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흙수저 성공 신화-2화 (2/328)

[2화] 운수 좋은 날

다음 날 오전.

일찍 병실을 방문한 가을이 사과를 깎으며 말했다.

“다시 생각해도 이번 일은 기적이나 다름없는 거 같아.”

“그치?”

“멍청하지만 착하게 살아와서 신이 도와줬다고 밖에는 설명이 되지 않는 거 같아.”

“아니, 멍청은 너무 심한…….”

“자, 입 다물고 사과나 드세요.”

가을이 겨울의 입에다 사과 조각 하나를 물려주었다.

겨울은 노인이 꿈속에서 해 준 말이 불현듯 생각났으나, 이야기해 봐야 귀찮아지기만 할 것 같아서 그냥 넘어갔다.

“착하게 살아와서 도와준 거면, 소방관이나 경찰들은?”

“오빠 같은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순수하게 돕고자 하는 마음보다 직업 정신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

“그런가…….”

“어차피 의미 없으니까,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고 기왕 쉬는 거 푹 쉬기나 해. 나 과외 있어서 간다.”

“어, 다녀와. 언제 다시 올 거야?”

“오전 중에 끝나긴 하는데, 점심 먹고 오려고.”

똑똑.

가을이 가고 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노크 소리와 함께 50대로 보이는 부부와 오른손에 붕대를 감은 여학생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겨울은 자기가 구한 여학생과 그녀의 부모라는 사실을 단박에 알아챘다.

셋은 겨울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를 하더니 진심 어린 목소리로 감사의 말을 해왔다.

“한겨울 씨 덕분에 제 딸이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뭘요. 따님께서 크게 다치지 않아 다행입니다.”

“네. 정말로 다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야기를 들었을 땐 정말…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습니다. 다시 한번 거듭 말씀드리지만, 감사합니다. 현지야, 너도 인사드려야지.”

그 말에 뒤에 엉거주춤 서 있던 여학생이 앞으로 나와 고개를 숙였다.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가벼운 찰과상이라고 들었는데, 많이 심한가요?”

“아, 아뇨. 이건 그냥 길게 쓸려서 그런 거예요. 진짜 전혀 아무렇지 않아요.”

“다행이네요.”

겨울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짓자, 여학생도 따라 수줍게 웃었다.

이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50대 남성은 갑자기 얼굴을 굳히고 입을 열었다.

“그… 딸에게 굉장히 큰 사고였다고 들었습니다만… 어떻게 몸은 괜찮으십니까?”

“아, 예. 보시다시피 멀쩡합니다.”

겨울이 보란 듯이 팔을 돌리며 건강함을 과시했지만, 50대 남성은 오히려 그가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 과장한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정말 감사하고 죄송하다는 말밖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제가 약소하게나마 사례를 준비했는데, 꼭 받아 주셨으면 합니다.”

50대 남성이 양복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 겨울의 손에 쥐어 주었다.

“그리고 이건 제 명함입니다. 혹시나 후에 문제가 생긴다면 연락 주세요. 성심성의껏 돕겠습니다.”

겨울은 50대 남성의 너무도 정중한 태도에 부담스러움을 느끼면서도 그가 진심으로 고마워하고 있음을 느껴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건네받은 봉투를 서랍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은 겨울은 명함을 살폈다.

“아,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최강훈이라고 합니다. 여기 이 사람은 제 와이프입니다.”

최강훈 교수의 아내가 앞으로 나와 겨울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네자 겨울 역시 어색하게나마 웃으며 이를 받아 주었다.

최강훈 교수 가족이 돌아간 후, 겨울은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졌다.

‘피해자 측은 왔는데, 가해자는 아직도 안 오네.’

응당 먼저 와서 사과해야 할 사람이 오지 않아 화도 나고 속상하던 찰나, 과외 아르바이트를 끝낸 가을이 돌아왔다.

“받아.”

“…뭐야? 아이스크림?”

“오빠, 메로나 먹고 싶다며?”

“누가 한겨울에 아이스크림을 먹냐. 그리고 먹고 싶다고 한 건 어제지, 오늘은 먹을 기분 아니야.”

“그냥 줄 때 조용히 먹지?”

가을이 비닐을 뜯어서 건네주자, 겨울은 말없이 받아 들고는 천천히 먹기 시작했다.

평소와 달리 겨울의 기분이 가라앉은 것을 눈치 챈 가을은 저도 아이스크림을 한입 베어 물며 말을 꺼냈다.

“왜? 또 무슨 일 있었어? 어제 내가 한 말 때문에 그래?”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왜 그런 표정인데?”

“…내가 무슨 표정인데.”

“중학생이 이차함수를 처음 마주했을 때 짓는, 그런 표정?”

“뭐야, 그게?”

의외로 가을의 눈치가 예리하다 생각하며 겨울은 피식 웃었다.

“그냥, 아까 내가 구한 여학생 가족이 왔다 가서. 사례금도 주고 가더라.”

“오, 얼마나 받았는데?”

“아직 안 열어 봤어. 지금 볼까?”

그 말에 가을이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여러 가지 생각으로 온 정신이 팔려 있었지만, 겨울 역시 사례금에 대해 내심 기대를 하고 있었다.

봉투는 제법 두툼했다.

겨울은 5만 원권 스무 장 정도는 들어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었다.

“허어…….”

기대를 배신하듯 봉투는 상당히 얇았지만, 안을 살핀 겨울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봉투 안에는 100만 원짜리 수표 열 장이 들어 있던 것이다.

“왜? 얼만데? 오!”

가을 역시 예상보다 큰 금액에 기뻐했지만, 이내 얼굴을 굳혔다.

“음, 근데 사례금치고 너무 많은데. 오빠, 설마… 그 사람들 협박하고 그런 거 아니지?”

“협박은 무슨. 편의점 알바가 무슨 힘이 있다고 대학 교수를 협박하냐? 그냥 고맙다고 주신 거야.”

“와, 역시 배운 사람이 인심도 넉넉하네. 오빠, 또 ‘너무 많으니까 아무래도 돌려줘야겠다’ 이런 소리 하기만 해 봐.”

“안 해, 이놈아. 목숨 값이라 생각하면…….”

겨울은 문득 자신의 목숨 값을 줘야 할 사람은 최강훈 교수나 그의 가족이 아니라 가해자라 생각하자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

이처럼 겨울이 인상을 찌푸리자, 가을은 그가 또다시 6년 전의 일을 떠올리며 비관적인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 오해했다.

“또 쓸데없는 생각 하지. 1,000만 원이 뭐? 목숨 값? 오빠가 그 정도밖에 안 돼?”

“얘가 뭐라는 거야, 갑자기.”

“그리고 오빠가 착각하는 게 하나 있는데. 1,000만 원 그거, 오빠 목숨 값 아니야. 오빠가 구한 그 학생 목숨 값이지. 이상한 생각 하지 말고, 그냥 고생한 보상이다 생각하고 받아.”

“왜 이러는 거야. 애초에 돌려줄 생각도 없었어.”

똑똑.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초췌한 얼굴의 젊은 아가씨와 중년 남자 한 명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가을이 의아한 눈빛으로 둘을 바라보았지만, 겨울은 이 아가씨가 교통사고를 일으킨 당사자임을 단숨에 알아봤다.

‘왔구나.’

가을은 날카로워진 겨울의 눈빛을 보고 눈앞의 아가씨와 중년 남자가 교통사고 가해자 측이라 추측했다.

겨울이 입을 열기 전에 가을이 먼저 두 사람을 향해 입을 열었다.

“누구시죠?”

가해자라고 생각하니 말투가 곱게 나오지 않는 가을이었다.

까칠한 말투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침대로 다가와 정중하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대한 그룹 법무팀을 이끌고 있는 이정진이라고 합니다. 제 옆에 계신 분은 송지유 님이십니다. 실례지만 그쪽은 누구인지 여쭤 봐도 괜찮겠습니까?”

“해당 사고 피해자인 한겨울 씨의 동생인 한가을입니다. 찾아오시는 게 좀 늦은 것 같습니다만?”

명백히 적의를 가진 말투에 이정진 변호사가 가을을 노려보았고, 가을 역시 피하지 않고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때, 지친 것이 분명하지만 맑은 목소리가 병실을 울렸다.

“이 변호사님, 그만하세요. 죄송합니다. 응당 어젯밤에 찾아와 사죄하는 게 맞으나, 당시에 저도 너무 놀라 경황이 없어 지금에야 왔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뻔뻔하기는…….”

가을이 작게 중얼거렸지만, 살짝 떨리는 듯한 송지유의 목소리에 진심을 느껴 화가 조금 누그러진 느낌이었다.

송지유의 목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겨울은 가을의 손을 잡으며 너무 날 세우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 모습을 본 가을은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뒤로 물러섰다.

“안녕하세요, 한겨울입니다.”

“안녕하세요, 겨울 씨. 거듭 사과드립니다. 차가 갑자기 급발진하는 바람에…….”

막상 피해자를 눈앞에 두자, 사고 때의 충격이 떠오른 것인지 말이 빨라진 송지유였다.

“아가씨, 많이 흥분하셨습니다. 진정하시지요.”

“아, 고마워요… 추태를 보여 죄송해요. 정말로 본의가 아니었지만, 겨울 씨에게 피해를 입혀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보시다시피 저희 아가씨 역시 정신적인 충격을 심하게 받으셨습니다. 그러니 피해자분께서는 너그러이 이해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실제로 사고 역시 차의 오작동으로 인해 급발진한 것으로 경찰과 저희 법무팀에서도 검사를 마친 상태입니다. 그러니 이 일은 이쯤에서 접어 두고 합의를 진행했으면 하는…….”

“이 변호사님!”

사무적이고 다소 강압적인 이정진 변호사의 말투에 송지유가 말을 끊으며 소리쳤다.

“계속 무례하게 굴면 회장님께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이정진 변호사가 고개를 살짝 숙여 사과하더니,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송지유는 잠시 그를 노려보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미안한 표정으로 겨울을 바라보았다.

“추한 모습만 보여 드리게 되는군요. 믿지 못하시겠지만, 이 변호사님의 말씀은 사실이에요. 조사 결과 역시 요청하시면 바로 보내 드릴게요. 하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충분히 보상은 해 드리겠습니다.”

“…….”

겨울은 한동안 말없이 송지유를 쳐다보았다.

어쩌면 저 변호사와의 말다툼도 자신의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한 연기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송지유의 눈가에 맺힌 자그마한 눈물을 보고 의심이 가셨다.

“…괜찮습니다. 당황스럽고 억울한 것은 맞지만, 진심으로 사과해 주신 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오빠!”

못마땅하다는 가을의 외침에도 아랑곳 않고 겨울은 말을 이어 나갔다.

“사과도 받았고, 나름 VIP 병실에서 호사도 누렸으니 괜찮습니다.”

송지유는 의외로 단호한 말투에 고개를 들어 겨울과 눈을 마주했다.

그는 다른 어떤 의도도 없이 정말로 이것만으로도 만족하는 듯했다.

송지유는 이곳에 오기 전에 겨울에 대한 간략한 조사 보고서를 비서실로부터 받았다.

그의 부모는 강원도 영월에서 농사를 지으며, 겨울은 취업을 위해서 서울에 올라와 여동생과 같이 살고 있었다.

생활 형편이 그다지 넉넉하지 않기에 제법 많은 액수의 합의금을 요구할 거라 생각했지만, 그런 예상을 깨고 겨울은 정말로 사과만으로도 괜찮다는 기색이었다.

늘 자기밖에 챙길 줄 모르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자란 송지유는 그런 겨울에게서 새로운 느낌을 받았다.

“그건… 안 돼요. 겨울 씨는 어떨지 몰라도 제 죄책감이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아요. 돈이든 뭐든 좋으니 편하게 이야기해 주세요.”

“…….”

그때, 문득 겨울의 마음속에 욕심이 슬그머니 차올랐다.

이미 최강훈 교수에게 사례금도 충분히 받았고 여자의 눈물에 마음이 약해진 겨울이지만, 정작 재벌 2세가 뭐든 들어준다 하니 욕심이 생긴 것이다.

‘이런 것도 들어주려나?’

송지유가 편하게 말하라고 했으나 겨울은 섣불리 말을 꺼내기가 주저되었다.

송지유의 사회적 지위라면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그래도 괜히 자신의 민얼굴을 보여 주는 것 같아 고민되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겨울은 제 손등을 쓰다듬는 가을의 손길에 마음을 굳혔다.

“그럼… 부탁 한 가지만 들어주세요.”

“네네, 뭐든 말씀해 주세요.”

그 순간, 뒤에 있던 이정진 변호사는 답답함을 느꼈다.

상대가 약점을 쥐고 뭘 요구할지 몰라 불안했기 때문이다.

“저는 작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지금까지 백수 상태입니다. 아무래도 취업이 쉽지만은 않더군요.”

“네…….”

“그래서 말인데, 혹시 저를 대한 그룹에 입사시켜 줄 수 있나요?”

“…….”

정말로 예상 밖의 요구에 송지유는 잠깐 넋이 나갔다.

그녀는 겨울이 돈을 비롯한 어떤 물질적인 요구를 해도 기꺼이 내줄 의향이 있었다.

그런데 입사라니.

“정말 그거면 되나요?”

“네. 그거 말고 더 바라는 건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아가씨!”

결국 보다 못한 이정진 변호사가 소리쳤다.

“아가씨께서도 보지 않으셨습니까? 스펙은커녕…….”

“이 변호사님, 변호사님의 역할은 저를 방해하는 게 아닙니다. 책임을 져도 제가 질 테니, 가만히 계세요.”

과연 대기업 그룹 회장의 무남독녀답게 카리스마 있는 모습이었다.

“겨울 씨, 조만간 제가 다시 연락드릴게요. 100% 가능하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최선을 다해 볼게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탁.

송지유와 이정진 변호사가 떠난 병실은 고요함을 되찾았다.

겨울이 한참 동안 멍하니 둘이 떠난 문을 바라보고 있을 때, 가을이 중얼거렸다.

“대담한 건지, 멍청한 건지…….”

“나한테 하는 소리야?”

“그럼 오빠한테 하는 소리지, 누구한테 해?”

겨울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지만, 그 역시 가을과 같은 생각이었다.

가을이 침대에 털썩 걸터앉으며 겨울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오빠, 어쨌든 기왕 말 꺼낸 거, 잘해 봐.”

“내가 잘한다고 되면 좋지. 하지만 아까 옆에 있던 변호사 말 못 들었어?”

“아, 그 싸가지? 걔가 하는 말 뭐 하러 신경 써. 그 여자가 최선을 다한다잖아.”

가을의 말에 겨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법무팀 변호사보다는 회장의 무남독녀의 입김이 분명 더 강하리라.

“되면 되는 거고. 어차피 큰 기대를 하고 꺼낸 말은 아니었어.”

“안 하기는 개뿔. 숨겨 놓은 답안지 찾은 초딩마냥 눈이 아주 초롱초롱하던데?”

“…….”

역시나 말로는 가을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은 겨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흙수저 성공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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