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범인이 누구일까?
“부장님, 괜찮습니까?”
겨울과 오정수 과장을 멀찍이 뒤따라가던 신대환 차장이 홍성훈 부장에게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입사한 지 1년도 안 된 놈한테 개망신을 당했는데, 괜찮을 것 같아!”
홍성훈 부장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한겨울한테는 한마디도 못하면서, 나한테 성질을 내는 이유가 뭡니까?’
이 말이 식도를 타고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으나, 신대환 차장은 차마 내뱉지 못했다.
“부장님, 저 자식이 계속 버릇없게 구는데, 가만히 내버려 두실 생각입니까?”
홍성훈 부장은 권력의 무상함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자신이 지주회사 소속의 인사담당 부장이었다면, 한겨울은 자신의 위세가 무서워서 함부로 덤벼들지 못했을 것이다.
설령 덤볐다 하더라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을 이용해서 한겨울을 처참하게 박살내 버렸을 것이고.
하지만 지금은 끈 떨어진 연 신세로 전락해 이리저리 휘둘리는 처치였다.
자신의 신세가 처량하기 그지없었으나, 신대환 차장에게까지 약한 모습을 보이기는 싫었다.
“신 차장, 여기는 저놈의 홈그라운드야. 만약 내가 손보겠다고 나서면, 어떻게 될 거 같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우리에게 불이익을 주려고 하겠지.”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저놈은 똥이라고 생각하고, 그저 멀찍이 피하는 게 상책이야.”
“후우, 저는 이해가 안 됩니다. 저 새끼는 왜 부장님한테 그렇게 버릇없이 덤빈 겁니까?”
“박철헌 사장님이 저놈을 꼬셔서 아프리카로 보내라고 해서 내가 정말로 보내 버렸거든.”
“왜 굳이 한낱 신입 사원을…….”
“최성진 부회장이 저놈을 싫어한다고 하시더라.”
신대환 차장도 작년 신입 사원 연수 기간 동안에 어떤 사건이 있었는지 알고 있었다.
최준하를 포함한 신입 사원 여덟 명의 해고 사건.
느낌상 겨울이 최준하가 해고당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의 추측이 맞는지 홍성훈 부장에게 물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최준하가 한겨울을 퇴사시키려고 했다가 도리어 당해서 해고당한 거지.”
“최준하가 왜 그랬답니까?”
“글쎄. 그것까지 알면 내가 여기서 안 이러고 있지. 뭐, 그래도 한겨울이 회장님의 따님이랑 친하게 지내니까 질투해서 그런 것 같다는 소문이 있더군.”
“흐음, 최준하가 회장님의 따님을 눈독들이고 있었나 보네요?”
“그렇다고 하더라고.”
“뭔가 저는 그 소문을 못 믿겠어요. 정말로 대한 그룹 회장의 딸이나 되는 분이 저런 놈한테 눈길을 줬을까요?”
“어휴, 이 사람아. 소문이 사실이었으면 저놈이 여기에 발령을 받았겠냐?”
“아, 확실히… 그럼 최준하가 오해했다는 건가요?”
“당연한 걸 왜 물어?”
“쯧, 결국 한겨울도 피해자군요.”
신대환 차장과 대화를 나누던 홍성훈 부장은 문득 싸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박철헌 사장은 안정혁 법인장한테 한겨울을 최대한 빨리 회사에서 내쫓으라고 지시를 내렸고, 시간이 날 때마다 확인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한겨울은 대리로 승진했고, 관련자들은 징계를 받아서 죄다 회사에서 쫓겨났다.
당연히 자기는 아프리카까지 유배되어 왔고.
무언가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하지 않으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오해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신대환 차장에게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글쎄요. 부장님, 저는 한겨울을 오늘 처음 만났습니다.”
“잘 생각해 봐. 신 차장도 분명히 저놈과 무언가 연관이 있을 거야.”
신대환 차장은 머리를 고속으로 회전시켜서 자신이 겨울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기억 속을 헤집었다.
그러다가 5촌 조카인 신인석이 불쑥 떠올랐다.
“에이, 설마…….”
“뭔가 생각난 게 있나?”
“최준하가 해고당할 때, 제 5촌 조카인 신인석도 같이 해고당했거든요.”
“그게 정말인가?”
“혹, 혹시… 감사실에 투서한 놈이 저 새끼가 아닐까요?”
신대환 차장이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홍성훈 부장은 징계위원회 당시의 기억을 떠올리며 절대로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프리카에 처박혀 있는 놈이 우리에 대해 샅샅이 알고 있을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나?”
“누군가에게 저희의 비리를 조사해 달라고 의뢰…했을 수도 있잖아요.”
“이번 사건에 연루된 사람이 몇 명인데, 그게 상식적으로 가능하다고 생각해?”
“하긴… 부장님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그럼 범인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최 부회장님은 송 회장 측의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더라고.”
앞에서 걸어가던 겨울과 오정수 과장도 같은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과장님, 저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저희 법인까지 오게 된 겁니까?”
“으음, 다른 사람한테 퍼트리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얘기해 줄 수도 있고.”
“제 입에 달려 있는 열쇠가 얼마나 무거운지 아시잖아요.”
“하하, 알았어. 작년 10월에 감사실에 인사담당 박철헌 사장이 저지른 비리가 적힌 투서가 접수되었어.”
그리고 박철헌 사장의 비리에 연루된 두 사람이 권고사직을 거부한 결과, 아프리카 법인에 전배됐다는 얘기였다.
“두 사람을 최대한 빨리 회사에서 내쫓으라고 지시가 내려왔지.”
“과장님, 두 사람이 저렇게까지 버티는 이유가 뭘까요?”
“글쎄다. 이사님 말씀으로는 누군가 구제해 줄 거라 믿고 있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
“그 구세주가 최성진 부회장이라는 건가요?”
“이사님도 그렇게 추측하시더라.”
“그나저나 박철헌 사장의 비리를 투서한 사람이 누굴까요?”
“감사실에 근무하고 있는 동기한테 물어봤는데, 경찰이나 정보기관에 근무했던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고 하더라.”
“그렇게 판단할 근거가 있답니까?”
“비리 내용이 얼마나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었는지, 추가로 조사할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고 하더라고.”
순간, 겨울의 머릿속에 장대산의 이름 세 글자가 스치고 지나갔지만, 곧 아니라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가 박철헌 사장의 비리를 조사해서 투서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멈칫거리는 겨울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오정수 과장이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물어왔다.
“뭔가 아는 게 있나 보네?”
“아닙니다. 제가 뭐라도 알았으면, 과장님께 여쭤보지도 않았겠죠.”
“하긴…….”
“그나저나 저어기, 저 사람들에게 저희가 근무하는 사무실의 층수는 알려 줘야 하는 거 아닌가요?”
“나이가 한두 살인가. 알아서 찾아오겠지.”
* * *
회의실에는 아프리카 법인에 전입한 사람들이 초조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그중에는 당연히 홍성훈 부장과 신대환 차장도 섞여 있었다.
“부장님, 저희 둘만 이곳에 발령받은 게 아닌 거 같은데요?”
“그러게 말이야.”
“여기서 언제까지 대기해야 할까요?”
“글쎄? 조금 있으면 오 과장이 와서 알려 주겠지.”
덜컥.
그때, 회의실 문이 열리고 추성민 이사, 오정수 과장, 아놀드 대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람들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서 그들을 맞이했다.
비어 있는 상석에 앞에 선 추성민 이사는 그들의 면면을 일일이 살펴본 후,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는 아프리카 법인에서 관리팀장을 맡고 있는 추성민 이사라고 합니다. 먼 길을 오시느라 수고 많으셨습니다. 편안하게 자리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도록 합시다.”
모두가 자리에 앉자, 추성민 이사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저희는 여러분을 맞이하러 공항에 나가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이곳에 도착하는 시간이 제각각이라서 마중을 나갈 수 없었습니다. 이 점 양해해 주십시오.”
추성민 이사가 만약에 발생할 수 있는 불상사를 대비하기 위해서 밑밥을 깔았다.
“스케줄상으로는 정명훈 법인장님과 면담을 먼저 가졌어야 했습니다만, 법인장님께서는 지금 외부 일정을 소화하고 계십니다. 그런 이유로 저희 법인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먼저 하겠습니다. 오정수 과장, 시작하세요.”
“네, 이사님.”
사회자석에 서 있던 오정수 과장이 아놀드 대리에게 신호를 보냈다.
스크린에 ‘아프리카 법인 현황’이라는 제목의 장표가 비춰졌다.
“이제부터 저희 아프리카 법인에 대해서 소개하도록 하겠습니다. 저희 아프리카 법인의 본부는 이곳 요하네스버그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아프리카 대륙을 모두 관할할 수는 없어서, 남아공, 알제리, 에티오피아, 나이지리아, 콩고민주공화국, 이 다섯 곳에 지점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각 지점은 많게는 15개국을 관할…….”
오정수 과장은 30여 분 정도의 시간을 소비하며 아프리카 법인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나갔다.
“…아프리카 법인은 상, 하반기 모두 평가 1위를 달성할 정도로 무섭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올해도 이 추세가 이어질 것으로 예상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질문 받겠습니다.”
“저는 유제신 과장이라고 합니다. 저희는 어디에 배치될 예정입니까?”
“여덟 분은 관리팀과 마케팅지원팀에 배치될 예정이고, 두 분은 안타깝게도 업무량이 제일 많은 콩고 지점에 배치될 예정입니다.”
홍성훈 부장은 자신들의 근무지가 콩고민주공화국일 것 같다는 느낌이 강하게 왔다.
자기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는지, 신대환 차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부장님, 저희 근무지는 콩고 지점이겠죠?”
“아마도…….”
“콩고에 에이즈 환자들도 많다고 하는데, 어떡하죠?”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에이즈에 걸리지 않게 하면 되지.”
“그게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엄한 짓 안하고 착실하게 생활하면 에이즈에는 절대로 걸리지 않을 거야.”
“그건 그렇고, 회사가 너무 치사하게 구는 게 아닌가요?”
“꾹 참고 견뎌야지, 별수 있겠어.”
두 사람이 속닥대는 사이에도 질의응답은 계속되었다.
“이곳에 근무하다가 지점에 발령받을 수도 있습니까?”
“이삼 년에 한 번씩 로테이션이 이뤄질 예정입니다.”
“퇴사할 때까지 아프리카 법인에 근무해야 하는 겁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본사에 발령받아 갈 수도 있고, 다른 법인으로 이동할 수도 있습니다.”
“숙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족들이 이사 오는 경우에는 사택을 지원할 예정이고, 독신자들은 호텔이나 게스트 하우스를 숙소로 정하시면 됩니다.”
오정수 과장은 여기저기에서 쏟아지는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해 주고 마무리 멘트를 날렸다.
“이제 질문이 더 이상 없는 것 같으니, 오리엔테이션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이사님의 말씀을 듣겠습니다.”
“흠흠.”
가볍게 헛기침을 통해서 사람들의 시선을 모은 추성민 이사가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도 여러분처럼 아프리카 법인에 처음 발령을 받았을 때 두려움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이곳에서 근무해 본 결과, 아프리카 대륙은 생각보다 근무 환경이 열악한 지역이 아닙니다. 각자 맡은 바 업무에 최선을 다하면, 반드시 보답이 있을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이제부터 법인장님과의 면담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법인장실이 협소한 관계로 열 명 모두가 들어갈 수 없어서, 세 번에 나눠서 진행하겠습니다. 홍성훈 부장과 신대환 차장은 저를 따라와 주시고, 다른 분들은 대기하고 계십시오.”
추성민 이사가 두 사람을 데리고 회의실에서 퇴장하자, 그곳에 남아 있던 오정수 과장이 빙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대충 눈치채셨겠지만, 여기 계신 여덟 분의 근무지는 이곳입니다.”
“와!”
여덟 명은 로또 복권을 맞은 것처럼 커다란 환호성을 질렀다.
“이제부터 관리팀에 배치될 분들의 성명을 불러드리겠습니다. 유제신 과장, 소명훈 대리…….”
법인장실.
정명훈 법인장은 추성민 이사에게 건네받은 두 사람의 인사 기록 파일을 꼼꼼하게 읽은 후, 차분한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우리 아프리카 법인은 인력이 항상 부족한 상태입니다. 따라서 두 분의 과거에 대해서는 불문에 붙이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법인장님.”
과거를 불문에 붙이겠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두 사람이었다.
정명훈 법인장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두 분의 발령지가 어디인지 알고 있습니까?”
“…콩고 지점일 것 같습니다.”
“네. 맞습니다. 그나저나 두 분의 어학 실력은 어떻게 됩니까?”
“외국인과 간단한 대화를 주고받을 정도는 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프랑스어 실력이 그렇다는 말씀이겠죠?”
“네? 프랑스어요?”
홍성훈 부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두 분이 주로 생활하게 될 콩고민주공화국의 공용어는 프랑스어입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3개월 안으로 프랑스어를 마스터하십시오.”
“하아…….”
홍성훈 부장이 내뱉는 한숨소리가 그의 허탈한 심정을 말해 주고 있었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