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화] 지는 것은 지는 것이다
정명훈 사장은 한 병에 몇 십만 유로씩 하는 와인을 주문할 생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강수를 둔 이유는 최성진 부회장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지켜보기 위함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자기가 1938년산 페트리쉬 와인을 주문할 때 그의 표정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의 그릇이 간장 종지보다 작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었다.
원하는 것을 얻었으니, 장난은 이쯤에서 멈추는 것이 맞았다.
“그렇다면 할 수 없군요. 한 병에 5,000유로 정도 하는 와인들을 추천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대답하는 지배인의 표정에서 살짝 실망하는 모습이 읽혀졌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한 병에 몇 십만 유로씩 값이 나가는 와인을 마실 정도로 무모한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지배인이 뒤돌아가려는 순간, 천쥐펑 부회장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지배인, 1938년산 페트리쉬 와인보다 가격이 살짝 저렴하면서 보유하고 있는 양이 제법 많은 와인이 뭐가 있습니까?”
“1949년산 페트리쉬 와인이 있습니다.”
“우리들과 밖에 있는 사람들이 풍족하게 마실 수 있겠죠?”
“네, 물론입니다.”
“그 와인으로 서빙해 주세요.”
“손님, 정말 감사합니다.”
지배인이 정중하게 인사하고 룸 밖으로 퇴장했다.
천쥐펑 부회장의 의도가 궁금해진 사람들이 그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는 씨익 웃으며 말을 꺼냈다.
“오늘 점심 식사는 불청객인 제가 사도록 하겠습니다.”
“천 부회장님, 역시 화끈하시네요,”
“천 부회장님, 멋지십니다.”
뿌요네 회장을 필두로 룸에 있던 사람들이 그를 한껏 치켜세웠다.
“하하하,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반면에 최성진 부회장은 기분이 급 다운됐다.
자기가 점심을 사기 싫어서 천쥐펑 부회장이 대신 떠안은 것 같은 모양새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화가 치밀어 올라서 한마디 하려는 순간, 임지태 회장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매형, 지는 것이 이기는 겁니다.”
“처남은 기분 안 나빠?”
“당연히 나쁘지만, 이미 게임은 끝난 상황입니다.”
“게임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얘기해 봐.”
“이 레스토랑의 매상을 많이 올려 주는 방법밖에 더 있겠습니까?”
즉, 1949년산 페트리쉬 와인을 최대한 많이 마시자는 말이었다.
“그러다 취하면 어떻게 하려고?”
“그렇게 되면 저희만 취하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취할 겁니다.”
“미팅 시간을 연기하자는 뜻인가?”
“네, 매형.”
“이제 자세한 방법을 얘기해 봐.”
“우리나라의 건배 문화를 이들에게 전파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아무리 천쥐펑 부회장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이 방법은 썩 내키지 않았다.
한 병에 4억 원이 넘어가는 와인으로 건배하자고 제안하면, 다들 미친놈 취급하지 않겠는가.
“처남, 건배는 없던 것으로 하자고.”
“매형, 저들이 오해하지 않게 제가 적당히 처신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계세요.”
“마음대로 해 봐.”
잠시 후, 지배인이 웨이터들과 함께 1949년산 페트리쉬 와인을 서빙하기 위해서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임지태 회장이 입을 열었다.
“대한민국에는 본격적으로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건배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저희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건배 한번 하실까요?”
정명훈 사장은 임지태 회장의 꼼수를 단박에 알아챘다.
천쥐펑 부회장에게 복수하고 싶은 마음에 이런 제안을 한 것이리라.
적을 분열시켜서 나쁠 것은 없었기에 그의 의도에 적극 호응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우리나라에 첫잔은 무조건 비우는 문화가 있습니다.”
문두야 부통령 또한 바보가 아니기 때문에 임지태 회장과 정명훈 사장의 의도를 단숨에 알아챘다.
‘흐흐흐. 천 부회장, 어디 한번 죽어 봐라.’
재빨리 생각을 구체화하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한국에는 잔을 가득 채워서 술을 마시는 문화가 있다면서요?”
“알고 계셨습니까?”
“그럼요. 우리 잔을 가득 채워서 거창하게 건배 한번 하십시다.”
“네, 좋습니다.”
“임 회장님이 선창하십시오.”
사실 임지태 회장은 이렇게까지 크게 판을 키울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얘기치 않게 정명훈 사장과 문두야 부통령이 가세함으로 인해서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판이 커져 버렸다.
칼을 뽑았으니 이제는 썩은 무라도 잘라야 하는 상황.
그는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문두야 부통령이 넘겨주는 공을 건네받았다.
“지배인, 웨이터들한테 와인 잔에 와인을 가득 따르라고 지시해 주세요.”
“손님, 이 와인은 상당히 고가의 와인입니다만…….”
“설마 우리가 와인 값을 지불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고 있는 것은 아니겠죠?”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그런 점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그때, 뿌요네 회장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지배인, 내가 누구인지 알고 있습니까?”
“뿌요네 회장님이십니다.”
“저기 앉아 계신 손님께서 지불하지 못하면, 나한테 청구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웨이터들이 잔에 와인을 가득 채우자, 임지태 회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잔을 들어 주십시오.”
“제가 선창하겠습니다. 송유관 건설공사 수주 성공을 위하여!”
“위하여!”
천취펑 부회장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말문이 턱 막혔다.
방금 전의 건배로 인해서 300만 유로에 가까운 돈이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것에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뿌요네 회장이 슬슬 발동을 걸기 시작했다.
“지배인, 잔에 와인이 비었습니다.”
“아차, 죄송합니다. 곧바로 잔을 채워 드리겠습니다.”
“거듭 얘기하지만, 식사비용은 걱정하지 마세요.”
“그야 물론입니다.”
결국 천쥐펑 부회장은 눈물을 머금고 엄청난 액수의 비용을 부담했다.
게다가 모두들 술에 취했기 때문에 미팅 시간이 두 시간 늦춰지는 해프닝도 발생했다.
* * *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호텔로 돌아온 천쥐펑 부회장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으며 리스롱 사장에게 물었다.
“리 사장, 임 회장이 끼어들어 이렇게 무모한 행동을 벌인 이유가 뭘까?”
“임 회장이 저희한테 단단히 화난 것 같습니다.”
“우리한테 화날 게 뭐가 있는데?”
“저희의 꼼수를 눈치챈 게 아닐까요?”
천쥐펑 부회장은 그럴 가능성이 별로 없다고 판단했다.
부투야 실장에게 20억 달러를 기부하면서 며칠 동안 언급하지 않기로 합의했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합의한 내용이 유출돼서 임지태 회장의 귀에 들어갔다면, 그때는 거짓말쟁이로 몰리는 대형사고가 발생한다.
그 생각을 하니 갑자기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그는 재빨리 핸드폰을 들어서 부투야 실장에게 전화 걸었다.
[네, 천 부회장님.]
“부투야 실장님, 긴급하게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혹시 오늘 오전에 임지태 회장에게 전화 받은 적이 있습니까?”
[임 회장이 아니라, 최 부회장한테 전화 받은 적은 있습니다.]
“최 부회장과 어떤 내용으로 통화하셨습니까?”
[모두 말씀드릴 수는 없고, 도로 확포장 공사와 관련해서 완커건설이 자국에 얼마를 기부했는지 알려 달라고 했습니다.]
“뭐라고 대답하셨습니까?”
[천 부회장님과 합의한 내용을 그대로 전해 줬습니다. 그런데 기부금과 관련해서 제가 모르는 일이라도 벌어진 겁니까?]
“아, 아무 일도 없습니다.”
제 발 저린 천쥐펑 부회장이 살짝 말을 더듬으며 부정했다.
[천 부회장님, 송유관 건설공사를 수주하기를 빌겠습니다.]
“하하하, 고맙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딸깍.
천쥐펑 부회장이 전화를 끊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리스롱 사장이 급하게 물어 왔다.
“부 회장님, 부투야 실장이 뭐라고 했습니까?”
“최 부회장이 전화를 했는데, 대답하지 않았다더군.”
“확실한 것은 최 부회장이 무언가 냄새를 맡았다는 얘기네요?”
“아마도 그런 것 같아.”
“최 부회장이 추궁해 오면 뭐라고 핑계를 댈까요?”
“40억 달러를 기부했다고 얘기하면 되잖아.”
“그러면 일이 더 커지잖아요.”
“커지기는 뭐가 커져. 콩고민주공화국에 20억 달러를 추가로 기부하면 되지.”
리스롱 사장은 천쥐펑 부회장의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거짓말을 은폐하기 위해서 20억 달러를 허공으로 날릴 생각을 하다니.
최성진 부회장에게 미안하다고 한마디 하면 오해를 충분히 해소할 수 있는데도.
“부회장님, 콩고민주공화국에 20억 달러를 추가로 기부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리 사장, 내가 충동적으로 이런 결정을 내린 것 같아?”
‘그럼 아닙니까?’
이 말이 입속에 머물렀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계획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리 사장은 최 부회장이 어떤 인간인지 모르고 있는 것 같은데, 엄청나게 독한 인간이야. 만약에 그 인간이 작정하고 고춧가루를 뿌려 대면, 우리는 도로 확포장 공사를 절대로 수주할 수 없어.”
“에이, 설마요.”
“예를 들어서 그 인간이 우리 정보를 대한 그룹 송 회장한테 제공하면 어떤 상황이 벌어질 것 같은가?”
리스롱 사장은 온몸에 솜털이 곤두섰다.
최성진 부회장이 대한 그룹 소속이라는 사실을 깜박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에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상당히 곤란한 상황에 처할 것만은 확실했다.
20억 달러를 허공에 날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추가로 20억 달러를 기부하는 것이 현명할 수도 있었다.
어차피 40억 달러는 충분히 회수할 방법이 있으니까.
“부회장님의 말씀이 맞는 것 같네요.”
“최 부회장이 쳐들어오기 전에 빨리 20억 달러를 송금하자고.”
“네, 부회장님.”
리스롱 사장은 재빨리 노트북을 펴서 천쥐펑 부회장에게 건네주었다.
천쥐펑 부회장은 주저하지 않고 20억 달러를 콩고민주공화국 계좌로 송금하고, 부투야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천 부회장님, 또 무슨 일이 생겼습니까?]
“다름이 아니라, 찜찜한 것이 있어서 해소하려고 연락 드렸습니다.”
[찜찜한 일이라니요?]
“저희는 애초부터 콩고민주공화국에 40억 달러를 기부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천 부회장님, 그 문제는 어제 마무리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실장님께서는 그렇게 생각하실지 몰라도 저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조금 전에 콩고민주공화국 정부 계좌로 20억 달러를 추가로 송금했습니다.”
[네?!]
부투야 실장의 경악에 가까운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서 들려왔다.
“실장님, 허락도 없이 20억 달러를 기부해서 미안합니다.”
[천 부회장님, 지금부터 통화 내용을 녹음하겠습니다. 20억 달러를 기부한 건에 대해서 완커건설의 입장을 밝혀 주십시오.]
“저희 완커건설은 킨샤사와 루붐바시를 연결하는 도로 확포장 공사를 수주하지 못해도 콩고민주공화국에 추가로 기부한 20억 달러에 대해서 반환 요구를 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됐습니까?”
[바통고 대통령님께 완커건설에 감사장을 보내 달라고 적극 요청하겠습니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딩동.
때마침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부투야 실장님, 손님이 오신 것 같으니까 나중에 통화하겠습니다.”
[다시 한번 완커건설의 호의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천쥐펑 부회장이 전화를 끊기를 기다렸다가 리스롱 사장이 객실 출입문을 열었다.
예상한 대로 최성진 부회장 일행이 기세등등한 표정으로 문 앞에 서 있었다.
“어서 오십시오.”
최성진 부회장은 비어 있는 소파에 앉자마자 작정한 듯 말을 쏟아 냈다.
“천 부회장님, 정말 실망했습니다.”
“최 부회장님, 뜬금없이 무슨 말씀하시는 겁니까?”
“도로 확포장 공사와 관련해서 콩고민주공화국에 얼마를 기부했는지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어디서 어떤 소문을 듣고 오셨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정확하게 40억 달러를 기부했습니다.”
“만약에 아니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송유관 건설공사, 잉가 3댐 건설공사, 도로 확포장 건설공사를 YCM건설에 넘겨드리겠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사실이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최성진 부회장은 겁이 덜컥 났다.
천쥐펑 부회장은 승리가 확실하지 않은 내기는 걸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으니까.
하지만 처음으로 되돌리기에는 이미 때는 늦어 버렸다.
“저희도 똑같은 조치를 취해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형평성이 어긋나니까, 20억 달러를 저희 회사에 기부해 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천 부회장님이 원하는 대로 해 드리겠습니다.”
“이제 누구 말이 맞는지 검증해 볼까요?”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