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뇌물은 선택이 아닌 필수
회사에 출근한 겨울은 정명훈 지점장의 표정이 매우 어둡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이유를 파악해 보기 위해서 맞은편에 앉아 있는 가쿠타 과장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사장님과 통화하신 이후로 컨디션이 급다운되셨어요.”
겨울은 그 이유가 무엇인지 대충 알 것도 같았다.
이진호 사장님으로부터 올해도 임원으로 승진하지 못했다는 통보를 받은 것이리라.
콩고 지점은 작년에 비해서 수출이 100% 이상 신장했고, 8월에 있었던 핸드폰 기지국 업그레이드 입찰도 대한 그룹이 낙찰받을 수 있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렇게 탁월한 성과를 기록했는데도 임원으로 승진하지 못하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임원으로 승진한단 말인가.
그동안 고생한 장면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겨울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과장님, 오늘 저녁때 위로주를 사 드리는 게 어떨까요?”
“지점장님이 임원 승진에 탈락해서 컨디션이 다운된 게 아닌 것 같아요.”
제대로 헛다리를 짚은 겨울이었다.
“어라? 그게 아니라고요?”
“지점장님은 사장님과 코발트 광산 건과 SUV 자동차 건에 대해서만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어요.”
겨울이 뭐라 더 물어보려 했지만, 정명훈 지점장이 회의를 소집했기에 두 사람의 대화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회의실.
정명훈 지점장은 아만다가 서빙해 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입을 열었다.
“임원 승진과 관련한 이런저런 소문이 떠돌아다니는 것 같은데, 소문은 소문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도록.”
“네, 지점장님.”
“가쿠타 과장, 현장 사무실에서 올라온 보고 중에서 특이한 점이 있나?”
“잠비아의 말라마 과장한테 올라온 보고인데, ZAHA 유통의 싱칼라 회장이 말라리아와 콜레라 치료제를 1,000만 개씩 추가로 발주했답니다.”
“납기는?”
“최대한 빨리 보내 달라고 합니다.”
“흐음, 그나저나 싱칼라 회장은 두 치료제 1,000만 개를 소화할 수는 있다고 하던가?”
“일부는 잠비아에서 소화하고, 나머지는 우리나라와 탄자니아, 그리고 앙골라에 공급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정명훈 지점장은 암산을 통해서 네 나라의 인구를 계산해 보았다.
약 1억 8,000만 명.
어쩌면 말라리아와 콜레라 치료제가 부족할 수도 있다는 판단이 섰다.
“가쿠타 과장, 말라마 과장한테 전화해서 이번에 발주하는 물량 말고, 추가로 발주할 수 있는 물량이 있는지 확인해 봐.”
“그렇게 하겠습니다.”
“또 다른 보고는 없나?”
“탄자니아 현장 사무실에서 올라온 보고입니다. 우간다와 탄자니아를 연결하는 1,450㎞ 길이의 송유관 건설 사업이 내년에 본격적으로 추진될 것 같다고 합니다.”
“공사 규모는 얼마 정도라고 하는가?”
“35억 달러 정도라고 합니다.”
“대한건설이 참여할 가능성이 있으니까, 지속적으로 동향 보고를 해 달라고 해.”
“네, 지점장님.”
그 후에도 가쿠타 과장은 현장 사무소에서 올라온 보고를 정명훈 지점장에게 상세하게 보고했고, 즉석에서 컨펌을 받았다.
“부지점장하고 가쿠타 과장만 남고, 나머지는 나가서 일들 보라고.”
“네, 지점장님.”
우르르.
직원들이 회의실 밖으로 퇴장하자, 정명훈 지점장이 겨울에게 말을 건넸다.
“부지점장, 카낭가에 출장 다녀온 것에 대해서 내가 특별하게 알고 있어야 하는 일이 있나?”
“무케나 사장을 만나고 킨샤사로 돌아오는 도중에 사건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떤 사건인지 얘기해 봐.”
“카낭가에서 출발한 지 세 시간 정도 지났는데…….”
겨울은 국경 없는 의사회를 도와서 마을 주민들을 도왔던 얘기와 VIP들에 대한 얘기를 간략하게 보고했다.
당연히 반군 기지에 침투해서 필수 의약품을 되찾아온 얘기는 하지 않았다.
“…VIP 중에 한 사람인 반투야를 트시카파까지 태워 줬습니다. 고맙다는 의미에서 최고급 사양의 킹스타를 한 대 구입해 주기로 약속했습니다.”
겨울의 보고를 듣고 있던 정명훈 지점장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이 여러 개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하나하나 물어서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었지만, 산적한 일들이 많았기에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흐음, VIP들이 그런 오지까지 간 이유가 뭐라고 하던가?”
“마침 그날이 국경 없는 의사회의 현장 사무소 개소식이었습니다.”
“VIP들의 신분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은 없고?”
“중상을 입은 두 사람은 얼굴조차 보지 못했습니다만, 반투야를 보고 실장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들었습니다. 그래서…….”
겨울은 반투야의 신분을 확인하기 위해서 들인 노력을 상세하게 보고했다.
“은센기 씨는 반투야가 비밀정보국의 고위 관리일 거라고 예상했습니다.”
“어떤 근거로?”
“제일 먼저 군사령관… 아차차.”
실수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겨울이 아예 입을 닫아 버렸다.
“부지점장, 비밀로 할 테니까, 계속 얘기해 봐.”
“아, 네. 트시카파로 이동하던 도중에 반투야는 누군가와 통화했고…….”
겨울은 윌리마 트시카파 경찰서장과 야쿠보 사령관을 만난 얘기와 군부대 상황실에서 보고 들은 것을 정명훈 지점장에게 보고했다.
물론 민감하다고 생각되는 내용은 철저하게 숨겼다.
“…결국 반군들은 소탕됐다고 들었습니다.”
“으음, 엄청난 사건이 있었군. 이 얘기는 나하고 가쿠타 과장만 알고 있는 것으로 하겠네.”
“네, 알겠습니다.”
“이제 실무적인 얘기를 해 보자고. 반투야한테 킹스타는 얼마에 판매하기로 했나?”
“관세와 운송비 포함해서 5만 달러를 불렀는데, 별도로 견적서를 산출해서 이번 주에 만나기로 했습니다.”
“반투야의 연락처는 받았나?”
“네. 한 번 통화까지 했습니다.”
“잠깐만 기다려.”
겨울과 대화를 중단한 정명훈 지점장은 그들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듣고 있던 가쿠타 과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우리 법인의 마진을 10%로 책정해서 견적서를 산출해 봐.”
“네, 지점장님.”
“반투야한테 오늘 당장 연락이 올 수 있으니까, 서둘러야 할 거야.”
“네, 알겠습니다.”
눈치 빠른 가쿠타 과장이 얼른 회의실에서 퇴장했다.
그의 뒷모습을 힐끗 쳐다본 정명훈 지점장은 바로 다른 안건을 꺼내 들었다.
“부지점장, 아까 사장님하고 통화했는데, 회장님은 우리와 무케나 사장이 코발트 광산을 공동 개발하기를 원하고 계신다고 하더라고.”
“그래요? 정말 잘됐네요!”
“그런데 문제가 하나 생겼어. 무케나 사장이 불가피한 사정이 생겼다고 하면서, 우리와의 미팅을 무기한 연기시켰어.”
“어? 무케나 사장님께 자세한 이유는 들어 보지 못했습니까?”
“후우, 얘기하기를 꺼려하는데… 상당히 난감해하는 목소리더군.”
“혹시… 중국 투자자가 저희보다 훨씬 좋은 조건을 제시한 건 아닐까요?”
“나도 비슷한 생각이야. 그래서 하는 얘기인데, 은센기 씨한테 전화해서 어떤 사연이 있는지 물어보면 안 될까?”
“네, 알겠습니다.”
겨울은 주저없이 은센기한테 전화를 걸어서 부탁의 말을 전하고 통화를 종료했다.
“알아보고 연락해 준다고 했습니다.”
“좋아. 이제 SUV 자동차 얘기를 해 보지. 사장님께서는 우리가 수주하기를 잔뜩 바라고 있으신데, 뭔가 대책이 없을까?”
“지난주에 지점장님과 대화를 나눈 것처럼 홍삼 선물 세트를 들고 내무부 담당 국장을 찾아가는 것이 어떨까요?”
“한국 식당에 쓸 만한 홍삼이 없다며.”
“제가 한국에 살고 있는 친구한테 고급 홍삼을 보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흐음, 부지점장 친구가 공짜로 보내 준 건 아닐 테고… 비용이 얼마나 들었나?”
“300만 원 들었습니다.”
“뭐? 홍삼 선물 세트 하나가 그렇게 비싸다고?”
정명훈 지점장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다른 용도로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넉넉하게 열 세트 보내 달라고 했습니다.”
“깜짝 놀랐네. 하여간 손도 어지간히 크구먼. 오전 중으로 비용 지원 품의 올려.”
윙윙―
그때, 겨울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당연히 은센기가 걸어온 전화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발신자는 무케나 사장이었다.
어리둥절해하면서도 겨울은 즉시 정명훈 지점장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전화받았습니다, 무케나 사장님.”
[한 부지점장님, 킨샤사까지 잘 돌아갔습니까?]
“네. 별일 없이 잘 왔습니다.”
[은센기는 파란만장했다고 하던데… 누구의 말이 맞는 겁니까?]
“킨샤사로 돌아오는 도중에 산사태를 만난 것 때문에 그러는 것 같습니다.”
[뭐, 아무튼 그 얘기는 나중에 하고, 코발트 광산 건 때문에 스트레스 받아서 죽겠습니다. 한 부지점장님이 저를 도와주시면 안 됩니까?]
이런 얘기를 꺼내는 것을 보니 은센기가 반투야의 신분을 무케나 사장에게 언급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의 신분은 자기와 은센기가 추측한 결과물이라서 틀릴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다.
설령 그가 비밀정보국의 고위 관리라도 자신의 부탁을 들어준다는 보장 또한 없었다.
문제는 무케나 사장의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할 수 없다는 점에 있었다.
일단 반투야에게 말이나 꺼내 보기로 마음먹었다.
“제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될까요?”
[제 억울한 사연을 반투야 씨한테 얘기해 주십시오.]
“후우, 그 사연이 무엇인지 말씀해 보세요.”
[제가 채굴하려는 코발트 광산은 도로에서 5㎞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도로를 신설해야 하는데, 공무원 놈들이 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습니다.]
보나마나 빤했다.
공무원들은 무케나 사장한테 도로 신설 허가를 내주는 조건으로 뒷돈을 요구했을 것이 분명했다.
무케나 사장은 주지 않으려고 버티고 있는 중이고.
겨울은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저도 공무원 놈들한테 어느 정도는 줄 생각이었습니다만… 이놈들이 요구하는 금액이 너무 많습니다.]
“얼마를 요구하고 있습니까?”
[100만 달러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네?! 그게 사실입니까?”
겨울이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그것도 제가 열심히 깎아서 100만 달러입니다.]
“아니, 그놈들이 그렇게나 많은 돈을 요구하는 이유가 뭐랍니까?”
[도로와 코발트 광산 사이에 산이 하나가 있는데, 그걸 정부가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 산을 통과하지 못하면, 코발트 광산까지 진입할 수 없다는 점을 악용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하아, 우선 제가 반투야 씨한테 부탁은 해 보겠습니다만… 큰 기대는 하지 말아 주십시오.”
[반투야 씨한테 5만 달러까지는 뒷돈을 줄 수 있다고 얘기해 보십시오.]
콩고민주공화국에서의 뇌물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그 배경에 이 나라 공무원들의 평균 월급이 100달러 수준으로, 상당히 열악한 조건에 놓여있는 상황도 한몫했다.
반투야가 아무리 비밀정보국의 고위 관리라고 하더라도 월급은 끽해야 500달러 정도일 것이다.
그렇다는 소리는 그런 쥐꼬리만한 공무원 월급으로 5만 달러짜리 SUV 자동차의 구입은 쉽지 않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뜻 킹스타를 구입한다는 뜻은 그도 그동안에 꾸준히 뒷돈을 챙겨 왔다는 뜻.
이런 사실을 알고 있기에 무케나 사장이 5만 달러를 뒷돈으로 제시한 것이었다.
짧게 생각을 끝낸 겨울은 무케나 사장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렇게 전달하겠습니다.”
[한 부지점장님이 도로 신설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무조건 대한 그룹과 코발트 광산 공동 개발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좋은 소식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겨울은 정명훈 지점장에게 통화 내용을 상세하게 보고했다.
“…죽으나 사나, 도로 신설 문제부터 해결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알았어. 추성민 팀장하고 통화해 볼 테니, 먼저 나가 있어.”
“네, 지점장님.”
회의실 밖으로 나온 겨울이 자리에 앉자, 가쿠타 과장이 견적서를 건네주며 말했다.
“부지점장님, 견적을 산출해 봤는데, 4만 9,000달러가 나왔습니다.”
“저희가 수입해서 고객의 집 앞에까지 운송해 주는 조건이겠죠?”
“네, 그렇습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잠시 후, 통화를 마친 정명훈 지점장이 회의실에서 나와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겨울은 그에게 견적서를 보여 주고 최종적으로 가격을 컨펌받았다.
이제 반투야한테 전화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오후에는 호영이 항공으로 보내온 홍삼 선물 세트 열두 박스가 사무실에 도착했다.
두 박스는 호영의 정성이 담긴 선물이었다.
겨울은 친구가 보내왔다고 말하고 그중 한 박스를 정명훈 지점장에게 건네주었다.
부담스럽다며 받지 않으려는 그에게 건강이 염려된다는 점을 빌미삼아 겨울은 반 강제로 떠넘겨 버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지만, 끝내 반투야에게서 전화는 걸려오지 않았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