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점점 늘어나는 연합군
“당연히 좋아하실 겁니다만, 다른 목적이 있는 것은 아니고요?”
“가쿠타 과장님께서 대신 답변해 줄 겁니다.”
정곡을 찔린 겨울이 가쿠타 과장에게 설명을 떠넘기고, 뒤로 물러났다.
“네, 맞아요. 저는 김을 바통고 대통령님을 비롯한 상류층에 판매하고 싶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그렇다면 가쿠타 과장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면 되잖아요.”
“저하고 한 대리님은 겸업금지라는 조항 때문에 말을 꺼내기가 상당히 조심스럽습니다.”
“불편하게 그러지 마시고, 이번 기회에 회사를 그만둘 생각은 없어요?”
“저는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데, 보스가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더라고요.”
“보스라면… 한 대리님이요?”
겨울은 곤혹스러운 얼굴로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가쿠타 과장님, 이제 그 말씀은 그만하시죠?”
“한 대리님이 제 보스 맞잖아요.”
“저는 대한 그룹의 대리일 뿐입니다.”
“고작 일개 회사의 대리가 각 나라의 정치 지도자들하고 교류를 나눕니까?”
“아이고.”
* * *
겨울이 킨샤사 시내 외곽에 위치한 H&E 트레이딩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받은 느낌은 썰렁함, 그 자체였다.
사무실 내부는 제법 넓었지만, 갖추고 있는 것이라고는 책상 세 개와 중고로 보이는 낡은 소파가 전부였다.
은센기의 재정 상태를 빤히 알고 있는 겨울은 이 정도만 해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했다.
“은센기 사장님, 사무실이 생각보다 상당히 넓고 멋진데요?”
“에이, 왜 그러세요? 오늘 부투야 실장님께 선급금을 받으면, 제대로 된 사무실을 꾸며 놓을게요.”
“하하, 알았어요.”
“저희 회사 직원들을 소개시켜 줄게요.”
뻘쭘하게 서 있던 직원 두 명이 그들 앞으로 다가왔다.
30대의 남자는 무역 실무를 담당할 봉쿨로 루암바 과장이었고, 까만 피부에 커다란 눈이 매력적인 20대 아가씨의 이름은 우마 디아타였다.
루암바 과장은 가쿠타 과장이 말한 대학 후배였고, 디아타는 은센기의 사촌 여동생이었다.
디아타는 인사를 나누자마자 재빨리 움직여 커피를 내왔다.
그렇게 그들은 낡았지만 갖출 것은 모두 갖춘 H&E 트레이딩 사무실에서 첫 번째 회의를 시작했다.
“루암바 과장님, 부투야 실장님께 컨펌받은 견적서를 저한테 보여 주실 수 있습니까?”
“네, 한 대리님.”
겨울은 견적서 항목마다 꼼꼼히 짚어 가며 루암바 과장에게 질문을 던졌고, 그는 모든 것을 꿰차고 있다는 듯 막힘없이 완벽하게 대답했다.
가쿠타 과장이 괜히 추천한 대학 후배가 아니었다.
“…저희가 630만 달러를 청구하면, 전혀 문제가 없다는 얘기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잠시 대화가 중단된 틈을 타서 가쿠타 과장이 입을 열었다.
“루암바 과장, 저기 보이는 박스를 개봉해서 똑같이 생긴 물건들을 다섯 묶음으로 나누고, 비싸 보이는 종이 가방을 구해 와서 담아 놓도록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그때, 겨울이 할 말이 있다는 듯 대화에 끼어들었다.
“루암바 과장님, 김을 다섯 묶음으로 나눈 후 제품마다 사진 촬영해 놓으세요.”
“무슨 말씀이지 알겠습니다.”
루암바 과장이 자리를 벗어나자, 겨울이 가쿠타 과장에게 물었다.
“하필이면 김을 다섯 개씩 구입한 이유가 뭡니까?”
“바통고 대통령님, 부투야 비서실장님, 카손가 부총리님, 카반구 장관님, 나머지 한 묶음은 부투야 실장님의 어머님의 몫입니다.”
가쿠타 과장은 부투야 비서실장의 효심이 깊다는 사실을 알아채고, 효심 마케팅을 활용할 생각을 가진 듯했다.
연세 많으신 분들이 입맛이 없을 때, 김은 훌륭한 반찬이 될 수 있다.
겨울은 나쁘지 않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다.
“은센기 사장님, 부투야 실장님께 우리나라 김을 소개할 때…….”
겨울은 알고 있는 지식을 모두 동원해서 김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고, 은센기는 메모지에 꼼꼼하게 메모해 가며 겨울의 얘기에 집중했다.
“…김은 가급적이면 빨리 먹는 것이 좋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콩고민주공화국의 경우에는 날씨가 매우 습하기 때문에 유효 기간이 남아 있어도 눅눅하고 변질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잠시 후, 작업을 마친 루암바 과장이 고급스러워 보이는 종이 가방 다섯 개를 가지고 와서, 소탁 옆에 내려놓았다
“사장님, 모두 끝났습니다.”
“수고했습니다. 이제 준비가 됐으면 출발할까요?”
* * *
약속 시간이 되기도 전에 바통고 대통령 집무실에는 고정 멤버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도착하지 않은 겨울을 기다리는 동안 그들은 기분 좋게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카손가 부총리, 재미 좀 봤습니까?”
바통고 대통령의 질문을 받은 카손가 부총리는 자신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배어 나왔다.
지난주 월요일, 겨울에게 테슬라와 관련된 극비 정보를 입수하자마자 비자금을 모두 끌어 모아서 다음 날인 화요일에 테슬라 주식을 주당 125달러에 무려 2억 달러 어치를 매입했다.
그때부터 주식 값이 졸금졸금 오르기 시작해서 현재 10%의 수익률을 달성하고 있는 중이었다.
즉, 불과 4일 만에 2,000만 달러를 번 셈이었다.
“이제 겨우 10%밖에 못 벌었습니다. 대통령님은 어떻습니까?”
“나는 8%밖에 벌지 못했습니다. 카반구 장관은 수익률이 어떻습니까?”
“저도 대통령님과 같은 8%입니다.”
“내가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테슬라와 관련된 정보는 우리 넷만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당연한 말씀입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비서가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와서 겨울이 대통령관저 정문에 도착했음을 보고했다.
바통고 대통령은 카손가 부총리, 카반구 장관과 함께 접견실로, 부투야 실장은 겨울을 맞이하러 현관으로 급히 이동했다.
부투야 실장은 가쿠타 과장이 가지고 내리는 커다란 종이 가방 네 개에 눈길이 먼저 갔다.
“한 대리님이 이번에는 무슨 선물을 주려는 걸까?”
그는 기분 좋은 혼잣말을 흘리며 겨울에게 다가갔다.
“한 대리님, 어서 오세요.”
“부투야 실장님,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그럼요. 그나저나 가쿠타 과장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뭡니까?”
“우리나라 특산품인 김이라는 겁니다.”
“오오! 김이라고요?”
김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는 듯 부투야 실장이 과한 반응을 보였다.
“실장님께서는 김을 알고 있습니까?”
“조연석 대사님께 김을 얻어먹은 적이 있습니다.”
“아, 그러시군요.”
“그나저나 김은 어떻게 구해서 가지고 오셨습니까?”
겨울은 이곳으로 오는 차 안에서 말을 맞춘 대로 살짝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은센기 사장이 바통고 대통령님께 선물해야 한다면서, 가쿠타 과장에게 구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랬군요. 대통령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안으로 들어가십시다.”
“네, 실장님.”
접견실로 이동하던 겨울은 부투야 실장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댁에 미리 전화해 놓으십시오.”
부투야 실장은 겨울의 의도가 무엇인지 단숨에 알아챘다.
겨울이 자기에게 줄 김 선물을 추가로 준비했다는 뜻이다.
“한 대리님, 이것만 해도 충분합니다.”
“이것은 부투야 실장님 것이고, 트렁크에 실려 있는 것은 어머님의 것입니다.”
“제 어머니를 꼬박꼬박 챙겨 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실장님, 대신 은센기 사장이 김에 대해서 브리핑할 수 있는 시간을 조금만 마련해 주십시오.”
“하하하, 무슨 말인지 감 잡았습니다.”
접견실.
역시나 바통고 대통령도 선물로 받은 김에 대해서 호기심을 보였다.
“한 대리님, 이게 뭡니까?”
“대통령님, 혹시 우리나라의 특산품인 김에 대해서 들어 보셨습니까?”
“아니요. 처음 들어봤습니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부투야 실장이 발언권을 요청했다.
“대통령님, 은센기 사장이 김에 대해서 간단하게 브리핑하겠다고 합니다.”
“그래요? 어서 얘기해 보세요.”
자리에서 일어난 은센기는 가볍게 헛기침으로 목을 풀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김은 대한민국, 중국, 일본의 바닷가에서 자라는 해초입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에서는 김을 한국의 슈퍼 푸드라고 소개할 정도로 단백질과 비타민이 많이 함유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김은 식이섬유가 풍부해서 혈중 콜레스테롤을 낮추는 데 탁월한 효과가…….”
바통고 대통령은 은센기가 목에 핏대를 세워 가며 김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대충 알아챘다.
겨울의 지시를 받아 자신들에게 김을 판매하고 싶은 것이리라.
겨울의 부탁이라면 하늘의 달이라도 따다 줄 판인데, 그깟 김을 구입해 주지 못하겠는가.
바통고 대통령이 생각에 빠져 있는 사이, 은센기의 브리핑이 끝이 났다.
“…입맛이 없을 때 밥과 함께 드시면, 짭조름한 것이 정말 맛있습니다. 이상입니다.”
은센기의 뒤를 이어서 겨울이 보충 설명을 위해서 입을 열었다.
“김은 그냥 먹으면 짜기 때문에 쌀로 만든 밥과 같이 드시면 더욱 맛이 있습니다.”
“부투야 실장, 내 생일 선물로 김도 추가하면 어떨까요?”
“아주 탁월하신 선택입니다.”
“은센기 사장하고 협의해서 1만 세트를 구입하도록 하세요.”
“네, 알겠습니다.”
즉석에서 결론을 내려준 바통고 대통령이 고개를 돌려 겨울에게 말을 걸었다.
“한 대리님, 중국 놈들이 탄자니아와 우간다 정부에 장난친 사건에 대해서 듣고 싶은데, 얘기해 줄 수 있습니까?”
“대통령님, 정말 죄송합니다만, 그 사건은 비밀로 하기로 했기 때문에 언급할 수 없습니다.”
“내가 마지리 대통령님과 루군다 대통령님께 동의를 받아 놓은 상태니까, 얘기해 주셔도 됩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콩고민주공화국은 중국과 해당 사항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해당 사항이 곧 발생할 것 같아서 그럽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지금 어떤 상황인지 제가 대신 얘기해 주겠습니다.”
부투야 실장이 발언을 자처하고 나섰다.
“작년 10월에 우리나라가 발주하는 140억 달러 규모의 잉가 3댐 건설 공사를 중국과 스페인의 컨소시엄이 수주했습니다.”
겨울도 잉가 3댐 공사 프로젝트에 대해서 알고 있었다.
대한 건설도 세계 2위 건설사인 프랑스의 VINCH와 컨소시엄을 구성해서 입찰 전쟁에 뛰어들었으나, 중국의 국영 기업인 CTG와 스페인의 ACS 컨소시엄에 밀려서 고배를 마신 프로젝트였다.
“그 당시에 저희가 아쉽게 2위를 차지했습니다.”
“저런… 정말 아쉽게 됐네요.”
부투야 실장이 안타까움을 표시했지만, 이미 과거지사였다.
“실장님, 이미 게임 끝난 일입니다.”
“하하, 알았어요. 계속 얘기해 주겠습니다. CTG 측에서 고맙다는 의미로 대통령님을 포함한 고위 관리들한테 화웨이의 최신 핸드폰을 선물로 주겠다고 제안해 온 상태입니다. 이 선물을 받아야 할지 말지를 고민하고 있는 중입니다.”
부투야 실장의 말에 겨울의 가슴은 심하게 요동쳤다.
정말 운이 따라준다면, CTG와 ACS 컨소시엄에 넘어간 잉가 3댐 건설 공사를 가지고 올 기회였기 때문에.
겨울은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자기의 생각을 밝혔다.
“이제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을 잘 들어 주십시오.”
“네, 얘기해 보세요.”
“CTG에서 주겠다고 하는 핸드폰 선물을 감사하다고 하면서 받으십시오. 그 후에 핸드폰에 백도어가 설치되어 있는지 은밀하게 확인하십시오.”
“백도어가 뭡니까?”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중국 정부가 실장님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기…….”
겨울은 백도어 프로그램의 의미와 이후의 행동 요령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나갔다.
“…결정적인 증거가 수집되면, 중국 정부에 손해배상을 청구하십시오. 참고적으로 탄자니아, 우간다, 나이지리아 정부는 중국과 체결했던 일대일로 프로젝트와 관련된 계약을 모두 파기하고, 부채를 전액 탕감해 달라고 요구하기로 했습니다.”
“중국 놈들이 우리들의 요구를 들어줄까요?”
“아프리카에서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울며 겨자 먹기로 들어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알았어요. 중국 놈들의 멱살을 잡고 흔들어 보겠습니다.”
잠시 대화가 중단된 틈을 타서 바통고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크흠… 한 대리님, 우리한테 원하는 게 있습니까?”
당연히 있지만, 지금 얘기를 꺼내 들면 죽도 밥도 안 되는 상황.
“CTG 측에서 선물하는 화웨이 핸드폰에 백도어가 설치된 사실이 확인되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십시다.”
겨울과 짧은 대화를 종료한 바통고 대통령은 부투야 실장에게 엄중한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잉가 3댐 착공시기를 최대한 늦추도록 하세요.”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