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과거의 기억
홍성훈 부장.
겨울은 당연히 그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에게 온갖 감언이설을 늘어놓으며 아프리카 법인에 가도록 만든 사람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이번에 콩고 지점으로 오게 될 사람이 그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동명이인이 아닐까 짐작했다.
‘요직 중에 요직인 인사담당에서 근무하고 있는 사람이 뭐가 아쉬워서 아프리카로 발령을 받아서 오겠어. 아마도 동명이인이겠지.’
겨울이 속으로 자문자답하는 사이, 정명훈 법인장과 김종학 지점장의 통화는 계속되었다.
“김 지점장, 홍성훈 부장과 신대환 차장을 알고 있나?”
[지주회사 인사담당에 근무하고 있는 사람들 아닙니까?]
“맞아.”
[그렇다면 신 차장은 모르겠고, 홍 부장은 알고 있습니다.]
“홍 부장이 김 지점장과 같은 해에 입사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혹시 입사 동기인가?”
[법인장님, 그런 말씀하지 마십시오. 저는 1월에 입사했고 그 인간은 11월에 입사했는데, 어떻게 입사 동기가 될 수 있겠습니까?]
김종학 지점장의 툴툴거리는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홍 부장과 사이가 별로인가 보네?”
[부장 진급 교육 과정에서 처음 만났는데, 얼마나 싸가지 없게 구는지… 진짜 참다가 화병 날 뻔했습니다. 그나저나 그 두 사람을 언급하는 이유가 뭡니까?]
“그 두 사람이 우리 법인으로 전배되어 올 예정이야.”
[네? 그 잘나가는 사람들이 왜요?]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얘기해 줄 수는 없었다.
“나도 잘 몰라. 다만 사장님께서 두 사람을 업무가 가장 많은 콩고 지점에 배치하라고 하셔서 그렇게 한 거야.”
[흐흐흐, 무슨 말씀인지 감 잡았습니다.]
“역시 눈치가 참 빨라. 다음 주 중에 콩고 지점으로 보낼 테니까, 그렇게 알고 있어.”
[네, 법인장님.]
“아차, 공항에 마중 나가지 말라는 사장님의 엄명도 있었다.”
[에이, 그런 거 정도야 말하지 않아도 압니다.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한편, 추성민 이사는 정명훈 법인장의 입에서 홍성훈 부장과 신대환 차장의 이름이 언급될 때, 겨울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다.
느낌상 겨울도 두 사람과 좋지 않은 기억으로 엮여 있는 듯했다.
추성민 이사는 그 사연을 파악해 보리라 마음을 먹었다.
“한 대리, 법인장님께서 언급한 홍성훈 부장과 신대환 차장을 알고 있나?”
추성민 이사의 질문을 받은 겨울은 짧은 고민에 빠졌다.
홍성훈 부장에게 뒤통수를 맞은 사연을 미주알고주알 얘기해 봐야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대환 차장은 처음 들어봤습니다만, 홍성훈 부장은 신입 사원 연수를 받을 때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음, 한 대리를 우리 법인으로 보낸 범인이 홍 부장인가?”
“네, 그렇습니다.”
“그래, 홍 부장이 어떻게 꼬시던가?”
“영어가 부족하다고 아프리카 법인에 가서 많이 배우라고 하더군요.”
추성민 팀장은 겨울이 아프리카 법인에 배치받게 된 일련의 과정을 이제야 완벽하게 이해했다.
지금까지 송훈석 회장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라 최성진 부회장과 관련이 있어서라고.
그리고 최성진 부회장은 외아들인 최준하를 해고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겨울이라고 판단했을 터였다.
그러니 박철헌 인사담당 사장에게 지시해서 겨울을 아프리카로 내쫓은 뒤, 퇴사시키라고 지시했을 것이다.
이에 박철언 사장은 홍성훈 부장에게 그 역할을 맡겼을 것이고.
“흐흐, 그렇다면 홍 부장이 한 대리한테는 은인인 셈이네?”
“하하, 그렇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얘기해 줄 수 있나?”
“네, 말씀하십시오.”
“입사 동기였던 최준하가 신입 사원 연수 당시에 해고당한 이유가 뭔가?”
그의 질문에 겨울은 잠시 갈등했다.
며칠 전, 지주회사 인사담당에 근무하고 있는 이재성과 통화를 하다가 최준하가 신입 사원으로 다시 입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와 또다시 악연으로 엮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고개를 가로저었다.
최준하가 또 커다란 사고를 치지 않는 이상 아프리카 법인으로 올 이유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가 대한 그룹에 재입사한 이상, 과거를 여기저기에 퍼트리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사님, 죄송합니다만, 아무래도 말씀드리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왜?”
“최준하가 재입사한다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으음,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잠시 대화가 끊어진 틈을 타서 정명훈 법인장이 입을 열었다.
“고 팀장, FTA팀에 인원을 추가로 한 명 더 배치할 예정이야. 고 팀장은 리더의 역할에만 집중해 줘.”
“네, 알겠습니다.”
“자, 이제 나를 찾아온 이유를 들어 볼까?”
“먼저 제가 건네드리는 자료를 읽어 보시고, 한 대리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을 듯싶습니다.”
“알았어. 이리 줘 봐.”
자료를 꼼꼼하게 읽어 본 정명훈 법인장은 자료를 다시 추성민 이사에게 건네주고, 겨울에게 말을 건넸다.
“한 대리,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가정하고 송유관 건설 프로젝트에 대해서 설명해 봐.”
“네, 법인장님. 우간다의 호이마라는 지역에서 탄자니아의 탕가까지 이어지는 송유관 건설 프로젝트는 5년 전에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겨울은 기존에 알고 있었던 지식과 심바 과장이 보내온 자료를 근거로 송유관 건설 프로젝트에 대해서 보고했다.
“…해서 3월에 국제 입찰을 실시할 예정입니다.”
“송유관 건설 프로젝트에 중국의 CNOOC가 33.3%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면, 송유관 건설도 중국 건설사가 가져가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굳이 국제 입찰을 붙일 이유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약에 우리가 입찰에 참여한다면, 성공 가능성이 몇 %라고 생각하는가?”
“결과를 섣불리 예단할 수는 없지만, 다른 나라 건설사들과 동등한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동등한 조건이라…….”
정명훈 법인장이 끝말을 흐리며 생각에 잠겼다.
겨울을 비롯한 다른 두 사람은 그의 생각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잠시 입을 닫았다.
약간의 시간이 지난 후, 정명훈 법인장이 자세를 바로하며 입을 열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가 있겠지?”
“프랑스는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말도 가볍게 무시할 정도도 자존심이 강한 나라입니다. 따라서 입찰을 주관하고 있는 토탈도 중국 정부의 압력을 코웃음치고 넘어갈 것이 확실합니다.”
“흐음, 나는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으로 아는데, 나한테 언급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겨울은 정명훈 법인장이 이런 얘기를 꺼낼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고, 그에 따른 답변도 만들어 놓고 있었다.
“만약을 대비해서 히든카드로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그러지 말고, 우리가 송유관 건설 프로젝트를 수주할 가능성이 얼마나 되는지 솔직하게 얘기해 봐.”
“중국 건설사들보다는 불리하지만, 다른 나라 건설사들보다는 약간 유리할 것 같습니다.”
“히든카드를 사용했을 경우에 그렇다는 말이겠지?”
“네, 그렇습니다.”
두 사람의 선문답을 지켜보고 있던 추성민 이사는 호기심이 치솟아 올라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법인장님, 히든카드가 대체 뭡니까?”
“미안하지만 얘기해 줄 수 없어.”
“왜요?”
“한 대리 말대로 결정적인 순간에 히든카드로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지.”
“저희에게조차 숨겨야 할 히든카드라… 일단 함구하고 있겠습니다.”
추성민 이사와 대화를 끝낸 정명훈 법인장은 고영규 팀장한테 시선을 옮기며 말을 건넸다.
“고 팀장, 본사에서 송유관 건설 입찰에 참여하겠다고 결정하면, 최선을 다해서 입찰을 수주할 수 있도록 해 봐.”
“네, 법인장님.”
“한 대리가 언급한 히든카드를 염두에 두지 말고 입찰 전쟁에 뛰어들어야 할 거야.”
“알겠습니다.”
“심바 과장이 보내온 자료는 나한테 보내 주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고영규 차장과 겨울이 정명훈 법인장에게 목례하고 법인장실에서 퇴장하자, 추성민 이사가 입을 열었다.
“법인장님, 오늘 저녁때 한 대리한테서 밥을 얻어먹을 겁니까?”
“설마. 나하고 추 이사가 한 대리한테 갚을 빚이 얼마인데 얻어먹겠나. 다 그냥 농담 삼아 그냥 해 본 말이야.”
“하하하, 알겠습니다.”
“저녁은 내가 살 테니까, 2차는 추 이사가 쏴.”
* * *
이진호 사장은 정명훈 법인장이 보내온 자료를 꼼꼼하게 읽은 후, 전화를 걸어서 궁금한 점에 대해 물었다.
“정 법인장, 중국 놈들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괜히 헛수고를 하는 게 아닐까요?”
[저희가 수주할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겠죠?”
[저희에게는 유난히 운이 따르는 한겨울 대리가 있잖습니까.]
“흐음, 한 대리하고 송유관 건설 프로젝트와 관련이 있다는 말이죠?”
[탄자니아와 우간다는 한 대리가 관할하는 나라입니다.]
“알았어요. 내가 회장님께 말씀드려 보고, 입찰 참여 여부를 결론 내려 줄게요.”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이진호 사장은 즉시 서동호 실장에게 메일을 전송했다.
윙윙―
약 5분 정도 지난 후, 이진호 사장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아마도 서동호 실장이 메일을 검토하자마자 전화를 걸어온 것이리라.
“네, 실장님.”
[회장님께서 올라오시랍니다.]
“지금 즉시 출발하겠습니다.”
송훈석 회장 집무실.
이진호 사장이 비서의 안내를 받아서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니, 그곳에는 문세형 대한건설 사장과 조병석 전략기획실 실장이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는 송훈석 회장에게 목례하고, 비어 있는 소파에 앉았다.
그가 마지막이었는지, 송훈석 회장이 바로 차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비서가 커피를 내올 때까지 문 사장님과 조 실장님은 서 실장이 건네준 자료를 읽어 보세요.”
“네, 회장님.”
자료를 읽어 보던 문세형 건설 사장은 3년 전의 안 좋은 기억이 불쑥 떠올라서 인상을 찡그렸다.
당시에 우간다와 탄자니아 정부는 송유관 건설공사 입찰을 진행하다가, 불과 3일을 남겨놓고 입찰을 전격 취소했다.
그 소식을 듣고 얼마나 허탈했는지.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화가 불끈 솟아오를 정도였다.
그 후, 송유관 건설 프로젝트와 관련된 소문이 들려오고 있지 않아서, 프로젝트가 무산된 것으로 여기고 관심을 접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또다시 입찰을 진행한다고 한다.
그런 그의 모습을 봤는지, 송훈석 회장이 말을 걸어왔다.
“문 사장님, 송유관 건설 프로젝트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네, 잘 알고 있습니다. 프로젝트는 5년 전에 처음 시작되었습니다.”
이 말을 시작으로 문세형 사장은 당시부터 지금까지의 사건을 시간 순으로 자세하게 보고했다.
“…그래서 영원히 프로젝트가 무산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입찰이 취소된 이유를 알고 있습니까?”
“우간다 정부와 사업 초기부터 MOU(Memorandum Of Understanding, 양해각서)를 체결한 석유 회사들이 있었는데, 그들 사이에 내분이 벌어진 게 문제였다고 알고 있습니다.”
“음, 알았어요.”
잠시 후, 비서가 커피를 내왔다.
송훈석 회장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가장 중요한 질문을 입을 올렸다.
“문 사장님, 우리가 입찰에 참여하면 승산이 있을까요?”
“CNOOC 놈들이 틀림없이 뭔가 수작을 부려 놨을 겁니다. 아마 거의 없다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조 실장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저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승산이 약간이나마 있다고 생각합니다.”
송훈석 회장도 문세형 사장처럼 성공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었다.
그런데 조병석 실장은 두 가지 이유를 들며 승산이라는 말까지 꺼낸 것이었다.
흥미가 생긴 송훈석 회장은 상체를 조병석 실장에게 가까이 기울이며 말을 재촉했다.
“빨리 얘기해 보세요.”
“먼저 입찰을 주관하고 있는 회사가 프랑스의 토탈이라는 점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거의 비슷비슷한 모양인지, 겨울이 언급했던 얘기가 고스란히 조병석 실장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국제 입찰을 진행한다는 의미는 토탈이 CNOOC이 제안한 수의계약을 거절했기 때문일 겁니다.”
“둘째 이유는 뭡니까?”
“우리의 호프인 한겨울 대리가 아프리카에 떡하니 버티고 있잖습니까?”
“으하하하!”
송훈석 회장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온 집무실을 울렸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