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오는 사람들, 가는 사람들
그런데 문제점이 있었다.
만약에 이 문제가 명쾌하게 해결되지 않으면, 해리슨 상원과의 합의는 공염불이 될 가능성도 있었다.
나중에 발생할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라도 확실하게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었다.
“상원의원님께서 저한테 해 주신 약속이 미국 정부의 공식 의견인지 확인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럼요. 당연히 그렇게 해 드릴 예정입니다.”
“그렇다면 저는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겠습니다.”
겨울과 해리슨 상원의원의 대화를 지켜보던 장대산이 자신의 의견을 입에 올렸다.
“아버지, 이번 기회에 한 대리님과 우리나라가 정식으로 합의서를 체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오오, 그거 좋은 아이디어인데?”
그러나 두 사람과는 다르게 겨울은 신중하게 반응했다.
“해리슨 상원의원님, 저는 연합군들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았다는 위임장을 소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제가 합의서에 사인하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일단 부투야 실장님과 통화해서 해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겨울은 지체하지 않고 부투야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한 대리님.]
자신의 전화를 기다리고 있다는 듯 신호가 가자마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투야 실장님, 방금 전에 해리슨 상원의원님과 합의한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네, 얘기해 보세요.]
“미국 정부는 조건 없이 연합군들의 손을 들어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네?! 그게 정말입니까?]
깜짝 놀란 부투야 실장의 목소리.
“네, 실장님.”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정말로 반대급부를 요구하지 않았습니까?]
“네, 물론입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실장님께서 연합군을 대표해서 미국 정부와 합의서를 체결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으음… 저도 미국에 가고 싶지만, 당장 비자가 없습니다.]
예상치 않은 문제가 발생했다.
이럴 때는 부투야 실장을 초청하는 사람에게 뜨거운 감자를 던져 버리는 것이 최고였다.
“제가 해리슨 상원의원님을 바꿔 드릴 테니까, 비자 문제에 대해서 말씀해 보십시오.”
[그게 좋겠네요.]
핸드폰을 건네받은 해리슨 상원의원은 부투야 실장과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고, 본격적인 대화를 시작했다.
간간히 들려오는 웃음 소리로 보아, 비자 문제는 깔끔하게 해결된 것 같았다.
제법 시간이 많이 지난 후에 핸드폰이 겨울에게 되돌아왔다.
“부투야 실장님, 잘 처리됐습니까?”
[네, 한 대리님 덕분에요.]
“언제 오실 예정입니까?”
[최대한 빨리 움직이면, 내일 오후에는 미국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출발하시기 전에 연락 주십시오.”
[네, 그렇게 할게요.]
해리슨 상원의원은 겨울의 시원시원한 일처리가 마음에 들었다.
“한 대리님,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제가 수행해야 할 역할에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이제 다른 얘기를 잠깐 해 봅시다.”
“네, 말씀하십시오.”
“한 대리님이 컨설팅 회사를 설립하면, 우리 대산이 밥 굶기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까?”
즉, 일감을 보유하고 있는가에 대해 묻는 거였다.
“네. 약속드릴 수 있습니다.”
“알았어요. 대산이와 함께 컨설팅 회사를 세계적인 회사로 키워 보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결론을 낸 듯, 한 문장으로 마무리를 지은 해리슨 상원의원의 표정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지금까지의 긴 대화도 부상을 아랑곳하지 않는 그의 열정 때문에 가능하던 것이리라.
장대산은 얼른 그를 부축해서 침대에 눕혔다.
“아버지, 안색이 안 좋아요. 너무 무리하셨나 봐요.”
“안 그래도 쉬려고 했어.”
“저희는 호텔로 돌아가서 컨설팅 회사와 관련한 대화를 나눠 볼게요.”
“그렇게 해라.”
* * *
호텔에 돌아온 겨울은 정말 묻고 싶은 질문부터 던졌다.
“대산 씨, 내가 열흘 전에 전화해서 주사를 많이 부렸나요?”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한 대리님은 그때 저와 통화하지 않았습니다.”
“네? 그럼… 해리슨 상원의원님께 한 얘기는 뭡니까?”
“제 아버지를 안심시키기 위한 고육책이었어요.”
“제가 컨설팅 회사를 설립할 예정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알아냈어요?”
“한 대리님이 케이프타운에서 술 마시며 혼잣말을 내뱉는 소리를 비밀 경호원이 들었어요. 본의 아니게 거짓말해서 미안해요.”
“괜찮아요. 그런데 저하고 합류하려고 회사에 사표 낸 건 아니겠죠?”
“여러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중에 포함되어 있긴 합니다.”
“알았어요. 더 이상 묻지 않을게요.”
“이제 컨설팅 회사와 관련한 얘기를 들어 보고 싶네요.”
“아직 구체화가 안 됐다는 점을 참고하고 들어 주세요.”
겨울은 정명훈 법인장과 나눈 대화 내용을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래서 제 퇴사 시점은 3월은 되어야 할 것 같아요.”
“그렇게 퇴사가 늦어지는 이유가 있겠죠?”
“제가 관여하고 있는 송유관 건설 공사 입찰이 3월 중순에 있을 예정이거든요. 그것까지 마무리 짓고 나오려고요.”
“송유관 건설 공사 입찰과 관련한 정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거죠?”
“해리슨 상원의원님께도 말씀드렸지만, 송유관 건설 공사는…….”
겨울의 얘기를 들으면서 장대산은 송유관 건설 공사 입찰이 예정대로 진행되지 않을 거라고 판단했다.
이유는 33.3%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CNOOC 때문에.
탄자니아와 우간다가 중국에 선전포고를 날릴 때 CNOOC를 걸고 넘어질 것이 빤한 상황.
CNOOC라는 송유관 건설 공사 입찰의 한 축이 빠지게 되면, 입찰은 자연스럽게 연기되거나 취소될 수밖에 없다.
장대산이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겨울의 설명도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해서 공정한 조건에서 입찰을 진행할 예정입니다.”
“한 대리님, 송유관 건설 공사 입찰은 잊어버리시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왜요?”
“탄자니아 및 우간다의 대통령 등에게 백도어가 설치된 핸드폰을 선물로 준 놈들이 CNOOC입니다. 두 나라가 CNOOC를 가만히 내버려 두겠습니까?”
장대산의 얘기가 백번 옳았다.
겨울은 특단의 대책이 있는지 강구하기 위해 생각에 잠겼다.
잠시 뒤, 기발한 아이디어를 하나 떠올린 겨울이었다.
“대산 씨, CNOOC가 퇴출되면…….”
겨울의 아이디어는 나쁘지 않았지만, 장대산이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었다.
해리슨 상원의원의 힘이라면 몰라도.
“아버지께 말씀드려 볼 테니까, 이틀만 시간을 주세요.”
“혹시 모르니까, 정명훈 법인장님한테 다른 아이디어가 있는지 물어볼까요?”
“그게 낫겠네요.”
겨울은 정명훈 법인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컨설팅 회사 설립과 관련한 보고와 더불어 송유관 건설 공사와 관련한 얘기를 꺼냈다.
정명훈 법인장은 겨울의 아이디어를 조금 더 구체화시키는 방법을 일러 주었다.
겨울의 얘기를 들은 장대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아버지께 다녀올 테니까, 호텔에서 쉬고 계세요.”
장대산이 떠나가자, 겨울은 즉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대리님, 설마 지금 일어난 건 아니겠죠?]
“에이, 그럴 리 있겠습니까?”
[그럼 어쩐 일로 연락 주셨습니까?]
원래 계획대로라면, 브라이언 박사 등은 휴식을 마치고 그저께 오후에 아프리카로 돌아갔어야 했다.
하지만 겨울의 미국 출장 소식을 듣고 만나고 간다며 일부러 오늘 오후로 출국 일정을 미뤄 놓은 것이었다.
“브라이언 박사님, 공항에 나가보지 못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하하,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번에는 어느 나라로 봉사하러 가십니까?”
[탄자니아에서 세 달 정도 머무를 예정입니다.]
“제가 탄자니아에 출장 가면, 꼭 찾아뵙겠습니다.”
[그럽시다.]
겨울은 브라이언 박사부터 안젤리카 간호사까지 일일이 안부를 챙기며 작별 인사를 전했다.
* * *
같은 시각.
해리슨 상원의원을 찾아간 장대산은 겨울과 나눈 대화 내용을 자세하게 전달했다.
“아버지가 대책을 세워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한 대리가 아버지처럼 믿고 따르는 정명훈 법인장이 누구인지 파악해 놓은 것은 있니?”
“대한 그룹에서 아프리카에 대해 제일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겁니다.”
“네 생각은 어때?”
“저는 두 사람의 아이디어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알았다.”
생각을 정리한 해리슨 상원의원은 송훈석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서 제법 긴 시간 동안 통화한 후, 전화를 끊었다.
“대산아, 한 대리한테는 비밀로 해라.”
“네, 아버지.”
* * *
송훈석 회장은 출근하자마자 집무실로 서동호 실장을 불렀다.
“회장님,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앉아서 얘기하자고.”
서동호 실장이 소파에 앉자, 송훈석 회장이 심각한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출근길에 해리슨 상원의원이 전화를 걸어왔는데, 느낌이 좋지 않아.”
“해리슨 상원의원이 뭐라고 했습니까?”
“우간다와 탄자니아를 연결하는 송유관 건설 공사와 관련해서 상의할 게 있다면서 미국으로 와 달라고 하더라고.”
“언제까지요?”
“미국 시간으로 모레쯤에는 만나 봤으면 하더라고.”
“혼자 오시랍니까?”
“송유관 입찰을 준비하는 책임자와 같이 오라고 하더군.”
“문세형 사장은 해외 출장 중이니까, 조병석 실장을 데리고 가겠습니다.”
“알았어. 그런데 말이야… 해리슨 상원의원이 정명훈 법인장을 알고 있는 듯한 눈치였어.”
“그분이 정 법인장을 어떻게 알고 있을까요? 제가 전화해 볼까요?”
“빨리해 봐.”
서동호 실장은 즉시 정명훈 법인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명훈 법인장입니다.]
“정 법인장, 새벽에 전화해서 정말 미안해요.”
[아닙니다. 말씀하십시오.]
“회장님께서 통화하고 싶어 하십니다.”
[네, 알겠습니다.]
서동호 실장에게 핸드폰을 건네받은 송훈석 회장은 간단하게 안부를 전하고, 묻고 싶은 안건을 꺼내 들었다.
“정 법인장, 송유관 건설 공사 입찰과 관련해서 변동 상황이 있습니까?”
[네.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어떤 상황인지 얘기해 보세요.”
[탄자니아와 우간다가 빠르면 이달 중에 중국에 선전포고를 날릴 예정입니다.]
“너무 서두르는 것 아닙니까?”
[사실은 지난 일요일에 알제리에서 중국의 화웨이 직원들이 스파이 혐의로 전격 체포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명훈 법인장의 얘기를 들으면서, 송훈석 회장은 두 나라가 서두르는 이유를 이제야 확실히 알았다.
비록 임시방편으로 뒷수습을 해 놓았지만, 중국 측에서 뭔가 이상하다고 여길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중국이 이를 눈치를 채는 순간, 네 나라의 전략은 상당한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을 우려해서 선전포고 시간을 앞당긴 것이리라.
송유관 건설 공사 입찰도 당연히 영향을 받을 것이 확실한 상황.
송훈석 회장이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 정명훈 법인장이 놀랄 만한 보고를 해 왔다.
[지금 한겨울 대리가 미국에 출장 가 있는 상황입니다.]
“정 법인장, 한 대리의 미국 출장 목적은 뭡니까?”
[표면적인 목적은 장대산 씨의 양아버지를 병문안 하는 것이지만, 숨은 목적은 미국을 연합군의 우호 세력으로 끌어들이는 겁니다.]
“협상 상황이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보고 받았습니까?”
[미국 시간 기준으로 내일 오후에 연합군 대표와 미국 정부 대표가 만나서 합의서에 사인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한 대리가 양측의 합의를 이끌어 냈다고 판단하면 됩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 법인장이 한 대리한테 협상 전략을 코치해 줬습니까?”
[코치라기보다 조언을 해 준 사실은 있습니다.]
정명훈 법인장의 이름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해리슨 상원의원의 귀에 들어갔는지 대충 감이 잡혔다.
겨울이 해리슨 상원의원과 협상 과정에서 그의 이름을 언급한 것이리라.
짧게 생각을 끝낸 송훈석 회장은 정명훈 법인장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수고했어요. 나중에 통화하십시다.”
[네, 회장님.]
송훈석 회장이 전화를 끊자, 서동호 실장이 말을 붙여왔다.
“회장님, 이번 협상에도 키맨이 한 대리입니까?”
“그렇다고 하더라고.”
“이제는 한 대리를 놔 줘야 할 것 같네요.”
“누구 마음대로.”
송훈석 회장의 단호한 목소리에 서동호 실장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그러면 진짜로 한 대리를 임원으로 승진시킬 생각입니까?”
“그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이 있지.”
“정말로 그 방법을 사용할 생각입니까?”
서동호 실장이 믿지 못하겠다는 듯 재차 물었다.
“그 방법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으면 얘기해 봐.”
“저번에는 안 된다고 하셨잖아요.”
“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했지, 안 된다는 말은 안 했어.”
“가능성이 있기는 합니까?”
“서 실장은 내가 가능성 없는 것에 배팅하는 것 봤어?”
“하하하, 알겠습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