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외나무다리
팀워크 강화 경연 대회가 끝나는 순간부터 오늘까지 총 여섯 번의 지필 테스트를 진행했다.
겨울의 연수 성적 평균 점수는 첫날부터 줄곧 하향세를 타고 이어지더니 오늘은 73점에 겨우 턱걸이했다.
팀워크 강화 경연 대회에서 획득한 600점 덕분으로 아직까지는 중위권에 머물러 있는 중이다.
물론 지필 테스트에 올인했더라면 평균 점수는 73점보다는 높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놈의 토익 시험이 문제였다.
시간을 쪼개 단어와 문장을 외우고 듣다 보니 지필 테스트에만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 추세가 이어진다면 평균 70점은 이번 주, 아니, 당장 내일 깨져도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실제로 겨울은 지금 강사가 설명하는 내용이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현재 가치(Present Value)는 미래에 얻게 될 돈의 가치를 현재 시점의 가치로 환산한 것을 말합니다. 이제부터 현재 가치를 계산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1,000만 원을 가지고 있고, 연간 물가 상승률이 3%라고 가정할 경우에…….”
문제는 자기를 포함한 극히 일부를 제외한 다른 신입 사원들은 강사의 설명을 이해하고 따라간다는 데에 있었다.
겨울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허우적거리는 사이, 모든 수업이 끝났다.
“…내일 시험은 가급적이면 쉽게 낼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대한 그룹 입사에 반드시 성공해서 선후배 사이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강사가 인사하고 퇴장하자, 이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신입 사원들도 서둘러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하지만 겨울은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은 채 방금 전의 수업을 복기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향해 조강희가 측은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겨울 오빠, 많이 힘드시죠? 재무관리는 경영학을 전공한 저도 어려운 과목이에요. 저… 내일 시험에 나올 만한 문제를 나름 예측해서 정리할 예정인데… 혹시 필요하시면 좀 보여 드릴까요?”
조강희의 말에 겨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다 이내 엷게 미소 지었다.
“챙겨 줘서 고맙다, 강희야.”
“뭘요. 우리 서로 돕기로 했잖아요. 오빠도 저 힘들 때 도와주셔야 해요. 나중에 자기 전에 저희 생활관 휴게실로 오세요.”
말을 마치고 떠나가는 조강희의 뒷모습을 보며 겨울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그녀가 아니었다면, 성적은 하향세가 아니라 이미 진즉에 밑바닥에서 머물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에게 감사한 마음 반, 미안한 마음 반을 안고 겨울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생활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겨울 씨!”
그때, 장근호가 다가와 겨울에게 말을 걸어왔다.
장근호는 겨울을 보고 무척이나 반가운 표정이었지만, 겨울은 드러나지 않는 한숨과 함께 쓴웃음을 지었다.
“겨울 씨는 오늘 수업 제대로 알아들었어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근호 씨는요?”
“아시면서 왜 그래요? 우리 루저들끼리 매점에서 가볍게 맥주 한잔 어때요?”
겨울은 속으로 또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경연 대회를 마치고 나서 팀원들끼리 무척이나 친해졌다.
어느 정도 선은 지키고 있지만, 그 이외에는 마음을 터놓고 편하게 대하는 정도였다.
겨울 역시 다른 이들을 편하게 생각하고 좋은 친구라 생각했지만, 장근호는 여러 의미에서 그에게 골칫거리였다.
장근호는 이미 성적에 큰 관심이 없었다.
그저 자신이 최하위 열다섯 명이 아니기에 편하게 마음을 먹은 상태였다.
그런 그가 달라붙으며 계속 음주나 휴식을 권하고 있으니 겨울로서는 미칠 노릇이었다.
지금 겨울은 자투리 시간마저 낭비할 수 없는 처지였다.
하지만 그렇다 해서 팀원인 그에게 싫은 내색을 하고 싶지 않던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많이는 말고, 간단하게 작은 거 한 캔만 할게요.”
“저도 술을 많이 마실 수 있는 형편은 아닙니다. 그냥 머리를 식히고 싶어서 그런 거죠. 9시에 매점에서 만납시다.”
해맑게 웃는 모습을 보니 겨울은 머리가 복잡해졌다.
자신에게는 분명 그가 방해가 되긴 하지만, 그는 정말로 자신과 친해지고 싶은 선의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만약 자신에게 걸린 조건이 없었더라면 그와 무척이나 친해질 수 있었을 거라 생각하자 자괴감이 몰려왔다.
‘다 내 업보지.’
“저녁 먹고 강희랑 선약이 있어서 조금 늦을 수도 있어요.”
“괜찮습니다. 먼저 세팅해 두죠, 뭐. 다른 분들도 같이 마시면 좋을 텐데… 쩝, 아쉽네요.”
그때, 겨울은 문득 아직까지 친구를 변변하게 사귀지 못한 장대산이 떠올랐다.
“다른 팀원분들은 어렵겠지만, 제 룸메이트라도 데려갈까요?”
“오! 좋죠. 새로운 멤버는 언제든 환영입니다.”
저녁을 먹고 생활관으로 돌아오니 장대산은 운동복 차림으로 침대에 누워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저녁은 드셨어요?”
“네. 강의가 일찍 끝나서 식사도 빨리 했어요. 겨울 씨는 식사하셨어요?”
“물론이죠. 요즘 연수원 밥 먹는 맛으로 살잖아요.”
겨울은 장난스럽게 웃다가 문득 이상함을 발견할 수 있었다.
“대산 씨, 강의가 일찍 끝났다고요?”
“네…….”
“얼마나 일찍 끝내 줬는데요?”
“어… 한 30분 정도?”
FM을 준수하고 있는 연수원이 강의를 일찍 끝내 주다니.
그것도 무려 30분씩이나.
뭔가 이유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늘 무슨 일 있었나요?”
“네? 아뇨. 그건 아니고… 그냥 휴식 시간에 그 ‘관종’이 강사랑 뭐라 대화하더니 강의가 끝나 버렸어요.”
겨울은 혀를 찼다.
보나마나 최준하가 신분을 내세워 갑질을 행사한 게 빤했다.
신입 사원 주제에 강사를 대상으로 갑질을 하다니.
여러모로 정이 가지 않는 놈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하지 않았어요?”
“딱히요… 오히려 강의가 일찍 끝났다고 좋아하던데요?”
“대산 씨도요?”
“저는… 오늘 강의 내용은 다 아는 내용이라 뭐… 네.”
머쓱한 듯 뒷머리를 긁적이는 장대산을 보고 겨울은 피식 웃었다.
“오늘 팀원 한 명이 같이 가볍게 맥주 한잔하자는데, 같이 갈래요?”
“어… 셋이서 마시는 건가요?”
“음, 글쎄요? 가다가 더 마주치면 사람이 더 많아질 수도 있고요.”
그 말에 장대산은 바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그냥 숙소에서 쉬고 있을게요.”
장대산의 소심하며 낯가리는 성격이 또다시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겨울은 그의 이런 행동을 미리 예상했다.
당연히 그에 대한 대책도 미리 생각해 둔 상태였다.
“아… 알겠어요. 팀원분한테 미리 말해 뒀는데… 아쉽게 됐네요. 그분도 새로운 멤버가 생긴다고 좋아하던데…….”
“네? 아… 네…….”
“어쩔 수 없죠. 다녀올게요.”
겨울은 보란 듯이 노골적으로 몸에 힘을 빼고 터덜터덜 문을 향해 걸었다.
그때, 그 모습을 보고 허둥거리면서 장대산이 급하게 말을 걸었다.
“저, 겨울 씨. 저 그냥 같이 갈게요.”
“네? 괜찮으세요?”
“이미 팀원분께 말씀하셨다면… 네. 잠깐만 마시고 오는 거면 괜찮아요.”
겨울은 언제 힘이 빠졌냐는 듯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얼굴에 가득 채웠다.
매점에는 빈자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손님들로 꽉 차 있었다.
하루의 피곤함을 한 캔의 맥주로 달래려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자리를 잡고 잠시 기다리자, 장근호가 이재성과 함께 매점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재성은 겨울과 장대산을 발견하고는 늘 그러던 것처럼 친근한 목소리로 말을 붙여 왔다.
“겨울 씨, 저도 껴도 되죠?”
“그럼요. 아, 대산 씨, 여기 이분들은…….”
겨울은 이재성과 장근호를 장대산에게 소개시켰다.
장대산은 언제 소심했냐는 듯 담담한 표정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그 모습을 보고 겨울은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이재성과 장근호는 친근한 미소를 지으며 장대산과 악수했다.
그 뒤, 넷은 맥주 네 캔을 사 와 자리에 앉았다.
먼저 맥주 캔을 딴 장근호는 모두에게 건배를 제의했다.
“건배!”
“건배!”
통.
서로 캔을 부딪친 다음, 넷은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켰다.
맥주를 한 모금을 마신 장근호는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겨울 씨, 고마워요.”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벌써 취하신 건…….”
“아닙니다! 벌써 취했으면 천하의 장근호가 아니죠. 저는 그저… 겨울 씨가 부릉부릉이라는 팀명을 생각해 내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싶어서 한 말입니다.”
겨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겨우 팀명 하나 작명한 것 때문에 저희가 좋은 결과를 낸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건 저도 압니다. 분명 다른 아이디어로 진행했어도 상위권에 충분히 들 수 있었겠죠. 그래도 과연 1등을 차지할 수 있었을지는…….”
그때,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재성이 끼어들었다.
“음, 겨울 씨의 아이디어가 독특하긴 했어요. 저도 겨울 씨가 1등에 기여한 부분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근호 씨가 이렇게 말하면 아무래도 겨울 씨 입장에서는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죠.”
“아무래도 제가 아이디어가 너무 유치하다든가 반대하고 나서서 더 그런 마음이 들었나 봐요.”
“에이, 그게 뭐가 문젭니까? 오히려 다 같이 좋자는 것보다 반대 의견을 내는 한 명이 있는 게 더 좋은 겁니다. 너무 마음에 담아 두지 마세요. 겨울 씨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이재성이 겨울을 쳐다보자 겨울은 맥주를 한 모금 들이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그대로 갔으면 근호 씨 말대로 유치했을 거 같아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재성이 갑자기 유난스럽게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맞다, 여러분. 그거 알고 계세요?”
매점이 워낙 소란스러웠기 때문에 겨울을 포함한 세 사람은 자연스럽게 이재성 쪽으로 상체를 밀착했다.
“지난주 팀워크 경연 대회 당시에 회장님께서 연수원을 몰래 다녀가셨대요.”
“바쁘실 분이 연수원에 왔다고요? 그것도 저희 경연을 지켜보러요? 에이, 말해 봐요. 또 어디서 들은 헛소문이에요?”
장근호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겨울은 그와는 반대되는 의견이었다.
“아버지가 딸을 보러 올 수도 있잖아요.”
“음, 그렇게 생각하면… 뭐, 충분히 가능하겠네요.”
“그럼요. 저 같아도 팀장님 같은 딸이 있으면 보러 올 거예요. 대산 씨도 그렇게 생각하죠?”
“어? 네… 네네.”
겨울의 말에 납득하는 장근호와 어버버거리는 장대산을 보며 이재성은 고개를 저었다.
“자자, 그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우리 부릉부릉 팀의 퍼포먼스가 그룹 홍보 동영상으로 사용될 예정이래요.”
“네? 정말요?”
세 명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재성을 바라보았다.
“회장님께서 회사로 복귀해서 그룹 홍보 담당 사장을 불러서 지시를 내렸고, 지금 홍보팀에서 동영상을 편집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재성 씨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아는 거예요?”
겨울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는 항상 어디선가 이렇듯 신입 사원이 알기 힘든 정보들을 물어 오곤 했다.
“제 대학교 선배가 그룹 홍보팀에서 근무하고 있거든요.”
“아, 그렇군요. 그런데 동영상을 그룹 홍보물로 사용하려면, 저희 부릉부릉 팀원들한테 동의를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요?”
“글쎄요. 잠깐만 기다려 보세요.”
이재성이 핸드폰을 손에 들고 일어나는 모습을 보아 하니 또 인맥의 힘을 빌리려는 듯했다.
겨울은 이재성의 인맥에 감탄하며 남은 둘과 함께 그를 기다렸다.
잠시 후, 돌아온 이재성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자리에 앉았다.
“저작권을 대한 그룹이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동의를 받을 필요가 없답니다.”
“아… 하긴 그러네요. 애초에 사용된 음악부터가 그룹 광고 노래잖아요. 혹시나 출연료를 받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아쉽게 됐네요.”
장근호가 입맛을 다시며 아쉬워했다.
말은 하지 않았으나 겨울 역시 그와 비슷한 생각이었다.
“흐흐, 그래도 소정의 상품은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제가 선배한테 기념품이라도 달라고 떼를 썼거든요.”
“오! 그게 진짭니까?”
“네. 아마 가전제품이 오지 않을까 싶은데, 정확히는 잘 모르겠네요. 아무튼 뭐라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고맙습니다, 재성 씨.”
장근호가 고개를 푹 숙이며 감사를 표하자 장대산이 부러운 듯이 쳐다보았다.
겨울 역시 고마운 눈빛으로 이재성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재성은 부들거리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마치 온몸에 힘을 주고 무언가를 참는 느낌.
“푸하하! 농담입니다. 그룹 차원에서 저희 팀에게 진즉에 상품을 줄 생각이었답니다. 아~ 이거 근호 씨 놀리는 맛이 있는데요?”
“아니, 재성 씨!”
장근호가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고 소리쳤다.
둘이 서로 장난치며 투덕거리는 모습을 보고 장대산과 겨울은 흐뭇한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아, 맞아. 저 저희 팀장님이 죽기 살기로 공부하는 이유를 알아냈어요.”
장근호가 뜬금없는 대화 주제를 꺼내 들었다.
하지만 장대산을 제외한 둘은 이 주제에 제법 흥미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송지유는 경연 대회가 끝난 직후에 술자리를 가진 이후, 단 한 번도 다른 팀원과 술자리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호기심으로는 남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이재성이 특히 눈을 빛내며 관심을 보였다.
장근호는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조심스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신입 사원 연수에서 수석을 노리고 있대요.”
“에이, 난 또 뭐라고. 회장 딸이 수석을 노리는 건 당연하지 않습니까?”
“아니, 아니죠. 당연할 수 있는데, 팀장님은 좀 뭔가 과하지 않나요? 너무 이 악물고 공부하시니까…….”
덜컹.
그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매점 문을 열고 들어왔다.
제법 소란스럽게 떠들며 들어오는 바람에 겨울은 인상을 찡그리며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그들의 면면을 확인하는 순간, 겨울의 찌그러진 미간은 한층 더 팍 찡그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 중에는 정말 마주치고 싶지 않은 최준하가 끼어 있었기 때문이다.
연수 첫날 마주친 이후로 멀찍이 피해 다녔는데, 재수 없게도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셈이 되어 버렸다.
하필이면 비어 있는 테이블이 자신들 옆자리밖에 없다니.
아니나 다를까, 겨울을 발견한 최준하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다가와 말을 건넸다.
“어라? 한겨울이잖아?”
말이 짧았다.
당연히 그런 놈인지는 알고 있었지만, 겨울은 순간적으로 짜증이 밀려왔다.
받은 만큼 되돌려 주는 게 맞지만, 지켜보는 눈이 많았다.
겨울은 한숨을 팍 내쉬며 대답했다.
“하아… 최준하 씨, 언제부터 저희가 서로 편하게 부를 수 있는 사이였는지 모르겠네요. 기본적인 선은 지켜 주시죠.”
“기본적인 선? 하, 얘 웃기네. 너도 반말해. 그러면 되잖아.”
말이 통하지 않는다.
겨울은 결국 대화하기를 포기하고 그를 무시한 채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 모습에 최준하는 얼굴을 찌푸리더니 이내 비웃음을 머금은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아~ 춥네. 이런 한겨울에 낙하산 타면 춥겠지? 야, 안 그러냐?”
최준하는 매점에 있는 모두가 들으라는 듯이 큰 소리로 옆에 있는 신입 사원에게 말했다.
겨울은 마음속에 참을 인(忍)자 세 개를 써 내려갔다.
최준하는 자신이 특별 채용된 것을 은근히 비꼬고 있는 중이다.
겨울은 고개를 돌려 최준하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뭐. 노려보면 어쩔 건데?”
“시비 적당히 거시고 볼일 보시죠.”
“시비? 내가 언제 시비 걸었나? 그냥 이런 날씨에 낙하산 타면 춥겠다 싶어서 말한 건데, 왜? 찔려?”
최준하가 킥킥거리며 비웃음을 흘렸다.
겨울은 주먹을 꽉 쥐었다.
“뭐, 춥더라도 기왕 낙하산 탄 거 즐긴 건 즐겨야지. 어차피 그 열다섯 명에 네가 들어갈 건 빤한데, 너무 아등바등하며 공부하지 말고 잠깐 휴가 왔다 생각하고 편하게 즐기다 가.”
그 말에 결국 겨울의 인내심이 한계치를 뚫고 나왔다.
“글쎄요. 제가 그 열다섯 명에 속할 거라곤 생각되지 않는데요. 즐기다 가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최준하 씨가 아닐까요?”
“하하하, 대한 그룹 부회장의 아들인 내가 탈락한다고?”
“제가 600점을 받을 동안 최준하 씨는 마이너스 100점을 받았잖아요.”
으득.
자존심이 상했는지 최준하가 표정을 바꾸며 이를 갈았다.
그러고는 겨울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겨울도 질 수 없다는 듯 마주 쏘아보았다.
한참을 서로 노려다보던 중 정준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 나하고 한판 붙어 보자는 거야, 뭐야!”
“언성 높이지 마. 여기 사람들 있는 거 안 보여? 그리고 시비는 당신이 먼저 걸었어.”
“하, 뭘 봐! 구경났어?”
최준하는 주위에 대고 소리를 지른 뒤, 다시 겨울을 노려보았다.
“충분히 시비 걸만 하지 않냐? 네가 다른 놈들처럼 정상적인 절차로 입사했다면 내가 이러지 않았지.”
“그러는 당신도 다를 것 없지 않나?”
“다를 것 없다고? 너랑 내가? 하, 지방대 출신인 네놈이랑 미국 명문대 출신인 내가 똑같다고?”
“미국 명문대 출신이면 뭐 하나. 나보다 연수 성적이 낮은데.”
“이 자식이!”
휘익!
약이 바짝 오른 최준하가 기습적으로 주먹을 날렸다.
둘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헉 소리를 내며 긴장했다.
하지만 그런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겨울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피했다.
본능적으로 반격을 하려 주먹을 쥐었지만, 그 순간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때문에 동작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면접날을 떠올린 것이다.
정확히는 면접 전날에 꾼 꿈.
만약 이번에도 최준하에게 주먹질을 가해서 때려눕히면, 자신이 뒷감당을 할 수 있을지 두려운 것이다.
최준하를 쓰러트리면 지금 당장에야 기분은 좋겠지만, 앞으로 벌어질 일을 생각하면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분명 이 썩어빠진 놈은 재력과 권력을 등에 업고 온갖 수를 동원해 자신을 끝까지 괴롭힐 것이었다.
가뜩이나 연수 성적을 유지하는 것조차 힘든데, 최준하의 방해까지 받는다면 최종 탈락을 면치 못할 것이다.
설사 그를 극복해 내고 입사하더라도 제대로 된 회사 생활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겨울이 혀를 차며 두 손을 늘어뜨리자, 잠시 쫄아 있던 최준하는 ‘그럼 그렇지’라며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아닌 척해도 자신의 신분에 겁을 집어 먹은 것이 틀림없다며 착각하고 있었다.
“왜? 막상 치려니까 쫄려?”
“후우… 이 이상은 너도 나도 좋은 꼴은 못 볼 게 빤한데, 이쯤하고 그만하지?”
“너도 나도? 하, 말은 정확히 해야지. 그냥 네가 쫄리는 거잖아. 아냐?”
겨울이 싸늘한 눈으로 최준하를 노려봤다.
최준하는 자신만만하게 말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내심 긴장하고 있었다.
자신의 허벅지만 한 팔뚝을 보고 최준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살면서 맞은 적이라고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아버지인 최성진 부회장에게도 회초리 한 대조차 맞지 않았다.
그럼에도 본능적으로 겁을 집어먹고는 허세를 부리는 것이었다.
단순히 체격 차이 때문에 긴장한 것만은 아니었다.
보는 눈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만약 이번 사건으로 징계위원회에 회부된다면 문제가 커진다.
주변에 있는 이 멍청한 놈들은 보나마나 갑질이니 뭐니 하면서 싸움의 원인을 자신이 제공했다며 거짓 증언을 할 게 빤하기 때문이다.
퇴사까지 당하진 않겠지만, 징계라도 당하면 지금까지 세워 놓은 계획이 와르르 무너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었다.
이깟 쓰레기 놈을 계속 방치해 두는 게 아니꼽지만,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처리할 수 있다는 생각에 후일을 기약하기로 마음먹었다.
“하, 씨. 가오 안 살게. 야, 조용히 살아. 자꾸 이렇게 나대면 나도 계속 봐주기 힘들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적당히 나대. 봐주기 힘들다.”
겨울의 힘 있는 목소리에 최준하는 움찔했지만, 그는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계속 그렇게 설쳐 봐. 어떻게 되나. 에이, 기분만 잡쳤네. 야, 술 챙겨. 밖에서 먹자.”
최준하의 말에 그의 일행이 주섬주섬 먹을 것들을 챙겼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최준하는 자신이 도망치는 것 같아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휘익!
와장창!
결국 화를 참지 못한 최준하가 플라스틱 테이블을 손으로 뒤집어엎어 버리고는 거칠게 매점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흙수저 성공 신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