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그녀의 복잡한 마음
“준하 씨, 무슨 일이야?”
“저… 이사님과 같은 방을 사용하면 안 될까요?”
최준하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설영석 이사는 최준하가 자기를 찾아온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특권 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그가 일반 룸을 마음에 들어 할 리가 없으니까.
“미안하지만, 나는 준하 씨와 같은 방을 사용할 수 없어.”
“왜요?”
“회장님이 준하 씨와 나 사이를 잔뜩 의심하고 있는데, 둘이 같은 방을 사용하면 어떻게 될 것 같은가? 지금보다 상황이 복잡해질 것 같지 않아?”
충분히 일리 있는 얘기였다.
“그거야… 그렇겠네요…….”
“그러지 말고, 사비로 방을 따로 얻는 게 어때?”
“그렇게 하겠습니다.”
설영석 이사는 진심으로 궁금한 것이 하나 있었다.
김포공항에서 조병석 실장에게 질책을 들을 당시, 최준하가 누구에게 욕설을 내뱉었는지의 여부였다.
정황상 조병석 실장일 가능성이 높지만, 자신일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었다.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서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고, 최준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사실은 한겨울한테 내뱉은 욕설이었습니다.”
“그곳에 한겨울이 없었잖아?”
“그놈이 송지유하고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며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에이, 별일 아니었네?”
“네, 그렇습니다. 그건 그렇고… 회장님이 언급한 두 건의 프로젝트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설영석 이사도 두 건의 프로젝트를 파악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한 끝에 겨우 알아낼 수 있었다.
그렇다고 정보를 얻기 위해서 노력한 일까지 일일이 언급할 필요는 없었다.
“우간다와 탄자니아를 있는 송유관 건설 공사와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발주하는 잉가 3댐 건설공사야.”
“어? 이사님은 알고 계셨네요?”
“대한 그룹 임원이면 그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설영석 이사가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하긴… 그렇겠네요.”
드르륵―
그때, 소탁 위에 올려놓은 설영석 이사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박철헌 사장이 걸어온 전화였다.
“네, 사장님.”
[설 이사, 통화 가능한가?]
“네, 말씀하십시오.”
[내가 토탈의 뿌요네 회장을 만나서 CNOOC가 토해 낸 지분을 매입해야 하는데, 그와 만날 수 있는 방법이 마땅치 않아. 그래서하는 말인데, 설 이사가 중간에서 힘을 써 줬으면 좋겠어.]
“제가 내일 토탈 측 사람들을 만나면 사장님의 말씀을 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망아지 놈이 사고 치지 못하도록 설 이사가 제대로 컨트롤하라고.]
설영석 이사는 무심결에 최준하를 힐끗 쳐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자기와 박철헌 사장의 통화에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만약을 위해서도 그와 관련한 대화는 이쯤에서 중단하는 것이 맞았다.
“저희가 묵고 있는 호텔은 리츠 파리라는 곳인데,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망나니 놈이 옆에 있군그래.]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박철헌 사장이었다.
“아, 그렇군요. 오늘은 그렇고, 내일쯤 만나서 식사나 같이하시죠?”
[그렇게 하자고.]
뚝.
박철헌 사장이 전화를 먼저 끊었다.
그와 동시에 최준하가 질문을 던져 왔다.
“이사님, 지금 누구와 통화하셨습니까?”
“박철헌 사장님.”
“박 사장님이 이곳에 오셨습니까?”
“맞아.”
“그분이 왜요?”
“길게 얘기해 줄 수는 없고, 부회장님의 특명을 받아서 이곳에 오셨어.”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바에서 가볍게 술이나 한잔하게 방을 얻으면 나한테 전화해.”
“네, 이사님.”
* * *
같은 시각.
바에서는 겨울과 호영이 장대산 부사장과 송지유와 함께 술자리를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정호영 씨, 한 부사장님은 학창시절에 어땠어요? 공부 잘했나요?”
송지유의 질문을 받은 호영은 양주를 한 모금 마신 후,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
“그 얘기를 듣는 것보다 한 부사장이 축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들어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네, 얘기해 주세요.”
“한 부사장과 저는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서 같은 초등학교에 입학했어요. 3학년까지는 한 부사장과 다른 반이었다가 4학년 때 처음으로 같은 반이 됐죠. 5월 초에 중간고사를 봤는데, 유일하게 겨울이만 올백을 맞았어요. 그런데 정말 이상한 건 한 부사장이 학교에서나 집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는 겁니다.”
호영은 안주 하나를 집어먹고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자존심이 엄청 상한 저는 기말고사 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죽어라고 공부했죠. 하지만 한 부사장을 꺾을 수 없었어요. 한 부사장을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한 저는 엉큼한 생각을 하나 하게 됩니다.”
“한 부사장님께 축구를 권유했나 보군요?”
“네, 그렇습니다. 2학기가 시작되자 저는 한 부사장을 축구하라고 꼬셨고…….”
사실 겨울이 축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호영의 꼬임에 넘어간 것이 아니라, 체육 시간에 자신의 공을 다루는 능력이 예사롭지 않다고 판단한 담임선생님의 제안을 받아서였다.
지금 호영은 그럴듯한 거짓말로 송지유와 장대산 부사장을 속이고 있는 중이었지만.
거짓말이라고 바로 잡아 주는 것이 옳았지만, 악의가 섞여 있지 않은 거짓말에 발끈하는 것도 모양새가 우스워서 가만히 있기로 결정했다.
겨울이 이런저런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호영의 이야기가 끝났다.
“…다행히 호랑이가 사라지는 바람에 여우인 제가 왕 노릇을 하게 됐습니다.”
“호영 씨, 한 부사장님이 축구를 잘했나 봐요?”
“7년 전에 부상당하지 않았더라면, 축구 역사에 한 획을 그을 수 있었을 실력이었죠.”
“정호영, 뻥치지 마라.”
보다 못한 겨울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네가 강석이보다 축구를 잘한 것은 사실이었잖아.”
“강석이가 유럽 리그에 진출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 너는 모를 거야.”
“네가 강석이보다 독기가 약하지는 않잖아?”
겨울이 독한 구석이 있다는 사실은 송지유도 알고 있었다.
신입사원 연수 당시, 밤을 새워 가며 지필 테스트와 토익 공부하는 모습을 지켜본 장본인 이었으니까.
“저도 정호영 씨의 의견에 동의해요.”
“봐라. 송지유 씨도 네가 독하다고 인정하잖아.”
“정호영, 내 과거사 얘기는 이제 그만하자.”
“네가 원한다면.”
하지만 세상사는 마음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송지유는 그럴 생각이 없다는 듯 또 다른 질문을 꺼내 들었다.
“정호영 씨, 한 부사장님은 학창 시절에 인기 많았어요?”
“영월에서 한 부사장을 모르면 간첩이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대단했죠.”
“여자 친구도 많았겠네요?”
“부상당하기 전까지는 제법 많았는데, 그 이후로는 보다시피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죠.”
또다시 겨울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정호영, 내 사생활을 어떻게 그렇게 꿰뚫고 있냐?”
“너희 부모님과 가을이가 내 정보원이라는 사실을 잊은 것 같다?”
“계속 이렇게 초를 칠거면 숙소로 돌아가.”
“바에 온 지 한 시간도 안 됐는데, 갈 수야 없지.”
“한 시간이면 충분히 마셨잖아.”
“이제 겨우 두 잔밖에 마시지 못했거든?”
두 사람의 말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송지유는 겨울과 인연을 맺은 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조용히 되뇌었다.
사실 자기는 겨울의 스펙이 형편없었기 때문에 신입사원 연수에서 탈락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자신의 예상과는 달리 겨울은 놀라운 능력을 보여 주며 당당하게 최종 관문을 통과했다.
최성진 부회장의 음모에 의해서 아프리카 법인에 발령받았을 때도 마찬가지.
그곳에서 잠재되어 있던 천재성과 특유의 독기를 보여 주며 승승장구하더니, 불과 1년 만에 대리로 승진하는 놀라운 활약을 보여 주었다.
대한 그룹을 퇴사한 후, 지난 2월에는 정명훈 사장, 장대산 부사장과 함께 H&J 컨설팅과 H&J Investment를 보란 듯이 설립하는 기염을 토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겨울을 비중 있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럴 수 없었다.
H&J 컨설팅은 대한 그룹이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전략적 파트너였기 때문에.
송훈석 회장으로부터 대한 그룹의 경영권을 어려움 없이 넘겨받기 위해서라도 겨울과의 관계는 돈독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이유로 겨울의 부름에 한달음에 달려온 것이고.
그녀가 제법 깊은 상념에 빠져 있는 사이에도 두 사람의 티격태격은 계속됐다.
“내가 가면, 술값은 누가 낼 건데?”
“여기서 제일 가난한 사람이 누군데 그런 소리를 해?”
“물론 나겠지. 하지만 나는 아직 볼일이 남아 있기 때문에 갈 수 없어.”
“설마… 그거 때문이야?”
“어.”
“어휴,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 말라고 했다.”
“오르지 못할 나무가 세상에 어디 있냐? 사다리를 타고 오르면 되지.”
송지유는 겨울과 호영이 자기와 관련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중이라고 판단 내렸다.
“정호영 씨, 저한테 궁금한 게 있으면 물어 보세요.”
“어어? 하하, 그럼 염치 불구하고… 혹시 남자친구 있습니까?”
“아니요. 없어요.”
“아… 그렇군요.”
“질문이 그게 다예요? 다른 궁금한 점은 없어요?”
송지유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특별히 없지만, 원하시면 하나만 더 물어보겠습니다.”
“얘기해 보세요.”
“그… 마음에 두고 있는 남자는 있습니까?”
“그 정도는 아니지만,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 남자는 있어요.”
윙윙―
아주 공교로운 타이밍에 겨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겨울은 궁금함을 거둬들이고 핸드폰으로 시선을 돌렸다.
생각지도 못한 사람의 전화번호가 액정에 표시되어 있었다.
겨울은 얼른 일행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마사카 부통령님.”
[한 부사장님, 지금 어디 계십니까?]
“파리에 도착해서 일행들과 바에서 가볍게 한잔하고 있습니다.”
[지금 올라갈 테니까, 10분만 기다리십시오.]
“부통령님, 저희가 묵고 있는 호텔이 어디인지 알고 계십니까?”
[리츠 파리 호텔이잖아요.]
겨울은 마사카 부통령의 프랑스 방문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오늘은 아니었다.
송유관 건설 공사와 관련한 미팅은 모레부터 시작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어쨌든 자기를 만나러 오겠다고 하는 사람을 말릴 수는 없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딸깍.
겨울이 전화 끊기를 기다렸다는 듯 호영이 재빨리 질문을 던져 왔다.
“마사카 부통령님이 이곳으로 오시는 거야?”
“어…….”
“음, 난 자리에서 빠지는 게 맞겠지?”
“인간아, 입술에 침이나 바르고 그런 소리를 해라.”
“하하. 눈치챘냐?”
호영이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잠시 후, 마사카 부통령이 무세베니 비서실장과 함께 문을 열고 들어왔다.
겨울은 두 사람에게 초면인 호영과 송지유를 소개시켜 주었다.
인사를 마치고 분위기가 안정되자, 마사카 부통령이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 부사장님, 미국 CNN이 뉴스 특보를 방송하지 않은 이유를 알고 있습니까?”
“부투야 실장님께 아무 얘기를 듣지 못했습니까?”
“한 부사장님을 만나면 직접 물어보라는 얘기밖에 들은 것이 없습니다.”
“장 부사장님이 자세하게 설명해 줄 겁니다.”
겨울이 장대산 부사장한테 발언할 기회를 넘겨주고 2선으로 물러났다.
장대산 부사장은 겨울에게 고맙다는 신호를 보낸 뒤,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실 미국은 연합군과 중국의 협상 내용을 언론을 통해서 공개할 생각이 없었습니다.”
“그럼 해리슨 상원의원이 저희에게 한 말이 거짓말이었습니까?”
“원래 적을 속이기 위해서는 아군부터 속이는 법입니다.”
“중국과 미국 사이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건이 있었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사실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미국은 CNN이 협상 내용을 뉴스 특보로 내보낼 예정이라고 중국 측에 살짝 흘렸습니다.”
장대산 부사장은 미국과 중국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고, 연합군에게 어떤 혜택이 돌아갔는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중국은 아무리 늦어도 이번 주 안으로 우간다에 정신적인 피해 보상금을 지급할 겁니다.”
“아, 그렇군요.”
“해리슨 상원의원께서 본의 아니게 속여서 미안하다는 말씀을 전해 달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우리들을 위한 일이었는데, 사과하실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마사카 부통령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해 드리겠습니다.”
“하하, 알았어요. 오늘 술값은 제가 계산할 테니까, 마음껏 술을 마셔 봅시다.”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호영이 입꼬리를 위로 말아 올리며 대답했다.
“마사카 부통령님, 잘 마시겠습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