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화] 아군끼리 총질하는 것은 아닙니다
“임 회장님, 30억 달러에 송유관 건설 공사를 실행할 수 있는 비결을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정명훈 사장의 질문들 들은 임지태 회장은 숨이 컥 막혔다.
32억 달러에 공사를 수주해도 적자가 발생할 것이 확실한데, 30억 달러는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렇다고 자재를 누락하거나 불량 자재를 사용하겠다는 말은 죽어도 할 수 없었다.
다행히 자신의 곤란한 사정을 알고 있다는 듯 옆자리에 앉아 있는 성진수 실장이 메모지를 건네주었다.
얼른 메모지를 펴서 내용을 읽어 본 뒤, 태연한 표정을 가장하고 정명훈 사장의 질문에 대답했다.
“정 사장님, 아직 승자가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비결을 언급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정명훈 사장은 YCM건설 컨소시엄이 어떤 꼼수를 사용해서 송유관 건설공사를 실행할지 알고 물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의미 없는 질문을 던진 데에는 임지태 회장의 임기응변 능력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다행히 성진수 실장의 도움을 받아서 위기를 그럴듯하게 넘겼지만, 결정적인 위기는 아직 도래하지도 않았다.
“제가 그 점을 생각하지 못했네요. 방금 전의 질문은 없었던 것으로 해 주십시오.”
“하하, 알겠습니다.”
‘휴우∼’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임지태 회장이었다.
정명훈 사장은 그의 모습을 힐끗 쳐다본 후, 다른 질문을 던졌다.
“우간다 정부는 석유를 최대한 빨리 생산해서 수출하고 싶어 합니다. 이 점을 감안해서 대답해 주십시오. YCM 컨소시엄이 송유관 건설 공사를 수주한다고 가정할 경우에 공사 기간은 어느 정도로 예상하고 계십니까?”
임지태 회장은 리스롱 사장으로부터 CSCEC가 토탈 컨소시엄에 96개월을 제시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그들이 무려 8년 이라는 공사 기간을 제시한 이유는 그만큼 공사여건이 까다롭다는 뜻일 것이다.
객관적으로 따져 봐도 YCM건설의 시공 능력이 CSCEC보다 한 수 위였기 때문에 적어도 24개월 정도는 단축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자신만의 생각이었다.
그는 옆자리에 앉아 있는 최성진 부회장에게 천쥐펑 부회장에게 의견을 물어봐 달라고 부탁했다.
“처남 생각부터 먼저 말해 봐.”
“저는 넉넉잡고 72개월이면 충분할 것 같아요.”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봐.”
최성진 부회장은 오른쪽에 앉아 있는 천쥐펑 부회장에게 임지태 회장의 생각을 먼저 밝히고 물었다.
“…이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최 부회장님, 아프리카에서의 건설 공사는 착공 시기는 인간이, 완공 시기는 신이 결정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게다가 송유관 건설 공사는 두 나라의 정글 지대에 설치해야 하기 때문에 엄청난 난공사가 예상됩니다. 그래서 저는 CSCEC가 처음에 제안한 대로 96개월을 고수했으면 좋겠습니다.”
“공사 기간이 너무 늘어지는 게 아닐까요?”
“공사 기간 안에 공사를 끝내지 못해서 막대한 지체보상금을 부담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합니다.”
“아차, 제가 지체보상금을 생각하지 못했네요.”
“어차피 송유관 건설 공사는 저희가 수주하는 게 확실하니까, 배짱을 부려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최성진 부회장은 임지태 회장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을 건넸다.
“들었지?”
“네. 매형.”
짧게 대답한 그는 정명훈 사장의 질문에 대답했다.
“이것저것 고려해 본 결과, 96개월이 제일 무난한 것 같습니다.”
“임 회장님의 말씀 잘 들었습니다. 이제부터 대한건설의 최종 제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경청하겠습니다.”
“대한건설은 저희에게 공사비는 33억 달러, 공사 기간은 48개월을 제안했습니다.”
“와!”
순간 임지태 회장을 포함한 YCM건설 컨소시엄 사람들이 기쁨의 환호성을 질렀다.
자신들이 대한건설보다 3억 달러나 낮은 가격을 제시했기 때문에 이변이 없는 한 송유관 건설 공사를 수주할 수 있을 것이니까.
약간의 어수선한 시간이 흐른 후, 임지태 회장이 잔뜩 들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정 사장님, 저희가 송유관 건설 공사를 수주했다고 판단해도 됩니까?”
“미안하지만, YCM건설 컨소시엄은 송유관 건설 공사를 수주할 수 없습니다.”
“네? 이유가 뭡니까!”
웃음을 급히 거두고 임지태 회장이 큰 소리로 따져 물었다.
정명훈 사장은 그의 격앙된 반응을 충분히 예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YCM건설 컨소시엄이 송유관 건설 공사를 실행하면, 부실하게 공사할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납득할 수 있도록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해 보세요.”
“건설 공사의 이익을 10%라고 가정하겠습니다. 그렇다면, YCM건설 컨소시엄은 21억 달러에 송유관 건설 공사를 실행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어째서 21억 달러입니까?”
“저는 YCM건설 컨소시엄이 순수한 마음으로 우간다와 탄자니아에 6억 달러를 기부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곡을 찔러 오는 정명훈 사장의 말에 임지태 회장은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의 말대로 자신들은 편법을 사용해서 6억 달러를 만회할 생각이었으니까.
반면에 천쥐펑 부회장은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자신들이 편법을 사용하지 않고 송유관 건설 공사를 30억 달러에 실행하는 것은 무조건 불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도 안 되는 가격을 제시한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공사비가 400억 달러에 이르는 철도 건설 프로젝트를 수주하는 데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그런데 임지태 회장이 이를 눈치 채지 못하고 어물쩍거리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를 의지하고 있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될 것이 확실한 상황.
천쥐펑 부회장은 조용히 발언권을 요청하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정 사장님, 저희의 순수성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음… 좋습니다. YCM건설 컨소시엄이 두 나라에 기부한 6억 달러와 송유관 건설공사는 결부시키지 않겠습니다.”
천쥐펑 부회장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정명훈 사장과 대화를 계속 이어 나갔다.
“고맙습니다.”
“천 부회장님, 저는 건설 회사가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은 공사 기간을 최대한 단축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제 말이 맞습니까?”
“그 방법이 제일 확실하기는 합니다.”
“대한건설은 공사 기간을 48개월로 줄였음에도 불구하고, 33억 달러를 제안했습니다. 반면에 YCM건설 컨소시엄은 공사 기간 96개월에, 공사비는 30억 달러를 제안한 상태입니다. 공사 기간을 단축시키지 않고 이익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설계변경을 통해서 공사금액을 늘리거나, 자재를 누락하거나 불량자재를 사용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제 의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천쥐펑 부회장은 정명훈 사장이 자신들의 수법을 꿰뚫고 있다는 것에 진심으로 깜짝 놀랐다.
아무리 짱구를 굴려 봐도 난감한 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저희는 노림수가 있었기 때문에 적자를 감수하고 송유관 건설 공사를 수주할 생각이었습니다.”
“노림수가 무엇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탄자니아, 케냐, 우간다를 연결하는 철도 건설공사 프로젝트 입니다.”
겨울은 일찌감치 천쥐펑 부회장이 노림수로 철도 건설 공사 프로젝트를 꺼내들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에 대한 적절한 대책도 마련해 놓은 상황이었고.
당장 정명훈 사장에게 이 대책을 전해 줘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자기는 통역 신분이라고 고지된 상태였다.
게다가 자리도 제법 멀리 떨어져 있었고.
겨울은 조용히 회의실 밖으로 나가서 정명훈 사장에게 전화 걸었다.
[이 상무, 이 시간에 웬일인가요?]
“사장님, 노림수를 역이용할 수 있는 방법을 제가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일인지 빨리 얘기해 보세요.]
“먼저 천쥐펑 부회장이 기분 좋게…….”
겨울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 상무, 내가 지금 아주 중요한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까, 한두 시간 후에 다시 통화합시다.]
“네, 사장님.”
딸깍.
겨울과 통화를 끝낸 정명훈 사장은 천쥐펑 부회장에게 사과의 말부터 꺼냈다.
“천 부회장님, 갑자기 대화를 중단해서 미안합니다.”
“긴급한 일입니까?”
“그렇게 시급한 일은 아닙니다. 하던 얘기를 계속하겠습니다. YCM건설 컨소시엄의 통 큰 결정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만, 아쉽게도 송유관 건설 공사는 대한건설에 넘겨줘야 할 것 같습니다.”
“제가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철도 건설 프로젝트가 본격적으로 추진되려면 시간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그리고 YCM건설 컨소시엄이 철도 건설 프로젝트를 수주할 할 수 있다는 보장 또한 없기 때문입니다.”
천쥐펑 부회장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기는 정명훈 사장이 속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철도 건설 프로젝트를 꺼낸 것이다.
정말 다행스럽게도 그는 자신의 말을 믿고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이제 송유관 건설 공사에서 자연스럽게 발을 빼는 일만 남아 있는 상태.
그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미련을 보이는 척 연기를 해야 할 때였다.
“정 사장님, 철도 건설 프로젝트와 상관없이 저희에게 송유관 건설공사를 넘겨주시면 안 됩니까?”
“저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양심이 허락하지 않네요. 천 부회장님의 마음만 감사하게 받도록 하겠습니다.”
“할 수 없지요. 정말 아쉽지만, 정 사장님의 제안을 수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우간다는 YCM건설이 송유관 건설공사를 수주하기 바랐는데, 정말 아쉽게 됐습니다.”
“우리 탄자니아도 마찬가지 입장입니다.”
마사카 부통령과 문두야 부통령은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서 곧바로 말을 이어 붙였다.
“이번에는 순순히 물러나지만, 철도 건설 프로젝트는 저희가 반드시 수주하겠습니다.”
“저도 그렇게 되기를 빌겠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의 대화를 지켜보면서 최성진 부회장은 또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
송유관 건설 공사와 관련해서 H&J 컨설팅 측에서 인정한 협상 대표는 임지태 회장이다.
그런데 천쥐펑 부회장은 그런 사실을 망각하고 마치 본인이 협상 대표인양 마음대로 결론을 내려 버리고 있었다.
그의 버릇없는 행동을 더 이상 두고만 볼 수 없었다.
“천 부회장님, YCM건설 컨소시엄의 협상 대표는 임 회장이라는 점을 명심해 주십시오.”
천쥐펑 부회장은 최성진 부회장이 까칠하게 구는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자신과의 내기에서 10억 달러를 잃은 것에 대한 반감의 표현이리라.
‘에이, 속 좁은 인간.’
속으로 한마디 해 주고 그와 대화를 시작했다.
“최 부회장님, 아군끼리 총질하는 모습은 그다지 보기 좋지 않네요.”
“총질이라뇨? 나는 사실관계를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그럼 YCM건설은 30억 달러에 송유관 건설 공사를 실행할 수 있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사실입니까?”
이쯤이면 이제는 자존심 싸움이었다.
“못 할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알겠습니다. 우리 완커건설은 YCM건설과 컨소시엄 관계를 청산하도록 하겠습니다.”
최성진 부회장은 울고 싶은데 뺨을 때려 준 천쥐펑 부회장이 진심으로 고마웠다.
‘천 부회장, 방금 내뱉은 말 때문에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겁니다.’
그는 이를 바드득 갈며 천쥐펑 부회장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렇다면 완커건설은 잉가 3댐 건설 공사에서 발을 빼겠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설마 진심은 아니겠죠?”
천쥐펑 부회장은 자신의 멍청함에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잉가 3댐 건설 공사에서 발을 빼면, 콩고민주공화국에 기부한 10억 달러는 회수할 방법이 사라진다.
게다가 도로 확포장 공사를 수주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소지도 다분했고.
정말 내키지는 않지만, 최성진 부회장에게 사과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최 부회장님,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미안합니다.”
“이번 한 번만 눈감아 주겠습니다. 다음부터는 월권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마무리됐다고 판단한 정명훈 사장이 입을 열었다.
“임지태 회장님께 묻겠습니다. 송유관 건설 공사를 포기한 것이 맞습니까?”
“맞습니다. 철도 건설 프로젝트를 저희가 수주한다는 보장이 없는 상태에서 30억 달러에 송유관 건설 공사를 수주할 수는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결정하겠습니다.”
히든카드를 사용하지 않고 YCM건설 컨소시엄을 포기시키는 순간이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