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서서히 드리워지는 전운
겨울과 정수기 수입과 관련한 합의를 끝낸 모우라 사장은 다른 일정이 있다면서, 티지아니 마케팅 부사장과 함께 H&E 트레이딩을 떠나갔다.
겨울은 즉시, 은센기 사장, 가쿠타 과장 모두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있는 정수기 유통경로를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H&E 트레이딩은 SH무역이 아닌 H&J 컨설팅과 계약을 진행하면 됩니다.”
“저는 한 부사장님의 의견을 수용할 수 없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상한 대로 은센기 사장과 가쿠타 과장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겨울은 두 사람이 반대한 이유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이 돈 때문이었다.
H&E 트레이딩이 SH무역이 아닌 H&J 컨설팅에서 정수기를 수입하면, 모우라 사장이 약속해 준 이익 25%를 온전하게 가지고 갈 수 없었다.
즉, H&J 컨설팅과 이익을 나눠야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가쿠타 과장은 정수기 수출에 H&J 컨설팅이 끼어들게 되면, 배정받을 이익 10%가 날아갈 것을 우려하고 있는 것이고.
겨울은 두 사람의 입장을 고려해서 한 발 물러서기로 결정했다.
“그럼 NIGA에 정수기를 수출하는 건은 H&J 컨설팅을 개입시키지 않겠습니다.”
“하하하, 알겠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이익 분배 방식에 대해서 정리하고 넘어갔으면 좋겠습니다.”
“네, 얼마든지요.”
“제가 대한 그룹에 소속되어 있을 때는 겸업 금지 때문에 어쩔 수없이 편법을 사용했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익을 우리 셋이 나누는 것은 NIGA에 정수기 수출 건이 마지막입니다. 제 말에 동의하십니까?”
“저는 한 부사장님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저도 같은 입장입니다.”
두 사람의 동의를 이끌어낸 겨울은 H&E 트레이딩과의 관계를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기로 결정했다.
“은센기 사장님, 이제부터 제가 하는 말이 섭섭하더라도 이해해 주십시오.”
“네, 말씀하십시오.”
긴장한 듯, 대답하는 은센기 사장의 목소리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H&J 컨설팅 내부에 아프리카 무역팀을 설치할 예정이고, 팀장은 가쿠타 과장님이 맡을 예정입니다. 아프리카 무역팀은 아프리카 대륙의 모든 나라들과 비즈니스를 전개할 예정인 데에 반해서, H&E 트레이딩은 아프리카 전역을 커버할 수 없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 점에 대해서는 저도 동의합니다.”
“H&J 컨설팅은 H&E 트레이딩이 커버할 수 없는 다른 나라들에 대해서는 협력 업체를 별도로 선정할 예정입니다.”
“얼마든지 그렇게 하십시오.”
“마지막으로 코발트 운송 사업은 절대로 등한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야 물론입니다.”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여기까지입니다.”
“알겠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소파에서 일어난 은센기 사장은 책상에서 파일을 하나 가지고 와서 겨울에게 건네주었다.
“이게 뭡니까?”
“네 개 나라와 체결한 정수기 공급 계약서입니다.”
“네? 벌써 계약을 완료했다는 말입니까?”
겨울이 믿기지 않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은센기 사장이 가쿠타 과장에게 전화를 받은 것은 지난주 화요일 오후.
콩고민주공화국과 나이지리아에 정수기를 공급하는 계약은 겨울이 직접 진행할 예정이니까, 탄자니아와 우간다만 계약을 진행하라는 내용의 전화였다.
정수기는 빨라야 3월 말이나 선적가능 하다는 얘기를 호영에게 들은 상태라서, 2월 말까지 계약을 체결하면 충분할 것으로 생각하다고 있었다.
하지만 웬걸.
화요일 저녁때 부투야 실장이 정수기 공급 계약을 체결하러 대통령 관저로 빨리 들어오라고 전화로 말했다.
계약을 체결하던 도중에 부투야 실장으로부터 네 개 나라가 정수기 계약을 서두른 이유를 알게 되었다.
겨울에게 금전적으로 도움을 주기 위함이라는 사실을.
그 사실을 알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어서, 수요일 오전부터 바쁘게 움직여서 정수기 공급계약을 체결하고 토요일에 돌아왔다.
은센기 사장은 지난주의 기억을 떠올리며, 겨울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습니다.”
사실 겨울은 부투야 실장 등이 정수기 5만 대를 자신에게 발주할 당시에 이익금 25%를 H&J 컨설팅 운영 자금으로 사용하라는 목적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VIP들이 계약을 서두르는 것을 보는 순간, 목적이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VIP들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자기에게 회사와는 상관없이 전별금을 챙겨 줄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대한 그룹 퇴사가 예정되어 있는 이상, 겨울은 VIP들의 호의를 부담감 없이 받아들이기로 결정했다.
“수고하셨습니다.”
“선급금 받은 것은 어떻게 할까요?”
즉, 지금 이익을 나누자는 얘기였다.
느낌상 가쿠타 과장은 자신들이 얼마를 분배받아야 하는지 계산해 놓고 있는 것 같았다.
“가쿠타 과장님, 우리가 얼마씩 분배받아야 하는지 산출해 놓으셨나요?”
“네. 부사장님은 245만 달러, 은센기 사장님은 70만 달러, 저는 35만 달러를 분배받으면 됩니다.”
가쿠타 과장과 대화를 끝낸 겨울은 은센기 사장에게 말을 건넸다.
“들으셨죠?”
“넵, 알겠습니다.”
은센기 사장은 은행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각자 지정한 계좌에 해당 금액을 송금했다.
모든 절차가 끝나자, 겨울이 은센기 사장에게 또다시 말을 걸었다.
“저한테 정수기 공급계약서와 이익 분배합의서를 한 부씩 카피해서 주세요.”
“세금 문제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네, 그래요.”
은센기 사장은 루암바 과장을 불러서 겨울의 지시를 전달했다.
그 막간을 이용해서 가쿠타 과장이 은센기 사장한테 비즈니스 비자를 발급받으려는 이유를 물었다.
“아, 그거요? SH무역에서 저를 초대했습니다.”
“왜요?”
“정수기 5만 대 공급 계약서를 한국에서 체결하자고 하더라고요.”
“언제 한국에 들어갈 예정인데요?”
“3월 초에 들어갈 예정입니다.”
“알았어요. 우리 한국에서 한 번 뭉칩시다.”
“그야 물론이죠.”
겨울은 은센기 사장과 약간의 대화를 더 주고받은 후,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저녁 식사 장소로 출발했다.
“한 대리님, 저를 챙겨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겨울은 가쿠타 과장이 어떤 이유로 고마움을 표현해 왔는지 알고 있었다.
정수기 20만 대 수출 계약을 H&J 컨설팅이 아닌 H&E 트레이딩이 진행하기로 결정한 것에 대한 고마움이리라.
“챙겨 주다니요? 기존에 합의한 대로 이익을 나누는 거잖아요.”
“정수기 20만 대 수출 건과 관련해서 제가 하는 일이 아무것도 없잖아요.”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면 되잖아요.”
“제가 어떤 일을 하면 됩니까?”
“아직 생각나는 것은 없지만, SH무역과 상의해 보시면 찾을 수 있을 겁니다.”
“한국에 들어가는 대로 SH무역의 정호영 씨를 만나 보겠습니다.”
윙윙―
겨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나이지리아의 오코사 실장이 걸어 온 전화였다.
“네, 실장님.”
[한 부사장님, 방금 전에 NIGA의 모우라 사장과 통화했습니다. 정수기 수입 계약을 3월로 미룬 이유가 있습니까?]
사실 정수기 계약을 3월로 미룬 이유는 아직 H&J 컨설팅의 사업자등록증이 발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H&J 컨설팅을 통하지 않기로 결정한 이상, 그것을 언급할 필요는 없었다.
“최초 선적이 4월 말이라서 일부러 계약을 늦췄습니다.”
[아, 그렇군요.]
“실장님, 저희한테 이익을 25%를 챙겨 주면, NIGA가 손해가 발생하지 않을까요?”
[이익이 거의 남지 않는다고 하기에 특급 정보를 하나 건네주었습니다.]
테슬라와 관련된 정보를 제공했다는 말이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제가 한 부사장님께 전화한 이유는 방금 전에 천유런 중국 외교부장이 협상단을 이끌고 내일 우리나라로 온다고 연락해 왔습니다.]
오코사 실장은 중국 시간 기준으로 지난주 금요일 새벽 2시경에 중국 대사를 불러서 선전포고를 날렸다.
중국 정부는 불과 3일 만에 모든 협상단 구성까지 완료하고, 나이지리아로 출발하기 위한 준비를 끝내 놓고 이를 통보해 온 것이다.
중국 정부가 이토록 신속하게 움직인 이유는 그만큼 상황이 심각하다고 여긴 탓이리라.
이를 반대로 해석하면, 연합군들은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 중국 정부와 전쟁을 치를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짧게 생각을 끝낸 겨울은 오코사 실장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중국 정부가 똥줄이 탄 것 같네요.”
[하하하, 저하고 생각이 똑같네요.]
오코사 실장이 즐거워하는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서 들려왔다.
“이번 기회에 중국을 시원스럽게 코너로 몰아붙이십시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입니다.]
“연합군들한테 알려 주었습니까?”
[이제 해 줄 생각입니다.]
“부투야 실장께는 제가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알았어요. 미국에도 알려 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오코사 실장과 통화를 끝낸 겨울은 곧바로 해리슨 상원의원에게 전화를 걸어서, 천유런 중국 외교부장의 나이지리아 방문 사실을 알렸다.
[중국 정부가 어지간히 급했나 보네요.]
사람들의 생각은 거기서 거기라는 듯 해리슨 상원의원도 자기와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것 같습니다.”
[내일 오코사 실장을 만나면, 절대로 급하게 협상에 임하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중에 통화합시다.]
그때, 겨울의 머릿속에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상원의원님, 미국 정보기관이 천유런 외교부장과 관련된 파일을 가지고 있을까요?”
[그건 왜 묻습니까?]
“오코사 실장님이 천 외교부장에 대한 정보를 미리 파악해 놓고 있으면, 협상에서 유리할 것 같아서 그럽니다.”
[아, 무슨 말인지 알았어요. 내가 오코사 실장과 통화해서 적절한 조치를 취해 놓을게요.]
“이제 진짜로 나중에 통화하겠습니다.”
* * *
프랑스 정통 레스토랑.
약속 시간이 되자 부투야 실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겨울은 재빨리 추성민 이사를 그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상견례가 끝나자,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정통 프랑스식 정찬이 시작되었다.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식사 시간이었지만, 겨울과 하도진 부지점장의 깨알 같은 노력으로 인해서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끝마쳤다.
포크로 디저트를 한 점을 떠서 입에 넣은 겨울이 부투야 실장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실장님, 중국의 천유런 외교부장이 협상단을 이끌고 나이지리아를 내일 방문한다고 합니다.”
“네? 그렇게 빨리요?”
부투야 실장도 믿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나타냈다.
“이곳으로 오던 도중에 오코사 실장님께 전화 받았습니다.”
윙윙―
그때, 부투야 실장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중요한 전화인지 핸드폰을 들고 밖으로 나갔다.
제법 긴 시간이 지난 후, 부투야 실장이 문을 열고 들어와서 자신의 자리에 앉으며 입을 열었다.
“방금 전에 중국 대사한테 전화가 왔는데, 내일 오전에 나를 만나러 오겠다고 합니다.”
겨울은 중국 정부의 전략이 빤히 보였다.
그들은 나이지리아를 상대하기 전에 연합군들을 각개격파해서 세력을 약화시킬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리라.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들의 전략이 먹히면, 오코사 실장의 협상력은 급격하게 약화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연합군들은 중국에 더욱더 예속되는 상황이 초래될 것이다.
결국에는 H&J 컨설팅과 H&J Investment의 비즈니스 영역 또한 대폭 축소되는 상황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절대로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마음은 없었다.
“부투야 실장님, 중국 대사를 굳이 만나 줄 필요가 있을까요?”
“내일은 만나주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한 번 만나 줘야 할 겁니다.”
“이번 기회에 중국 대사한테 쌓인 스트레스를 시원하게 해소하십시오.”
“안 그래도 그럴 생각입니다.”
“잠깐만 기다려 주십시오.”
부투야 실장은 겨울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이유가 무엇인지 눈치챘다.
“한 대리님, 내가 문두야 부통령과 마사카 부통령에 전화해서 단속해 놨습니다.”
“아, 알겠습니다.”
“이제 다른 얘기를 잠깐 해 봅시다.”
부투야 실장은 가방에서 USB 여러 개를 꺼내서 정명훈 법인장에게 건네주었다.
“실장님, 이 USB는 뭡니까?”
“현재 우리나라에서 중국 국영 회사가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들입니다. 그들이 철수하면, H&J Investment에서 투자해 주십시오.”
“저희가 투자하기 전에 타당성 검토와 현장 실사를 진행했으면 합니다.”
“얼마든지 하십시오. 이제 저녁 식사도 끝냈으니까, 2차 가실까요?”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