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그가 전해 준 소문
겨울은 정명훈 사장의 의도를 정확하게 이해했다.
대한제약이 공급하지 못하는 전염병 치료제를 다른 의약품 제조 회사에서 공급받을 생각인 것이다.
물론 그 역할을 SH무역에 맡길 생각인 것이고.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SH무역 측에 전화해 주라고.”
“네, 사장님.”
“뭐하고 있어 지금 전화하지 않고?”
“지금이요?”
겨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정 사장님이 내일 오전에 다른 일정을 잡으면 어떻게 하려고 그래?”
“아, 그 뜻이었습니까?”
“면접을 마저 봐야 하니까 밖으로 나가면서 인사팀 지원자들을 들어오라고 하고.”
면접장 밖으로 나온 겨울은 이승훈 팀장에게 정명훈 사장의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자신의 사무실로 이동해서 호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전화했는데?]
심드렁한 목소리.
느낌상 누군가 그의 심기를 건드린 것 같았다.
“무슨 일 있냐?”
[제발 부탁인데, 우리 빅 바이어 좀 말려 주면 안 되겠냐?]
“은센기 사장이 왜?”
[지금 동대문 쇼핑몰에서 옷을 겁나게 많이 사고 있는 중이야.]
겨울은 은센기 사장의 의도가 무엇인지 대충 감 잡았다.
그는 한국산 의류를 수입해서 콩고민주공화국에 판매할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호영이 투덜댈 정도라면, 뭔가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했다는 뜻이었다.
겨울은 호기심이 치솟아 올라서 이유가 무엇인지 물었다.
[나도 모르는 건 아닌데, 옷을 구입하는 양이 너무 많아서 그래.]
“얼마나 많은데?”
[지금까지 구입한 의류가 종류별로 100벌이 넘어.]
“뭐? 100벌이나 된다고?”
[하아, 아무튼 그건 그렇고, 왜 전화했는데?]
“내일 오전 10시까지 정 사장님과 같이 우리 회사로 와.”
[또 돌발 상황이 발생한 거야?]
“아프리카에 전염병 치료제를 공급해야 하는데, 물량이 장난이 아니야.”
[일감이 하늘에서 우박 내리듯 아주 우르르 쏟아지는구나.]
호영의 넋두리성 발언에 겨울은 살짝 장난기가 도졌다.
“너희 회사는 일감을 받기 싫다는 뜻으로 해석해면 되냐?”
[에라이, 개떡 같은 인간아.]
뚝.
호영은 걸쭉하게 한마디 내뱉고 재빨리 전화를 끊어 버렸다.
“어라? 이놈 봐라.”
혼잣말을 흘린 겨울이 다시 면접에 참여하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면접장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정명훈 사장과 대한 그룹 인사팀의 남우영 차장이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겨울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 않으려고,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 착석했다.
그러는 사이에도 두 사람의 대화는 계속 이어졌다.
“남 차장, 우리 회사로 이직하려고 결심한 이유가 뭡니까?”
남우영 차장은 자신이 소속되어 있는 인사팀에서 일어난 일련의 일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작년 11월 말까지 자신이 모시고 있던 직장 상사는 홍성훈 부장이었다.
그는 출세를 제일의 목표를 세워 놓은 인물이었으나, 업무적으로 눈에 띨 만한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10월에 있던 투서 사건의 결과로 그동안 숨어 있던 그의 비리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때 그의 이중성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실망을 했는지.
당연히 자신들도 감사팀에 의해서 정밀 감사를 받게 되었다.
다행히도 어떠한 문제도 발견되지 않았지만.
투서 사건은 이대로 정리되겠거니 생각했으나, 12월에 다른 계열사에서 사공식 부장이 팀장으로 발령받아 오면서 부터 패가 꼬이기 시작했다.
그는 홍성훈 부장과 같이 근무했다는 이유 때문인지, 자신들을 수시로 면박을 주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노골적으로 없는 사람 취급까지 하며 구석으로 몰았다.
스스로 사직서를 제출하게 만들려는 그의 의도에 희망이 없다 생각하고 퇴사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 H&J 컨설팅에서 직원을 모집한다는 사내 게시판을 보게 되었고, 주저하지 않고 이직을 결심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들이 겪은 일들을 이 자리에서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사람한테 받는 스트레스 때문입니다.”
“나는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저희가 신임 팀장님의 업무 지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이해해 주십시오.”
“인사팀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묻지 말라는 소리인가요?”
“…그래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현재 소속되어 있는 부서의 팀장 이름 정도는 알려 줄 수 있겠죠?”
“사공식 팀장입니다.”
정명훈 사장은 사공식 팀장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작년 11월 말까지 해외 법인을 담당하고 있는 인사 담당에서 근무하고 있었으니까.
그는 능력이 뛰어난 반면에 외골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한 번 눈 밖에 난 직원들에게 절대로 정을 주지 않는 반면, 능력이 뛰어난 직원들은 마치 가족들처럼 친근하게 대해 주는 업무 스타일을 가졌다.
그러니 남우영 차장이 사공식 팀장의 눈 밖에 났다는 사실을 조금 더 깊게 해석하면, 능력이 없다는 뜻으로도 해석될 수 있었다.
하지만 겨울은 자신에게 남우영 차장이 능력이 매우 뛰어난 사람이라고 보고했다.
누구 말이 맞는지 검증할 필요가 있었다.
“남 차장, 내가 사 팀장하고 통화할 예정인데, 이곳에 남아 있을래요, 아니면 밖에 나가 있을래요?”
“이곳에 있겠습니다.”
거리낄 것 없다는 그의 태도에 일단 합격점을 주면서 정명훈 사장은 핸드폰 전원을 키고 사공식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배님께서 어쩐 일이십니까?]
“사 팀장, 내가 어느 회사에 근무하고 있는지 알고 있지?”
[H&J 컨설팅의 대표님이시잖아요. 저한테 자랑하시려고 전화한 것은 아닌 것 같고,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하십시오.]
“단도직입적으로 하나만 물어볼게. 자네 팀의 선임 사원인 남우영 차장한테 스트레스를 주는 이유가 뭐야?”
[음? 남 차장을 알고 계십니까?]
“내가 묻는 말에 먼저 대답하는 게 먼저 아닐까?”
[…아무리 선배님이라고 해도 남의 회사의 왈가왈부하는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예상한 대로 사공식 팀장이 싫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여기서 물러날 정명훈 사장이 아니었다.
“정재엽 사장님의 지시를 받으면, 얘기해 줄 수 있을까?”
[선배님께서는 사장님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그룹 인사담당에 근무하고 있으면, 항상 소문에 귀를 기울이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그, 그럼… 소문이 사실이라는 말씀입니까?]
드디어 겁을 먹었는지 사공식 팀장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내가 사 팀장한테 거짓말할 이유가 있을까?”
[후우… 알겠습니다. 남 차장은 작년에 비리를 저질러 우리 회사에서 쫓겨난 홍성훈 팀장과 2년 가까이 호흡을 맞춰 온 사이입니다.]
정명훈 사장은 이제야 모든 정황이 이해되었다.
사공식 팀장은 남우영 차장이 홍성훈 부장의 사람이라는 이유로 일부러 멀리한 것이다.
언뜻 이해되지 않는 측면도 있었으나, 남의 회사 일이기에 그의 행동에 대해서 왈가왈부할 수 있는 자격은 없었다.
“사 팀장, 그 일을 제외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해 줬으면 좋겠어. 남 차장의 능력은 어때?”
[…능력은 있는 친구입니다.]
“알았어. 나중에 통화하자고.”
[선배님, 제 질문에는 언제 대답해 주실 겁니까?]
“남 차장을 우리 회사로 스카우트하려고. 지금 면접 보고 있는 중이야.”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그동안 못되게 굴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다고 전해 주십시오.]
“나중에 본인한테 직접 해.”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딸깍.
사공식 팀장과 통화를 끝낸 정명훈 사장은 남우영 차장에게 말을 건넸다.
“남 차장, 홍성훈 부장의 말로가 어떤지 궁금하지 않나요?”
“궁금합니다.”
“지난 1월에 우리 아프리카 법인에 발령받아서 왔다가, 며칠 뒤에 콜레라에 걸려서 퇴사했어요.”
“결국… 그렇게 됐군요.”
“그 사람 얘기는 그만하고, 다른 얘기를 잠깐 해 봅시다.”
“네, 말씀하십시오.”
“남 차장은 입사 후배를 직장 상사로 모실 수 있습니까?”
눈앞에 앉아 있는 겨울과 장대산 부사장을 의식해서 꺼낸 말이리라.
“물론입니다.”
“박기훈 과장도 물론이겠죠?”
“네, 그렇습니다.”
“알았어요. 세 분을 채용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회사에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는 뼈가 으스러질 때까지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남우영 차장부터 이재성까지 돌아가면서 각오를 밝혔다.
“아무리 늦어도 다음 주 중에는 우리 회사에서 근무하셔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세 분의 직급은 한 단계씩 상승시키겠습니다.”
“사장님, 정말 감사합니다.”
“이제 궁금한 게 있으면 질문해 보세요.”
“사장님, 인사팀의 정원은 몇 명으로 구성하면 되겠습니까?”
“H&J 컨설팅과 H&J Investment에 근무하는 인원이 최소 500명이 넘으면 몇 명 정도 직원이 필요할까요?”
“1인당 100명 정도 감안하면 될 것 같습니다.”
“내가 답변해 주지 않아도 되겠죠?”
“네, 물론입니다.”
남우영 차장 등은 정명훈 사장과 10분 가까이 질의응답을 더 주고받은 후, 면접을 종료했다.
세 사람이 떠나가자, 지금까지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이승훈 팀장이 발언권을 요구했다.
“사장님, 남 차장도 부장으로 승진시켜 줬는데, 저는 계속 부장에 만족해야 합니까?”
사실 정명훈 사장은 투자분석 검증팀의 중요도를 감안해서 이승훈 팀장을 임원으로 승진 시켜 줄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겨울과 장대산 부사장의 의견을 들어 봐야 하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대답해 줄 수 없었다.
“이 팀장, 오늘 저녁때 얼큰한 김치찌개가 먹고 싶은데 사 주겠지?”
“반주로 소주를 곁들이는 건 어떻습니까?”
“오늘 대접이 신통치 않으면, 계속 부장 자리에 머물러 있는 줄 알고 있어.”
“제가 오늘 풀코스로 모시겠습니다.”
“나머지 얘기는 내 방에 가서 얘기할까?”
“네, 좋습니다.”
윙―
겨울이 면접을 끝내고 사무실로 복귀해서 자리에 앉는 순간, 카톡이 하나 수신됐다.
― 이재성 : 한 부사장님, 시간 있어요?
― 겨울 : 지금 어디 있는데요?
― 이재성 : 밑에 로비에 있습니다.
― 겨울 : 지금 내 사무실로 올라오세요.
― 이재성 : 넵.
똑똑.
잠시 후, 노크 소리와 함께 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이재성이 도착했다고 보고했다.
“들어오시라고 하고, 음료수 두 잔만 내오세요.”
“네, 부사장님.”
이재성도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들어오다 말고 휘둥그레 뜬 눈으로 겨울의 사무실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한 부사장님, 사무실 인테리어와 창밖 뷰가 끝내주는데요?”
“하하, 그런가요? 이리 와서 앉으세요.”
“넵, 부사장님.”
이재성이 소파 빈자리에 앉는 것과 동시에 비서가 음료수를 내왔다.
겨울은 음료수로 목을 축이고 이재성에게 물었다.
“이제 나를 찾아온 이유를 얘기해 보세요.”
“집에 가 봐야 딱히 할 일이 없어서 한 부사장님과 저녁이나 한 끼 같이하려고요.”
겨울은 이재성이 거짓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단박에 눈치챘다.
아무리 그가 자신과 입사 동기이지만, 지금은 하늘과 땅만큼 격차가 벌어져 있는 직장 상사였으니까.
즉, 할 말이 있는데, 어색해서 얘기를 꺼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지 말고, 솔직하게 얘기해 보세요.”
그는 특유의 버릇답게 주위를 둘러보고, 조심스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제가 어제 오후에 은밀히 떠다니는 소문을 하나 들었는데, 신빙성은 그다지 높지 않은 편입니다. 하지만 만약을 위해서라도 나중에 검증해 볼 필요는 있습니다.”
“어떤 소문입니까?”
“최성진 부회장의 사람들이 H&J 컨설팅으로 이직하려고 지원을 많이 했다고 합니다. 특히 팀장급들을 중심으로요.”
이재성은 신입사원 연수 시절부터 주위에 깔아 놓은 정보원들로부터 입수해 오는 소문들이 상당히 많았다.
그중에는 헛소문도 많았지만, 나중에 사실로 확인된 경우도 여럿 있었다.
방금 전에 이재성이 전달한 소문은 헛소문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사실이라면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닐 것이다.
짧게 생각을 끝낸 겨울은 이재성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최 부회장이 그렇게 행동하려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우리 회사가 보유하고 있는 정보를 활용해서 못된 짓을 하려는 게 아닐까요?”
충분히 가능성 있는 시나리오였다.
겨울은 최성진 부회장의 목적이 실현되도록 내버려 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소문의 진위 여부는 제가 알아서 검증해 볼게요.”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