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진심은 통하는 법
송훈석 회장 등과 점심 식사를 끝내고 회사로 복귀한 겨울은 오후 업무를 시작하기 위해서 책상 앞에 앉았다.
똑똑.
노트북을 키고 메일을 확인하려는 순간, 비서가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 사장님, SH무역에서 손님들이 오셨습니다.”
겨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서가 ‘손님들’이라는 복수형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즉, 호영을 포함한 또 다른 사람이 자기를 찾아왔다는 뜻이었다.
느낌상 정상호 사장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모르는 일이었다.
“빨리 안으로 모시세요.”
“차는 어떻게 할까요?”
“사장님과 미팅을 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비서의 안내를 받아서 겨울의 사무실 안으로 들어온 정상호 사장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생각보다 사무실 내부가 넓었을 뿐만 아니라 분위기 또한 상당히 고급스러웠기 때문이다.
자신의 사무실보다 훨씬 좋아 보였다.
“한 부사장, 사무실이 끝내주는데?”
“하하, 감사합니다. 이쪽으로 앉으세요.”
겨울은 정상호 사장에게 상석을 권했으나, 그는 손님석에 앉기를 고집했다.
겨울 또한 상석에 앉을 수는 없어서 그들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서 대화를 시작했다.
“사장님, 저희 회사는 어쩐 일이세요?”
“겸사겸사 들러 봤어.”
겸사겸사는 이 일도 하고, 저 일도 하기 위해서라는 뜻.
겨울은 정상호 사장이 자기를 만나러 온 이유 중에 하나는 확실하게 알았지만,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수학 문제처럼 머리를 끙끙 싸매 가며 풀어할 게 아님을 깨닫고 곧바로 이유를 물었다.
“정명훈 사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은센기 사장을 마중 나가려고.”
“네? 사장님이 직접 공항에 나가 보시게요?”
겨울의 질문을 받은 정상호 사장은 어떻게 설명해 줄까 짧게 생각한 후,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한 부사장, 우리 회사의 1년 매출이 얼마 정도인지 알고 있나?”
“1조가 조금 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H&E 트레이딩이 우리 회사에서 얼마를 수입할 예정인지 알고 있겠지?”
“정확하게 모릅니다.”
“2억 2,000만 달러(약 2,400억)가 조금 넘어.”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정상호 사장이 은센기 사장을 애지중지 다루는 이유가 한마디에 모두 함축되어 있었으니까.
SH무역의 연간 매출대비 24% 가까이를 H&E 트레이딩이 수입해 주고 있는데, 귀하게 대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비정상일 것이다.
게다가 물품 수입 대금 또한 선급금으로 지급하고 있으니, SH무역에게 은센기 사장은 최고의 바이어일 것이다.
겨울이 짧은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도 그의 얘기는 계속 이어졌다.
“…2억 2,000만 달러는 우리 회사가 H&E 트레이딩과 거래를 시작한 지 두 달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발주 받은 금액이야.”
“사장님은 H&E 트레이딩이 최소 5억 달러는 넘게 수입해 주기를 바라고 있으니까, 참고하고 있어라.”
정상호 사장의 말을 끝으로 호영이 겨울에게 결정타를 먹였다.
“그 얘기를 나한테 하는 이유가 뭐냐?”
“은센기 사장은 H&E 트레이딩이 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더라.”
“나는 H&E 트레이딩의 지분을 1%도 보유하고 있지 않아.”
“은센기 사장이 VIP들로부터 2억 2,000만 달러가 넘는 발주를 누구 때문에 받았을 것 같냐?”
“그게 나 때문이라고?”
“알면서 왜 그래? 남은 9개월 동안에 더도 말고 3억 달러만 수주해서 넘겨 줘.”
“으이구, 징그러운 놈.”
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정명훈 사장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겨울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서, 정상호 사장과 호영을 소개시켜 주었다.
정명훈 사장은 비서가 내온 커피를 한 모금 마신 후, 친근한 목소리로 정상호 사장에게 말을 건넸다.
“제가 사장님을 만나 보고 싶어 했다는 얘기를 한 부사장한테 들었습니까?”
정상호 사장은 처음 듣는 얘기였지만, 겨울을 위해서라도 그런 척했다.
“그래서 제가 정 사장님을 찾아뵈러 온 겁니다.”
“아, 그러셨군요?”
“정 사장님, 저희 SH무역에 대해서 잠깐 소개할 시간을 주실 수 있습니까?”
“얼마든지 말씀해 보십시오.”
“저희 SH무역은 송파구 잠실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작년 기준으로 연간 매출액은…….”
정상호 사장은 오늘과 같은 상황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SH무역의 현황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나갔다.
“…저희 SH무역에 기회를 주시면, H&J 컨설팅에 최상의 가격과 서비스를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정 사장님, 저를 만날 것을 대비해서 미리 연습하셨습니까?”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H&E 트레이딩의 은센기 사장을 만나면 브리핑하려고 연습해 두었습니다.”
정명훈 사장은 정상호 사장이 오버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H&E 트레이딩이 SH무역에서 수입하기로 한 품목은 정수기 5만 대 건을 포함해서 모두 네 건.
네 건의 수출 금액은 약 2,000만 달러가 조금 넘어가는 규모라고 겨울에게 들었다.
게다가 그 수출 건 역시 겨울이 수주한 것이지, 은센기 사장이 수주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정상호 사장도 그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 빤한데도, 은센기 사장한테 공 들이고 있었다.
그 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저희 SH무역은 아프리카 대륙에 위치한 나라들과의 무역 거래량은 형편없을 정도로 적은 금액입니다. 그러던 도중에 지난 1월에 한 부사장의 소개로 H&E 트레이딩의 은센기 사장을 소개받았고, 지금까지 2,000만 달러가 넘는 수출 계약을 체결할 수 있었습니다. 저희는 H&E 트레이딩을 교두보 삼아서 아프리카 대륙을 공략할 예정이기 때문에 은센기 사장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백수의 왕인 호랑이도 토끼를 사냥할 때 혼신의 힘을 다하는 법이거늘.
정명훈 사장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배에 기름이 잔뜩 끼었음을 깨달았다.
자기는 겨울이 씨 뿌리고, 정성스럽게 가꿔 놓은 농작물을 수확하는 월급쟁이에 불과할 뿐이지 않는가.
그 역할은 자기가 아니더라도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었다.
막말로 얘기해서 자기는 H&J 컨설팅과 H&J Investment의 최대 주주인 겨울이 자기를 자른다고 해도, 아무 저항 없이 짐을 챙겨서 회사를 떠나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회사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었으니.
이런 자기를 겨울이 아니꼽게 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등줄기를 따라서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정명훈 사장은 얼른 정신을 가다듬고 정상호 사장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정 사장님, SH무역이 아프리카 대륙에 확실하게 발판을 마련할 수 있도록 저희가 힘껏 돕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SH무역은 H&J 컨설팅의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도록 하겠습니다.”
“한 부사장한테 얘기를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저희와 거래하기 위해서는 파트너십 계약을 체결해야 합니다. 저희의 제안에 동의하십니까?”
“물론입니다.”
“오늘은 그렇고, 한가한 날을 잡아서 파트너십 계약을 체결했으면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잠시 대화가 끊어진 틈을 타서 겨울이 발언권을 요청했다.
“사장님, 은센기 사장을 마중하러 이제 떠나야 할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아차, 내가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은 것 같군. 은센기 사장을 내일쯤 만날 수 있도록 해 줄 수 있겠지?”
“네, 알겠습니다.”
겨울과 대화를 끝낸 정명훈 사장은 정상호 사장에게 정중하게 말을 건넸다.
“사장님, 언제 시간이 되면, 소주 한잔 기울이고 싶습니다.”
“불러 주시면,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오겠습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 * *
차장 밖을 쳐다보며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있던 정상호 사장이 입을 열었다.
“한 부사장, 정 사장님이 융통성이 없는 편은 아니지?”
“왜 그러시는데요?”
“아까 정 사장님과 대화를 나눌 당시에 처음에는 나를 신통치 않은 잡상인 정도로 취급했는데, 나중에는 진심으로 대하는 모습이 역력히 보여서 그래.”
“사장님도 그렇게 생각하셨어요?”
호영이도 그렇게 생각했다는 뜻이었다.
겨울만 그들의 대화가 새삼스러운 뿐이었다.
“저희 사장님이 그랬나요? 저는 전혀 느끼지 못했는데요.”
“한 부사장은 정 사장님과 항상 같이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사실을 모를 수 있어.”
“사장님, 저희 사장님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정상호 사장은 그 이유를 대충 감 잡고 있었지만, 굳이 겨울에게 밝혀서 좋을 것은 없었다.
“나는 잘 모르겠다.”
“한 부사장, 내가 얘기해 줄까?”
호영이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얘기해 봐.”
정상호 사장은 큰일 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호영이 느낀 점을 그대로 얘기했다가, 겨울이 기분 나빠 할 수도 있었기 때문에.
그는 겨울이 눈치채지 못하게 호영의 발을 살짝 건드렸다.
정상호 사장에게서 은밀한 신호를 받은 호영은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여 주고 겨울과 대화를 이어 갔다.
“우리 사장님이 정 사장님을 진심으로 대했기 때문이잖아.”
“진심은 통하는 법이라는 뜻이냐?”
“역시… 대한 그룹이 좋은 회사인 것은 확실하구나.”
“무슨 소리야?”
“너같이 무식한 돌 머리가 1년 만에 천재급으로 변했으니 하는 말이다.”
“네가 죽고 싶어서 무덤을 파는 구나.”
“농담을 진담으로 받는 버릇은 언제 버릴 건데?”
“죽어도 안 버릴 거다.”
“그건 그렇고, 네 차는 언제 태워 줄 거야?”
불리함을 느낀 호영이 얼른 화제를 전환했다.
“내 차라니?”
“어제 가을이가 네 차가 엄청나게 좋다면서 입에 침을 튀겨 가며 자랑하더라.”
“하여간 그 녀석은 못하는 말이 없어.”
“그만큼 나하고 친하다는 뜻이잖아.”
“지금 당장은 그렇고, 나중에 시간 날 때 태워 줄게.”
“기대하고 있으마.”
* * *
[이제 저희 비행기는 잠시 후, 대한민국의 인천국제공항에…….]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은센기 사장은 승무원의 기내 방송을 듣고 서서히 잠에서 깨어났다.
오랜 비행 끝에 굳어진 몸을 기지개를 켜서 풀고는 옆자리에 앉아 있는 가쿠타 부장에게 말을 건넸다.
“부장님, 설레지 않으세요?”
“솔직하게 말하면, 설레는 것보다 두려운 마음이 더 큰 것 같아요.”
“왜요?”
“대한민국이 낯선 나라인 점도 있고, 무엇보다 한국인 부하 직원들이 제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것 같아서요.”
은센기 사장은 가쿠타 부장의 고민을 단숨에 이해했다.
피부색이 원인이었다.
흑인에 대한 차별은 전 세계 어디서나 공통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현상이니,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기는 그 점에 대해서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가쿠타 부장님, 걱정도 팔자라는 말을 알고 계시나요?”
“뜬금없이 무슨 소리입니까?”
“부장님 뒤에 한 부사장님이 떡 버티고 있는데, 직원들이 함부로 행동할 수 있을까요?”
직원들이 반발하면 겨울의 힘을 빌리라는 말이었다.
가쿠타 부장은 은센기 사장의 조언이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겨울은 대한 그룹에 몸담고 있을 당시에는 편한 동료였지만, 지금은 엄연한 직장 상사였다.
게다가 직급 차이가 엄청나게 많이 나는.
시시콜콜한 일로 겨울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은센기 사장님, 인종차별 문제는 제가 어떻게든 스스로 해결하도록 할게요.”
“알겠어요. 그나저나 숙소는 마련했어요?”
“회사 근처에 위치한 오피스텔을 배정받았어요.”
“H&J 컨설팅이 복리후생 하나만큼은 확실한 것 같네요.”
“하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제 업무적인 얘기를 잠깐해 볼까요?”
은센기 사장은 진지한 표정으로 화제를 전환했다.
“정수기 70만 대 수입 건은 정명훈 사장님이 알면 절대로 안 됩니다.”
“저도 그 정도 눈치는 있어요.”
“그런데… 오코사 실장님께 발주 받은 일감은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가쿠타 부장은 은센기 사장의 마음이 훤히 들여다보였지만, 이번에는 그의 뜻을 따를 수 없었다.
물론, 자신들이 고집을 피우면, 이전처럼 겨울에게 양보를 받아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일로 인해서 겨울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는 않았다.
나중을 위해서라도 이번에는 욕심을 버리는 것이 맞았다.
“그 문제는 한 부사장님께 결정권을 넘겨야 할 것 같아요.”
“아깝기는 하지만, 부장님의 의견에 따를게요.”
은센기 사장과 가쿠타 부장이 소곤소곤 대화를 나누는 사이, 여객기는 인천국제공항에 무사히 착륙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