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풀리지 않는 난제
정명훈 법인장과 통화를 끝마친 이진호 사장은 의자를 뒤로 돌려서 창밖을 내다보며 장고에 들어갔다.
그러나 생각을 거듭할수록 엉킨 실타래처럼 머리는 점점 더 복잡해질 뿐, 명쾌한 해결 방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일단 회장님께 보고하고, 해법을 찾아보자.”
결심을 굳힌 이진호 사장은 서동호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이 사장님.]
“회장님께 차를 한 잔 얻어먹으면 좋겠습니다.”
[희소식이라도 가지고 오십니까?]
“희비가 섞여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지금 넘어오십시오.]
서동호 실장이 전화를 끊자, 송훈석 회장이 질문했다.
“이진호 사장인가?”
“네, 그렇습니다.”
“왜?”
“희비가 섞여 있는 보고를 회장님께 하러 오겠답니다.”
“흐음, 그렇다는 말이지.”
서동호 실장은 이진호 사장이 어떤 내용으로 보고할지 얼핏 알 것도 같았다.
자기도 어젯밤에 콩고민주공화국의 부투야 비서실장한테 전화를 받았기 때문에.
그와 안부를 나누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던 도중에 겨울의 얘기가 흘러나왔다.
그는 마치 작정하고 있었다는 듯 거침없이 쓴소리를 쏟아냈다.
그의 얘기가 하나도 틀린 것이 없어서, 변명 한 마디 하지 못하고 미안하다면서 사과만 하다가 통화를 끝냈다.
느낌상 부투야 실장은 자신뿐만 아니라 정명훈 법인장한테도 전화를 걸어서 쓴소리를 늘어놓은 것이 틀림없었다.
그 탓에 정명훈 법인장은 즉시 이진호 사장에게 보고한 것이고.
“회장님, 아무래도 한겨울 대리와 관련한 보고인 것 같습니다.”
“한 대리가 왜?”
“제가 어젯밤에 부투야 실장한테 전화를 받았는데, 한 대리와 관련해서 심할 정도로 질책을 받았습니다.”
“그가 뭐라고 했는데?”
“한 대리가 네 나라의 대통령과 허물없이 교분을 나누고 있는데, 고작 대리 신분이 뭐냐고 하면서…….”
송훈석 회장도 그 점에 대해서는 부투야 실장과 생각이 같았지만, 회사 차원에서 특별히 취할 수 있는 조치가 없었다.
입사 1년밖에 안 된 겨울을 대리로 승진시켜 주고, 10만 달러라는 거액의 포상금까지 줬다.
형평성 문제 때문이라도 겨울에게 추가로 혜택을 줄 수는 없었다.
“서 실장, 한 대리를 어떻게 했으면 좋겠나?”
“저도 이런저런 생각을 해 봤지만… 뾰족한 수가 없습니다.”
“그 문제는 천천히 생각해 보기로 하고, 네 개의 나라 중에서 내가 모르고 있는 나라는 어디인가?”
“나이지리아라고 합니다.”
“한 대리가 언제 나이지리아 대통령과 인맥을 쌓았지?”
“탄자니아의 마지리 대통령이 소개시켜 줬답니다.”
똑똑.
그때, 비서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이진호 사장이 도착했음을 보고했다.
이진호 사장이 비어 있는 소파에 앉자, 송훈석 회장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이 사장님, 나쁜 소식이 좋은 소식을 커버할 수 있습니까?”
“커버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나쁜 소식은 아프리카 법인의 한겨울 대리와 관련한 소식이겠네요?”
“네? 회장님께서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젯밤에 콩고민주공화국의 부투야 실장이 서 실장한테 전화를 걸어서 엄청나게 심한 쓴소리를 늘어놓았답니다.”
“아,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나쁜 소식은 나중에 얘기하고, 좋은 소식부터 얘기해 보세요.”
이진호 사장은 비서가 내온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작년 10월에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잉가 3댐 건설 공사…….”
송훈석 회장은 잉가 3댐 건설 공사 입찰만 생각하면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대한 그룹은 스페인의 ACS와 컨소시엄을 구성해서 잉가 3댐 건설 공사 입찰에 참여하기로 결정하고, 자신이 직접 스페인으로 출장을 가서 ACS 회장과 MOU까지 체결했다.
그런데 국제 입찰을 한 달 남겨 둔 시점에 중국의 CTG가 ACS에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을 제시하는 바람에 체결한 MOU를 해지할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부랴부랴 프랑스의 VINCH와 컨소시엄을 구성해서 잉가 3댐 건설 공사 입찰에 참여했지만, 아쉽게 2위를 차지하는 바람에 고배를 마신 쓰라린 기억이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그런데 바통고 대통령은 CTG와 ACS의 컨소시엄과 계약을 파기하고 잉가 3댐 건설 공사를 자신들에게 줄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이진호 사장의 얘기가 길어질수록 송훈석 회장의 입가에 미소가 저절로 피어올랐다.
“이 사장님, 잉가 3댐 건설 공사는 우리가 가지고 올 수 있겠죠?”
“바통고 대통령은 잉가 3댐 건설 공사를 저희가 아니라, 한겨울 대리한테 줄 것 같습니다.”
“그게 그거 아닌가요?”
“한 대리가 퇴사하면, 저희가 가지고 온다는 보장이 없다는 뜻입니다.”
“하아…….”
현실을 인식한 듯 송훈석 회장이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뱉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한 대리가 퇴사하면 송유관 건설 공사부터, 탄자니아, 우간다, 나이지리아의 핸드폰 기지국 업그레이드와 증설 공사 또한 저희가 수주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그때 서동호 실장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 사장님, 나이지리아 핸드폰 기지국 업그레이드와 증설 공사는 또 뭡니까?”
“한 대리가 탄자니아의 마지리 대통령의 소개로 바하리 대통령과…….”
이진호 사장은 정명훈 법인장한테 보고받은 내용을 요약 간추려서 설명했다.
“…공사 금액은 20억 달러 정도 된다고 합니다.”
“만약에 한 대리가 퇴사하면, 우리의 피해는 얼마 정도 될까요?”
“현재 저희가 수주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건설 공사 건이 210억 달러 정도 되고, 송유관 건설 공사까지 포함하면 245억 달러 정도 됩니다.”
“장난이 아니네요.”
“이 사장님, 그런데 한 대리가 퇴사하는 것으로 기정사실화 하는 이유가 뭡니까?”
송훈석 회장이 불쾌한 감정을 실어서 물었다.
“부투야 실장이 정 법인장한테 전화를 걸어서 한 대리를 풀어 주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했답니다.”
이진호 사장의 말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송훈석 회장은 창가로 이동해서 팔짱을 끼고 장고에 들어갔다.
서동호 실장과 이진호 사장은 그가 생각을 끝낼 때까지 말없이 기다렸다.
제법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송훈석 회장이 자리로 돌아와서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사장님, 한 대리의 퇴사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요?”
“차라리 한 대리를 전담할 팀을 따로 만드는 게 어떨까 생각해 봤습니다.”
“태스크포스를 만들자는 말씀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한 대리를 팀장으로 앉히기에는 무리수가 있을 텐데요?”
“회장님께서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오해라니요?”
“한 대리는 야생마처럼 너른 들판을 마음껏 뛰어다니라고 하고, 그를 지원할 수 있는 팀을 만들자는 거였습니다.”
“일종의 스태프라고 보면 되겠네요?”
“네, 그렇습니다.”
“서 실장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서동호 실장은 나름대로 구상해 놓은 방법이 있었으나, 당장은 성공 가능성이 희박했다.
그래도 말이나 한 번 꺼내 보기로 했다.
“회장님, 이 사장님의 아이디어도 훌륭하지만, 제 생각을 들어 보시겠습니까?”
“얘기해 보세요.”
“이번 기회에 한 대리의 신분을 바꿔 주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서동호 실장의 아이디어가 그럴 듯했으나, 아직은 시기상조였다.
“서 실장, 그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이 사장님의 아이디어를 구체화하는 것으로 해봅시다.”
“네, 회장님.”
“언제까지 기다리면 될까요?”
“이것저것 준비하려면, 적어도 한 달은 주셔야 할 겁니다.”
“지금 나온 얘기는 우리 셋만 알고 있는 것으로 합시다.”
“네, 알겠습니다.”
* * *
한국과 남아공의 시차는 일곱 시간.
겨울은 잠들기 전에 고향에 계신 부모님과 통화하기 위해서 졸음을 꾹 참고 기다리고 있었다.
핸드폰을 지켜보고 있다가 자정이 넘어가자마자, 즉시 아버지인 한상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들?]
“아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그래, 너도. 어디 몸 아픈 곳은 없고?]
“너무 건강해서 탈이에요.”
[잠깐만, 기다려라. 네 엄마가 바꿔 달란다.]
잠시 후, 이진숙 여사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아들, 그동안 잘 있었니?]
“엄마,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고맙다. 너도 건강 조심하고.]
“엄마, 용돈은 잘 받으셨어요?”
[받기야 잘 받았다만… 무슨 용돈을 이렇게 많이 주는 거니?]
겨울은 1월 말에 작년 실적에 대한 보상으로 200%, 2월 1일에 설 보너스까지 받았다.
큰맘 먹고 부모님께 100만 원씩 용돈을 보내 드렸더니, 이진숙 여사가 깜짝 놀라 묻는 것이었다.
“지난달에 보너스를 제법 많이 받았어요.”
[아무튼 고맙게 잘 쓰마. 그건 그렇고… 호영이 작은 아버지가 한우 갈비 선물 세트를 가지고 왔는데, 받아도 되니?]
“제가 얼마 전에 호영이네 회사의 물건을 팔아 줬거든요. 아마도 고마워서 설 선물로 주신 것 같아요.”
[그럼 잘 먹을게.]
“엄마, 그런데 가을이가 예비 사위와 관련해서 아무 말도 없었어요?”
[사위라니?]
[엄마, 오빠가 장난…….]
뚝.
갑자기 전화가 끊어졌다.
당황한 가을이 전화를 강제로 끊어 버린 것이다.
“후후. 한가을, 넌 아직도 멀었어.”
혼잣말을 흘린 겨울은 자기와 마찬가지로 홀로 쓸쓸하게 설 연휴를 보내고 있을 장대산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전원이 꺼져 있다는 기계음 소리가 들려왔다.
“대산 씨도 설 쇠러 미국에 간 건가?”
윙윙―
겨울이 종료 버튼을 누르자마자 곧바로 전화가 걸려왔다.
하지만 그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침대 맡에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분명 분노한 가을의 전화이리라.
“이제 자 볼까.”
* * *
“사모님, 지욱이하고 지민이는 어디 갔나요?”
겨울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홍지연 여사에게 물었다.
“남아공은 설날이 아니라, 그냥 화요일이잖아.”
즉, 학교에 갔다는 말이었다.
“그럼 법인장님하고 셋이서 떡국을 먹어야 한다는 말이네요?”
“왜? 내 남편이 싫어?”
“아유, 무슨 말씀이세요.”
손수 차려 주는 떡국을 맛있게 먹은 겨울은 정명훈 법인장과 소파로 자리를 옮겨 모닝커피를 마셨다.
“주말에 뭐 했어?”
“희망봉을 구경하러 케이프타운에 다녀왔습니다.”
“가 보니까 별것 없지?”
“네. 법인장님 말씀이 맞더라고요.”
“한 대리, 지금부터는 직장 상사가 아닌 인생 선배와 대화를 나눈다고 생각하고 얘기 좀 하자고.”
“네, 말씀하십시오.”
“한 대리는 대한 그룹에 뼈를 묻을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이유가 뭔가?”
사실 겨울이 케이프타운에 바람 쐬러 다녀온 이유도 풀리지 않는 난제를 해결해 보기 위함이었다.
결국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되돌아 왔지만.
“저는 대한 그룹에 마음의 빚이 있습니다.”
“마음의 빚이라니?”
“제가 가진 스펙 가지고는 죽었다 깨어나도 대한 그룹에 합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회장님께서 기회를 주는 덕분에 비록 조건부지만 어렵게 입사할 수 있었습니다.”
“회사에 진 마음의 빚을 갚기 위해서 퇴사할 생각이 없다는 것인가?”
“그것도 있고, 면접 시험 당시에 제가 자진해서 사표를 쓰는 일은 절대 없을 거라고 회장님께 맹세한 것도 있습니다.”
정명훈 법인장은 안도감이 밀려왔다.
만약에 겨울이 퇴사라도 하면, 아프리카 법인도 타격을 입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앞으로도 대한 그룹에 계속 다니는 것으로 판단하면 되나?”
“아직까지는 그렇지만, 저로 인해서 회사가 불이익을 받을 것 같아서 지금 고민하는 겁니다.”
“불이익이라니?”
“부투야 실장이 서동호 비서실장님께 저에 대한 처우를 개선해 주지 않으면, 대한 그룹과의 관계를 끊어 버리겠다고 경고를 보냈다고 합니다.”
“회사에서 한 대리에 대한 처우를 개선해 주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뜻인가?”
“부투야 실장의 요구 사항을 회사가 들어주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도대체 부투야 실장이 어떤 요구를 했는데?”
“비즈니스를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해서 저를 임원급으로 승진시켜 달라고 했답니다.”
정명훈 법인장은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재벌가의 후계자라도 입사해서 임원으로 승진하기 위해서는 최소 몇 년은 걸린다.
아무리 겨울이 능력이 뛰어나다고 하더라도 입사 1년 만에 임원으로 승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하나.
부투야 실장에게 대한 그룹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겨울이 퇴사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한 대리, 만약에 우리 회사를 퇴사한다면, 세워 놓은 계획이라도 있나?”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