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Give & Take
대한 그룹 전용기는 열두 시간을 날아서 프랑스의 관문인 샤를 드골 국제공항에 저녁 8시 무렵 무사히 착륙했다.
작은 창을 통해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 호영에게 겨울이 말을 걸었다.
“너희 회사는 의약품을 어떤 방법으로 우리 회사에 공급할 생각이냐?”
“걱정 마라. 우리 회사 사장님이 인도의 제약 회사들을 줄줄이 꿰차고 있으니까.”
“역시 믿는 구석이 있었구나?”
“어쨌든 우리 회사를 신경 써 줘서 고맙다.”
“고마우면 한턱내고.”
“원한다면야.”
프랑스 출장의 공식 일정은 내일부터 시작한다.
따라서 마음 편하게 한잔 할 수 있는 날은 오늘밖에 없었다.
“생각난 김에 오늘 끝내자.”
“나는 얼마든지 상관없지만, 네가 시간이 날지 모르겠다.”
“내가 왜?”
“우리가 프랑스로 날아오고 있는 사이, 미국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모르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차, 내가 깜빡했네.”
호영과 대화를 중단한 겨울은 핸드폰 전원을 키고, 미국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서 인터넷에 접속했다.
그런데 정말 이상했다.
이곳으로 오는 동안, 연합군과 중국의 협상 내용이 CNN 뉴스 속보로 나갔을 것이다.
그 시간으로부터 이제 네 시간 조금 넘었을 뿐이다.
지금쯤이면 이 문제 때문에 온 세상이 들썩거리고도 남았을 시간인데,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판단한 겨울은 급하게 CNN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기사들을 검색했지만, 협상 내용과 관련된 기사는 하나도 없었다.
궁금함이 치솟아 오른 겨울은 건너편 자리에 앉아 있는 장대산 부사장한테 말을 건넸다.
“장 부사장님, 미국 상황이 조금 이상한 것 같아요.”
겨울의 심각한 표정을 보고 장대산 부사장은 무언가 돌발 상황이 발생했음을 직감했다.
겨울과 마찬가지로 핸드폰 전원을 켰다.
일련의 과정을 거친 장대산 부사장은 어떤 상황인지 대충 감이 잡혔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이 틀릴 수 있기 때문에 모든 정황이 확실하게 파악될 때까지 말을 아끼기로 했다.
“제가 조금 있다가 해리슨 상원의원님과 통화해 볼게요.”
“네, 부탁합니다.”
무사히 프랑스 입국 심사를 끝낸 겨울 일행은 대한 그룹 유럽 법인이 준비한 차량을 이용해서 예약되어 있는 호텔로 출발했다.
장대산 부사장은 초조해하고 있는 겨울을 고려해서 재빨리 해리슨 상원의원에게 전화 걸었다.
[대산아, 프랑스에는 잘 도착했냐?]
“네, 아버지. 그런데 CNN이 뉴스 특보를 방송하지 않은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열 시간 전쯤에 중국 측으로부터 우리나라에 비밀 협상을 요청해 왔어.]
장대산 부사장은 열 시간 동안에 어떤 상황이 발생했는지 대충 짐작이 되었다.
미국은 중국 측에 CNN에서 뉴스 특보를 방송할 예정이라고 정보를 살짝 흘렸을 것이다.
이 정보를 취득한 중국은 긴급회의를 통해서 이해득실을 따져 보았을 것이고.
이런저런 토론 끝에 여러모로 불리하다고 판단 내리고, 미국에 비밀 협상을 요구한 것이리라.
이에 미국은 CNN이 뉴스 특보를 방송하지 않는 조건으로 중국으로부터 적당한 반대급부를 얻어 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는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아버지에게 물었다.
[네 말이 맞아.]
“반대급부가 무엇인지 제가 알 수 있을까요?”
[중국은 연합군에 정식으로 사과하고, 최대한 빨리 피해 보상금을 지급해야 해. 참고적으로 하나만 더 얘기해 주면, 연합군들은 우리나라가 중국과 비밀리에 협상을 벌였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어.]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이제 궁금증이 해소됐냐?]
“아직 하나가 더 남아 있습니다. 연합군과 중국의 협상 내용은 영원히 땅속에 묻히는 건가요?”
[그럴 리가 있겠냐?]
미국은 협상 내용을 계속 활용하겠다는 의미였다.
그 문제는 미국과 중국 정부와의 문제였기 때문에 자기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네, 알겠습니다.”
[나중에 통화하자.]
“네, 아버지.”
딸깍.
해리슨 상원의원과 통화를 끝낸 장대산 부사장은 겨울에게 통화 내용을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장 부사장님, 미국이 중국과의 비밀 협상 사실을 연합군에 알리지 않은 이유가 뭘까요?”
장대산 부사장은 이유를 알고 있었으나, 귀가 여럿인 이곳에서 미국의 기밀 사항을 함부로 언급할 수는 없었다.
더구나 이 일은 겨울이 당장 알고 있어야 할 내용도 아니었고.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사건이 잘 마무리돼서 다행이네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호영이 궁금한 것이 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장 부사장님, CNN이 뉴스 특보를 제작하기는 했을까요?”
“뉴스가 제작되면, 특성상 많은 사람들이 알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아닐 가능성이 상당히 높습니다.”
윙윙―
그때, 겨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부투야 실장이 걸어온 전화였다.
겨울은 모두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와 통화를 시작했다.
“네, 부투야 실장님.”
[한 부사장님, 프랑스에는 잘 도착하셨습니까?]
근심 걱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
“실장님, 목소리가 상당히 어두운데, 무슨 일이 있습니까?”
[한 부사장님은 CNN이 뉴스 특보를 방송하지 않은 이유를 알고 있습니까?]
“네. 방금 전에 장대산 부사장이 알려 줬습니다만, 실장님께서는 모르고 계셨습니까?”
[해리슨 상원의원께 몇 번 전화를 걸어 봤지만, 바쁜 일이 많은지 전화를 받지 않습니다.]
겨울은 미국이 중국과의 협상 내용을 연합군에 알려 주지 않은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연합군에 통보하는 역할을 일부러 자기에게 맡긴 것이리라.
“실장님, 이유를 제가 알려드릴 테니까, 연합군에 전파해 주세요.”
[빨리 얘기해 보세요.]
“열 시간 전쯤에 중국 측이 비밀리에…….”
겨울은 장대산 부사장한테 들은 얘기를 가감 없이 전달했다.
[아,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근심 걱정이 가득 담겨 있던 부투야 실장의 목소리가 정상으로 돌아오는 데에는 몇 분 걸리지 않았다.
“조만간에 중국 측에서 피해 보상금을 지급할 겁니다.”
[하하, 알았어요.]
“그럼 프랑스에서 뵙겠습니다.”
[한 부사장님, 잠깐만요.]
부투야 실장은 아직 할 말이 남아 있는지 전화를 끊으려는 겨울을 불러 세웠다.
“네, 말씀하세요.”
[우리가 의약품을 추가로 발주하면, 올해 안에 공급해 줄 수 있습니까?]
“그럼요.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오코사 실장은 어려울 거라고 했는데,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르겠네요.]
“실장님, 전 세계에서 의약품 생산이 제일 많은 나라가 어디인지 알고 계십니까?”
[한국 아닌가요?]
“아닙니다. 인도입니다.”
[인도라…….]
부투야 실장이 끝말을 흐리며 말문을 닫았다.
아마 그의 머릿속은 인도가 언급된 이유를 추측하느라고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난 후, 살짝 상기된 그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들려왔다.
[한 부사장님, 의약품 발주를 인도에 의뢰하겠다는 건가요?]
“연합군들의 자원을 수입해 주는, 고마운 바이어잖아요.”
[아하! 그런 뜻이 있었는지 몰랐습니다.]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답게 부투야 실장은 겨울의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했다.
“실장님, 의약품과 관련한 얘기는 인도와의 TTM 장소에서 언급할 예정입니다. 그때까지는 절대 비밀입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모든 비즈니스에 적용되는 Give & Take 원칙을 활용해 볼 생각입니다.”
[으하하하!]
겨울의 생각을 읽었다는 듯 부투야 실장이 화통한 웃음을 터트렸다.
“실장님, 이제 전화를 끊어도 되겠죠?”
[그럼요. 나중에 통화합시다.]
겨울이 통화를 끝내기를 기다렸다는 듯 하도진 실장이 말을 걸어왔다.
“부사장님, 대한 그룹과 SH무역에도 말조심 시켜야 하지 않을까요?”
“SH무역은 정호영 씨가 알아서 할 것이니까, 대한 그룹에만 얘기해 놓으면 될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중단된 틈을 타서, 호영이 입을 열었다.
“부사장님, 몰디브에 저희 회사도 따라갔으면 좋겠습니다.”
“이유가 있겠죠?”
“그곳에서 인도 제약 회사들과 TTM을 갖는 것이 좋을 거 같아서 그럽니다.”
겨울은 호영의 아이디어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자신들은 몰디브에서 있을 TTM에서 생색을 내며 의약품과 관련한 협상 카드를 꺼내들 계획인데, 미리 인도 제약 회사를 불러들이면 협상 전략이 꼬일 가능성이 있었다.
겨울의 얘기를 들은 호영은 뜻밖의 대답을 꺼내 놓았다.
“H&J 컨설팅으로부터 OK 사인이 떨어지는 즉시 행동으로 옮기면 되지 않을까요?”
“그렇게 하세요.”
* * *
한편, 앞서가고 있는 자동차 안에서는 송훈석 회장이 서동호 실장과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서 실장, CNN이 뉴스 특보를 방송하지 않은 이유가 뭘까?”
“중국과 미국 사이에 무언가 문제가 발생한 것 같습니다.”
“한 부사장이나 장 부사장은 알고 있겠지?”
“제가 전화해 볼까요?”
“조금 있으면 호텔에서 만날 텐데 뭐.”
윙윙―
그때, 서동호 실장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통화 버튼을 눌렀으나,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상대방과 통화한 후 전화를 끊었다.
“서 실장, 하도진 실장이 뭐라고 하는데?”
“CNN이 뉴스 특보를 방송하지 않은 이유는 중국 측의 요청이 있어서였답니다.”
“중국이 꼬리를 내렸다는 말이겠지?”
“네, 그렇습니다.”
“그나저나 중국이 연합군에 피해 보상금을 제때에 지급할까?”
“미국과 중국의 비밀 협상 의제에 피해 보상금 문제도 포함되었기 때문에, 조만간 정상적으로 지급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럼 의약품 추가 발주 건도 곧 진행되겠네?”
“그 건과 관련해서 한 부사장이 저희한테 협조를 요청해 왔는데, 별도 얘기가 있을 때까지 인도 제약 회사들과 접촉을 중단해 달랍니다.”
“이유가 뭘까?”
“몰디브에서 있을 연합군과 인도의 자원 거래 TTM 장소에서 언급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송훈석 회장은 겨울의 의도를 단숨에 이해했다.
겨울은 의약품 발주를 자원 수출과 연계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연합군들의 자원 수출 가격을 조금이나마 인상시킬 수 있는 여지가 있다.
“한 부사장의 요구를 적극 들어주도록 하라고.”
“네, 회장님.”
차에서 내린 겨울은 눈앞의 리츠 파리 호텔의 외관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전통을 고수하는 나라로 유명한 프랑스답게 왕궁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건물과 경관이 웅장하고 아름다웠다.
배정된 숙소는 어떨지 잔뜩 궁금함을 가지고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
체크인을 하고 숙소 문을 열고 들어간 겨울은 또다시 놀랄 수밖에 없었다.
내부 인테리어부터 각종 가구들까지, 고풍스러움의 끝판왕을 달리는 룸 안의 분위기에 감탄사가 저절로 나왔다.
호영이도 마찬가지.
그는 연신 감탄사를 내뱉으며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한참 만에 푹신한 소파에 앉은 호영은 겨울에게 느닷없는 말을 건넸다.
“겨울아, 고맙다.”
“뭐가?”
“네가 아니었으면, 내가 언감생심 이런 스위트룸에 묵을 수 있었겠냐?”
“그럼 빨리 짐 풀고 한잔하러 나가자.”
“우리 둘만 가지 말고 멤버를 더 부르는 건 어때?”
“누구? 장 부사장?”
“송지유 씨도 있잖아.”
겨울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지만, 그녀가 초대에 응할지는 미지수였다.
“피곤해하지 않을까?”
“일단 불러나 보자.”
“혹시… 너 송지유 씨한테 관심 있니?”
“당연하지. 왜? 나는 관심 가지면 안 돼?”
“너는 여친이 있잖아.”
“누구? 설마… 강희?”
“어.”
“어휴, 너는 여사친이라는 말도 모르냐?”
결국 아무 사이가 아니라는 얘기였다.
“흠흠, 그렇구나. 그나저나 송지유 씨의 전화번호는 알고 있어?”
“내가 어떻게 알아. 네가 알고 있잖아.”
“어휴, 못난 놈.”
* * *
최준하는 짜증이 만땅으로 차올랐다.
지금까지 호텔에 묵을 때 스위트룸이 아닌 곳에서 잠을 자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을 자랑 삼아 떠벌리고 다닌 몸인데, 난생처음 파리에서 일반 룸에 머무르게 되다니.
그것도 재수 없는 양경운 과장과 함께.
그에게 자기가 누구인지 누누이 얘기했으나, 그는 귓등으로 듣지도 않고 흘려 버렸다.
방금 전에도 마찬가지.
그는 자기의 의사를 묻지 않고, 창가 쪽에 위치한 침대를 선점해 버렸다.
그러니 더욱 더 짜증이 날 수밖에.
“왜 그렇게 노려봐? 내가 이 침대를 사용하는 게 불만인가?”
“당연히 불만… 아닙니다. 됐습니다.”
이 말과 함께 최준하는 캐리어를 끌고 룸 밖으로 나가 버렸다.
“쯧쯧쯧, 저런 놈이 최 부회장님의 아들이라니.”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