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겨울이 문두야 대통령, 마사카 부통령과 핸드폰 판매와 관련된 대화를 마무리 짓고, 호텔 체크인을 하고 나자 새벽 1시경이었다.
객실로 올라와서도 겨울은 편안하게 쉴 수 없었다.
저녁부터 자정까지 발생했던 사건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정리하는 데도 한참 걸렸다.
일단 당장 급한 업무부터 처리하기로 하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 대리, 이 늦은 시간에 웬일이야?]
“부지점장님, 제가 주무시는데 깨운 건 아니죠?”
[아직 12시도 안 됐는데 뭐.]
“내일 스케줄이 어떻게 되십니까?”
[특별한 일은 없어. 왜?]
“내일 최대한 빨리 탄자니아의 다르에스살람으로 와 주십시오.”
[뭐야? 큰 건을 터트린 거야?]
하도진 부지점장이 반색하며 물었다.
“큰 건은 아니고, 최신형 핸드폰을 탄자니아와 우간다 정부에 각각 5,000대씩 수출하는 건입니다.”
[하, 그게 큰건이지! 1,000만 달러가 적은 건이라고?]
“부지점장님, 농담을 진담으로 받으시면 어떻게 합니까?”
[하하하, 미안해.]
“내일 중으로 계약서를 작성해야 하니까, 견적을 미리 산출하고 오셔야 할 겁니다.”
[왜 이렇게 서두르는데?]
“마사카 부통령님이 내일 늦게 우간다로 돌아가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알았어. 그나저나 심바 과장은 어디에 있나?]
“옆에 있는데, 바꿔 드리겠습니다.”
심바 과장은 하도진 부지점장과 제법 길게 통화한 후, 핸드폰을 겨울에게 돌려주었다.
“더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아니, 뭐. 그냥 우리 콩고 지점을 위해서 신경 써 줘서 고맙다고.]
하도진 부지점장의 목소리에 진심이 담겨 있었다.
“에이, 쑥스럽게 왜 그러세요?”
[하하, 아무튼 내일 아침에 출발할 때 전화할게.]
하도진 부지점장과 통화를 마친 겨울은 가쿠타 과장과 심바 과장을 향해 다시 한번 입단속을 강조했다.
“두 분께서 오늘 보고 들은 일들은 영원히 비밀로 해 주셔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심바 과장님은 피곤하시더라도 하루만 버텨 주세요.”
“당연한 말씀입니다.”
치이익!
냉장고에서 맥주캔을 꺼낸 심바 과장은 겨울과 가쿠타 과장에게 캔을 따서 건네주며 말했다.
“오늘 성과를 자축하며 건배 한번 할까요?”
“좋죠.”
“FTA 팀과 콩고 지점을 위하여!”
“위하여!”
세 사람은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순식간에 캔 하나를 비워 버렸다.
그 후, 심바 과장은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에 급하게 현장 사무실로 떠나갔고, 겨울과 가쿠타 과장은 샤워를 끝내고 지친 몸을 침대에 뉘었다.
윙윙―
하지만 겨울의 길고 긴 하루는 끝이 아니라,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 * *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송훈석 회장은 서동호 실장과 모닝커피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하고 있었다.
“서 실장, 콩고민주공화국에 수출하기로 한 덤프트럭 1,000대는 한겨울 대리의 작품이겠지?”
“한 대리가 밑밥을 깔아 주고, 김종학 지점장이 마무리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건 그렇고, 한 대리는 바통고 대통령을 어떤 방법으로 인연을 맺게 됐을까?”
“부투야 실장이 자리를 마련해 줬다고 들었습니다.”
“한 대리가 부투야 실장한테 청탁한 건가?”
“그게 아니라 그 반대인 것 같습니다.”
서동호 실장은 김종학 지점장에게 보고받은 내용을 가감 없이 보고했다.
“…선물한 것은 라면 몇 박스와 우황청심원 선물 세트 하나가 전부였다고 합니다.”
“고작 그걸 선물한 대가가 1억 5,000만 달러가 넘는 덤프트럭 1,000대로 돌아왔다고?”
“김 지점장은 그렇게 보고했습니다.”
“에이, 다른 무언가가 있었겠지.”
송훈석 회장이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여 주었다.
윙윙―
그때, 서동호 실장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를 확인한 그는 송훈석 회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상대방과 통화를 시작했다.
“네. 이 사장님.”
[방금 전에 아프리카의 법인장에게 보고받은 게 있는데, 회장님께 보고드렸으면 합니다.]
“어떤 내용인지 제가 알 수 있습니까?”
[콩고 지점에서 탄자니아와 우간다에 최신형 핸드폰을 각각 5,000대씩 수출하기로 했답니다.]
최신형 핸드폰 1만 대의 수출 금액은 고작해야 1,000만 달러 정도.
콩고 지점의 입장에서는 큰 금액일 수 있겠으나, 대한 그룹 전체로 봤을 때는 무시해도 적은 금액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진호 사장이 핸드폰 수출 건을 송훈석 회장에게 직접 보고하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분명 무언가 있다는 뜻이 분명했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서동호 실장은 두 나라의 이름에서 힌트를 찾았다.
“이 사장님, 바이어가 누구인지 알려주실 수 있습니까?”
[탄자니아와 우간다 정부입니다.]
역시 자신의 추측이 맞아떨어졌다.
“알겠습니다. 회장님께 말씀드릴 테니까, 빨리 건너오십시오.”
서동호 실장이 전화를 끊자, 송훈석 회장이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서 실장, 무슨 일이야?”
“이진호 사장이 회장님께 긴급하게 보고할 것이 있다고 합니다.”
“어떤 내용으로?”
“제가 미리 말씀드리면 재미없으니까, 직접 들어보시지요.”
“알았어. 비서한테 얘기해서 아이스커피를 미리 준비해 놓고 있으라고 해.”
“네? 이 추운 겨울에요?”
“이 사장이 허겁지겁 달려올 것 같지 않아?”
“하하, 그렇겠네요.”
잠시 후, 이진호 사장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송훈석 회장은 서동호 실장에게 ‘내 말이 맞았지?’라는 의미로 미소를 보내고, 이진호 사장에게 말을 건넸다.
“이쪽에 앉아요. 이 사장님, 아이스커피 좋아하죠?”
“네?”
어리둥절해하며 자리에 앉는 이진호 사장을 향해 서동호 실장이 은밀한 신호를 보내왔다.
‘아하, 그 뜻이 숨어 있었군요?’
송훈석 회장의 의도를 간파한, 이진호 사장이 눈치껏 립서비스를 날렸다.
“회장님의 센스를 따라갈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하하, 시원하게 마시고, 어떤 내용인지 얘기해 보세요.”
이진호 사장은 아이스커피를 찬물 마시듯 벌컥벌컥 단숨에 들이켠 후, 송훈석 회장에게 보고를 시작했다.
“제가 30분 전에 아프리카 법인장인 정명훈 상무와 통화했습니다.”
“잠깐만요. 지금 아프리카는 새벽 시간 아닙니까?”
“네, 맞습니다.”
“내가 또 긴급하게 컨펌을 해 줘야 하는 내용입니까?”
“지금 당장은 아닙니다.”
“알았어요. 계속 얘기해 보세요.”
“콩고 지점에서 탄자니아와 우간다 정부에 최신형 핸드폰을 각각 5,000대씩 수출하기로 했습니다.”
“탄자니아와 우간다 정부라…….”
끝말을 흐린 송훈석 회장이 시선을 위로 향하고 생각에 잠겼다.
서동호 실장과 이진호 사장은 그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했다.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송훈석 회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사장님, 핸드폰 수출 건이 송유관 건설 공사와 관련이 있다고 보십니까?”
“한겨울 대리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에 관련 있다고 봅니다.”
“한 대리는 지금 콩고민주공화국에 있는 거 아닙니까?”
“어제 탄자니아로 넘어가서 문두야 부통령, 우간다의 마사키 부통령과 면담을 가진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네? 그렇게 바쁜 사람들이 한 대리를 만나 줬다고요?”
송훈석 회장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두 사람이 만나 줬으니까, 면담을 가진 것 아니겠습니까?”
“부투야 실장이 소개시켜 줬겠네요?”
“문두야 부통령은 이미 한 대리와 알고 있는 사이였고, 마사카 부통령은 부투야 실장이 소개시켜 주었답니다.”
“흐음…….”
송훈석 회장은 잠시 뜸을 들인 후, 서동호 실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문세형 대한건설 사장과 조병석 전략기획실 실장을 빨리 부르세요.”
“네, 회장님.”
잠시 후, 송훈석 회장의 호출을 받은 두 사람도 가쁜 숨을 몰아쉬며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송훈석 회장에게 정중하게 인사하고 비어 있는 소파에 앉은 두 사람은 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소탁 위에 있던 아이스커피를 단숨에 비워 버렸다.
“문 사장님, 누가 쫓아왔습니까?”
“하하, 서 실장님께서 최대한 빨리 오라고 해서요.”
문세형 사장의 대답에 웃음으로 답한 송훈석 회장은 조병석 실장에게 말을 건넸다.
“조 실장님, 우간다와 탄자니아를 연결하는 송유관 건설 공사 입찰은 준비하고 있습니까?”
“지금 입찰 팀을 구성하고 있는 중이고, 이달 말에 본격 가동할 예정입니다.”
“내가 두 사람을 왜 보자고 했는지 궁금하지요?”
“혹시 송유관 건설 공사 때문입니까?”
“네, 그래요. 어제 한겨울 대리가 탄자니아에서 문둔야 부통령과 우간다의 마사카 부통령을 만났답니다.”
“네?!”
예상한 대로 조병석 실장에게서 경악에 가까운 소리가 나왔다.
일반인에 불과한 겨울이 두 부통령을 만났다고 하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잠시 뒤, 침착함을 되찾고 송훈석 회장에게 물었다.
“회장님, 마사카 우간다 부통령이 한 대리를 만나기 위해서 탄자니아에 간 겁니까?”
송훈석 회장은 대신 답변하라는 의미로 고개를 이진호 사장에게 돌렸다.
“콩고민주공화국의 부투야 비서실장이 마사카 부통령에게 겨울을 만나 보라고 권유해서 면담이 성사됐다고 합니다.”
“면담 목적은 송유관 건설 공사 때문입니까?”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여간 한 대리의 실행력 하나만큼은 끝내주게 빠르네요.”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잠시, 대화가 중단된 틈을 타서 서동호 실장이 발언권을 요청했다.
“회장님, 이제 정명훈 법인장하고 전화를 연결해 볼까요?”
“그렇게 하세요.”
이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는 듯 이진호 사장이 재빨리 정명훈 법인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송신음이 귀에 들리는 것으로 봐서 스피커폰 버튼을 누른 듯했다.
[네, 사장님.]
“정 법인장, 나는 지금 회장님과 같이 있고, 스피커폰으로 통화하고 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제부터 회장님과 통화하세요.”
이진호 사장에게 핸드폰을 건네받은 송훈석 회장은 정명훈 법인장에게 따뜻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정 법인장, 새벽에 전화해서 미안해요.”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한 대리가 문두야 부통령과 마사카 부통령을 만난 이유는 당연히 송유관 건설 공사 때문이겠죠?”
[네, 그렇습니다.]
“두 사람이 한 대리를 만나 줄 정도로 한가하지는 않았을 텐데요?”
[저도 그 이유가 궁금해서 한 대리한테 물어봤는데, 두 사람에게 거절할 수 없는 선물을 건네줬다고 했습니다.]
“그 선물이 무엇인지 모르고요?”
[여러 번 물었는데, 끝내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송훈석 회장은 선물의 내용이 몹시 궁금했으나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했다.
지금은 선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송유관 건설 공사 입찰 공고가 뜬 지 며칠 되지 않았는데, 한 대리가 너무 빨리 움직인 거 아닌가요?”
[아닙니다. 한 대리가 조금 늦게 움직였더라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빠질 뻔했습니다.]
“어떤 상황이 벌어졌었는지 얘기해 보세요.”
[토탈의 쟝 뿌요네 회장과 CNOOC의 텐궈리 회장이 송유관 입찰과 관련해서…….]
정명훈 법인장의 설명을 듣고 있던 조병석 실장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만약에 겨울이 그들이 체결한 밀약을 사전에 알아내지 못했더라면, 자신들은 거의 두 달 가까이 헛짓거리를 할 뻔했다.
마음속으로 겨울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사이에도 정명훈 법인장의 보고는 계속됐다.
[…마지리 대통령과 루군다 대통령이 입찰이 공평하게 진행되도록 해 주겠다고 확답해 줬다고 합니다.]
송훈석 회장은 마지막 결론을 듣고 진심으로 아까웠다.
겨울이 조금만 욕심을 냈더라면 송유관 건설 공사를 가지고 올 수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그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겨울이 한 발 뒤로 물러난 이유부터 물었다.
[세 가지 이유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얘기해 보세요.”
[송유관 입찰의 주체는 탄자니아와 우간다가 아니라는 점과 토탈과 CNOOC에 밉보여서 입찰에 참여하지 못할 것 같아서였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대한 그룹의 저력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욕심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고 판단하면 될까요?”
[저도 회장님과 같은 생각입니다.]
“한 대리의 심계가 보통이 아니네요. 이제 핸드폰 수출 건에 대해서 얘기해 볼까요?”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