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궁하면 통한다
[저도 VIP들에게 H&J 컨설팅을 통해서 정수기를 공급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일언지하에 거부당했습니다.]
H&E 트레이딩이 수입하는 물품에 대한 이익 배분율을 알고 있는 사람은 부투야 실장이 유일했다.
H&J 컨설팅이 아닌 자신들에게 이익을 챙겨 주기 위해서 그가 VIP들을 직접 설득한 것이리라.
겨울은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가쿠타 부장에게 물었다.
[부투야 실장님이 제일 먼저 거부했고, 곧이어 다른 VIP들도 모두 거부했습니다.]
혹시 했는데 역시였다.
VIP들이 자기들에게 이익을 챙겨 주겠다고 하는데, 싫다고 거절할 수는 없었다.
겨울은 감사한 마음으로 그들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알았어요. 정수기 수입 조건에 대해서 얘기해 보세요.”
[먼저 정수기 숫자는 나이지리아를 포함한 다섯 개 나라에서 각각 10만 대씩입니다. 조건은 기존 정수기 수입 건과 동일하고, 납기는 H&E 트레이딩의 제안을 따르겠답니다.]
천만다행이었다.
만약에 납기에 최대한 빨리라는 말이 붙었으면, 골치 아픈 일이 발생했을 테니까.
“제가 무엇을 컨펌해 주면 됩니까?”
[다른 것은 문제없는데, 정수기가 언제부터 공급이 가능한지 알려 달라고 합니다.]
“납기는 언제까지 답을 해 줘야 합니까?”
[연합군들은 오전 정오쯤에 본국으로 돌아갈 예정이니까, 아무리 늦어도 한국 시간 기준으로 오후 3시까지만 연락 주시면 됩니다.]
콩고민주공화국과 한국의 시차는 여덟 시간.
따라서 그 나라 시간으로 정오면 한국 시간으로 저녁 8시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어떤 영문인지, 가쿠타 부장은 다섯 시간이나 앞선 오후 3시까지 답을 달라고 한다.
겨울은 자기가 모르고 있는 무언가 있다고 생각했다.
“가쿠타 부장님, 굳이 다섯 시간이나 일찍 답변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VIP들이 본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계약서를 작성하고 떠나겠답니다.]
“네? 계약을 너무 서두르는 거 아닙니까?”
[VIP들은 은센기 사장이 다음 주에 한국에 들어가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알겠습니다. SH무역하고 상의해서 최대한 빨리 연락을 줄게요.”
[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그건 그렇고, 가쿠타 부장님은 우리나라에 언제 입국할 예정입니까?”
[이번 주말에 입국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은센기 사장하고 같이 움직여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겨울은 곧바로 호영에게 전화를 걸어서 가쿠타 부장과의 통화 내용을 알려 주었다.
“…아무리 늦어도 오후 3시까지 공급 가능한 날짜를 통보해 줘야 해.”
[도착 기준이야, 출발 기준이야?]
“다섯 나라니까, 출발 기준이 맞을 거야.”
* * *
같은 시각.
SH무역의 정상호 사장은 아프리카 지역을 담당하고 있는 구명수 전무를 자신의 사무실로 불러들였다.
“구 전무, H&E 트레이딩의 은센기 사장이 정수기 20만 대 수출 건에 대해서 간이 계약서를 작성했으면 한답니다.”
T/T(현금 송금 방식, Telegraphic Transfer) 계약 방식의 경우, 바이어가 셀러한테 물품 수입 대금을 송금할 때에는 반드시 은행이 요구하는 구비 서류를 제출해야만 한다.
그중에는 당연히 계약서도 포함된다.
만약에 구비 서류를 제출하지 않으면, 외화 밀반출이 되기 때문에 은행은 절대로 송금해 주지 않는다.
게다가 콩고민주공화국은 외화가 항상 부족한 나라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H&E 트레이딩이 별다른 무리 없이 선급금 7,300만 달러를 송금할 수 있던 배경에는 엄청난 실력자가 떡하니 버티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구명수 전무는 그 실력자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오전 중에 계약서를 작성해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알았어요.”
“사장님, 그나저나 H&E 트레이딩의 실제 주인은 누구입니까?”
“나도 제 조카한테 궁금해서 물어봤는데, 은센기 사장이 실제 소유주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은센기 사장이 엄청난 신분의 소유자겠네요?”
정상호 사장은 구명수 전무가 질문한 의도를 단숨에 캐치했다.
언젠가는 알려질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다.
“은센기 사장은 전직 축구선수였고, 뒤를 봐주는 사람은 콩고민주공화국의 바통고 대통령입니다.”
“대통령이라니… 은센기 사장이 엄청난 배경을 두고 있었네요.”
“그러니까, 우리가 H&E 트레이딩에 공을 들이고 있는 겁니다.”
“사장님, 생각난 김에 하나만 더 여쭤도 되겠습니까?”
“이번엔 뭐가 궁금한 겁니까?”
“H&E 트레이딩과 한겨울 부사장과의 관계는 어떻게 됩니까?”
“H&E 트레이딩의 ‘H’가 한 부사장의 성입니다.”
정상호 사장의 말을 넓게 해석하면, 겨울도 바통고 대통령과 친분이 있다는 뜻.
그는 자신의 생각을 밝히며 맞는지 물었다.
“한 부사장은 콩고민주공화국, 나이지리아, 탄자니아, 우간다 대통령과도 친분이 있습니다.”
구명수 전무는 정상호 사장이 H&J 컨설팅과 파트너십을 체결하려는 이유를 이제야 확실히 깨달았다.
그는 겨울의 도움을 받아서 아프리카 대륙의 나라들과 무역을 확대할 생각인 것이다.
하긴 한겨울 덕분으로 벌써 7,980만 달러(약 880억)라는 엄청난 금액의 수출 계약을 체결했다.
이 추세가 이대로 계속 이어진다면, 올해 최소 2억 달러는 충분히 수출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그렇게 즐거운 상상을 하면서, 그는 정상호 사장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저희는 한 부사장을 업고 다녀야겠네요?”
“아무렴요.”
“이왕 말이 나온 김에 한 부사장의 카운터 파트너인 정호영 사원의 직위를 대리나 과장으로 승진시켜 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사실 정상호 사장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다른 직원들과의 형평성 때문에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자신의 조카라고 해도 입사 1년도 안 된 신입 사원을 승진시키는 것은 여러모로 문제가 많았다.
“성과가 나고 있으니, 조금 더 지켜보는 것으로 합시다.”
“네, 알겠습니다.”
똑똑.
그때, 비서가 사장실 문을 열고 들어와서 정호영 사원이 찾아왔다고 보고했다.
“이유가 뭐라고 합니까?”
“정수기 수출 건과 관련해서 긴급하게 보고할 것이 있다고 합니다.”
“안으로 들어오라고 하고, 원효석 실장도 부르세요.”
“네. 사장님.”
호영과 원효석 비서실장이 정상호 사장에게 목례하고 비어 있는 자리에 앉았다.
“정 사원, 무슨 일인지 얘기해 봐.”
“방금 전에 한겨울 부사장한테 전화를 받았는데, 나이지리아를 포함한 다섯 개 나라에서 정수기 50만 대를 더 발주받았답니다.”
“오, 오십 만 대?!”
정상호 사장이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설마 거짓말은 아니겠지?”
“사장님, 한 부사장이 저한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네 개 나라는 알겠는데, 하나는 어느 나라인가?”
“알제리라고 합니다.”
“한 부사장이 알제리는 언제 발을 뻗었다는데?”
“워낙 경황이 없어서 그것까지는 물어보지 못했습니다.”
“한 부사장을 지금 불렀나?”
“한 시간 정도 후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H&E 트레이딩과 거래 조건은 어떻게 되지?”
“기존과 똑같고, 오늘 오후 3시까지 선적 가능한 날짜를 통보해 줘야 합니다.”
“알았어.”
호영과 대화를 종료한 정상호 사장은 원효석 실장에게 말을 건넸다.
“청우정수기가 정수기 50만 대를 커버하지 못하겠지요?”
“저도 사장님과 생각이 같습니다.”
“플랜 B를 마련해 놓아야 하는 게 아닐까요?”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호영은 적어도 지금은 플랜 B가 소용없다고 생각했다.
플랜 B를 마련한다는 얘기는 정수기 제조 업체를 바꾼다는 말과 같은 의미.
즉, 정수기 거래를 위해서 모든 절차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시간적인 여유가 충분하면 상관없겠지만, 자신들에게는 불과 여섯 시간밖에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잠시 대화가 중단된 틈을 타서 호영이 발언권을 요청했다.
“사장님, 은센기 사장이 콩고민주공화국 시간으로 오늘 오전에 바이어들과 계약한다고 합니다.”
“시간이 없다는 뜻인가?”
“네, 그렇습니다.”
“생각해 놓은 방안이 있나?”
“제 생각은…….”
정상호 사장은 호영의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주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 모든 거래에서는 물품을 구입하는 사람이 갑의 위치에 있다.
그런데 호영이 방금 언급한 아이디어는 청우정수기 측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조건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만약에 그들이 자신들의 의도를 쫓아오지 않는다면, 생각지도 못한 곤란을 겪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우리가 청우정수기의 페이스에 말리지 않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이리저리 생각 끝에 제법 괜찮은 아이디어를 생각해 냈다.
“구 전무는 청우정수기의 박 사장을 오전 10까지 우리 회사로 와 달라고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오늘 청우정수기 측과의 협상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다른 사람들은 끼어들지 마세요.”
“네, 사장님.”
* * *
임원 회의실.
정상호 사장은 테이블 위에 놓인 생수병을 들어 물을 마시고, 차분한 목소리로 청우정수기의 박종훈 사장에게 말을 건넸다.
“박 사장님, H&E 트레이딩으로부터 정수기 50만 대를 발주 받을 예정입니다.”
“네?! 정말입니까?”
예상한 대로 박종훈 사장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제가 박 사장님께 거짓말할 이유가 있을까요?”
“…죄송합니다.”
“최종 바이어는 다섯 개 나라이고, 거래 조건은 기존과 동일합니다. 최종 바이어가 언제 선적이 가능한지 알려 달라고 하는 상황입니다.”
박종훈 사장은 장영호 부사장과 귓속말로 대화를 주고받은 후, 정상호 사장의 질문에 대답했다.
“저희가 한 달 동안에 생산할 수 있는 정수기는 8만 대가 최대입니다. 5월 말에는 2만 대, 6월부터 11월 말까지 매월 8만 대씩 공급하겠습니다.”
“다섯 개 나라에 5월에는 각각 4,000대, 그 후부터 1만 6,000대씩 공급하겠다는 뜻으로 해석하면 되겠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만약에 최종 바이어가 납기를 단축시켜 달라고 하면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현재로서는 답이 없는 상황입니다.”
정상호 사장은 박종훈 사장의 그런 답변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를 자신들의 페이스로 끌어당기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생각해 놓은 방안을 꺼내야 했다.
“박 사장님, 우리나라에 정수기 제조 회사가 청우정수기밖에 없다고 생각하시는 건 아니시겠죠?”
박종훈 사장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H&E 트레이딩에 정수기를 수출하는 건은 SH무역이 갑이고, 자신들은 을임을 일깨워 주는 말이었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SH무역이 다른 정수기 제조 회사와 거래하더라도, 자신들이 이의를 제기할 권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마치 자신들이 갑인 것처럼 행동했으니, 정상호 사장이 이런 말을 꺼낼 만도 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런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막아야 하는 상황.
역시 궁하면 통한다는 말이 있듯이 머리를 엄청나게 혹사시킨 끝에 OEM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냈다.
‘이 바보 멍청아, 다른 정수기 제조 업체에 OEM을 주면 되잖아. 지금부터 자재를 준비하면…….’
그는 머릿속으로 계산을 끝내고, 정상호 사장의 질문에 대답했다.
“정 사장님, 5월 말에 10만 대, 6월 말에 20만 대, 7월 말에 20만 대를 공급하도록 하겠습니다.”
“해법을 찾았습니까?”
“다른 정수기 제조업체에 OEM 줄 생각입니다.”
“알겠습니다.”
박종훈 사장과 대화를 끝낸, 정상호 사장은 시선을 겨울에게 옮기며 물었다.
“한 부사장, 정 사장님의 의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가급적이면 상반기 안에 정수기 선적을 마무리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서두르는 이유가 있습니까?”
“느낌상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로부터 정수기 발주가 계속 이어질 것 같아서 그럽니다.”
겨울의 말을 들은 정상호 사장은 입가에 함박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박 사장님, 한 부사장의 얘기를 들었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상반기 중에 정수기 생산을 끝내도록 하겠습니다.”
“정수기 50만 대에 대한 선급금은 다음 주 중에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장님.”
긴급회의를 끝내자마자 겨울은 가쿠타 부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결정된 내용을 알려 주고, 부탁의 말을 꺼내 들었다.
“은센기 사장한테 제발 사고 치지 말라고 전해 주십시오.”
[하하하, 알겠습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