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화] 유일무이한 사람
다음 날, 아침.
냉장고에서 찬물을 꺼내 벌컥벌컥 들이마신 겨울은 비틀거리며 소파로 이동해서 대자로 누워 버렸다.
“아이고, 죽겠다.”
한참 동안 멍하니 누워 있던 겨울은 몸을 일으키고, 어젯밤의 술자리를 기억에 떠올렸다.
자기도 남들에 지지 않을 정도의 주량을 가지고 있었으나, 브라이언 박사와 램버트 교수는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그들과 호기롭게 술로 내기를 벌인 자신이 멍청할 따름이었다.
“그래도 그렇지… 독한 양주를 물처럼 마시는 사람들이 어디 있어. 그나저나 대산 씨는 술내기에 왜 끼어들어 가지고… 괜찮으려나…….”
겨울은 장대산이 잠들어 있는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어 보았다.
지축을 울리는, 낯익은 코고는 소리.
살아 있음을 확인한 겨울은 조용히 문을 닫고 소파로 돌아와서 호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빨리도 전화했네.]
잔뜩 심사가 뒤틀린 목소리였다.
어제 저녁때 브라이언 박사 등과 한창 술판을 벌이고 있는 동안, 호영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도저히 통화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 조금 있다가 전화해 주겠다는 멘트를 남기고 급하게 통화를 종료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필름이 끊겼고, 열두 시간이 지난 지금에야 기억을 떠올리고 전화했으니, 호영의 입에서 좋은 소리가 나올 리가 없었다.
“미안하다. 어젯밤에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전화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어.”
[그건 그렇고, 미국에 출장은 왜 간 거야?]
“어라? 내가 미국에 출장 온 걸 니가 어떻게 알아?”
[은센기 사장이 친절하게 알려 주더라.]
“아, 그렇구나.”
[그래서? 내가 한 질문에는 언제 대답해 줄 건데?]
사실 겨울이 시간을 끈 이유는 적당한 변명거리를 찾기 위함이었다.
문제는 아직도 그럴 듯한 답변거리를 찾지 못했다는 데에 있었다.
이럴 때야말로 만병통치약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비즈니스.”
[어떤 비즈니스 때문에 미국을 갔는데?]
“나중에 확정되면 얘기해 줄게.”
[뭔가 말 못할 사연이 있는 거야?]
“어.”
겨울이 얼떨결에 진심을 말해 버렸다.
[알았어. 묻지 않을게.]
다른 사람들 같았으면 궁금증을 해소할 때까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며 괴롭힐 법도 하건만, 호영만은 예외였다.
그는 웬만해서는 선을 넘지 않았다.
그런 점을 겨울이 좋아하는 것이고.
“그나저나 왜 전화했어?”
[네가 비행기를 타고 미국으로 가고 있는 동안 은센기 사장과 통화했는데, 비즈니스 건수가 하나 있는 것처럼 얘기하더라.]
“비즈니스?”
[부투야 실장님이 은센기 사장한테 제법 돈이 되는 일감을 하나 주려고 하나 봐. 혹시 네가 알고 있는 것이 있나 해서.]
겨울은 머리를 쥐어짜며 생각해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네.”
[부투야 실장님과 통화할 일이 있으면 비즈니스 건이 무엇인지 물어봐 줘.]
“그 정도 서비스는 해 줄게.”
[고맙다. 나중에 통화하자.]
“그래라.”
호영과 통화를 끝낸 겨울은 샤워를 위해서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샤워를 끝내고 밖으로 나오니, 언제 일어났는지 장대산이 룸에서 나와 소파에 널브러져 있었다.
“대산 씨, 속은 괜찮아요?”
“아니요. 속 쓰려 죽겠어요.”
“아침 먹으러 내려가게 빨리 씻고 나와요.”
“네.”
* * *
“한겨울 대리님, 어서 오세요.”
장대산에게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해리슨 상원의원은 병상에 일어나 앉아 두 사람을 맞이했다.
그의 낯빛은 어제보다 한결 밝아져 있었다.
“상원의원님, 컨디션은 어떻습니까?”
겨울이 보조 의자에 앉으며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보다는 한 대리님의 컨디션이 안 좋은 것 같은데요? 무슨 일이 있습니까?”
“어젯밤에 브라이언 박사님과 술내기를 하다가 처참하게 박살났습니다.”
“내기 상품은요?”
“브라이언 박사님이 저한테 진 빚을 탕감하는 조건을 상품으로 걸었습니다.”
“졌다는 얘기는 빚 탕감이 안 됐다는 뜻이겠네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그건 그렇고, 병세는 어떻습니까?”
쓸데없는 얘기를 멈추기 위해 겨울이 화제 전환을 시도했다.
“하하, 매일 조금씩 나아지고 있고, 빠르면 한 달 안으로 퇴원할 수 있다고 하네요.”
“빨리 쾌차하기를 바랍니다.”
“한 대리님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저는 이미 주님의 품 안에 들어가 있었을 겁니다.”
해리슨 상원의원의 목소리에 진심이 묻어 있었다.
“저는 브라이언 박사님께 도와 달라고 고작 전화 한 통만 한 것 뿐입니다.”
“전화 한 통화로 브라이언 박사님을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은 전 세계에서 한 대리님이 유일할 겁니다.”
겨울은 해리슨 상원의원이 자기를 위해서 립 서비스를 해 준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런데 장대산이 쐐기를 박는 말을 꺼냈다.
“한 대리님, 저도 브라이언 박사님께 똑똑히 들었습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겨울이 겸연쩍은 웃음을 흘리는 사이, 해리슨 상원의원이 입을 열었다.
어느새 그의 표정은 진지하게 변해 있었다.
뭔가 중요한 얘기가 나올 것을 직감한 겨울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한 대리님, 내가 한 대리님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지금이 아니라 작년 2월입니다.”
“네? 그렇게 빨리요?”
“대산이와 나는 수시로 통화하고 있었는데, 그때마다 대산이가 한 대리님과 관련한 얘기를 하더군요.”
“설마… 대산 씨가 저를 흉본 것은 아니겠지요?”
겨울이 무거워진 분위기를 끌어올리기 위해 슬쩍 농담을 건넸다.
“아니요. 한 대리님에 대한 칭찬만 잔뜩 늘어놓던데요?”
“그렇다면 천만다행이네요.”
해리슨 상원의원은 예열을 마치고 본격적인 안건을 꺼내 들었다.
“한 대리님, 이제부터 중요한 얘기입니다. 가급적이면 나하고 나눈 대화 내용은 비밀로 지켜 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 대리님은 중국 정부가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는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당연히 알고 있었다.
미국의 패권에 도전하기 위해서 동맹국을 확보하기 위한 프로젝트.
거기에 중국산 제품을 판매하기 위한 시장 개척과 자원 수탈이 목적인 것까지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잘난 척을 해 봐야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들어 본 적은 있습니다.”
“그럼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숨겨진 목적은 모르겠군요. 중국은 우리나라에 맞서기 위해서…….”
해리슨 상원의원은 겨울에게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대해서 길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그중 우리는 화웨이를 포함한 정보통신 기술 기업을 전면에 내세워 추진하고 있는 디지털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상당히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있어요.”
그는 숨을 고르기 위해서 잠깐 말을 끊었다가 다시 이어 나갔다.
“우리나라는 중국 국영기업인 화웨이를 정보 통신 시장에서 퇴출시키기 위한 물밑 작업에 돌입했고, 작년 7월 초에 콩고민주공화국 주재 대사한테 정보 보고를 하나 받게 되었죠.”
보나마나 보다콤의 핸드폰 기지국 업그레이드 및 증설과 관련한 입찰 정보일 것이었다.
겨울의 예상이 맞는 듯 해리슨 상원의원의 입에서 그 얘기가 흘러나왔다.
“우리는 입찰에 참여한 대한 그룹에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기 위해서 ‘중국의 화웨이 제재방안’이라는 극비 문서를 대산에게 보내 줬어요. 나는 대산이 그 문서를 송훈석 회장에게 전달해 줄 것으로 예상했는데, 의외로 한 대리님한테 보냈더라고요.”
“저는 그런 사연이 숨어 있는지 몰랐습니다.”
“사실 우리는 핸드폰 기지국 업그레이드 및 증설 공사는 화웨이가 수주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어요.”
“왜 그렇게 생각하셨는지 이유를 알고 싶습니다.”
“우리가 파악한 바로는 화웨이는 공사를 수주하기 위해서 6개월 전부터 보다콤의 고위 관계자들에게 공을 들이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대한 그룹이 입찰을 수주하는 이변이 발생했죠. 당시에 어떤 상황이 벌어졌는지 내가 알 수 있을까요?”
겨울은 해리슨 상원의원이 송훈석 회장과 친분이 깊다는 사실을 장대산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아마도 송훈석 회장에게 입찰 과정에서 벌어진 사건에 대해서 들은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자기에게 물어오고 있었는데, 그 이유가 몹시 궁금했다.
겨울은 크게 고민하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상원의원님, 정말 모르십니까?”
“나는 송 회장님한테 대한 그룹이 불과 일만 달러 차이로 입찰을 수주했다는 얘기밖에 들은 게 없습니다.”
겨울은 살짝 미심쩍었지만, 믿어 주기로 했다.
“네, 알겠습니다. 사건의 시작은 제가 친하게 지내고 있는 비엠베 은센기라는 사람으로부터 시작됐습니다. 입사 선배와 펍에서 간단하게 맥주를 마시고…….”
사실 해리슨 상원의원은 당시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여러 경로를 통해서 보고받은 상태였다.
그럼에도 겨울에게 당시에 벌어진 사건을 듣고자 한 이유는 사실 여부를 면밀하게 검증하기 위한 목적이 컸다.
겨울은 자기가 알고 있는 정보를 교묘하게 비틀어서 자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공적으로 돌리고 있는 중이었다.
해리슨 상원의원이 자신의 선택이 탁월했음을 자평하고 있는 사이, 겨울의 설명이 끝을 향해 달려갔다.
“…해서 화웨이를 박살 낼 수 있었습니다.”
“결국 투찰 가격은 한 대리님이 가르쳐 준 셈이네요?”
“아닙니다. 투찰 가격은 조병석 사장님과 정명훈 법인장께서 상의해서 결정하셨습니다.”
“하하, 알았어요. 입찰 이후에 화웨이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알려 줄까요?”
“네, 말씀해 주십시오.”
“그날, 입찰에 참여한 화웨이의 궈징페이 부사장을 비롯해서 모든 임직원들이 회사에서 쫓겨났습니다.”
“네? 그 정도로 파장이 컸습니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때부터 중국 정부는 아프리카 각 나라에서 벌어지는 모든 프로젝트를 치열한 공개 입찰이 아닌 수의계약으로 전환하기로 방침을 정했습니다.”
겨울은 그동안 아프리카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의문이 조금씩 풀려 갔다.
콧대 높기로 소문난 프랑스의 토탈이 송유관 건설 공사를 중국의 CSCEC에 비밀리에 주기로 한 것하며, 탄자니아를 포함한 여러 나라들의 고위급 인사들에게 백도어가 설치된 핸드폰을 선물로 제공한 것 하며….
겨울이 짧은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에 해리슨 상원의원의 설명은 계속됐다.
“…우리는 중국 정부의 야욕을 분쇄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11월 초에 한 대리님이 콩고민주공화국의 부투야 실장 등의 생명을 구하는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진 겁니다.”
“네? 기적 같은 일이라뇨?”
“아프리카 대륙에서 인맥이 넓기로 소문난 사람이 부투야 실장입니다.”
“아, 그렇군요.”
“그때부터 우리는 중국 정부의 야욕을 분쇄할 수 있는 적임자로 한 대리님으로 낙점하고 비밀리에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네?! 저를요?”
진심으로 깜짝 놀란 겨울이 경악에 가까운 소리를 내질렀다.
“이제 와 하는 얘기지만, 우리는 작년 11월부터 한 대리님을 중요 인물로 선정해 놓고, 콩고민주공화국 대사관을 통해서 은밀하게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겨울은 갑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제 비행기 티켓을 업그레이드 해 준 분이 혹시 상원의원님이십니까?”
“나는 아니고, 엄밀히 말하면 우리나라입니다.”
“하, 하하… 이왕 선심 써 주실 거라면, 일등석으로 업그레이드해 주시지 그러셨습니까.”
무겁게 내려앉은 분위기를 해소시킬 목적으로 겨울이 가벼운 농담을 건넸다.
“하하하, 알았어요. 남아공으로 복귀할 때는 일등석으로 업그레이드해 줄게요.”
“엎드려 절 받는 느낌이 이런 거군요?”
“하하, 계속 얘기해도 되겠죠?”
“물론입니다.”
“한 대리님과 부투야 실장을 확실한 우군으로 삼을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던 우리는 전기자동차 선도 업체인 테슬라를 이용하기로 결정하고, 극비 문서를 제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대산에게 극비 문서를 보내 줬고, 한 대리님은 그 자료를 활용해서 무섭게 인맥을 쌓아 가는 중이고요.”
해리슨 상원의원의 얘기를 듣고 있던 겨울은 궁금증이 일었다.
“상원의원님, 저의 어떤 점을 보고 미국 정부를 도울 거라고 확신하고 계셨습니까?”
“처음에는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었습니다. 1월 중순 이후부터 테슬라 정보를 활용해서 인맥을 넓혀 가는 모습을 보고 가능성이 높아진 것이죠.”
“그럼 결정권이 저한테 있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되겠습니까?”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