까, 화 풀어요.”
[저는 천 부회장님 때문에 화난 상태가 아닙니다.]
“그럼, 무엇 때문에 화났습니까?”[저희가 뇌물로 6억 달러를 사용했는데도 송유관 건설 공사를 수주하지 못한 것 때문에 화가 난 것입니다.]
‘인간아, 입술에 침이나 바르고 거짓말해라.’
속으로 한마디 해 주고, 최성진 부회장과 통화를 이어 나갔다.
“저도 송유관 건설 공사를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심정입니다.”
[호텔로 돌아가서 술 마실 생각인데, 같이 한잔 하실까요?]
“좋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사겠습니다.”
[한 시간 뒤에 천 부회장님의 숙소로 가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딸깍.
최성진 부회장이 전화를 끊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임지태 회장이 말을 걸어왔다.
“매형, 천 부회장이 뭐라고 합니까?”
“10억 달러를 되돌려준다고 하더군.”
“왜요?”
“나한테 아쉬운 것이 있나보지 뭐.”
임지태 회장은 천쥐펑 부회장이 아쉬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단숨에 알아챘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우간다와 탄자니아 정부의 계좌번호를 탐내고 있는 것이다.
“매형, 아무 대가 없이 계좌번호를 넘겨줄 생각은 아니겠죠?”
“당연하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박철헌 사장이 할 말이 있다는 듯 조용히 입을 열었다.
“부회장님, 이참에 도로 확포장 공사에 YCM건설을 참여시켜 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어떨까요?”
“그야 당연한 것이고, 또 다른 아이디어가 없나?”
“저희가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서는…….”
* * *
같은 시각.
겨울을 포함한 일행들은 철도 건설 공사와 관련한 대책을 논의하느라 아직도 회의실에 남아 있었다.
“두 분의 부통령님은 내일이 아니라 모레 귀국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한 부사장님, 좋은 일이라도 있습니까?”
문두야 부통령이 잔뜩 호기심을 품으며 물었다.
“천 부회장이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무언가 조치를 취하려고 할 겁니다.”
“저희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맞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러나 마사카 부통령은 겨울의 생각과 달랐다.
천쥐펑 부회장이 자신들의 나라에 기부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그렇게 빨리 이곳을 떠나지 않았을 것이니까.
결정적으로 그는 자신들의 나라의 계좌번호를 모르고 있다.
이 점을 언급하며 겨울의 생각을 물었다.
“이곳을 빨리 떠난 이유는 최 부회장과 대책을 논의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계좌번호는 최 부회장이 알고 있으니까요.”
“아차, 제가 그 생각을 하지 못했네요.”
“천 부회장이 조치를 취한다고 가정하고, 두 분의 행동 요령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빨리 말씀해 보세요.”
“제일 먼저, 시간은 우리 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느긋하게…….”
뿌요네 회장은 연합군들이 겨울을 애지중지 다루고 있는 이유를 이제야 확실하게 깨달았다.
책사를 자처하며 그들의 나라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 주고 있는데, 어떻게 함부로 대하겠는가.
‘우리도 도움 받은 것에 보답하기… 아차! 그게 있었지?’
뿌요네 회장은 재빨리 옆자리에 앉아 있는 움티카 비서실장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H&J 컨설팅에 줄 개업 축하 선물을 생각해 봤나?”
움티카 실장은 지난 2월의 일을 기억에서 끄집어 냈다.
그때 해리슨 상원의원을 병문안 다녀온 뿌요네 회장은 2월 말에 H&J 컨설팅이라는 회사가 설립될 예정이라면서 근사한 개업 선물을 준비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지시받은 대로 개업 선물을 준비하던 도중에 H&J 컨설팅이 어떤 회사이고 핵심적인 인물이 누구인지 절실하게 깨달았다.
그런 이유로 개업 선물 규모를 대폭 상향해 놓은 상태였다.
“대한전자에서 생산하는 최신형 핸드폰이 제일 적합한 것 같습니다.”
“음, 그게 좋겠군. 몇 대나 구입해 주면 좋아할까?”
“생색을 제대로 내려면, 적어도 20만 대는 구입해 줘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많은 핸드폰을 어디에 쓰려고?”
“저희 회사 창사기념 선물로 직원들한테 나눠 주는 것은 어떨까요?”
“그렇게 하면 되겠네.”
두 사람이 속닥대는 사이, 겨울의 설명이 끝이 났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절대로 조급함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마세요.”
“철도 건설 공사 프로젝트가 공수표가 되면 곤란하니까, 저희가 타당성 검토를 시작할 수 있도록 최대한 빨리 자료를 건네주십시오.”
“아무리 늦어도 내일까지 받아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줄게요.”
“마지막으로 케냐 정부 측의 사람을 만나볼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주십시오.”
문두야 부통령은 겨울이 그런 부탁을 해 올 것이라 짐작하고, 이미 케냐의 윌리엄 루사토 부통령과 통화를 해 놓은 상태였다.
“제가 케냐의 루사토 부통령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 이곳으로 출발하라고 할까요?”
“저희가 그분을 만나기에는 조금 이른 감이 있습니다.”
“그러면 몰디브에서 미팅을 갖는 것은 어떨까요?”
“루사토 부통령님께 인도에 수출할 수 있는 자원들을 파악해서 가지고 와 달라고 부탁해 주십시오.”
“하하, 그렇게 할게요.”
어느 정도 대화가 일단락된 틈을 타서 뿌요네 회장이 발언권을 요청했다.
“정 사장님, VINCH의 나발 페키르 회장님은 언제 소개시켜 줄까요?”
“페키르 회장님과는 콩고민주공화국의 도로 확포장 건설 공사에 대해서 상의하느라고 이미 어젯밤에 인사를 나눴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 회사가 창사 기념일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직원들에게 대한전자에서 생산한 핸드폰을 지급할 예정입니다. H&J 컨설팅에서 그 업무를 수행해 주세요.”
“저희 회사에 일감을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하하, 별말씀을요. 이제 축하 파티를 벌이러 출발할까요?”
* * *
“회장님, 지금쯤이면 모든 결론이 나지 않았을까요?”
조병석 실장이 초조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송훈석 회장에게 물었다.
“왜? 송유관 건설 공사를 YCM건설에 빼앗길까 봐 그러는 거야?”
“아닙니다. 그것보다도 최 부회장이 어떤 개망신을 당했는지 궁금해서 그럽니다.”
송훈석 회장은 조병석 실장과 생각이 달랐다.
정명훈 사장이 최성진 부회장을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을 생각이었다면, 아마 혹독하게 대하고 돌려보냈을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은 내일 오전에 또다시 만나기로 예정되어 있다.
“정 사장은 최 부회장을 자주 만날 예정이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올 때까지 발톱을 숨기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
“아, 제가 그 점을 깜빡하고 있었네요.”
윙윙―
그때, 서동호 실장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재빨리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 실장, 어떻게 됐어?”
[아무 문제 없이 잘 마무리되었습니다.]
“특별한 이슈는 없었고?”
[최 부회장이 정 사장님을 얕잡아 봤다가 개망신을 당했습니다.]
예의범절이 몸에 밴 정명훈 사장이었기에 들려오는 말이 쉽게 믿어지지 않았다.
“신 실장,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얘기해 줄 수 있어?”
[자세한 얘기는 저녁 식사 장소에 오셔서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어디로 가면 되는데?”
[뿌요네 회장님의 저택으로 오시면 됩니다. 오실 때 정호영 씨도 데리고 와 주십시오.]
“알았어. 지금 출발할게.”
호영은 속으로 겨울을 원망했다.
뿌요네 회장의 저택은 한 번 가 봤기 때문에 자기 혼자 택시를 타고 이동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런데 개떡 같은 놈은 택시를 이용하지 말고 송훈석 회장과 같이 오라는 말을 똑똑히 남기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송훈석 회장의 옆자리에 앉아 같은 차를 타고 이동하고 있는 중이었다.
“호영 씨, 내가 어렵나 봐요?”
당연히 어렵지, 그럼 편하겠는가.
재계 순위 1위인 대한 그룹 회장과 같은 공간에 있는데, 불편하지 않을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겠는가.
차 안의 분위기를 좋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입에 발린 말을 꺼내는 것이 마땅하겠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거짓은 진실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네. 솔직히 어렵습니다.”
“하하, 솔직해서 좋군요.”
“칭찬이라고 받아들이겠습니다.”
“호영 씨는 한 부사장과 언제부터 친구가 됐나요?”
“아주 어릴 때부터 한 동네에서 같이 자랐습니다.”
“한 부사장과의 일화 중에서 재미있는 것이 없나요?”
“많이 있습니다. 한 부사장은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덩치가 컸는데, 어울리지 않게 열 살 때 오줌을 싼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