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 (2)
“민 팀장, 정 지점장 후임으로 누구를 보낼지 생각해 봤어?”
민경진 팀장은 안정혁 법인장이 지난 4월 초에 내린 지시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콩고 지점의 실적이 상반기까지 개선되지 않으면 지점장을 교체하겠다면서 후임자를 물색해 놓으라고 했다.
하지만 정명훈 지점장은 5월에 무려 2,000만 달러가 넘는 수출 실적을 기록하면서 단숨에 실적을 플러스로 전환시켰다.
뿐만 아니라 6월에는 무려 6,000만 달러가 넘는 수출 실적을 기록했다.
따라서 콩고 지점의 지점장 교체는 없을 것으로 예상하고, 후임자 물색 건은 업무 노트에서 지워 버렸다.
그런데 안정혁 법인장은 무슨 심술이 도졌는지 정명훈 지점장의 교체에 대해서 다시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법인장님, 정 지점장하고 안 좋은 일이 있습니까?”
“하, 그 친구가 내 지시를 정면으로 들이받더군.”
보나마나 빤했다.
안정혁 법인장은 한겨울에게 사표를 받으라고 요구했을 테고, 고지식한 정명훈 지점장은 불가하다고 맞섰을 것이다.
“법인장님, 저희 법인의 스타를… 그것도 이 시기에 함부로 교체하는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뭐? 민 팀장도 지금 나한테 반항하는 거야?!”
안정혁 법인장이 화를 버럭 냈지만, 민경진 팀장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그게 아닙니다, 법인장님. 한겨울만 회사에서 쫓아내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렇기는 하지.”
“굳이 정 지점장을 내쫓을 필요는 없다는 말을 드리는 겁니다. 저한테 한 달만 주시면, 책임지고 한겨울에게 사표를 받아 내겠습니다.”
“한 달은 너무 길어. 보름 안에 끝내.”
“조금 무리이기는 하지만, 최대한 용써 보겠습니다.”
둘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보던 추성민 팀장은 식은땀을 흘렸다.
아무리 봐도 둘은 무리수를 두고 있다 생각된 것이다.
잘못하다가는 한겨울보다 그들이 먼저 회사에서 쫓겨날 수도 있다고 생각한 그는 급히 말을 꺼냈다.
“법인장님, 한겨울이 보잘 것 없는 스펙을 가지고도 대한 그룹에 입사한 이유를 제가 알고 있는데, 말씀해 드릴까요?”
“뭔데? 얘기해 봐.”
“회장님께서 한겨울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 회장님께서 한겨울을 특별 채용했다는 말이야?”
“네. 적어도 저는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하…….”
안정혁 법인장은 추성민 팀장의 말이 거짓이라고 판단했다.
만약에 그의 말이 진실이라면, 한겨울을 굳이 이 험한 아프리카까지 보낼 이유가 없었다.
“추 팀장은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말이 안 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근거를 얘기해 봐.”
“사자가 새끼를 낳으면 낭떠러지 밑에 떨어뜨려서 기어오르게 한다는 말을 아십니까?”
“어이, 추 팀장. 그럼 뭐, 한겨울이 회장님의 혼외 자식이라도 된다는 말이야, 지금?”
안정혁 법인장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이에 반해 추성민 팀장은 세 가지 정황을 근거 삼아서 그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겨울의 스펙이 엉망진창인데도 대한 그룹에 입사했다는 점.
이종수 이사가 한겨울에게 애정을 듬뿍 가지고 있다는 점.
최성진 부회장이 한겨울을 잔뜩 견제하고 있다는 점 등이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은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회장님이 한겨울을 알고 있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때, 민경진 팀장이 할 말이 있다는 듯 발언권을 요청했다.
“법인장님, 한겨울이 회장님과 어떤 관계인지 대충 알 것 같습니다.”
“말해 봐.”
“한겨울의 아버지와 회장님이 알고 지내는 사이 아닐까요?”
한겨울의 아버지가 송훈석 회장에게 청탁했다면 충분히 얘기가 된다.
송훈석 회장이 그의 부탁을 받아들여 대한 그룹에 취직시켜 주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두 사람의 관계가 그다지 친하지 않아서 한겨울이 아프리카에 발령 나든지, 말든지 별로 신경 쓰지 않았을 수도 있고.
일련의 생각을 끝낸 안정혁 법인장은 고개를 돌려서 추성민 팀장에게 물었다.
“민 팀장의 의견에 어떻게 생각하나?”
“저도 그럴 가능성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무능력한 인간을 퇴사시키면 회장님이 반대하실까?”
“법인장님, 제가 지난번에 술자리에서 말씀드린 것은 기억나지…….”
그때.
우우우웅―
안정혁 법인장한테 전화가 걸려왔기 때문에 그의 얘기는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조용히 해.”
발신자를 확인한 안정혁 법인장이 버럭 소리치고 재빨리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사장님.”
[안 법인장, 당신이 그렇게 한가한 사람인가?]
안정혁 법인장은 겁을 덜컥 집어먹었다.
이진호 사장은 정중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런 그가 반말을 사용했다는 것은 단단히 화가 나 있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이 이진호 사장한테 잘못한 일은 없었다.
그렇다 해서 자신의 목줄을 쥐고 있는 직속 상사한테 덤벼들 수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제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당신이 무슨 권리로 한겨울에게 사표를 요구하는데?]
안정혁 법인장은 이제야 모든 정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진호 사장과 정명훈 지점장 간의 접점은 없으니 답은 하나였다.
정명훈 지점장이 자신과의 통화 내용을 한겨울에게 얘기해 주었고, 그놈이 아버지한테 조르르 일러바친 것이라면 이 상황과 딱 들어맞는다.
한겨울의 아버지는 아들의 얘기를 듣고 송훈석 회장에게 따졌을 것이고, 이진호 사장은 회장님께 불려가서 싫은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안정혁 법인장은 기회주의자같은 모습의 한겨울이 괘씸하기까지 했다.
“사장님, 우리 회사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인간들은 최대한 빨리 솎아 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은 한겨울이 무능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그렇습니다! 스펙과 언어 구사 능력조차도 형편없는 친구가 밥값이나 제대로 하겠습니까?”
[그래서 정명훈 팀장에게 한겨울의 사표를 받으라고 요구했나?]
“네, 그렇습니다.”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
‘설마… 사장님이 알고 있나? 에이, 알 리가 있겠어.’
그는 가볍게 무시하고 이진호 사장과 대화를 이어 나갔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알겠네. 한겨울이 무능하다는 사실은 정명훈 지점장한테 직접 확인했나?]
당연히 물어보지 않았지만, 사실대로 얘기할 수는 없었다.
그래봐야 긁어 부스럼일 테니까.
“네, 사장님.”
[…정 지점장이 진짜로 그렇게 말했다는 말이야?]
“네, 틀림없습니다.”
[만약에 사실이 아니면 어떻게 할 건가?]
다리를 건너올 때, 다리 자체를 아예 불살라 버렸기에 이제는 죽어도 직진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형태로든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마지막 경고일세. 다시 한번 확인하고 전화해.]
뚝.
이진호 사장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아이고, 돌아 버리겠네.”
안정혁 법인장은 핸드폰을 던지듯 내려놓고 머리를 쥐어뜯었다.
“법인장님,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십니까?”
“사장님은 한겨울이 무능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계시는 것 같아.”
“에이, 설마요.”
그때, 추성민 팀장이 또 대화에 끼어들었다.
“사장님 말씀이 맞습니다.”
“추 팀장은 알고 있는 것이 있어?”
“제가 지난번에 술자리에서 말씀드렸는데, 법인장님과 민 팀장이 그럴 리 없다면서 믿지 않았잖습니까?”
“영어도 제대로 구사하지 못하는 신입 사원이 싱칼라 회장을 설득했다는 말을 내가 어떻게 믿어?”
“한겨울이 영어를 구사하지 못한다고요?”
“토익 385점이면 빤한 거 아니야?”
민경진 팀장이 조심스런 목소리로 한마디 보탰다.
“저… 법인장님, 한겨울은 영어를 제법 구사할 줄 압니다.”
“뭐? 그게 사실이야?”
“네. 한겨울과 인사 상담할 때, 영어 회화 능력을 직접 검증해 봤습니다.”
“그 얘기를 지금까지 나한테 하지 않은 이유가 뭔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법인장님, 입사 3개월 조금 넘은 신입 사원이 어떻게 그런 아이디어를 구상해 내겠습니까? 정 지점장이 한겨울을 띄워 주려고 거짓말했을지도 모릅니다.”
안정혁 법인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이 맞을 거라 스스로 위안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시간을 끌지 않고 정명훈 지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추 팀장 말이 맞습니다.]
“거짓말하지 말고, 진실을 얘기해 봐.”
[제 말이 의심스러우면 ZAHA의 싱칼라 회장한테 직접 물어보십시오. 아니, 어차피 저희 대한 그룹 회장님께서도 다 알고 계시는데 그만 의심할 때도 되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안정혁 법인장은 하늘이 우르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송훈석 회장도 알고 있다는 얘기는 이진호 사장도 알고 있다는 뜻.
그런 사실도 모른 채 거짓말을 잔뜩 늘어놓았으니.
이 사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전혀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일단 진상 파악이 먼저였다.
“정 지점장, 그런 얘기를 왜 나한테 보고 안 한 건가?”
[제가 연락드렸는데, 바쁘다면서 나중에 전화해 주신다고 했잖습니까?]
“내가 언제?”
[정확히 5월 8일입니다.]
“…내가 먼저 전화하지 않으면, 정 지점장이 전화할 수도 있었잖아.”
[그래서 제가 주간 업무 보고서에 회장님과 통화한 내용을 언급했잖습니까.]
안정혁 법인장은 이를 악물었다.
그도 정명훈 지점장이 보내온 주간 업무 보고서에서 그 내용을 읽어 본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회장님이 정명훈 지점장과는 다른 용건으로 통화했을 거라고 생각하고 무시해 버렸다.
전적으로 자신의 잘못이었기에 정명훈 지점장한테 책임을 전가할 수는 없었다.
“…알겠네. 나중에 통화하지.”
힘없이 통화를 마친 안정혁 법인장은 두 팀장과 대책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법인장님,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그건 좋은데… 사장님은 한겨울을 내쫓으려는 배후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 같았어.”
“설마 아시겠어요? 사장님이 넘겨짚더라도 최 부회장님이 배후에 있다는 사실은 숨겨야 할 겁니다.”
“민 팀장, 지금 나를 가르치려 드는 건가?”
* * *
같은 시각.
이진호 사장은 송훈석 회장 집무실에 다시 찾아와서 안정혁 법인장과 통화한 내용을 사실대로 보고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경고 차원으로 끝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이 사장의 복안은 어떤데요?”
“해임시켰으면 좋겠습니다.”
반면에 서동호 실장의 생각은 달랐다.
즉시, 발언권을 요청하고 입을 열었다.
“회장님, 제가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안 법인장을 지금 해임시켜 버리면, 최 부회장이 다른 형태로 또 움직일 겁니다.”
“예를 들어 얘기해 봐요.”
“극단적인 경우지만, 아프리카는 사람 목숨이 파리 목숨보다 못한 곳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충분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쓸 만한 아이디어를 얘기해 봐요.”
“안 법인장에게 장기 교육을 시키는 것은 어떨까요?”
“어떤 과정이 있는데요?”
“6개월짜리 최고 경영자 육성 과정이 있습니다. 이 교육에 참여시켰다가, 한겨울 주변이 안정이 되는 대로 연말에 자연스럽게 해임시키면 될 것 같습니다.”
“이 사장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송훈석 회장의 질문을 받은 이진호 사장은 그 방법이 현재로서는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괜찮은 생각 같습니다. 저도 그 의견에 동의합니다.”
“흠, 그럼 아프리카 법인장 대행은 누구한테 맡길 생각입니까?”
“남아공 지점장인 박정훈 이사한테 겸임하라고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송훈석 회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윙윙―
그때, 이진호 사장의 핸드폰이 진동했다.
“회장님, 안정혁 법인장이 걸어온 전화입니다.”
“여기서 스피커폰으로 통화하세요.”
“네, 회장님.”
짧게 대답한 이진호 사장이 천천히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래, 안 법인장. 확인해 봤나?”
[사장님,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한겨울 씨의 능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습니다.]
“잘못을 시인한다니 이번에는 책임을 묻지 않고 넘어가 줄게요.”
[선처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번 중순까지 법인장 업무를 박정훈 이사한테 인계해 주고 귀국하도록 하세요.”
[저어… 사장님, 방금 전에 용서해 주신다고…….]
묻는 안정혁 법인장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뭔가 오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안 법인장은 8월에 개설되는 최고 경영자 장기 교육에 참석해야 합니다.”
[네? 사장님, 그게 정말입니까?]
“그래요. 방금 전에 회장님으로부터 승인이 떨어졌어요. 교육을 제대로 이수하고, 대한 그룹 계열사 하나를 맡아서 멋지게 경영해 보세요.”
[사장님, 능력 없는 저를 신경 써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상반기 법인 평가 1위를 차지한 안 법인장이 능력이 없으면, 누가 능력이 있다는 말입니까? 가족들도 같이 데리고 들어올 수 있도록 준비하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귀국하면 봅시다.”
이진호 사장이 통화를 마치자, 송훈석 회장이 끌끌 혀를 차며 입을 열었다.
“쯧쯧쯧, 지옥으로 끌려가는지도 모르고.”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