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인생만사 새옹지마
“한 부사장, 아직 한 시간이 안 됐나?”
정명훈 사장과 마찬가지로 겨울도 초조했다.
“아직 10분 정도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시간이 더디 흘러가는 것을 보니, 시간은 상대적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네.”
“저도 사장님의 말씀에 동감합니다.”
윙윙―
그때, 겨울의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이 잠에서 깨어났다.
누가 전화를 걸어왔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지체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샤르마 장관님.”
[한 부사장님, 제가 실수를 저지른 것 같네요.]
한 시간 전에 통화할 때와는 달리 그의 목소리는 상당히 부드러워져 있었다.
네 나라의 대통령들과 통화하면서 자기가 어떤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겨울은 얼마든지 허세를 부릴 수 있었지만, 그렇게 행동하지 않기로 했다.
어쨌거나 샤르마 장관은 연합군 나라들로부터 자원을 수입해 줄 바이어이기 때문에.
“장관님, 저는 어차피 한 번은 거쳐야 하는 검증 절차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크게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한 부사장님은 제가 어떤 사람인지 검증하지 않으셔도 됩니까?]
당연히 검증은 이미 거쳤다.
장대산 부사장을 통해서.
하지만 그 얘기는 절대로 언급할 수 없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약간의 기름칠을 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설마 해리슨 상원의원께서 저희에게 아무나 소개시켜 주셨겠습니까?”
[하하하, 고맙습니다.]
역시 장대산 부사장의 조사 결과대로 샤르마 장관은 칭찬에 약한 모습을 보였다.
“장관님, 자원 거래에 대해서 본격적인 대화를 나눴으면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좋습니다.]
“다섯 개 나라와 협상 테이블을 마련했으면 합니다.”
[그 전에 그 나라들이 우리나라에 수출하고 싶은 자원들의 리스트를 받아 봤으면 합니다.]
“아차, 제가 너무 서두른 것 같네요. 이메일 주소를 알려 주시면, 지금 즉시 보내 드리겠습니다.”
[제 이메일 주소는…….]
겨울은 샤르마 장관이 불러 주는 이메일 주소를 메모지에 적어서 하도진 이사에게 건네주었다.
겨울의 의도를 찰떡같이 알아본 그는 메모지를 들고 재빨리 밖으로 뛰어나갔다가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에 복귀했다.
그러고는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서 겨울에게 신호를 보냈다.
“장관님, 방금 전에 리스트를 전송했습니다.”
[리스트를 검토한 후,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겨울이 통화를 끝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장대산 부사장이 발언권을 요청했다.
“한 부사장님, 생각보다 급하게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당장 C&B 코리아의 김윤중 사장한테 연락해 보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장 부사장, 우리가 먼저 전화하는 건 그다지 바람직스럽지 않아.”
겨울보다 정명훈 사장의 입이 먼저 열렸다.
장대산 부사장은 그의 의도가 무엇인지 단숨에 눈치챘다.
아무리 급하더라도 김윤중 사장과의 주도권 싸움에서 밀리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장대산 부사장과 짧은 대화를 끝낸 정명훈 부사장은 초조함을 감추고, 하도진 이사에게 그동안 아프리카에서 진행한 일을 물었다.
“하 이사, 다섯 개 나라들과 TV, 컴퓨터, 컵라면, 즉석 밥에 대한 공급 계약은 어떻게 됐어?”
“깔끔하게 완료했습니다.”
“물품 수입 계약은 어떻게 됐나?”
“대한 그룹으로부터 공급받는 물품은 아프리카 법인과 계약을 끝냈고, SH무역에서 공급받는 물품은 가쿠타 부장이 계약을 완료했습니다.”
“물품 공급 금액 및 우리 회사의 이익은 얼마로 산정했어?”
“공급금액은 11억 5,000만 달러에 조금 부족합니다. 이익률은 10%입니다.”
“수고했어. 그동안 수고한 의미로 오늘 점심은 내가 살게.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얘기해 봐.”
“얼큰한 두부전골이 먹고 싶습니다.”
“알았어. 오랜만에 두부전골 먹으러 가자고.”
점심 식사를 끝내고 사무실로 복귀한 겨울은 가쿠타 부장을 호출했다.
그는 자신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세세히 챙길 필요가 있었다.
“부장님, 그동안에 우리나라에서 생활해 보신 소감이 어떻습니까?”
“놀랍고 신기한 점이 많았지만, 무엇보다도 밤늦게까지 돌아다녀도 안전하다는 사실이 정말 인상적이었습니다.”
아프리카의 경우, 치안이 불안하기 때문에 긴급한 일이 아닌 이상 밤에는 외출을 삼가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
특히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의 경우에는 더더욱 위험이 뒤따른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겨울도 치안이 비교적 튼튼한 지역에만 살짝살짝 돌아다녔을 뿐이었다.
“가족들은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우리나라도 돈만 많으면 충분히 살 만한 나라입니다.”
가쿠타 부장은 정수기 75만 대 수출 건으로 인해서 500만 달러가 넘는 이익을 배분 받았다.
그 정도 돈이면 콩고민주공화국에서 호화롭게 사는 데 전혀 문제가 없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직원들이 가쿠타 부장님을 직장 상사로 인정해 주고 있습니까?”
사실 가쿠타 과장은 한국인 직원들이 피부색을 이유로 자기의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며칠 동안 직원들과 근무해 본 결과, 쓸데없는 기우였다.
“네, 물론입니다.”
“다행이네요. 이번에 채용된 직원들은 언제부터 우리나라에서 근무 가능하다고 합니까?”
“지금 취업 비자 발급받고 있는 중에 있는데, 늦어도 다음 달초부터 근무시키도록 하겠습니다.”
“의약품 태스크 포스는 문제없이 가동되고 있죠?”
“네, 그렇습니다. 다음 주 중반쯤에 제안서와 견적서를 바이어들한테 발송할 예정입니다.”
지이이잉―
그때, 테이블위에 올려놓은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를 확인하니 홍석훈 기사가 걸어온 전화였다.
느낌상 김윤중 사장에게 전화 연락을 받은 것 같았다.
“네, 홍 기사님.”
[부사장님, 김윤중 사장이 2시쯤에 우리 회사를 방문하겠다고 하는데, 뭐라고 답변해 줄까요?]
“기다리고 있겠다고 전달해 주세요.”
[제가 모시고 올라가겠습니다.]
“그렇게 하시고, 사장님을 만날 때 집 매각과 관련한 얘기는 언급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 * *
같은 시각.
정명훈 사장은 하도진 이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연합군들이 중국에 수출하고 있는 자원들에 대한 리스트는 언제 줄 거야?”
“그렇지 않아도 사장님께 보고 드리려고 출력해 왔습니다.”
“이리 줘 봐.”
하도진 이사한테 자료를 건네받은 정명훈 사장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자료에는 연합군들이 중국에 수출하는 자원들의 수출가격이 떡하니 표기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 이사, 샤르마 장관에게 이 자료를 그대로 보내 준 것은 아니겠지?”
“사장님, 제가 바보인줄 아십니까?”
“휴, 다행이네. 그런데 하 이사는 가끔 바보짓을 하잖아.”
“그때는 아프리카 법인에 처음 배치 받아서 아무것도 모를 때였잖아요.”
“그때도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사원이 아니라 차장이었어.”
“사장님, 은근히 뒤끝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그 당시에 하 이사가 사고 치는 바람에 임원 승진이 3년이나 늦어졌는데, 뒤끝이 없으면 오히려 이상한 거 아니야?”
“사장님, 인생만사 새옹지마라는 한자성어를 아십니까?”
정명훈 사장도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만약에 그 당시에 정상적으로 임원 진급을 했더라면, 인생이 바뀌어서 겨울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쯤 자기는 아프리카 법인, 또는 다른 법인에서 상무 진급을 위해서 죽어라 노력하고 있을 것이다.
“하긴… 하 이사 말이 맞는 것 같군.”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겨울과 장대산 부사장이 찾아왔다고 보고했다.
“이유를 물어봤나요?”
“C&B 코리아의 김윤중 사장님과 관련해서라고 합니다.”
“얼른 들어오라고 하세요.”
“네, 사장님.”
겨울이 비어 있는 자리에 앉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정명훈 사장이 질문을 던졌다.
“김윤중 사장한테 연락 왔어?”
“네. 2시 무렵에 우리 회사를 방문하겠다고 합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네?”
“네, 그렇습니다.”
“우리가 로비에 내려가서 김 사장님을 기다려야 하는 거 아닐까?”
“홍석훈 기사가 모시고 올라온다고 했습니다.”
“알았어. 그리고 하 이사가 출력해 온 자료를 읽어 봐.”
정명훈 사장에게 자료를 건네받아서 읽어 보던 겨울은 소스라치게 놀라서 물었다.
“하 이사님, 이 자료를 인도 측에 그대로 넘긴 것은 아니겠죠?”
“샤르마 장관께는 수출 가격이 표시되지 않은 자료를 보내 줬습니다.”
“휴우, 십년감수했네요.”
“그나저나 중국 놈들의 횡포가 너무 심한 게 아닙니까?”
“자본을 가진 사람들의 특권 아니겠습니까?”
윙―
그때, 겨울에게 문자가 하나 수신됐다.
문자를 읽어 본 겨울이 재빨리 입을 열었다.
“홍 기사한테 문자가 왔는데, 방금 전에 로비에서 김 사장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한 부사장이 밖에 나가서 김 사장님을 모시고 오라고.”
겨울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해 엘리베이터 앞으로 가서 김윤중 사장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윤중 사장과 홍석훈 기사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겨울은 활짝 웃으며 그를 정중하게 맞이했다.
“김 사장님, 저희 회사 방문을 환영합니다.”
“저를 반겨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저희 회사 사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겨울은 김윤중 사장을 데리고 사장실로 들어갔다.
그와 인사를 나눈 정명훈 사장은 차분하게 목소리를 가다듬고 질문을 던졌다.
“김 사장님, 저희 회사에 대해서 알고 계신 게 있습니까?”
사실 김윤중 사장은 소뿔도 단김에 뺀다고, 지난 월요일에 겨울을 찾아오려고 했다.
그러다가 만약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조급함을 억누르고 H&J 컨설팅에 대해서 먼저 알아보기로 했다.
다행히 평소 친분이 있던 대한 오일의 현경호 사장에게 부탁해서 어제 오전에 그룹의 실세인 서동호 실장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자기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H&J 컨설팅이 어떤 회사인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고, 말미에 대한 그룹의 전략적 파트너라는 사실을 언급했다.
대한 그룹의 2인자가 H&J 컨설팅에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 의심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짧게 생각을 끝낸 그는 정명훈 사장의 질문에 대답했다.
“어제 오전에 대한 그룹의 서동호 실장과 만나서 H&J 컨설팅이 어떤 회사인지 들었습니다.”
“서 실장님과 친분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대한 오일의 현경호 사장을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럼 저희 회사에 대해서 따로 설명해 드리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C&B 코리아가 어떤 회사인지 간단하게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김윤중 사장은 이제부터 본격적인 면접이 시작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는 차분하게 숨을 고르고, 정명훈 사장의 질문에 대답했다.
“C&B 코리아는 Credit(신용)과 Belief(믿음)의 약자로 10년 전에…….”
김윤중 사장은 침착한 목소리로 C&B 코리아에 대해서 설명해 나갔다.
“C&B 코리아의 직원은 현재 몇 명입니까?”
“저를 포함해서 모두 아홉 명입니다.”
“C&B를 폐업할 예정이라고 들었는데, 직원들은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염치없는 말이지만, 저희 회사 직원들을 H&J 컨설팅에서 채용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흐음, 그들의 능력은 어떻습니까?”
“저와 오랫동안 이 일을 해 왔기 때문에 그들의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사장님이 저희 회사에 채용된다면,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때, 돌발 상황이 발생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김윤중 사장이 정명훈 사장에게 정중한 자세로 인사했기 때문이다.
“사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김 사장님, 아직 채용이 결정된 것이 아닙니다.”
“하하, 그런가요?”
김윤중 사장은 쑥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정명훈 사장은 뜸들이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저희 회사에 합류해 주시겠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사장님께서 수행해야 하는 업무가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까?”
“석유, 구리 등의 자원을 인도와 대한 그룹에 중개해 주는 역할이라고 들었습니다.”
“이제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을 잘 들어 주십시오.”
“네, 경청하겠습니다.”
“자원을 인도와 대한 그룹에 수출할 셀러는 나이지리아, 콩고민주공화국, 알제리, 탄자니아, 우간다입니다.”
“…….”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