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6화] 미련을 없애는 방법
다음 날 오전.
최성진 부회장은 일행들을 자신의 숙소로 불러들여서 대책 회의를 시작했다.
“임 회장, 알아봤나?”
임지태 회장은 어젯밤의 술자리에서의 일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천쥐펑 부회장은 잔뜩 술에 취한 목소리로 킨샤사와 루붐바시를 연결하는 도로 확포장 공사를 완커건설이 수주했다고 떠벌렸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콩고민주공화국에 기부한 돈의 일부를 YCM건설이 부담한다면, 도로 확포장 공사를 나눠주겠다는 제안을 해 왔다.
YCM건설은 여력이 부족해서 도로 확포장 공사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때문에 그의 제안을 면전에서 거부할 수는 없어서 오늘 오전까지 답변해 주겠다고 미뤄 놓았다.
문제는 최성진 부회장이 도로 확포장 공사에 여전히 미련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할 수 없이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YCM건설의 김종철 사장에게 도로 확포장 공사에 참여할 수 있는지를 물었고, 조금 전에 최종 연락을 받았다.
“YCM건설의 김 사장의 말로는 도저히 여력이 안 된답니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도로 확포장 공사는 잊어버리자고.”
박철헌 사장은 최성진 부회장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았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어떻게든 도로 확포장 공사에 참여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천쥐펑 부회장도 최성진 부회장의 욕심을 알아보고 이런 제안을 한 것이리라.
그의 미련을 완전히 없애 버리는 것이 먼저였다.
“부회장님, 저희가 도로 확포장 공사에 참여하면, 천쥐펑 부회장에게 뒤통수를 맞을 수 있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천 부회장은 콩고민주공화국에 20억 달러를 기부해 놓고, 저희한테는 40억 달러를 기부했다고 거짓말했습니다.”
“그게 진짜야?”
“네. 설영석 이사가 오늘 아침에 전화로 알려 주었습니다.”
소파에서 일어난 최성진 부회장은 창가로 이동해서 팔짱을 끼고 멀리 보이는 에펠탑을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의 생각을 방해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었기에 소파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눈치껏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이윽고 생각을 끝낸 최성진 부회장은 핸드폰을 들어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최 부회장님께서 이 시간에 어쩐 일이십니까?]
“부투야 실장님, 궁금한 것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네, 말씀해 보세요.]
“오늘 오전에 H&J 컨설팅과 계약 체결할 공사가 잉가 3댐 건설공사 하나뿐입니까?”
[아닙니다. 킨샤사와 루붐바시를 연결하는 도로 확포장 공사까지 계약을 체결할 예정입니다.]
“오늘 하루는 바쁘시겠네요?”
[이른 아침부터 계약을 서둘러서 오전 중에는 계약을 완료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오늘 오후에 H&J 컨설팅의 정명훈 사장을 만나 볼 수 있겠네요?”
[최 부회장님, 아직 연락받지 못하셨습니까?]
“연락이라뇨?”
[오늘 오후에 토탈 본사에서 송유관 건설공사 건과 관련한 미팅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최성진 부회장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우간다 유전 개발과 관련해서 토탈은 66.7%를, 대한 그룹은 33.3%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송훈석 회장이 미팅 장소에 모습을 드러낼 가능성은 100%.
‘그곳에서 송훈석 회장과 마주치기라도 한다면…….’
등줄기를 따라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그는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고 부투야 실장과 통화를 이어 나갔다.
“아, 그렇군요.”
[아차, 송유관 건설공사와 관련해서 대한 그룹은 이해 당사자이기 때문에 송 회장님은 참석하지 않기로 했답니다.]
‘휴우… 다행이다.’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최성진 부회장이었다.
그는 흔들리던 정신을 수습한 뒤, 하고 싶은 질문을 꺼내 들었다.
“부투야 실장님, 도로 확포장 공사와 관련해서 궁금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완커건설이 콩고민주공화국에 얼마를 기부했는지 알려 주실 수 있습니까?”
[기부 금액에 대해서는 완커건설 측과 며칠 동안 언급하지 않기로 합의했습니다. 이해 부탁드립니다.]
천쥐펑 부회장의 꼼수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기분이 상당히 나빴지만, 부투야 실장에게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최 부회장님,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될까요?]
“네. 말씀해 보십시오.”
[H&J 컨설팅과 YCM건설 컨소시엄 사이의 잉가 3댐 건설공사 계약이 체결될 때까지 이 호텔을 계속 사용했으면 좋겠습니다.]
그의 말에 최성진 부회장은 저조하던 기분이 한순간에 솟구치는 것을 느꼈다.
부투야 실장이 잉가 3댐 건설공사를 자신들에게 줄 의향임을 은연 중에 내비친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부투야 실장님께서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편의를 봐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송유관 건설공사 계약을 마무리 잘하시고, 내일 오전에 뵙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딸깍.
전화를 끊은 최성진 부회장은 미소를 지으며 부투야 실장과의 통화한 내용을 알렸다.
“…오늘 오후부터 바빠질 예정이니까, 참고하고 있어.”
“네, 부회장님.”
“그나저나… 기부금은 누구 말이 맞는 것일까?”
“설 이사는 마히무 장관과 왈라카 장관이 화장실에서 나누는 대화를 들었답니다.”
“에이… 양아치보다 못한 놈.”
최성진 부회장이 누구를 향해 욕설을 내뱉었는지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크리용 호텔 회의실.
부투야 실장이 전화를 끊자, 마히무 장관이 질문을 던져왔다.
“실장님, 기부금 얘기는 뭡니까?”
“천쥐펑 부회장이 우리나라에 기부한 금액을 YCM 그룹 측에 다르게 얘기한 것 같습니다.”
기부금 얘기가 흘러나오자, 장대산 부사장이 바로 대화에 끼어들었다.
“기부금과 관련한 자세한 전말을 제가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얘기해 보세요.”
“천쥐펑 부회장은 콩고민주공화국에 기부한 금액을 조금이라도 건져 볼 생각으로 최성진 부회장에게 도로 확포장 공사에 참여해 달라고 권유했습니다. 그러면서 기부 금액을 40억 달러로 뻥튀기 한 것입니다.”
“언젠가는 알려지지 않을까요?”
“천 부회장은 콩고민주공화국 측에서 계약 체결을 끝낼 때까지 비밀을 지켜 주면 될 것으로 판단한 모양입니다.”
“YCM건설은 도로 확포장 공사에 참여한답니까?”
“현재까지는 여력이 부족해서 참여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한 상태입니다만, 오늘 오후 이후로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습니다.”
겨울은 장대산 부사장의 생각을 단숨에 읽었다.
송유관 건설공사 수주가 불가능해질 경우, YCM건설은 그만큼 여력이 발생한다.
그 남는 여력을 도로 확포장 공사에 집중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YCM건설과 완커건설 사이의 문제였기 때문에 자신들이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부투야 실장과 장대산 부사장의 대화는 계속됐다.
“장 부사장님, YCM건설 측에 정확한 기부 금액을 알려 줘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미 최 부회장 귀에 들어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 놓은 상황입니다.”
“그나저나 설영석 이사가 천 부회장 등의 대화 내용을 녹음했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지금 편집하고 있는 중입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정명훈 사장이 발언권을 요청했다.
“부투야 실장님, 음성 파일은 가급적 사용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해법이 있다는 말씀이겠죠?”
“네. 내일 눈으로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이제 계약을 서두를까요?”
“좋습니다.”
콩고민주공화국과 H&J 컨설팅 간의 잉가 3댐 공사와 도로 확포장 공사 계약 체결은 사전 조율을 끝냈기 때문에 일사천리로 마무리되었다.
계약을 완료한 겨울 일행은 마사카 부통령, 문두야 부통령, 뿌요네 회장과 점심 식사를 위해서 크리용 호텔을 나섰다.
차에 오르자마자, 겨울의 뒷자리에 앉아 있던 하도진 실장이 넉살 좋게 한마디 내뱉었다.
“사장님, 330억 달러나 되는 엄청난 계약을 반나절 만에 완료했다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도 없겠지.”
“혹시 그런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고생한 사람들한테 성과급은 없습니까?”
“하 이사가 남우영 인사팀장에게 전화해 놓으면 되겠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윙윙―
그때, 정명훈 사장의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뿌요네 회장이 걸어온 전화였다.
“네. 뿌요네 회장님.”
[정 사장님, 식사 장소로 이동하고 계신 중입니까?]
“네. 20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급하게 상의드릴 것이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
“네, 말씀하십시오.”
[조금 전에 최성진 부회장이 점심 식사를 같이하자고 제안해 왔습니다.]
정명훈 사장은 최성진 부회장의 의도가 무엇인지 빤히 들여다보였다.
자신들에게 어떻게든 호의를 베풀어서 송유관 건설공사를 수주하는 데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가 허세 떠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가 있을 터였다.
“뿌요네 회장님, 최 부회장이 점심을 사겠다고 제안해 왔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회장님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번 기회에 최 부회장의 기를 죽여 놓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샹젤리제 거리에 위치한 레스토랑.
겨울 일행의 뒤를 이어, 뿌요네 회장, 마사카 부통령, 문두야 부통령 일행이 차례로 들어왔다.
뿌요네 회장이 비어 있는 자리에 앉으며 정명훈 사장에게 말을 걸었다.
“최 부회장은 15분 정도 후에 도착할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때, 겨울이 재빨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뿌요네 회장님, 이곳보다 더 넓은 룸은 없습니까?”
“무슨 일 때문에 그럽니까?”
“최성진 부회장이 천쥐펑 부회장과 리스롱 사장을 데리고 올 것 같아서 그럽니다.”
“그 사람들이 왜 옵니까?”
“혹시 문두야 부통령님과 마사카 부통령님께 이유를 듣지 못하셨습니까?”
“네. 듣지 못했습니다.”
“최성진 부회장이 우간다와 탄자니아에 기부한 6억 달러를 조금이라도 아껴 볼 생각으로 송유관 건설공사 일부를 완커건설에 넘겨주기로 약속한 상태입니다.”
“누구 마음대로요!”
예상한 대로 뿌요네 회장이 강한 불쾌감을 드러냈다.
“뿌요네 회장님, 하늘이 두 쪽 나는 한이 있더라도 송유관 건설공사는 그들이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아차, 내가 그 점을 깜빡했네요.”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자리부터 옮겨야 할 것 같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움티카 비서실장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다행히도 큼지막한 룸이 하나 남아 있었다.
그곳으로 이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최성진 부회장이 예상했던 일행들을 데리고 레스토랑으로 들어왔다.
다소 길던 상견례 시간이 끝나자마자, 최성진 부회장이 기분 나쁘다는 표정을 감추지 않고 입을 열었다.
“정 사장, 실무자들은 밖에서 식사하는 게 어떨까요?”
“안 그래도 그렇게 조치를 취한 상태입니다.”
“저기 앉아 있는 두 사람은 통역입니까?”
정명훈 사장은 은근히 기분이 상했다.
H&J 컨설팅의 최대 주주와 2대 주주를 한낱 통역으로 치부하다니.
한마디 쏘아붙이려고 입을 열려는 순간, 겨울이 은밀하게 신호를 보내왔다.
즉, 그들의 신분을 밝히지 말라는 뜻이었다.
그는 겨울에게 알았다는 신호를 보내 주고 최성진 부회장의 질문에 대답했다.
“잘 알고 계시네요.”
“뭐, 그렇다면 할 수 없군요. 점심 식사를 내가 샀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식사비용이 상당히 많이 나올 텐데, 상관없으십니까?”
“나와 봐야 얼마나 나오겠습니까.”
“주문은 저희가 해도 되겠지요?”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호출을 받고 온 지배인에게 정명훈 사장은 작심한 듯 주문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저희와 밖에 있는 일행들한테 이 레스토랑에서 제일 자신 있는 스테이크를 서빙해 주세요.”
“네, 손님. 그리고 와인은 어떻게 할까요?”
“이 레스토랑에서 제일 비싼 와인이 무엇이 있습니까?”
“1938년산 페트리쉬 와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곳에는 2인당 한 병, 밖에 일행들에게는 4인당 한 병씩 서빙해 주세요.”
페트리쉬 와인의 가격이 얼마나 비싼지 알고 있는 최성진 부회장은 너무 놀라 목이 컥 막혔다.
‘1965년산이 10만 유로였으니까… 1938년산은 도대체 얼마야? 한 병당 50만 유로 정도한다고 가정하면… 헉! 와인 값만 100억이 넘는다고?’
정명훈 사장의 주문을 당장 말리고 싶었지만, 내뱉은 말이 있어서 속만 끙끙 앓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죽으라는 법은 없는지 지배인이 가뭄에 단비와 같은 말을 내뱉었다.
“손님, 1938년산 페트리쉬 와인은 한 병밖에 없습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