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거짓말의 향연
최성진 부회장의 숙소.
문두야 부통령의 숙소로 출발하기 직전에 최성진 부회장은 임지태 회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매형, 저하고 성진수 실장은 계단으로 올라가지 않아도 되잖아요.”
“처남을 우리 회사 직원들이 알아보면 어떻게 할 거야?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어.”
임지태 회장은 대한 그룹 직원들이 변장한 자신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할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최성진 부회장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의견을 따르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성진수 비서실장의 상황은 자신과 달랐다.
“매형, 성 실장은 계단 이용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왜!”
예상한 대로 최성진 부회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자기주장이 상당히 강한 최성진 부회장은 따르는 사람들이 지시를 어기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임지태 회장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조심하려고 노력하고 있었으나,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다.
“성 실장은 얼마 전에 다리를 수술해서 컨디션이 완전히 회복된 상태가 아닙니다.”
“알았어. 그렇게 해. 준비됐으면 출발하자고.”
“네.”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그의 뒤를 따르는 임지태 회장이었다.
* * *
갈색 페도라를 눌러쓰고 중년 신사의 모습으로 변장한 성진수 실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발걸음을 옮겼다.
시간은 8시 45분이 넘어가고 있었으나, 해가 진 지 겨우 10분 정도 지났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츠 파리 호텔 로비에는 개미 새끼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텅텅 비어 있었다.
혹시나 싶어서 호텔 커피숍으로 시선을 돌렸으나 역시였다.
“금요일 저녁인데, 이렇게 손님들이 없다고?”
그는 잔뜩 의문을 품은 채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아직 여름도 아닌데, 웬 땀을 이렇게 흘리시는 겁니까?”
객실 문을 열어 준 칼리마니 실장은 안면이 있는 박철헌 사장에게 질문부터 던졌다.
“안에 들어가서 말씀드리면 안 되겠습니까?”
박철헌 사장은 주위를 둘러보며 급하게 대답했다.
칼리마니 실장은 그들의 다급한 심정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문을 활짝 열어 주었다.
“얼른 들어오세요.”
칼리마니 실장과 박철헌 사장의 소개로 서로 인사를 끝내자, 무세베니 실장은 냉장고에서 시원한 생수병을 꺼내서 그들 앞에 놓았다.
생수병을 받아 든 그들은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순식간에 생수를 비워 버렸다.
그들의 모습을 흥미로운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던 문두야 부통령은 궁금함을 담은 얼굴로 물었다.
“임 회장님, 왜 이렇게 땀을 흘리시는 겁니까?”
임지태 회장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다 궁색한 변명을 내놓았다.
“운동이 부족해서 일부러 계단을 통해서 올라왔더니 이렇게 됐습니다.”
문두야 부통령은 살짝 실망했다.
YCM 그룹을 이끌어 가는 총수라면 제법 그럴싸한 변명거리라도 늘어놓아야 하지 않겠는가.
“저희는 임 회장님이 송훈석 회장과 어떤 사이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굳이 거짓말하실 필요 없습니다.”
“험험, 미안합니다.”
거짓말을 들켰음을 깨달은 임지태 회장은 헛기침을 내뱉으며 얼굴을 붉혔다.
“제가 임 회장님이 불편함을 겪지 말라고, 호텔 측에 20분 정도를 로비 및 커피숍을 비워 달라고 요청해 놓은 사실은 알고 계셨습니까?”
“네? 호텔 측에서 부통령님의 요청을 들어줬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임지태 회장은 문두야 부통령의 말을 믿지 않았다.
프랑스인들은 부당한 지시를 잘 따르지 않는, 특유의 국민성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호텔 측에서 투숙객들의 불만을 살 수 있는 조치를 취했을 리 만무했다.
그런데도 문두야 부통령은 호텔 측이 그의 요청을 들어주었다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는 꼴이라니.
평소라면 한마디를 해 주고도 남았지만, 지금은 철저한 을의 신세라서 넘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아, 그렇군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성진수 실장은 로비와 커피숍에 손님들이 없던 이유를 이제야 확실하게 깨달았다.
두 사람의 대화에 참여할 자격이 없었지만, 잔뜩 생색을 내고 있는 문두야 부통령의 엉덩이를 긁어 줄 필요가 있었다.
“회장님, 문두야 부통령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래요?”
“네. 제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했습니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괜히 헛수고 했네요.”
“그러게 말입니다.”
문두야 부통령을 한껏 띄워 줬다 생각한 성진수 실장은 조용히 2선으로 물러났다.
임지태 회장도 슬쩍 잘했다고 고개를 끄덕여 주곤 문두야 부통령에게 말했다.
“문두야 부통령님, 호의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희가 베푼 호의를 누리지 못했으니까, 감사 인사는 받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반면, 이들의 대화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최성진 부회장은 자존심이 왕창 상했다.
한국 측의 대표는 자기인데, 문두야 부통령은 눈길도 주지 않고 임지태 회장을 대표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가 대표라고 알려 주고 대화의 주도권을 찾아와야 하지만, 마땅한 방법이 없다는 것에 문제가 있었다.
방법을 찾기 위해서 속으로 끙끙대고 있는 도중에도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됐다.
“임 회장님, 거추장스러운 뿔테 안경과 콧수염을 제거하는 게 어떨까요?”
“저도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한편, 박철헌 사장은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심기가 매우 불편한 듯, 최성진 부회장의 표정이 붉으락푸르락 변해 가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이런 표정을 짓고 있는 이유는 보나마나 빤했다.
문두야 부통령이 그를 무시하고 임지태 회장에게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상태가 계속 유지되면, 나중에 어떤 불상사가 발생할지 모르는 일.
조용히 발언권을 요청하고 입을 열었다.
“문두야 부통령님, 최 부회장님은 임 회장님의 매형입니다.”
문두야 부통령도 당연히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지태 회장 중심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유는 최성진 부회장의 염장을 질러 주기 위함이었다.
자신의 전략이 적중했는지 최성진 부회장의 표정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쉽게 그를 한국 측의 대표로 인정해 줄 마음은 없었다.
“그래서요?”
“…죄송스런 말씀이지만, 최 부회장님과 대화를 나누시면 어떻겠습니까?”
“박 사장님, 오늘 미팅이 성사된 이유를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박철헌 사장은 내뱉은 말이 부메랑으로 돌아오리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다.
최성진 부회장을 통해서 임지태 회장을 두 명의 부통령에게 소개시켜 주기 위함이라고 무세베니 실장에게 언질해 놓았으니까.
이미 상견례를 끝냈기 때문에 문두야 부통령은 더 이상 최성진 부회장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판단하고, 임지태 회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서면 죽도 밥도 안 되는 상황.
두뇌를 극한으로 회전시켜서 그럴듯한 대답거리를 생각해 내고, 문두야 부통령의 질문에 대답했다.
“YCM 그룹이 탄자니아와 우간다에 진출하기 위한 목적으로 미팅이 성사됐습니다.”
“그런데 제가 임 회장님과 직접 대화를 나누는 것이 뭐가 문제라는 겁니까?”
“물론 부통령님의 말씀이 맞습니다만, YCM 그룹이 두 나라에 진출하기 위한 묘안을 최 부회장님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두야 부통령은 묘안이 무엇인지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모른 척하고 물었다.
“어떤 묘안입니까?”
“최 부회장님께 직접 들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합시다.”
박철헌 사장과 대화를 종료한 문두야 부통령은 최성진 부회장에게 시선을 옮기고 말을 걸었다.
“최 부회장님, 어떤 묘안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대화의 주도권을 찾아오는 데 성공한 최성진 부회장은 박철헌 사장에게 고맙다는 뜻으로 은밀하게 신호를 보내주고,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문두야 부통령님, 제가 묘안을 가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이곳에 도착한 지 이제 10분 정도 지났을 뿐입니다.”
“저희하고 다른 주제로 대화를 나눴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사실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어떤 내용인지 말씀해 보세요.”
“마사카 부통령님께 여쭤볼 게 하나 있습니다.”
“저한테요?”
마사카 부통령이 손가락으로 자기를 가리키며 자연스럽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CNOOC가 보유하고 있던 우간다 유전의 지분을 토탈에 매각한 진짜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질문을 받은 마사카 부통령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입을 열었다.
“제가 대답해 주기 전에 거꾸로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네. 얼마든지요.”
“최 부회장님께서 그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이유가 뭡니까?”
“사실은 몇 년 전에 우간다 유전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던 영국의 석유 회사를 CNOOC 측에 소개시켜 준 사람이 저였습니다.”
“그렇다면 CNOOC 측에 이유를 물어보면 될 텐데요?”
“CNOOC의 장징궈 사장은 ‘유간다 유전의 경제성이 현저히 떨어져서’라고 대답했습니다.”
마사카 부통령은 사실 그대로를 밝힐까하다가 만약을 대비해서 일부만 알려 주기로 결정했다.
“CNOOC의 텐궈리 회장이 우리나라와 탄자니아에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어떤 실수인지 알려 주실 수 없습니까?”
“우리나라와 탄자니아의 국익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사실 최성진 부회장은 마사카 부통령이 이유를 알려 주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유를 물어본 이유는 혹시나 하는 마음 때문이다.
“제가 괜한 질문을 던진 것 같네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윙―
그때, 무세베니 실장에게 문자가 하나 수신되었다.
겨울이 보내온 문자였다.
얼른 고맙다는 내용으로 답장을 보내 주고, 마사카 부통령에게 귓속말로 문자 내용을 보고했다.
“부통령님, 박 사장이 프랑스에 온 목적은 CNOOC가 보유하고 있던 지분을 인수하기 위함이었답니다.”
“알았어요.”
무세베니 실장과 짧게 대화를 끝마친 마사카 부통령은 최성진 부회장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최 부회장님, CNOOC가 보유하고 있던 지분을 인수할 생각이었습니까?”
최성진 부회장은 그 일만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불끈불끈 치솟아 올랐지만, 이미 게임 끝난 일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대한 그룹에서 인수한 것으로 만족하겠습니다.”
“설마 CNOOC가 보유한 지분을 최 부회장님이 개인적으로 인수할 생각은 아니었겠지요?”
‘당연히 내가 인수하려고 했습니다. 됐습니까?’
이 말이 입속에 맴돌았지만, 차마 내뱉을 수는 없었다.
“그럼요. YCM 그룹에서 인수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사카 부통령은 최성진 부회장이 거짓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박에 알아챘다.
당사자인 임지태 회장이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표정으로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지태 회장이 어떻게 반응하는지 확인하기 위해 기습적으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임 회장님, 저한테 부탁했더라면 지분을 인수할 수 있었을 텐데, 상당히 안타깝게 됐네요.”
임지태 회장은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방금 전에 두 사람이 나눈 대화 내용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모른 척하고 있으면 초대형 사고가 발생할 것은 자명한 사실.
그런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 거짓말을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YCM 그룹은 CNOOC가 반납한 지분을 얼마에 인수할 예정이었습니까?”
임지태 회장은 숨이 턱 막혀 왔다.
마사카 부통령의 질문에 대답해야 하지만, 알고 있는 것이 전무한 상태.
그렇다고 이제 와서 모르고 있었다고 이실직고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은밀하게 최성진 부회장에게 신호를 보냈다.
임지태 회장의 신호를 받은 최성진 부회장도 난감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실 자기는 20억 달러 플러스알파에 CNOOC가 보유한 지분을 인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송훈석 회장이 토탈 측으로부터 얼마에 지분을 인수했는지 모르고 있다는 것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었다.
‘3년 전에 CNOOC가 영국의 석유 회사로부터 15억 달러에 매입했으니까, 그동안에 투입된 비용을 감안하면 토탈이 20억 달러 정도에 매입했을 것이라는 말이지. 토탈이 대한 그룹에 얼마의 마진을 붙였는가가 관건인데…….’
이런저런 생각 끝에 결론을 내리고, 임지태 회장에게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다.
애초에 가격을 알지 못하던 임지태 회장은 순간적으로 갈등에 휩싸였다.
‘음…손가락 세 개라? 3억 달러와 30억 달러 중에 하나일 텐데. 과연 짠돌이 매형이 30억 달러를 질렀겠어?’
임지태 회장은 마음속으로 결론 내리고, 마사카 부통령의 질문에 대답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